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7/8.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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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위기와 6자회담의 전망

'그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정희찬 | 정책편집부장
'중대한 제안'의 발표와 6자 회담의 재개, 그러나…

지난 7월 12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핵폐기에 합의할 경우 지난 2003년 12월 이후 중단된 경수로 건설사업을 동결하고 대신 매년 200만 kw의 전력을 북한에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6·15 남북 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한 이후 세간에 회자되던 이른바 '중대제안'의 정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원래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 따르면 경수로가 완공되는 때까지 북한의 에너지 수요는 미국이 중유를 제공함으로써 충족되는 것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정부가 북한의 에너지 문제에 대해 중유공급을 담당하던 미국을 대체하여 대북 송전이라는 카드를 제시한 것은 6자회담에서 북한을 유인하기 위한 조치로서 내외의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정부는 '중대제안'을 수주일 전부터 미국에게 설명해왔고 7월 13일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무장관은 "확산의 위험 없이 북한의 에너지 문제해결을 위한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very creative idea)"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직 북한의 반응은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일단 6자회담을 재개하는 문제에 대해서 북한은 미국과 회담재개에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7월 9일) 이에 따라 지난 1년이 넘게 중단되었던 6자회담은 7월 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자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6자 회담의 재개 그 자체가 문제해결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1990년대 북핵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화해의 전사(前史)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제네바 합의 이후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근본적으로 북핵문제를 둘러싼 제반의 쟁점들은 고스란히 미해결된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지난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어째서 핵문제는 1993-94년 동안 '새삼스레' 국제적인 현안으로 부각되었던 것일까? 또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이후 10여 년이나 지났지만 어째서 북·미 관계를 포함한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갈등은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조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시기 동안 정치·군사적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 것은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북한의 거듭되는 '말 바꾸기'와 핵무기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
지난 1990년대 〈제네바 합의서〉에 사인을 하고 난 이후에 벌어졌던 사건의 추이를 조사해본다면, 우리는 거듭되는 합의를 번복하거나 추가적인 요구를 제기하는 쪽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남한의 대북정책 또한 독자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추진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대북정책의 추이에 따라 심한 변동을 거듭하며 오히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냉전적 질서를 해체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또한 미국의 대북정책의 자장 안에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뉴스거리를 제공한 이후 실질적인 후속작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그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1990년대 북한과 미국 사이의 '합의'가 어떻게 해서 결국 실질적인 관계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2002년 2차 북핵위기로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는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과연 과거 군사독재 정권과 외형상의 차별성 속에 연속성을 포함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자. 이를 통해 우리는 6자회담을 희망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지,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중대제안이 진정 핵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통해 북한과 미국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동결하고 핵비확산조약(NPT)에 규정된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경수로 건설 및 난방용 중유제공을 약속하고 궁극적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진영의 집중포화를 받게 된다. 사진은 북한 영변의 핵시설.


지연된 제네바 합의의 유산과 2차 핵위기

1) 1994-98: 제네바 합의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

1993-94년으로 접어들면서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저지하기 위해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 UN을 통한 대북 제재, 영변 선제공격계획 등을 검토하면서 냉전구도의 붕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은 오히려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나 제한적 무력사용이라도 군사적인 적대관계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한반도에서는 곧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하는 전면전의 개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착상태가 계속된다. 그러나 1994년 6월 카터의 방북은 북핵문제로 고조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국면이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고 그 해 10월 제네바에서는 북·미 고위급 회담을 통해 결국 <제네바 기본 합의서>가 체결되기에 이른다. 그 주된 내용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동결하고 핵비확산조약(NPT)에 규정된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경수로 건설 및 난방용 중유와 4억 달러의 장기채와 지급보증을 약속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는 양국 간 관계정상화를 명시함으로써 정치·외교적 고립상황에 빠진 1990년대이래 북한이 추구하던 '교차승인'이 머지않아 현실화할 것으로 보였다.(2항. "양측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1)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일단 동결하고 과거 얼마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재처리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위한 연료봉의 해외반출) 및 기존 핵시설의 해체는 대체 원자로(제네바합의에 규정된 경수로의 건설)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2) 따라서 이는 경수로가 완공되는 수 년 동안은 북한의 과거 핵 프로그램이 당분간 모호한 채로 남겨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미국 내에서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진영의 비판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북한이 비밀 핵시설이 있다든지, 혹은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경우 제네바 합의는 결국 미국이 북한에게 사기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에 대한 비난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압박하는 데는 미국보다 적극적이었던 김영삼 정권은 북·미 직접대화에서 한국이 소외된 것과 북한의 핵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1994년 미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모두 다수파를 차지한 직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난은 봇물을 이루었다. 제네바 합의는 '카드로 만든 집'이라고 조롱받았고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투명하게 밝혀지기 전에는 북한에 대한 연료 공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미행정부의 대응은 협상과정에서 줄곧 자신들이 우위에 있었음을 밝히기 위해 동맹국과의 협조, 군사적 우월함, 제재에 대한 위협에 북한이 굴복했고 미국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었다는 식이었다. 제네바 합의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모든 세력이 공유하는 것은 위협에 굴하지 않는 미국의 굳건하고 단호한 의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미행정부의 '변명'은 이후 북한에 대한 불신과 제네바 합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단초가 된다.
2000년 10월 23일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은 미국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국내사정을 이유로 예정되어있었던 클린턴의 방북이 취소되고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북한은 '악의 축' 뿐 아니라 선제 핵공격이 가능한 국가 목록에 오르게 된다.


2) 1998-2002: 도마 위에 오른 북한의 미사일 개발

1998년 정권창립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을 계기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이 도마 위에 올랐다. 북한은 사정 거리 500km의 스커드-C형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제작·보유하고 있었고 대포동 1호의 사정거리는 1,500-2,000km에 달했다. 또한 이를 개량한 대포동 2호는 (실험되지는 않았지만) 3,500-6,000km를 나라아가 이론상으로 미국의 북서해안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사일의 개발은 이란, 파키스탄 등의 국가들에게 수출되었는데 이는 북한의 주요한 외화수입원 중 하나였다.3) 당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부풀리며 전역미사일방어망(TMD)을 정당화하는 계기로 삼았고, 1994년 약속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별다른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대조적으로 북한은 이미 1995년 1월 미국과의 상업 및 금융거래 금지를 폐지했다.) 게다가 미국은 1998년에도 펜타곤에서 북한에 대한 모의 핵공격을 훈련하는 등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여전히 철회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새롭게 등장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문제를 포함하여 한반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999년 발간된 〈페리 보고서〉에서는 북한에게 경제제재 해제와 실질적인 대북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북한이 기존 제네바 협정에서의 이행사항을 준수할 것과 더불어 미사일 실험의 유예와 중동지역에 대한 미사일 판매를 포함한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것은 제네바 합의에서 언급한 관계 정상화의 조건에 미사일 문제의 해결을 추가적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면 이는 거꾸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미 관계정상화와 대북 경제제재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제네바 합의사항을 무력화하는 것이었지만 북·미 누구도 제네바 합의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단계는 아니었고 이 문제 역시 순조롭게 풀려 가는 듯 보였다. 2000년 북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의 평양방문에 이어서 11월의 시점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기 일보직전이었다. 여기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수년 동안 10억 달러 상당의 식량원조를 받고 사정거리 180마일(388km) 이상의 미사일을 규제하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로 인식되었다.4) 그러나 클린턴의 방북은 취소되고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네바 합의에 비판적인 주장들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3) 2002-현재: 2차 핵위기와 '대담한 제안'

당초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기존 흑연 감속로를 대체하는 경수로의 건설 시점은 2003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제재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라크·이란과 더불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2002년 대통령 연두교서) 이들 국가의 정권붕괴를 목표로 설정한다. 또한 핵무기나 화학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예방적 반확산'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2002년 「국가안보전략」), 이를 통해 정당화되는 선제공격의 범주에는 선제 핵공격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선제 핵공격이 가능한 7개 국가로는 중국과 러시아 등과 더불어 북한이 포함된다.) 이러한 미국의 공격적인 군사안보 전략의 첫 시험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였다. 2002년 말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다시 제네바 합의 이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1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비밀 핵 프로그램-농축 우라늄 개발-을 추궁하는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에게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 주권의 인정과 불가침 보장, 여타의 경제적 지원을 제안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한다.5) 켈리의 귀국 이후 미국은 제네바 합의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들을 추방하고 발전소의 봉인을 연료봉을 재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은 다시금 북·미간의 모든 현안을 일괄에 타결하는 '대담한 제안'을 협상하려 하지만 미국은 끝까지 북한에 대한 인정과 불가침을 보장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작년 6자회담에서 확인된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른바 'HEU(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CVID 원칙', 즉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가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이 당장 경제적 보상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북한과 얼마나 타협의 여지를 열어놓는 것인지는 4차 6자회담을 앞둔 현재에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처럼 미국은 북한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구조건을 제시하거나 협상 당시와는 다른 태도를 보임으로써 북한에 대한 불가침의 보장 및 북미관계 정상화에 미온적일 뿐 아니라 제반 합의사항들의 이행을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북한을 포함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감과 핵무기 개발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은 보상과 협상이라기보다는 범죄와 처벌이라는 도식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반증한다.6) 이에 따라 결국 지연된 제네바 합의의 유산은 1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금 한반도 위기라는 정세적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남한은 한반도 평화의 신뢰할만한 보증자인가?
-대미 종속적인 남한의 역대 정권들의 대북정책


이번에 대북 전력 지원이라는 '중대제안'을 발표한 남한의 노무현 정부는 제네바 합의 당시 대북지원을 반대하던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책과는 외형상의 대조를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 역대정권의 대북정책을 살펴보면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따라 항상 불안하고 동요를 거듭하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교차승인을 목표로 북한에 대한 화해와 교류를 추진하다가도(1991년〈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노태우 정부), 상황에 따라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모의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며 무력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1993-94년 김영삼 정부)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정부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한의 대북정책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등장하는 것은 바로 '교차승인'이란 쟁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서부터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교차승인'이 처음 제기된 것은 베트남전 패배와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현실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유화책으로서 '데탕트'가 등장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관련하여 제기된 것이 '교차승인'이었는데, 이는 한반도에 독자적인 두 개의 국가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변 국가들이 서로 상대방 진영의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정희 정권은 1973년 <6·23 선언>에서 "남북한 UN 동시가입",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호혜평등에 입각한 문화개방"을 발표하게 된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1975년 UN 총회에서 이른바 '교차승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대결구도 속에서 기존의 한미간 군사동맹, 즉 현존하는 안보구도의 변화 없는 '교차승인'이란 쉽게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舊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급속하게 해체·몰락하면서 '교차승인'의 문제는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소련 및 중국과의 경제교류가 확대되더니 1989년 헝가리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소련 및 중국과는 각각 1990년과 1992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이른바 '북방정책')
처음에 북한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획책하는 행위라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후 북핵문제가 국제적인 쟁점으로 불거지면서 남한과 미국이 대북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국은 한·소 수교와 북·미 수교를 별개로 분리하고, 남한은 UN 단독가입 의사를 천명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남한과 미국의 '교차승인'이란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변화 없는 교차승인이었고 언제라도 대북 압박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한미군과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 핵전력의 철수 및 남북한 군사력의 상호감축을 주장하는 북한의 해결방안은 무시되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 및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에 따른 정치적 고립과 경제위기라는 위기상황에 내몰린 북한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현실적인 교차승인의 틀 내에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한다.('북·일 수교'를 천명한 북한 노동당, 일본 자민당·사회당의 공동성명, 1990.9.28)
이러한 가운데 1991년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존재를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7) 또한 같은 해 1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성명>8)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듬해 김일성 주석은 『워싱턴 타임즈』誌와의 회견에서 북·미 수교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기존의 강경한 요구(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테러의 포기)를 재확인하고 1993-94년으로 접어들면서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 UN을 통한 대북 제재, 영변 선제공격계획 등을 검토하면서 한반도는 오히려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미 수교는 물론 북·일 수교의 가능성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김영삼 정권은 정권 초기 장기수를 송환하는 등의 유화적 태도에서 1994년 이후 팀스피리트 훈련과 북·미 직접 대화를 반대하는 등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98년 6월과 10월에 걸쳐 각각 소 500마리와 501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이벤트'를 통해 남북경협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정부의 협력을 속에 북한을 7차례 방문하면서 금강산 관광 등의 성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북·미 수교 및 북·일 수교를 지지할 의사를 분명히 하였는데 '햇볕정책'의 큰 틀은 미국의 군사적 주도권을 인정하고 남북교류를 문화·경제적 차원에 국한한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의 획기적 국면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김대중 정부 역시 군사·안보 정책 및 대북정책에서 대미의존성은 이전의 독재정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한 나름대로의 소신을 뒷받침한 것은 1999년에는 <페리 보고서>를 통해 공식화된 미국의 접촉정책(일명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었다. <페리 보고서>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 규정한 북한의 의무, 즉 핵 프로그램의 동결을 이행하고 더불어 미사일의 실험 및 수출 중단을 주문하는 대가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양국 외교관계 정상화를 제시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북·미 수교 및 북·일 수교를 지지할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의 큰 틀은 미국의 군사적 주도권과 남북교류를 문화·경제적 차원에 국한한다.(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첫 번째 발언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남한의 외교·안보정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새삼스레 확인한 최근의 사례는 이른바 '균형자론'을 둘러싼 보수언론과 정부 사이의 해프닝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결국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불순한' 의도라는 보수적 비판에서 시작하여 장기적인 한·미동맹을 위한 것이라는 정부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막을 내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균형자론'을 둘러싼 내외의 논란에 답하기 위해 발간한「동북아 균형자 설명자료」(2005.4)에서는 한국을 "필수적 동반자(essential partner)이며, 세계적 동반자(global partner)"로 언급하는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일연설(3월 19일)을 인용하면서 균형자 역할의 기본토대로서 한·미동맹, 동북아 지역과 긴밀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영토적 야심이 없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미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는 한·미 동맹과 양립가능하고, 심지어는 "미국의 지도력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상호번영과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다는 홍석현 주미대사의 발언9)이나, "동북아의 '최후 균형자'는 미국"10)이라는 인식 등을 종합해보았을 때 결국 '동북아 균형자론'이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현존하는 동북아시아의 군사안보 구조 안에서의 문제해결, 혹은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지원 아래 (중국 및 일본과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루어지는 군비증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관통하는 일관성은 바로 미국의 대북정책과의 보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북한과의 교류 및 관계개선 사업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예상되었으나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6·15 공동행사가 미국의 스텔스기 배치에 따라 축소된 규모로 치루어지는 모습에서도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안보적 태도에 종속된 남북관계의 불안정성과 동요를 확인할 수 있다.
애초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대북정책의 '연속성'의 핵심은 군사·안보분야의 (한·미 동맹의 군사적 우위가 관철되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 한계 내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따르면 주한미군의 주둔과 한·미동맹은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한 대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역내에서 한국과 이해관계를 함께 공유하는 동반자로서 무한히 연장된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한국의 지지와 참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데 9·11 테러의 발생 이후 연이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해 이루어진 미국의 침략전쟁에서 지적되어왔다시피 호전적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주도로 이루어지는 오늘날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과의 타협, 혹은 이에 대한 협력은 언제든지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극단적인 결과를 개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6자회담에서 한국은 북한에게 전력지원이라는 '당근'을 제시했지만 한편으로 이는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에게 전력설비를 제공하는 것에 비해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자체로 협상의 성패를 좌우할 미국의 대북 불가침 보장과 관계 정상화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한 사회운동의 과제: '그들'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쟁취하자!

미국은 최첨단 전폭기로서 이라크에서 그 무용(武勇)(?)을 한껏 뽐낸 바 있는 F-117 스텔스기 15대(전체 전력의 27%)를 군산기지에 배치하였고(5월 31일), 중국에 대북경제제재의 압력을 넣거나(6월 23일), WMD 확산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북한기업들(조선광업무역회사, 단천은행, 조선룡봉총회사)이 자산을 동결하면서(6월 29일) 6자회담을 앞두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들을 구사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더이상의 회담을 중지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11) 이번에 남한의 대북전력지원이라는 '중대제안'이 이번 6자회담의 전망을 밝혀준다고 하지만 이에 전적인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한반도의 동반자로서 미국을 상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9·11테러 이후 '예방적 反확산'과 '선제 핵공격'까지 불사하는 미국의 철저한 핵폐기(아마 미국의 요구는 여기에 머무르기 않을 것이다.12)) 요구를 과연 북한 '평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6자회담은 3치례(2003.8.27-29, 2004.2.25-28, 2004.6.23-26)에 걸쳐 열렸으나 회담을 통해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2004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은 북·미간의 핵프로그램과 중장거리 마이사일 개발을 포함하여 모든 현안을 일괄에 타결하는 '대담한 제안'을 내놓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한 체제인정과 불가침을 보장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작년 6자회담에서 확인된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른바 'HEU(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CVID 원칙', 즉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가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6자회담에서 별다른 성과가 없으면 북핵문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남한과 미국의 협상 테이블에 의존할 수는 없다. 심지어 북한의 '자위적' 핵무기의 개발에 기대를 걸고 있을 수도 없다.13) 왜냐하면 핵무기의 파괴력과 위협을 경고하고 그 사용을 제한할 수 있었던 것은 핵무기의 독점이나 핵무기의 확산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 이후 일체의 핵무기에 대해 반대하는 민중들의 반핵운동, 반전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45년 12월〈모스크바 3상회의〉를 둘러싼 이른바 '찬-반탁'논란과 그 이후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 제국주의 열강의 '선의'에 기대를 거는 것은 결코 민중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0년 전 '위로부터' 주어진 선택지는 냉전의 개시와 더불어 쉽사리 깨질 수 있는 미-소의 합의에 근거하고 있었고 그나마 현실화되지도 못한 채 결국 한반도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최첨단 무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연대를 위한 민중들의 단결된 투쟁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남한의 사회운동 역시 6자회담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 것보다는 대안적인 선택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오늘날 이라크 파병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서 드러나는 남한정권의 대미 종속적인 군사안보정책에 대한 비판, 선제공격과 예방전쟁의 첫 시험대인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점령에 대한 반대투쟁이 점점 중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반전평화운동의 대중적이고 강력한 토대만이 핵을 군사무기화하고 민중들의 목소리가 배제된 채 '그들만의' 협상 테이블에서 전쟁이냐 평화인가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1) 그 부속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합의 후 3개월 내 양측은 통신 및 금융거래에 대한 제한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시켜 나간다. 2)양측은 전문가급 협의를 통해 영사 및 여타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 후에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3)미국과 북한은 상호 관심사항에 대한 진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까지 격상시켜 나간다." 본문으로

2) 관련 조약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4. 양측은 국제적 핵비확산 체제 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 1) 북한은 핵비확산조약(NPT) 당사국으로 잔류하며 동 조약상의 안전조치협정 이행을 허용한다. 2) 경수로 제공을 위한 계약 체결 즉시 동결 대상이 아닌 시설에 대하여 북한과 IAEA간 안전조치 협정에 따라 임시 및 일반사찰이 재개된다. 경수로 공급계약 체 결시까지 안전조치의 연속성을 위해 IAEA가 요청하는 사찰은 동결 대상이 아닌 시설에서 계속된다. 3)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 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 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협정(INFCIRC/403)을 완전히 이행한다. 』 본문으로

3)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 이후 북한은 1차 연료의 부족과 대외무역의 급속한 감소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러시아와의 교역은 1990-94년 동안 26억 달러에서 1억 달러로 줄었고 무역총액은 47억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반토막 났다.) 본문으로

4)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The New Press(New York), 2004[남성욱 옮김, 『김정일 코드』, 따뜻한손, pp.197-199] 참조. 본문으로

5) 당시 북한은 "미국이 대담한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이에 상응하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으며, 이에 대한 미국측의 반응이 없자 북한이 수 주 후 유엔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을 추방하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한데 이어 플루토늄 생산 시설을 재가동시켰다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와 존 오버도퍼 교수가 밝힌 바 있다. 이 둘은 2002년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었다. (『연합뉴스』6월 22일) 본문으로

6) 리언 시걸,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북한과 미국의 핵외교』(구갑우·김갑식·윤여령 옮김, 사회평론, 1999), pp.25-29. 그는 북한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미 행정부 내 형성된 핵외교에 대한 공유된 상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첫째,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인 '불량국가'는 핵확산의 골칫거리이다, 둘째, 전형적인 불량국가로서 북한은 미국에 적대적이고 핵무장에 광분하고 있다, 셋째, 핵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한 국가는 회유를 통해 중단시킬 수 없다, 넷째, 핵무기에 대한 야망을 중단시키는 것은 오직 무장해제, 즉 응징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7)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 4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1992년 9월 17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부속합의서」를 체결하여 그 이행과 준수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 실행은 핵개발 의혹을 둘러싼 북·미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계속 보류되었다. 본문으로

8) 이 선언에서는 남북은 핵무기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배비, 사용을 하지 않으며, 핵에너지를 평화적 용도로 이용한다는 것,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 쌍방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 등을 합의하였다. 본문으로

9) 5월 12일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본문으로

10) 6월 1일 PBC 라디오와의 통화에서 천영우 외교통상부 외교정책홍보실장의 발언. 본문으로

11) 7월 18일자 {아사히신문} 보도 본문으로

12) 부시행정부 들어 북한에 대해 제기하는 추가적인 쟁점 중의 하나가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미 미국은 2004년 10월 4일 북한인권단체 지원과 탈북자의 미국망명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한인권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부시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폭정", "전체주의" 등의 수사를 사용했는데 이는 북한주민들의 '인권상황'을 북한정권에 대한 관계 정상화와 결부시키겠다는 의중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6월 13일 미국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 유린 현실을 고발하는 책을 쓴 탈북자 출신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씨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환대함으로써 대북 압박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본문으로

13) 또한 우리는 핵무기 개발을 통해 대미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북한의 시도가 가진 한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전세계의 민중들이 반핵투쟁을 통해 외쳐왔던 바 핵무기 개발은 민중들의 평화에 대한 권리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과 동맹국들의 핵무기 독점을 정당화하는 미국의 반확산 정책의 맹점을 비판해야 하며,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미달하는 (반)주변부 국가들의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개발 시도의 (제국주의 비판에 미달하는 대쌍논리로서) 대항폭력이 지니는 한계를 명확히 바라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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