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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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1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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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레솔에서 2주

지 선 | 평화바람
지금도 생각하면 난 정말 용감한 걸 넘어 무식한 것 같다. 골레솔에 가기로 마음먹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어떻게 갈지 대책이 없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터키사람들은 그곳은 미개하고 위험한 곳이라고 가지 말라고 했다. 차라리 안탈랴나 이즈미르에 가서 놀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때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도 중동과 유럽의 길목에 있어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많은 문명이 거쳐 간 곳이다. 터키는 해안선을 따라 관광지가 발달되어 있어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곳이다. 마침 여름이 시작된 터키는 정말 세계 곳곳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어딜 가나 복잡했다. 장사꾼들의 호객소리가 너무 지겹고 날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민박집아줌마 사니에는 '어릴 적에 살던 골레솔에 가겠냐'고 제안을 했고 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곳을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의 계시에 준함

일단 길은 나섰지만 포기하고 싶었던 고비가 종종 있었다. 돈도 잃어버리고 성추행을 당하기도 한 터라 나 혼자 여자 혼자 갈 수 있을까 무척 겁이 났다. 골레솔에 가기 전 묵었던 호텔에서 만난 우짜짜하게 생긴 아저씨는 왜 거길 가냐고 거긴 위험하고 네가 거길 가면 그 마을 사람들도 위험해진다고 하면서 오히려 날 파출소에 끌고 가려고도 했다. 머리가 무척 복잡해졌다. 내가 가면 왜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걸까? 골레솔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가는 걸 왜 원하지 않을까? 이 우짜짜한 아저씨는 누굴까? 내가 골레솔의 평화를 깬다는 말을 확신을 갖고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난 더욱 흥미진진해져 골레솔로 향했다. 가까스로(아니 이건 표현이 좀 약하네) 극적으로 골레솔에 도착해 사니에의 가족들을 만나 날 환영해 주는 모습을 보는데 와~ 밀려오는 그 감동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왜 사니에는 안 왔냐고 물으시며 사니에가 받아야 할 환영과 뽀뽀를 내가 다 받으니 그곳에 가기까지 받았던 천대와 설움이 한방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건 신의 계시였다. 아니 계시에 준했다. 사니에의 아버지는 웬일인지 날 보자마자 서류뭉치를 보여주며 골레솔이란 지명은 50년대 초반에 없어졌고 대신 '촘첼릭'이란 터키어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가르쳐 주셨다. 쿠르드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터키정부의 1국가 1언어정책으로 쿠르드어 교육은 물론 책, 신문발간도 금지되었다.

2년 전 터키정부는 EU가입을 위해 쿠르드교육을 허가했으나 그나마도 2개월만에 전면 금지한다. 터키정부의 쿠르드어와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은 악명이 높다. 그래서 쿠르드 가정이나 골레솔 같은 쿠르드마을에선 쿠르드어로 말은 하지만 대부분 활자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쓸 줄은 모른다. 내가 이스탄불에 있을 때 우연찮게 쿠르드문화센터에서 나온 잡지를 본적이 있는데 그것도 그 중에 대부분은 터키어로 되어 있었고 쿠르드어는 불과 몇 장 안됐다. 그만큼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적었다.

사니에의 아버지인 뮤슬림씨는 70~80년대까지 20년 동안 그 지역의 읍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사니에의 친정으로 제일 먼저 인사를 온다. 내가 마을로 인사를 다니는 게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날 보러 사니에 친정집에 왔다. 인사를 왔다기보다 날 구경하러 왔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지 싶다.

사람들은 사니에의 친정아버지를 '아포'라고 불렀다. 아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삼촌'이란 의미로 인척관계에서 부르는 경우와 또 다른 의미로 '우리들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을 줄여서 부른다(압둘라 오잘란은 PKK(쿠르드노동자당) 게릴라의 지도자로 쿠르드해방을 위해 무력투쟁을 하다가 6년째 수감 중이다).

아포에게는 부인이 둘이다. 한 분은 사니에와 8형제를 데리고 이스탄불로 이주한 멕부레부인이고 또 한분은 골레솔에서 날 반겨주신 또 다른 부인인데 죄송하게도 그분의 성함을 잊었다. 사니에의 아버지는 사니에와 8남매가 골레솔을 떠나 정착할 몇 년 동안 이스탄불에서 함께 지내다가 시골로 돌아와 살고 있다. 사니에의 배다른 자매와 형제는 모두 네 명이다. 이 중 세 번째인 베리완은 바쁜 와중에도 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베리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리는 바람에 학업을 중도 포기해야만 했지만 궁금한 게 많은 소녀다. 항상 긴치마에 여름에도 팔뚝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는 '나도 짧은 치마 입고 싶다'고 했다. 또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은 위험하지 않은지, 한국 사람과 일본사람은 같은 사람이냐, 한국남자들 잘 생겼냐는 질문에서부터 심지어 나에게 터키어까지 가르쳐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정이나 마을사람들끼린 쿠르드어를 하기 때문에 학교가 아니면 터키어를 배우기가 쉽지 않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들어 말은 할 줄 알되 쓸 줄은 모르기 때문에 책이나 신문엔 까막눈인 것이다. 베리완의 친구들은 고3이지만 시골살림에 여자를 공부시키는 집은 많지 않다.

베리완은 동네여자들이 모여 뜨개질하는 곳, 빨래하는 곳으로 날 데리고 다니며 내 말을 쿠르드어로 통역해 주는 걸 즐겼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내가 얘기한 것과 영 다르게 통역하는 바람에 오해도 사고 해명하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렇게 다니면서 나의 대안생리대 워크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런 시골에선 어떤 생리대를 쓰는지 물어보니 위스퍼 같은 일회용생리대를 쓰더라는 것이다. 정말 세상 곳곳에서 여성들은 일회용생리대의 부작용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난 대안생리대전도사처럼 즉석에서 집안에 안 쓰는 면을 이용해서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차 마시고 식사하며 수다를 떨었다. 내가 계발한 건 아니지만 마을여자들은 내게 무척 고마워했고 나 또한 누구나 무료로 대안생리대를 배울 권리가 있다고 가르쳐 준 피자매연대 활동가들에게 무척 감사했다.

깨끗한 물이 절실한 곳

마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가 누렇다 못해 갈색이다. 충치는 아니고 아주 어린아이나 다른 지역에서 시집 온 며느리들을 뺀 마을 사람들 모두 갈색 이를 자랑스럽게 내놓고 웃는다. 첨엔 너무 신기해서 사진만 찍었다. 하지만 얘길 하다 보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치아이기에 양해를 구하고 물어보니 책으로만 봤던 불소피해자인 것이다.

텐듀렉 화산에서 식수를 끌어다 쓰는데 자연스레 불소가 다량 함유된 물을 음용하게 된 것이다. 이 물로 동물도 먹이고 빨래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이 마을엔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에 공동수도가 있다. 여긴 하루 종일 물길으러 오는 여자들과 물 마시러 오는 개와 음식물찌꺼기를 먹는 닭들로 복잡하다. 지방정부에다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다 달라고 해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계속 늦춰지고 있다는데 그 피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단지 물을 마신 것뿐인데 뼈가 단단해지고 유리처럼 쉽게 부러져서 걸어다니거나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 노인도 많다. 또 자신을 30대 중반이라고 소개한 아저씨는 50대 후반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이다. 깨끗한 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이곳 주민들의 불만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골레솔에선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골레솔에 한때 2천명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300~350명 정도밖에 안 남았다. 그나마 대부분 여자다. 남자들은 대도시로 나가 막노동하여 번 돈을 집으로 보내지만 막노동이란 게 불안하기 짝이 없다. 건물에 페인트칠하는 일도 집단장하는 봄, 가을에나 일이 있는 것이지 겨울엔 하루 종일 집에만 있기 일쑤다. 만약에 돈을 못 받거나 체불되기라도 하면 자신이 지은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부인과 자식을 등지고 대도시로 가야만 하는 거지?

그건 터키정부가 쿠르디스탄 고립정책을 통해 일자리도 만들지 않고 투자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 가까운 도시에다 설탕공장을 만들어 운영하다가 1년 만에 폐쇄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 쿠르디스탄의 실업률은 80%가 넘는다. 골세솔에서 학교는 초등학교 하나뿐이고 그것도 선생님 한 명에 학생은 80명, 두 개 반뿐이다.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려면 도시로 나가야 한다. 교육수준도 낮고 진학률도 낮다보니 취직하기도 쉽지 않다.

쫓겨나도 갈 곳 없는 사람들

남자들이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특히 산을 끼고 있는 시골마을의 남성들은 '코루주'라는 역할을 겸해야 한다. 코루주는 산악지역에서 활동하는 PKK(쿠르드노동자당)게릴라를 잡기 위해 터키정부로부터 정기적으로 훈련받고 월급을 받으며 무기도 제공받는다. 터키군경의 협조요청이 있을 땐 응해야하고 마을에 의심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신고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사람을 말한다. 평소에는 농부였다가 터키군경의 호출시 군인으로 변신하지만 일상에서는 순박한 아저씨와 다를 바 없다.

만약 'PKK도 이슬람형제고 동족이다'란 이유로 코루주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마을에서 살 수가 없다. 설사 코루주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건 대도시로 나가 살 수 없는 시골사람들에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생존의 조건이다. 마을사람들의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가 이 '코루주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다.

어떤 사람은 동족에게 총을 겨누는 배신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편, 어떤 이에겐 터키정부가 달마다 주는 20만원의 월급이 유일한 수입이 되기도 한다. 평생 양을 치거나 밀농사만 지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등에 짐을 지어 나르는 지게꾼이나 건설현장의 일용직뿐이다. 실제로 이스탄불이나 앙카라의 건설 현장엔 70~80%가 쿠르드인이다. 대도시에 나가 일한다고 해도 쿠르드라는 멍에는 계속된다.

홍차배달 일을 하던 15세, 16세의 소년들에게 게릴라협조자로 일했다는 엉뚱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또 감옥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치범이 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많다니 자연스럽게 터키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학교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줄어드니 교사도 줄어들고 학교가 줄어드는 대신 교도소는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대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 중에 농토가 있거나 가족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농사일을 도우러 또는 시골로 휴가를 오면 골레솔의 여름은 그나마 활기가 있다. 골레솔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료용이나 주식용 밀을 키워 내다 팔거나 양을 사육하는 것이다.

양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털을 잘라 실을 만들고 뜨개질해서 양말을 짠다. 고기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양 똥으로 음식을 데우거나 난방에 쓰이는 연료를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감화 받은 몇 가지 것 중에 하나인데 온갖 동물의 똥을 한곳에 모아 손으로 주물주물하여 책 한 권 만하게 만들어 돌담 위에 놓고 볕에 말리면 훌륭한 난방연료가 된다.

이 동네에선 재산목록 1호가 텔레비전도 아니고 농기계도 아니요 바로 양이다. 양은 특성상 더운 곳에 있으면 죽어버린다. 그래서 여름이면 2개월 15일 동안 목동들과 함께 고원으로 풀을 뜯으러 가야 하는데 이 길까지 터키정부에서 통제한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PKK게릴라들과 민간인이 접촉할 수 있다는 이유다. 여름에는 양이 고원에서 풀을 맘껏 뜯어먹어야만 털에 윤기가 나고 살도 많이 붙고 건강한데 이렇게 양을 산에서 내쫓는 건 사람들을 마을에서 내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국내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저기 부서진 집들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면, 사람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서로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난 지금 대추리에 살고 있는데 국방부가 올 봄부터 평택 K-6 미군기지를 확장하기 위해 대추리와 그 인근지역을 포함해 345만평을 수매하는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다. 내가 터키에 가기 전 한 달, 그리고 터키를 다녀와 석 달을 지내는 동안 이곳은 갈수록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정도 오죽하겠냐마는 남아있는 동네사람들은 어제까지 오순도순 살던 이웃이 떠나고 집만 덩그러니 비어 있다는 게 너무나 불안하기만 하다. 게다가 요즘은 고물상들이 와서 빈집을 돌며 문짝이며 창틀을 떼어 가는 바람에 더 흉가 같은 몰골이라 이곳 주민들은 그런 험상궂은 집을 지나칠 때마다 욕을 한마디씩 한다.

요즘은 잠도 안 온다. 잠을 자도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꿈, 차표는 끊었는데 결국 차 놓쳐서 발 동동 구르다가 깨기도 하고 여기에 땅 한 평, 집 한 칸 없는 내가 이정도니 여기서 평생 살아오신 주민들은 그 심정이 어떨까. 오늘도 주민들은 '내 살아있을 때 더 이상 여기서 쫓겨나가는 꼴 못 본다'고, '여기서 이웃들과 살고 싶다'고 하신다. '기지도 싫고 돈도 싫으니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고 국방부 앞에서 미 대사관 앞에서 한국토지공사 앞에서 절규하신다. 할머니들은 차가운 아스팔트에 나앉아 있다가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을 쏟아낸다.

평택 대추리에 있는 빈집을 보면 나의 기억은 어느새 골레솔로 향한다. 마을 곳곳에 집이 무너진 채 아니 누군가에 의해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다.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보다 부서진 곳이 더 많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우물쭈물 대답하지 않거나 '살던 집주인이 부수고 나가서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니 어느 누가 고향을 떠난다고 자기가 살던 집을 부수는가. 것도 한두 채가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듣자니 뭔가 숨기는 게 있구나 싶었다.

난 사니에의 아버지에게 이 마을에서 있었던 12년 전 사건을 들을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쿠르디스탄에선 PKK게릴라와 터키정부군 간에 전쟁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밤에 부상당한 게릴라들이 마을에 들어와 간단한 치료를 요청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에 기꺼이 응하고는 차와 빵을 대접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터키군인들이 마을에 찾아와 게릴라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집들을 부수고 산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들을 유치장에 가뒀고 그 중 5명의 청년은 재판을 받았다. 그 청년들 모두 12~13년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미치거나 병에 걸려 감옥에서 일찍 나오거나 형을 마치고도 '위험한 자'라는 이유로 재수감되었다고 한다. 밖에 나와 병을 치료하자 다시 감옥에 가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들은 왜 우릴 가만히 놔두질 않느냐고 절규하지만 터키정부는 그저 '아직 수감기간이 남아있다'고 말하고 변호사 외 가족면회도 금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여기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한다. 터키에 있는 쿠르드인 밀집지역에서 흔히 있는 일로 3000~5000개 이상의 마을이 이런 식으로 부서지고 없어졌다고 하며 이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국가범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쓸 만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쓸 만한 땅은 다 빼앗기네

본래 PKK(쿠르드노동당)은 무력투쟁단체는 곳이 아니었으나 80년대 초반 PKK활동가의 부모를 터키정부군이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산을 주무대로 하는 게릴라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압둘라 오잘란 체포 이후 PKK에서 터키에 휴전을 제안해 한때 쿠르디스탄에 총소리가 멈췄지만 이라크에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터키가 함께 게릴라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터키에서 단골 뉴스거리가 PKK에 관한 것인데 '게릴라 몇 명이 총격전을 벌이다 몇 명이 사망하고 몇은 부상을 입었다', '무슨 무슨 은행에서 테러가 발생했고' 등등….

사람들은 이곳을 버려진 땅이라고 한다. 방치되어 더 이상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 일주일에 4일에서 5일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 저녁식사를 마치고 반쯤 누워서 텔레비전연속극을 보고 있다가 전기가 나가면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것이 이곳의 저녁 풍경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은 건지 한집에 8~9명이 보통이다. 코루주라는 걸 만들어 마을주민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계, 평소엔 수다도 잘 떨더니 부서진 집에 대해서는 거짓된 정보를 흘리는 주민들 마을 곳곳에 부서진 채 방치된 집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마을 사람들은 게릴라가 아니다. 설사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주민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면 이주비용과 땅과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인데 보복성으로 다짜고짜 불도저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밀어버린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인가?

대도시로 가 일용직 노동자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장소의 이동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동이기도 하다. 13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25시간 남동방향으로 달리면 그곳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쇼핑센터도 인터넷도 없는 그저 과거만 있는 곳이 나온다. 수시로 버스로 올라와 검문을 하는 군인들이 짐칸에 물건들을 다 내려 풀어헤치고 사람들을 한 명씩 쪼려보고 지나간다. 나는 드디어 내가 바라는 적나라하고 부끄러움 없는 날것 그대로의 쿠르디스탄을 찾았나?

12년이 지난 지금도 밝혀지지 않거나 해소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누가 그렇게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부수라고 명령을 내렸는가. 그 중 누구 하나 주민들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고 그런 사건 기록되어 있는 문서 한 장도 없다. 이것이 국가권력이라는 것의 실상임을 다시 확인했다.

책으로 보거나 잠깐 여행 와서 알 수 없다. 그들의 삶을

터키인들은 나의 쿠르디스탄 여행을 탐탁해하지 않아 했다. 터키사회 내에서 쿠르드인들이 겪는 차별은 쿠르드만의 일이 아니고 가난하고 빽 없는 터키인들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한다. 현재 터키엔 쿠르드와 터키인만 사는 게 아니다. 수많은 문명이 지나가고 흥망성쇠를 거듭했기 때문에 50개 이상의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다른 민족과 같이 쿠르드인도 한 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데 왜 분리시켜 생각하냐'고 '쿠르드 문제는 터키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쿠르드는 모두 '테러리스트이고 무식하고 냄새나고 능력 없는 2등 국민'이라는 쿠르드 사람들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사실 난 쿠르드와 터키사람들을 구별해서 보려 했던 건 아니다. 그곳에 집이 부서진 사람이 있었고 그 누구의 집도 그렇게 부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을 전체적으로 주민들의 건강상태는 엉망이었고 닭과 개들도 아프니 마을 전체가 '의사 없는 병원' 같았다.

요즘 대추리 촛불집회장에는 오끼나와, 일본, 대만, 필리핀, 프랑스, 미국 등 세계각지에서 지지방문을 온다. 일본 남서쪽에 있는 섬 오키나와에 사는 어떤 할아버지는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영상을 보시고는 '어쩜, 대추리랑 오끼나와랑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네.' 하신다.

재일동포 3세 어느 남학생은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땅을 빼앗겨 일본으로 이주해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과거를 얘기하면서 한국의 농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한국의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과연 그는 한국의 땅과 농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궁금했던 것일까? 어쩜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대추리 주민들을 보며 동양척식회사에 땅을 빼앗겼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한국에서 생존하고자 발버둥치는 연약한 존재들을 만나러 온 것일까.

오늘은 국방부가 평택 345만평을 건설교통부 산하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의뢰해 강제토지수용여부를 법제도내에서 통과시키는 날이다. 말만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이지 일제시대 때 동양척식회사가 농민 땅 뺏고 농민들 내쫓는 것과 뭐가 다른가. 올해 겨울은 어느 겨울보다 추운 겨울이 되겠지. 언제부터 불렀는지 누구의 노래인지 어떤 뜻인지 모르고 불렀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노래가 생각난다. 예전엔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직 대추리 땅을 뺏기진 않았지만 즉흥적으로 시작했던 쿠르디스탄여행을 돌아보며 그 마음을 조금 헤아려본다.
주제어
평화 생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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