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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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 산업공동화, 현장 투쟁 중심으로 맞서다

한국합섬노동조합의 정리해고 분쇄투쟁

서병욱 | 한국합섬노동조합 사무부장
자본의 부패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한국합섬의 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에 따른 산업공동화가 경영위기를 부추기고, 이것이 직접적인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어진지 오래다. 특히 화학-섬유 산업은 중국을 대상으로 한 생존경쟁이 가장 치열한 산업이다. 이미 효성, 태광 등 대기업들은 앞 다투어 중국으로 설비를 이전하였고, 너도나도 그 물결에 뛰어 들어 발생한 산업공동화는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 같은 산업공동화는 기업의 극심한 경쟁력 약화와 구조조정을 낳았고, 이는 다시 대량 정리해고와 노동조건 저하로 이어져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일상화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원사생산업체라고 자부하던 한국합섬도 그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영자체가 너무나 비전문적이다 못해 족벌경영으로 일관했고, 부패규모가 1천억 원을 넘어설 정도로 썩은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위기는 너무나 당연했다.
이렇게 위기가 본격화되자 한국합섬 자본은 인원감축과 임금삭감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2월 13일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351명 여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겠다고 신고하였다. 한국합섬 자본은 모든 자본과 마찬가지로 노조무력화를 노렸고, 검증된 구조조정 시나리오를 내 놓으며 승리를 자신했다.

100% 승률을 가져 왔던 자본의 구조조정 시나리오

한국합섬 자본은 노동조합 무력화를 위해 수 년전부터 노무전담을 맡는 이사와 노사협력팀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두는 등 구조조정에 경력이 있는 관리자들을 영입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구조조정 전문 컨설팅을 꾸리고 치밀한 노조파괴 과정을 진행시켰다. 여러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수 년전부터 컨설팅을 꾸리고 수십 억 원을 들이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제 그 시나리오는 모든 자본들이 따라 하기만 하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자본은 노동조합과의 힘의 맞대결에서 이길 수 있도록 충분한 계획을 가지고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법과 구사대, 용역깡패, 노-노 분열이 그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이를 알면서도 질 수밖에 없는 투쟁들을 계속해왔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최대 권력인 자본에 맞서 노동조합은 단순히 단결된 힘만으로 자본의 준비된 힘과 부딪쳤고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부담은 한국합섬노동조합에서도 제대로 투쟁도 하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일부 세력에게 구실과 명분을 제공했고, 개별 조합원으로 하여금 노동조합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흔들리게 했다.

▷ 임금체불로 경제적 어려움과 경영위기 부각
회사는 먼저 2004년 말부터 임금을 체불하기 시작했다. 임금을 지급하더라도 지급일을 절대 지키지 않았으며 그 마저도 분할해서 지급했다. 노동조합이 항의하고 농성해 봤자 실제 지급해야할 회사가 지급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도 지급일로부터 15일 이상이 되어야만 체불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처벌도 벌금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와 같은 체불을 지속적으로 반복했고, 2005년 1월부터 50%의 공장을 휴업시키는 등 경영위기를 조장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2005년 임금동결, 상여금 200% 유보, 복지비 일부 유보 및 반납 등 노동조합 설립이래 처음으로 양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대신 회계감사를 할 수 있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체불금을 분할 지급받기로 합의하게 된다. 그 전제조건은 합의를 어길시 사장의 사퇴였다.

▷ 노조무력화- 노동조합의 불법성 유도
회사는 항상 노조무력화를 노리고 있었다. 회사 측 세력들을 조직해서 노조 집행부를 어용으로 바꿔내고 손쉽게 구조조정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사관계로드맵이 한참 통과된다는 말이 나올 때인 2005년 10월, 경영위기 차원을 넘어서서 노조파괴를 목적에 두고 구조조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2006년 1월부터 300명에 이르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기로 합의한 단체협약도 노조무력화를 목적에 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회사는 2005년 10월부터 단체협약 및 노사합의를 고의로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조합의 투쟁을 유도했다. 노동조합은 노사합의에 따라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회사가 이를 거부했고 노동조합은 사장의 집기를 들어내고 정문 출입을 통제하였다. 이에 회사는 관리자들을 총동원하여 정문에서 대립하게 만들고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물리적인 충돌을 감수하면서 사진을 회수했다. 이후 형사 고소고발을 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이지만, 회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장거리에서 몇 대의 사진기를 가동했다. 그리고 업무방해금지 법원판결이 고시되었다.

이 지점에서 노동조합은 투쟁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회사가 급작스럽게 유인물을 배포하고 증거자료 확보를 위해 치밀하게 대처할 뿐 아니라, 휴업실시, 잔업통제 등 정리해고 요건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즉시 조합원 간담회를 통해 구조조정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장기 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정문통제를 풀고 사장의 출입도 묵인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노동조합 성향 상 쉽게 결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구조조정 투쟁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정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전 조합원에게 인지시켜 나가면서 전환을 결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이후 구조조정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3월 8일 회사측이 사장에 대한 간접강제 및 업무방해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 중간관리선 장악 및 노-노 갈등 야기
회사는 모든 구조조정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먼저 중간관리선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2006년 1월부터 조장, 반장, 기사 등 조합원이지만 현장을 관리하는 이들의 임용과 면직을 회사 마음대로 한다는 규정을 제정한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은 이에 반대한다는 서명 작업 및 간담회를 실시했다. 그러나 회사는 중간 관리선에게 회사측의 계획에 찬성한다는 서명을 하도록 했고, 이에 반대한 조장과 반장들은 전원 면직됐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회사측에 찬성서명을 한 이들은 중간 관리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직접적인 당사자 중 50% 이상의 서명이 있으면 법적으로도 사규를 변경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셈이 된다. 이후 회사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주로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비를 지급하며 조합원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어용조직을 만들어 역시 현장을 분열시키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이 회사의 잔업 통제 문제 등을 이유로 현장투쟁을 통해 규정된 작업 이외의 업무를 거부하기로 했으나 어용조직들은 이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투쟁조끼 미착용, 집회 참석거부 등 철저하게 회사의 지시만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현장에서는 결의를 통해 이들의 직책뿐 아니라 부서원으로서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노동조합은 이들 중 7명을 제명하고 3명을 정권에 처하였다. 구조조정 투쟁에 실패한 노동조합의 경우 어용세력들이 대의원회의를 장악한 예가 많았고, 결국 이것이 내부적인 노-노 갈등으로 이어져, 노조가 무력화되는 결정적 이유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힘이 투쟁과정에 작용하지 못하도록 본격적인 투쟁돌입 전에 조합원 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실제 코오롱노동조합의 경우 투쟁을 마무리하고 조합원징계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결국 징계가 늦어지면서 이들이 철저히 회사 편에 서서 활동하였고 현장을 분열시켰다.

▷ 희망퇴직 실시
2월부터는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노동조합은 즉각 반대를 표명하고 현장에 희망퇴직 관련 면담거부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관리자와 밀접하게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지원부서는 개별면담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이들 위주로 2월부터 희망퇴직을 신청하게 된다. 4월 현재까지 176명이 희망퇴직 하였다. 위로금은 많아봐야 일천만원, 근속년 수가 적은 사람은 30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볼 때 희망퇴직은 1년 수개월에 걸친 체불 반복과 경영위기에 따른 불안감에 따른 것이었으며, 27억 원에 이르는 손배가압류도 일정부분 그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희망퇴직자 중 상당수가 당장 단돈 몇 푼이 아쉬운 경제사정의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었고, 개별적으로 결정하면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퇴직신청을 원천 봉쇄할 수는 없었다. 노동조합은 때늦게 금융, 재무교육 등 일상적인 경제활동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으며 구조조정에는 손배가압류가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기에 그에 따른 사전 교육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합섬노조의 경우 손배가압류 대처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지만, 어쨌든 구조조정이 닥친 이후에 교육을 준비하고 실행했기 때문에 늦은 감이 있었다. 사전교육과 대처에 대한 토론이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 핵심적인 전직 집행간부에 대한 공격
회사는 371명의 인원감축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회사는 법을 떠나 노조무력화만이 정리해고에 있어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여겨,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노조파괴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1차 희망퇴직의 성과는 30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회사는 기름을 붙는다. 전직 핵심간부들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전직 대의원뿐 아니라 전직 위원장, 임원 등 핵심 간부들을 목표로 삼고 작업에 들어갔으며, 결국 2명의 전직 핵심간부들이 희망퇴직하면서 현장이 술렁거리고 그 간부가 속한 해당부서는 비교적 많은 인원이 희망퇴직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타사업장의 경우와 같이 희망퇴직의 급물살로 발전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하고 구조조정 투쟁의 본질을 공유하였으며, 오히려 더욱 단결해야하는 이유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 활동가 및 핵심간부 위주의 조직이 살아있을 때는 활기차지만 무너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아래로 부터의 투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2월13일, 드디어 회사는 작년 영업적자를 인당 노무비로 나눠서 계산한 것이라며 351명 정리해고를 노동부에 신고한다. 이것도 애초 수개월간 충원하지 않아 발생한 자연감소와 희망퇴직자가 발생함으로써 줄어든 숫자였다.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국면에 들어서면서 즉각 매일같이 구미노동부를 압박하는 집회를 전개하였다. 이는 그동안 노동부가 자본의 편에서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노동조합의 압박 투쟁은 쉽게 노동부가 자본과 결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낼 수 있었고, 회사의 직장폐쇄 신고를 반려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노동조합의 파업이 아닌 자본에 의한 파업을 만들어낸 노동조합의 투쟁방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 계속된 희망퇴직 및 구사대 편입 강요
회사는 정리해고를 신고해 놓고 본격적인 희망퇴직 강요에 들어갔다. ″너는 정리해고 대상자다. 내가 노력해 봤지만 뺄 수가 없더라”, “구조조정 못하면 어차피 회사 문 닫을 생각이다. 지금 돈 줄 때 나가라”, “당신 자식이, 당신 남편이 손배가압류에 걸려들었다. 지금 희망퇴직하면 그거 다 풀어주고 돈을 더 준다”, “당신 자식이 불법을 저질러서 구속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집에 데리고 가라” …. 회사의 이러한 강요에 176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하였다. 176명의 희망퇴직을 결심한 데는 심리적인 압박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구조조정 투쟁을 노-사간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과 자본가와의 싸움, 자기 자신의 마음과의 싸움임을 인식시켜 나가면서 신청을 막아갔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으로 남아 있는 대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의 대응

▷ 현장중심의 투쟁 전개
노동조합은 우선 아래로 부터의 투쟁, 현장 중심의 투쟁을 기본으로 두고 노동조합에 의한 투쟁지침을 지양하였다. 노동조합은 투쟁방향을 치밀하게 결정하되, 투쟁방법은 각각의 현장에서 조건에 맞게 토론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결과 똑같은 투쟁방향을 놓고도 현장의 투쟁은 각각 달랐다. 예를 들어 회사의 잔업통제 업무지시에 대해서는 부서별 토론 후 어떤 부서는 철저하게 잔업을 들어가지 않음으로서 희망퇴직으로 인한 빈자리를 채우기 않았고, 또 다른 부서는 회사의 업무지시는 당장 제품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이에 따라 이후 노동강도가 심각히 상승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체적으로 잔업실시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또한 회사의 생산 활동에 타격을 주는 행동은 법적으로 따지면 불법이지만, 노동 강도 상승에 따라 업무를 다할 수 없다는 정당성이 인정되는 부문에서는 전 부서가 공히 노동조합의 지침 없이 작업을 거부하면서 결과적으로 회사가 스스로 공장가동을 중단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노동조합 투쟁지침이 없는 현장 중심의 투쟁은 회사가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탄압 구실을 찾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회사는 결국 다수의 현장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징계와 손배가압류를 그 대응방안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합원들의 심리적인 위축을 가져오기보다는, 조합원 전체가 함께 징계를 받고, 또한 함께 손해배상을 책임지는 결의를 하게 됨으로서 오히려 더욱 단단한 단결투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정리해고 투쟁은 노동조합 중심이 아니라 조합원 개개인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개인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집행부의 건재가 필수임을 모두가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지속적인 조합원교육
노동조합은 1주일에 1회 이상의 조합원교육을 실시하였다. 직접적으로 구조조정에 관한 교육(구조조정 투쟁 실패 사업장 사례, 손배가압류, 법적대응, 선동 등)을 편성하고 나아가 노동철학, 노동역사 등 의식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교육에 대한 토론을 반복함으로서 교육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 법률 관련 전담팀 가동
물론 법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법적 대응이 노동조합 투쟁에 질곡이 되지 않는 한, 법적인 문제에서 자본에게 너무도 쉽게 칼자루를 넘길 필요는 없다. 투쟁은 잘해 놓고 이후 법적인 문제가 큰 충격을 주어 노동조합 조직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는 예들이 적지 않다. 노동조합은 수년에 걸쳐 노동운동에 함께해 온 노무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법률 전담간부를 통해 모든 투쟁에 대해 법적인 점검을 해 나갔다. 법을 따르려고 마음먹으면 투쟁방법의 폭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의를 거듭하면서 최선책을 찾아내고 투쟁방법을 결정해 나가면서 조금씩 법에도 단련되어 갔다.
현재까지 위원장을 포함하여 형사고발 된 조합원이 35명이다. 그러나 정리해고 투쟁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에서야 한두 명씩 출두해서 조사를 받아주는 정도다. 물론 노동조합에 단결력이 부족하다면 상황전개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 실천적 연대투쟁 전개
회사측이 정리해고 신고를 위한 요건을 만들기 위해 실시한 휴업에 맞서 노동조합은 즉각 전 조합원 출근투쟁을 전개하며 동시에 주 1회 상경투쟁을 조직했다. 상경투쟁단은 2박3일에서 4박5일 일정으로 서울무역부, 채권단을 압박하는 투쟁과 비정규직 장기투쟁사업장 투쟁에 실천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고 느끼고 직접 부대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동자 의식을 고취시켜갔다. 실제로 노동조합 대오 450명 전원이 이 같은 상경투쟁을 2회 이상 함께 하면서 현장토론의 수준을 급상승시켜냈다.

▷ 용역깡패와 구사대에 대한 철퇴
회사는 3월11일 토요일 저녁을 기해 용역깡패 140명과 구사대 100명을 동원하여 공장을 점거하였다. 노동조합은 이 같은 상황에 최대한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당시 조합에는 3명 정도의 간부뿐이었다. 회사는 용역깡패를 동원해 정문과 노동조합을 통제하고 공장 내 노동조합의 투쟁시설들을 철거해 들어갔다. 그러나 긴급 가동한 조합원 소집에 1시간 이내에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공장에 진입하였고 결국 관리자들과 용역깡패들은 사무실에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어들거나 공장 밖으로 밀려 투석전을 전개하다가 조합원들에게 철저하게 심판을 받고 전원 공장에서 퇴거하였다.
이날은 긴장감과 자신감이 공장을 휩쓸었으며, 노동조합의 거품조직을 완전히 구분 짖고 제거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한 날이었다.

▷ 초유의 자본파업, 그리고 자본의 떠돌이 생활 : 한국합섬 구조조정 싸움의 대 전환점
드러난 회사의 문건에 의하면 용역깡패 투입 목적은 ‘노동조합의 폭력성 증거(쇠파이프, 신나 등)들을 확보하고, 그리고 노동조합 대오를 정문에서 차단하고 가동 중단된 일부 기계를 구사대를 동원해서 가동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동조합의 마지막 고공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싸이로 탱크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잘라내는 등 회사는 노동조합이 깡패들에게 몰려 피신할 곳을 사전에 차단하기까지 했다. 용역투입으로 완전히 노동조합을 누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후부터 모든 상황은 회사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회사는 구사대들과 함께 출근하지 않았다. 공장을 세우기 전까지 노동조합은 수 차례 출근할 것과 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처를 요구했으나 어떠한 업무지시도 없었다. 그만큼 회사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원료가 바닥나기 직전 현장에 전화로 가동중단을 지시했으나, 노동조합은 정확한 업무지시를 요구했고 결국 3월 15일부로 가동이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4월20일 사상초유로 자본이 결의대회를 갖고 공장으로 들어올 때까지 구미지역 외곽지역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구사대만의 별도 단합대회 등 모임을 가졌다.
노동조합은 회사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하고 구사대 모임 및 세미나 등에 최소의 인원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러한 대응은 실제로 구사대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고, 집에서 노-사간 대립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으로 이끌거나 최소한 구사대가 되지 않게 만들었다.

▷ 관리자 및 구사대 압박
노동조합은 구사대 및 관리자들을 상대로 가정방문을 하고 진정으로 회사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내고 더불어 회장 및 핵심 관리자에게는 집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직접적인 타격투쟁을 병행하였다. 특히 노-사간 물리적인 충돌에 구사대가 직접적으로 참가한다면 구사대와 노동조합은 이후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것이며 나아가 노-사간 해결지점에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바로 구사대문제가 될 것임을 인식시켰다.
무엇보다 노-사간 힘의 균형에서 노동조합이 공장을 사수해 내는 등 우위를 점하고 관리자와 구사대들이 밖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3월11일 용역깡패 투입 실패는 시간이 갈수록 회사측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조조정 초기 노동조합 현장에 심리적인 위축이 있었다면 3월11일 이후 오히려 구사대와 회사가 심리적인 압박을 크게 느끼게 되었고, 실제로 구사대들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즉 구사대들 중 상당수는 “회사 편에 있기는 하겠으나, 물리력 행사 등 구사대로 활동시킨다면 사표를 던지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3월11일 이후에는 노동조합 투쟁대오에서는 전혀 이탈자가 없었으나 오히려 구사대 중 희망퇴직자가 계속적으로 발생했다.

▷ 관공서에 대한 압박
4월20일 회사는 실제 노사간에 아무리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공장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 따라서 회사는 조금이라도 한국합섬에 관계된 업체라면 인원동원을 요청했고 500명 이상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부와 경찰이었다. 자본이 파업한 3월11일 이후 노동조합은 곧바로 노동부에 직장폐쇄에 대한 질의를 하였고 노동부는 쟁의행위에 있지 않다면 직장폐쇄 요건에 있지 않음을 회신해 왔다. 그리고 3월21일 회사의 직장폐쇄에 대해 지방노동위원회는 이를 반려시켰다. 더불어 노동부는 한국합섬의 공장가동 중단은 노동조합의 파업에 의한 것이 아니며 재가동은 회사 의지의 문제이지 노동조합의 점거를 이유로 재가동하지 않는 것은 노조무력화에 의도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특히 회사가 업무방해에 대한 각각의 내용들에 대해 업무방해가처분을 신청했으나 투쟁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점인 4월17일 김천지법이 노동조합의 공장 내 출입과 생활, 그리고 욕설, 비방 및 선전활동 금지를 기각함으로서 회사는 모든 명분을 잃게 된다.
또한 3월11일 이후 경찰서에 대한 압박에도 온 힘을 다했다. 회사의 용역경비 동원이 신고제라 할지라도 의도자체가 노조무력화가 분명한 만큼, 그리고 경비업무를 벗어난 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은 극렬하게 대항할 것이며, 유혈사태는 필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폭력사태를 충분히 예견하고 있는 경찰도 그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경찰로 하여금 “용역경비(계약직) 동원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한다면 폭력교사 및 방조죄를 적용할 것이다”는 입장을 회사에 통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특히 자본이 500여명으로 공장을 침탈하고자한 4월20일에는 경찰병력이 회장을 필두로 한 회사측을 우선 통제하면서 노동조합이 사원임을 입증하는 사람만을 선별해서 공장에 진입시켰다. 이 같은 상황에 빠지자 관리직 사원 70여명을 뺀다면 실제 구사대중 경찰병력을 통과하고 공장에 들어온 인원은 십 수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차마 공장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나서게 만들어 사태를 크게 부각시킴
회사가 공장 청소를 하기 위해 진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후, 노동조합은 즉각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기자회견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또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함께 구미 노동부 및 경찰서를 방문하며 한국합섬 사태를 더욱 크게 확산시켜 냈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부와 경찰, 언론을 움직였고 결국 용역깡패 투입을 사전에 차단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합섬노동조합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연대투쟁, 정치세력화 투쟁의 중심에서 지역을 책임져 온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곧은 노동운동정신으로 가고자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 선전 대립에서의 승리
구조조정의 시작은 바로 회사의 선전전의 시작과 함께 했다. 유인물을 자주 발행하지 않던 회사가 선전활동을 강화하면서 그 내용 또한 그동안 화섬동향과 현장소식 위주였던 것들이,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을 타깃으로 하는 내용으로 바뀌면서 갈등을 촉발시켰다. 발행주기도 점차 많아지면서 업무방해, 징계,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 굵직한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유인물 내용대로 상황이 실제로 진행된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었다. 이렇게 회사는 자신들의 소식지 내용대로 상황이 그대로 진행된다는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협박의 표현을 점점 노골화하였고 실제 현장의 심리적인 위축으로까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 또한 즉각 소식지 발행주기를 앞당기고 속보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회사의 부당성과 노동조합의 정당성, 투쟁성을 부각시켜내고 그리고 회사의 행보를 앞서서 짚어냄으로서 집행부의 판단과 대응에 조합원들이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더불어 대시민선전전을 출퇴근 시간에 맞춰 매일같이 전개했으며, 조합원 가정통신문, 소식지 전달, 관리자와 구사대 가정에 대한 선전까지 확대해 나갔다.
또한 관공서 및 민주노총 산하단체, 민주노동당 등에 인터넷 홍보를 계속하면서 한국합섬 투쟁을 알려내고, 심지어 가장 중요했던 4월 20일 사측의 결의대회의 부당성을 한겨레신문, 매일노동뉴스 등 일간지에 신속하게 광고하였다. 이것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기자회견과 함께 사태를 크게 부각시키고 사측의 결의대회를 자괴감이 들 정도 수준으로 전락시켜 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

결국 회사에게 남은 것은 구사대와 법적인 조치뿐이다. 그러나 구사대는 물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수준이라 회사가 더 이상 기댈 수가 없다. 회사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무기는 고작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 형사고발 뿐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2월13일 정리해고를 신고 받고 4월말인 지금까지 폭력사태를 최소화하면서 조사 진행을 늦추어갔고 단 한 명의 간부도 수배되지 않게 했다. 투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유리한 싸움을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폭력으로 불리하게 끌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황이 밀려나는 국면이었으면 선택의 여지없이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3월11일 이후 공장가동이 전면 중단되었지만 우리는 법적으로 임금을 받아낼 수 있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지 않고 자본이 파업을 한 특수한 상황전개로 노동부에서조차 휴업으로 인정하고 있고, 직장폐쇄까지도 반려된 것이다. 그러는 한편 2006년 임단협 협상은 21차까지 진행 중이다. 물론 단 한 차례도 사측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은 쟁의찬반투표를 가결한 상황에서 줄기차게 교섭을 진행해 왔다. 이를 통해 별도로 총파업투쟁의 합법성을 준비해 간 것이다. 정리해고 투쟁은 언제나 처절한 장면뿐이었다. 그러나 한국합섬에 처절한 모습은 없다. 투쟁하는 조합원과 연대동지들이 함께 웃으면서 싸우고 있으며, 공권력, 용역깡패, 구사대에 대한 부담을 완전히 벗어 던진 것이다. 회사는 노동조합의 정리해고, 손배가압류, 형사고발 등의 철회를 전제로 한 노사대화 요구에 마지막 남을 명분이라며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만 이미 그 기세는 죽어가고 있다. 구조조정에 끝이 있을 수 없으나, 또한 노동자들이 싸우기에 따라 승리한다는 자신감들이 현장에 팽배하다.

노동조합이 걸어 온 길

노동조합은 결국 조합원의 단결투쟁이 담보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그동안 노동조합 집행부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투쟁을 전개해 왔다. 민주노총의 투쟁, 정치세력화의 투쟁, 연대투쟁에 가능한 최대한 결합해 왔다. 물론 간부 위주의 투쟁이 잦았고 투쟁의 피로도도 없지는 않았으나 현장에는 활동가들이 있었다. 끝없이 학습하고 실천하는 현장 활동가들의 존재는 노동조합의 흔들림을 견제해 왔으며 단점을 지양하고 장점에 장점을 더한 집행부의 발전된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노동조합의 신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순수한 운동성을 끊임없는 실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의 힘이 그 어떤 집행부가 들어서더라도 이어졌고 집행간부의 학습을 보이지 않게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활동가들의 깊이와 주변의 동지들이 많아졌고 그 진정성이 유지되었다. 이 같은 힘이 초기 민주노조를 건설했던 간부들 대부분이 구사대로 돌변했지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흔들림 없이 투쟁해 갈 수 있게 하였다.

앞으로의 길

한국합섬노동조합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자본과 노동자와의 투쟁은 끝이 없는 것이고, 이번 구조조정 투쟁에 있어 정리해고를 분쇄할 수 있을지언정 구조조정을 완전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위기에 빠진 현실 속에서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만 머무르는 투쟁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노동자는 투쟁 속에서 10년 이상을 교육해도 생기지 않을 노동자 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 자본을 상대로 투쟁을 어떻게 싸워왔냐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스스로 얼마만큼 노동자 의식으로 무장하는 과정으로 만들어 갔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투쟁을 계기로 현장의 움직임을 역동성 있게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지역노동운동을 하나로 묶어내고, 역시 지역의 비정규직 투쟁을 책임지는 지역조직으로 거듭나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한국합섬노동조합은 향후 지역운동을 이끄는 시선으로 지금의 구조조정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구조조정 투쟁에 있어 승리 여부는 정리해고 분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5년, 10년 후 한국합섬노동조합의 모습 속에 있다.
주제어
노동
태그
경제위기 임금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