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0.68호
첨부파일
68_오늘여성_정지현.hwp

서비스노동에 대한 생각

정지현 | 회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을 청탁받고 약간 심란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고민이 완결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시작으로 나의 고민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 고민을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글이 두서가 없더라도 차근히 읽어주길 바라면서 글을 시작해 본다.

나는 어떤 고객인가?

실제 우리는 많은 곳에서 서비스노동을 받는다. 밥을 먹으로 간 식당에서, 술을 먹으로 간 술집에서, 가끔은 가전제품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하는 전화 상담서비스 등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노동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순간순간 고민이 든다. 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각종 금융상품을 판매하려는 전화가 올 때도 그렇다. 전화한 텔레마케터에게 짜증을 낼 수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그 얘기를 다 듣고 있기도 갑갑하고. 텔레마케터의 노동현실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제가 지금 회의 중이라 통화를 할 수 없습니다,’라거나 ‘저는 그 상품이 필요 없는 데요’ 라고 미안한 듯 얘기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면서도 찝찝함이 남는다.
식당이나 술집에서도 그렇다. 어쩌다 활동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때 친구들은 그런 문제를 따지고 든다.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왜 불친절까지 받아야 하는가? 내가 내는 돈에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참으로 난감해지는 상황이다. 합리적으로(?) 따진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과연 그 상품에 서비스 비용까지 포함되는 것이 맞는가하는 생각이 남는다.

KTX 승무원 투쟁, 그리고 서비스노동

벌써 7개월이 넘게 파업 투쟁하는 KTX 승무원들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공개적인 글에는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만큼 여러 생각이 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심산인데, 뭐랄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탄 외국항공기에는 아줌마 승무원도 많았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한국의 항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는 늘 존재하지만, 한국과 같이 외모 지상주의가 심하고 여성의 노동에 심하게 섹슈얼리티를 붙여서 판매(?)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자꾸 그런 식으로 구성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서비스노동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 항공기에 승무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비상시 발생할 안전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젊고 예쁘고 화장을 해야 하고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안전문제를 항상 체크하고 있어야 한다. KTX 승무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 여성들을 자꾸만 예쁘게 포장하려고 하니, 사람들도 이 여성노동자들이 할 일 없이 웃고만 있는 존재인줄 안다. 실제 KTX 승무원 파업 투쟁 동안 KTX 승무원 없이 타보니 불편한 것도 없는데 아예 없애라는 네티즌들의 말도 있었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기묘한 논리가 네티즌들에게 먹힌 것이다.
승무원만이 아니다. 제조업을 제외하고는 간병, 유통 등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많은 부문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친절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이 친절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막 화를 낸다. 내가 내는 비용에 친절이 들어있는 거라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들이 노동의 권리를 얘기하면 그 노동은 그다지 중요한 노동이 아니라고 폄하한다.
활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서비스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눈요기 거리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2000년 롯데호텔 파업 당시 잘 차려입은(?) 여성조합원들이 집회에 나올 때마다 실실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KTX 승무원 투쟁 때도 그렇다. KTX 승무원들이 집회에 나오면 좋다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녀들의 집회 때 차림새를 흠 잡으며 투쟁성이 없느니, 주체적이지 못하느니 뭐라고들 해댄다.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노동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노동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입장도 달랐고, 그 근거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쉽게 정리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서비스노동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노동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는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난감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서비스노동이 늘어나고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노동을 더욱 서비스노동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여성의 서비스노동은 가사노동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더욱 저임금과 차별적인 처우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도 속 시원히 풀리는 문제가 없다.
당장 고민은 그거다. 당장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식당에 가서 불친절했을 때, 전화상담원이 전화를 했을 때, 비행기든 KTX든 승무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네티즌들의 글을 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럼 거기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여성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얘기하고 생존권을 얘기할 때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투쟁하는 여성노동자에게 화장하고 나오지 말라고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이니 ‘국민여러분, 친절을 강요하지 마십시오.’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일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주제어
노동 여성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