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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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1.69호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이산, 2005

류주형 | 조직교육부장
윌리엄 맥닐은 『전쟁의 세계사』(William H. McNeill, The Pursuit of Power, The University of Chicago, 1982)에서 전쟁의 상업화·산업화라는 맥락에 따라 세계사를 구성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쟁의 상업화·산업화는 인간의 시장 지향적 행동과 군사적 행위의 역사적 결합 패턴에 다르지 않은데, 이에 따라 발생하는 무기체계의 진화와 군비경쟁의 역학은 세계 헤게모니의 이행과 국가 간의 정치·경제적 세력관계를 변화시키는 주요인이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설정은 이행이라는 역사적 계기에서 국가간체계의 변화가 갖는 절대적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경제주의적 설명과 구분되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서양의 흥륭에 선행하는 비서양의 몰락의 원인을 ‘시장경제’와 ‘명령경제’라는 모호한 개념을 통해 논증하려는 것은 인식상의 큰 공백이다. 유럽 세계경제의 형성과 중상주의적 팽창을 ‘화력격차’라는 단순 요인으로 환원하는 것도 한계점이다. 그밖에도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기원을 ‘인구압박’과 같은 통계적 분석에서 추출한다거나 제국주의 상쟁 과정에서 미국의 부상에 대한 설명을 결여하고 있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방대한 사료와 상세한 설명을 통해 전쟁과 군사체계가 인류사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조밀하게 기술함으로써, 정치·경제·지정학·문명·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연관성을 진지하게 사고하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일부 논지를 보충하면서 저자의 설명에 따라 전쟁의 세계사를 재구성하자.

전쟁의 상업화의 초기 국면

1만여 년 전 신석기혁명과 농업혁명에 의해 수렵·채취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이행한 인류는 잉여생산물 축적과 함께 청동기 문명에 따라 부족연맹을 거쳐 고대국가를 형성한다. 인접한 부족·부족연맹이나 도시국가와의 전쟁을 위해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처음 도입된 청동제 무기는 군대의 관료적 조직화를 야기했다. 기원전 1800년경 바퀴의 개량과 합성궁의 개발을 통해 고도의 기술과 비용을 결합한 이륜전차의 등장은 군사엘리트의 권력 강화를 의미한다. 기원전 1400년경 값싸고 구하기 쉬운 철제 무기가 보급되면서 고대전쟁은 범속화된다. 이어 기원전 1000년 이후 중동 일대를 지배한 아시리아는 상비군제도를 강화하고 조세수입을 확대하는 한편 군대의 표준화와 문관에 의한 병참·보급의 관리를 시도했다. 이들에 의해 창안된 기마 전투술은 기원전 7세기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의 대규모 약탈 원정으로 이어져 후대 몽골 제국에 이르기까지 약 2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일대를 지배하게 된다. 이 시기 유라시아에서는 기마혁명을 바탕으로 한 스텝 유목민(nomad)과 세계제국 간의 전쟁이 기본 구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 초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송과 보급으로서, 전쟁의 상업화가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1000년경 세계제국 송과 이슬람 사이의 무역혁명에 즈음해서였다. 수·당에 의한 중국의 통일과 이슬람의 흥륭에 이은 11세기 송의 눈부신 성장은 금납제로의 이행과 제철업과 상업의 발전, 지폐 유통의 확대와 농산물 생산성 급증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숭유정책과 중농주의에 기반을 둔 송의 문관 관료제는 상인자본과 군부를 억압했다.
원에 의해 일시적으로 완화된 상업과 군사의 동맹은 15세기 초 정화 제독의 함대가 정치적·상업적 목적 하에 시도했던 인도양 원정(1405~33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남송 건국기 수군의 전통을 기초로 건조된 명의 보선함대는 그 규모와 기술면에서 공히 바스코 다 가마나 콜럼버스, 마젤란 시대에 비해 우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조는 제국 통치의 내적 비용 문제로 인해 원정함대 파견을 중단한데 이어 새로운 외양선의 건조를 금하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쇄국정책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이로써 중국은 상·공업에서 유럽의 기술적 성과를 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어떠한 영속적 변화도 낳지 못한 채 내부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유럽 세계경제의 형성과 군사의 상업화

중국에서 촉발된 중세 무역혁명은 11세기 이후 지중해까지 전파되었고,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기점으로 유럽은 대서양에서 인도양,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교역망에 합류하게 된다. 12세기경 경제활동이 전문화되면서 상인 권력이 대두하게 되자 농업에 근간을 두고 현물세와 관습법에 의해 지지되는 기사·평민 간의 봉건적 위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실제 전쟁에서도 기사전술의 우위가 약화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이에 상인들은 독자적 무장력을 갖추거나 후원 군벌을 매수해야 했는데, 무역과 약탈이 혼재된 유럽 상인의 성격은 과거 바이킹이나 미케네의 전통으로 소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11~12세기 라틴계 유럽의 경제적·군사적 형세 변화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의 이탈리아 분할을 야기하여 도시국가들의 세력균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북부 이탈리아 상인들은 고국 방위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결과 12~13세기 북부 이탈리아 도시의 민병대는 용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조직화된 폭력의 상업화라고 할 만한 이 현상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두드려졌다. 상업과 용병제의 결합은 15세기 이후 용병대장과 특정도시가 장기 제휴를 맺게 됨으로써 안정화되었다. 군사의 상업화는 인원과 장비의 표준화를 야기하여 15세기 전반에는 일부 도시국가에서 병력의 규모와 능력이 미리 정해진 정규 상비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효과적인 징세, 채권 발행에 의한 자금조달, 숙련된 전문가에 의한 군사 운영을 통해 도시 내부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조직화된 폭력에 따르는 불안정성을 외교·군사적 영역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농업·상업·제조업이 발달했고 이는 또다시 군대 유지를 위한 징세의 기반을 확대했다. 군상복합체 간의 계약을 처음으로 정규화한 베네치아는 준(準)상비군적인 지상군 운용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던 반면 피렌체나 제노바처럼 효과적인 군대 행정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들은 간헐적인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13~15세기 봉건적 수취 제도와 국가 및 교회의 위기를 배경으로 유럽에서는 자본주의의 원형적 요소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라시아에서 팽창하던 몽골제국의 갑작스런 붕괴를 기화로 이전부터 원격지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유럽의 상인들은 그 세력권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했다. 스페인과 제노바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 세계경제는 그 존속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 냈고 이렇게 형성된 자기 지속적인 순환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힘과 부를 일찍이 다른 문명이 이룩한 것보다 훨씬 신장시켰다. 특히 군사의 상업화와 함께 군비경쟁이 전역에서 추진되면서 유럽은 여타지역에 비해 월등한 화력격차를 지니게 되었다. 공성포와 축성술이 보급되고, 중포(重砲)를 탑재한 군함이 발달하면서 이제 유럽의 지배영역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지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아메리카 정복을 계기로 원격지무역을 둘러싼 경쟁에서 포르투갈을 추월한 스페인은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는 은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육성했다. 이처럼 16세기 유럽의 해상강국이 보유한 해군력은 대부분 준사기업적 성격을 갖는 상선으로서 군사와 상업의 강력한 유착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네덜란드와 두 개의 전쟁을 치름으로써 유럽 내부에서 제국을 건설하려던 스페인의 야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군사력이 비슷한 유럽 국가 상호간의 영토 전쟁은 군비의 출혈적 지출을 가져왔고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실시된 중과세 정책은 지역민의 담세능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방위비용의 증대에 따른 생존위기가 지역민과 병사의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금융·상업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전되었고 펠리페 2세도 결국 재정적으로 파산했다.
16세기 종교전쟁과 17세기 초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상업화된 대규모 폭력의 참화를 겪은 유럽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을 기점으로 세력균형의 시대로 접어든다. 신로마제국의 패배와 네덜란드의 독립을 상징하는 베스트팔렌 체계는 국제법에 의해 민족적 주권(국왕의 권리)과 상업·금융·종교의 자유(소유자의 권리)를 승인함으로써 유럽에서 근대적 국가간체계를 형성했다. 한편 기독교적 원리에 따라 ‘정전(正戰) 원칙’(The doctrine of the just war)이 제안되는데, 이는 전쟁법에 관한 후대 법사상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나 정전원칙은 세속권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유럽대륙 안팎에서 정복활동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
17세기 이후 전쟁은 세금징수 능력과 재정부담 능력이 있는 중앙 집중화된 정치권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점차 유럽형 절대국가의 출현으로 현실화되었다. ‘30년 전쟁’을 기화로 유럽 절대왕정이 도입한 상비군 제도는 훈련과 무기체계의 표준화는 물론 모병제에 기초한 장기복무와 재입대를 추진함으로써 내부의 강력한 유대감을 수반하는 일종의 전문화된 인위적 공동체가 되었다. 강력한 상비군과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대서양 통제권을 둘러싼 경합을 시작했다. 18세기에 전개된 정주식민지, 자본주의적 노예제, 경제적 민족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와 영토주의의 새로운 종합은 민족국가와 동시에 민족경제를 형성함으로써 상업 및 금융에서 네덜란드의 우위에 도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한 유럽 국가들 간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지만, 결국 국가간 세력균형에 따라 각국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인도양 연안의 항구와 역내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로 조정되었다. 이런 국지적 무역독점은 국지적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유사시에는 본국에서 증원군으로 파견된 함대의 지원을 받아 제국의 해외 거점을 보호하고 확장했다. 절대왕정의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은 근대적으로 훈련된 군사력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군사기술혁명

한편 프랑스는 영국과의 ‘7년 전쟁’(1756~63년) 패배를 기점으로 세기말 격변기에 이르기까지 근대적인 군사기술혁신을 추진한다. 5만이 넘는 부대를 전술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던 야전상의 한계, 장기 원정에서 보급의 문제, 인사나 전술논쟁을 둘러싼 조직적·전술적 한계 등이 근대 전쟁의 제약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과 도시에서 급증하는 인구의 대다수를 군대와 전쟁을 유지하고 지원하기 위한 수동적인 납세자 역할에 한정하는 것은 결국 전쟁의 규모와 강도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프랑스 육군은 지도 제작, 지휘조직의 개혁, 참모부의 육성, 사단 단위 편재 등을 통해 야전의 효율적 규모에 관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실제로 전장에서의 효과적인 통제 없이 단지 수적으로 우세할 뿐이었다면 프랑스 혁명군은 1793년 국민총동원령에 의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보급 면의 제약을 타개하기 위해 18세기 후반기에 유럽에서는 도로와 운하 건설에 전례 없는 자본이 투입되었다. 징병과 인사, 전술에 관련된 군사행정적 측면에서도 관료제적 합리성이 부가되어 광범위한 변화가 수반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육군은 대포 설계 및 포술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함으로써 기술적 개혁이 군대 조직 및 훈련의 전반적인 합리화와 병행되는, 즉 공권력에 의해 조직되고 지원되는 ‘계획적 발명’을 현실화했다.
특히 프랑스혁명 말미 국내 반혁명세력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공격에 직면한 국민공회는 1793년 국민개병제와 국민총동원령을 공포함으로써 나폴레옹의 전쟁의 기초를 확립한다. 왕립조병창을 중심으로 대규모 무기생산을 위해 전국적인 산업동원이 이뤄지고 군량 확보와 빈민 구호를 위해 곡물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에 상한선을 두는 ‘최고가격법’이 시행된다. 1793년경 육군 규모가 65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국민방위군은 구체제 정규군과 부르주아 의용병으로 구성된 혁명군에 더해 실업·半실업자까지 포괄하여 재편된다. 18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에서 지속된 인구증가는 동원 강화에 부응하는 조건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혁명적 열의와 수적 우위에 신속한 행군, 전략적 집중, 공격적인 전술을 결합시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클라우제비츠가 분석 대상으로 삼는 국민전쟁 또는 전면전으로서, 국가-인민-군대라는 삼각 통일체에 수행되는 근대 전쟁은 이전의 왕조전쟁·내각전쟁 또는 국지전과 판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자유무역 제국주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8세기 후반 인구 압박에 직면한 영국은 노동력 급증과 국내시장의 확대라는 조건에 신기술을 접목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신기술을 도입하면 가격이 낮아지고, 가격이 낮아지면 시장이 확대되고, 시장이 확대되면 생산규모가 커지고, 생산규모가 커지면 고용이 확대되는 선순환이 창출되었다. 사실 이러한 선순환은 영국이 비유럽지역으로 확장되는 제국주의적 팽창전략에 따라 이미 생산비용의 내부화를 실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세계 전역을 저가의 원료 공급지로 포섭하고 이에 따라 본국에서는 생산 활동을 자본의 통제에 종속시켜 낮은 생산비용으로 상품을 만들어 이런 외부의 원료 공급지에 판매하는 세계적 상업망이 산업혁명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면공업의 기계화에 따른 원료 및 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의 토착면공업을 파괴하고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건설했다. 이에 따라 인도에 대한 무역흑자를 토대로 런던의 고도금융이 형성되었고 인도의 과잉인구는 제국 군대로 조직되었다. 영국 해군은 영란은행을 통해 전쟁비용을 효과적으로 조달하는 한편 청부계약을 통해 민간 시장을 자극했고, 전국적 상업망의 확대는 해군의 군비지출로 피드백되었다. 1793~1815년 對프랑스 전쟁 시기에 영국의 군수품 수요는 산업혁명을 촉진하는 동시에 산업발전의 향방을 결정했다. 또 인클로져가 가장 빈번했던 시기는 19세기 초 15년 동안이었는데, 농촌의 실업·半실업 노동자는 징집령에 따라 입대하거나 빈민법에 의해 규제되거나 군수품 수요의 자극에 힘입어 민간 경제 안에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과두적 귀족 정치 내로 포섭되었다.

프로이센의 군사개혁과 전쟁의 산업화

나폴레옹의 패퇴와 빈 체제의 성립 이후 각국 정부는 1793~1815년 프랑스 병사들의 혁명적 열기와 1813~14년 프로이센 민병대의 민족주의적 열정이 역으로 정부에 도전할 힘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국민개병제도에 따라 무장한 인민은 불경하게도 사회의 심연에서 통치자를 위협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815년 이후 사반세기 동안 군사 경영의 구체제적 패턴은 살아남았다. 대다수 국가는 훨씬 더 철저하게 구체제의 원리로 돌아갔고, 유독 프로이센에서만 1806년의 군사적 붕괴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 개혁이 일어났다. 빌헬름3세는 장교 육성 과정을 혁신했고 특히 대참모본부가 창설을 계기로 기술이나 병참에 관한 전문지식을 계발했다. 또 프로이센 육군은 평화 시에도 예비군(Landwehr) 제도를 근간으로 보편적인 병역의무라는 이상을 지켜 나갔다.
1840년대 이후 프로이센의 육군과 프랑스·영국의 해군은 ‘전쟁의 산업화’ 패턴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패턴은 1850년대 크림전쟁(1854~56년)을 계기로 민간의 공학기술을 군사문제의 모든 면에 적용하면서부터 가속화되어, 1880년대에 이르면 군사 공학기술이 민간의 공학기술을 선도할 정도였다. 증기선·철도·전보통신의 발전은 군사력의 하부구조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또 후장식 소총, 개틀링 기관총, 포함, 기관총, 정밀한 대포와 같은 새로운 전쟁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총기제조업에도 대량생산 기술이 적용되었고 이후 무기체계와 군사체계의 변화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서구와 여타 지역 간의 화력격차는 더욱 확대되어 유럽 열강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발휘했다. 이에 따라 1878년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 그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증가할 정도로 제국주의적 권력이 강화되었다.
1880년대 이후 민간 무기제조업체와 국영 조병창의 기술 격차가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의 정부는 독일의 크루프, 영국의 암스트롱/엘스위크, 휘트워스, 프랑스의 슈네데르 크뢰조 등 민간 무기업체들과 밀접한 제휴관계를 맺게 되었다. 군산복합체의 출현과 제국주의적 팽창, 전지구적 통신·운송 기반시설의 발전에 따라 1860년대 이후 세계적인 수준에서 무기혁신과 군비경쟁이 야기됐고 이는 세계적인 군사화를 야기했다.

영국 헤게모니의 위기와 제국주의 간 경쟁의 격화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한계를 의미하는 1873~96년의 대불황은 영국 헤게모니의 위기와 함께 제국주의간 경쟁의 격화를 불러왔다. 생산의 팽창에서 한계에 다다른 영국 자본주의는 1890년대에 이르러 대불황의 효과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고도금융을 중심으로 미국과 독일, 여타의 신흥국가와 비유럽 식민지에 자본수출과 해외투자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금융자본은 경합국들 사이의 무력경쟁의 자금줄이 되었고, 독일과 미국은 각각 독점화와 법인화라는 상이하고도 새로운 물질적 확장을 기획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서 부상하고 있었다. 먼로주의와 원주민 제거를 통해 대륙적 규모의 시장을 확보하고 구대륙과 분리된 ‘섬나라’로서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해 급속도로 부상 중이던 미국, 보호무역과 수입대체형 공업화를 통해 민족경제를 형성한 독일, ‘청년장교파’를 중심으로 해군력 강화 계획을 수립한 프랑스는 영국의 전략적 안전보장을 위협했다.
특히 영국의 산업 전략을 모방해 급속한 따라잡기 전략을 추구했던 독일에서는 거대한 고정자본과 높은 유기적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산재부문이 집중적으로 성장했다. 거대한 규모의 생산설비는 국가와 은행의 지원을 받았고, 카르텔과 트러스트에 의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적 규모의 거대화는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이는 프러시아 이래 지속되어온 독일의 팽창주의적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비스마르크의 국가독점적 부국강병책을 통해 독일은 대규모 징집, 고비용 무장, 중앙집권화된 지휘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영토주의적 제국주의를 지향했다.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쟁은 지속적인 군비경쟁을 낳았고, 이는 결국 제국주의 전쟁으로의 경향을 창출했다. 먼저 영국은 불황과 안보 위기에 대응하여 정부와 민간기업 간의 무기 조달계약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이윤을 회복하는 동시에 영국의 국제적 지위를 재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일례로 1889년의 해군방위법에서 제시된 ‘2개국 함대주의’란 영국의 해군력이 언제나 영국 다음의 2개국의 해군력 이상이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게다가 1880년대 이후 해군본부는 민간기업의 기술혁신에 따르는 비용, 즉 엄청난 개발비와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관제 기술개발’로써 사실상 보장해주고 있었다. 이처럼 국수주의, 정략적 이해관계, 대중의 호전적 분위기가 결합되어 민간 무기업체나 제강업, 조선업의 이해를 증진하고 있었다. 군비경쟁에 따른 이윤율 회복으로 영국 자본주의는 다시 ‘좋은 시절’을 맞이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경이적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이에 맞서 독일도 대대적인 군함 건조와 육군 확대 계획에 착수했다. 이는 독일 함대가 영국의 해군력 우위를 위협하면 영국이 세계강국으로서 독일의 지위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위험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1893년~1914년 사이에 수립된 슐리펜 계획은 이른바 두 개의 전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군사 동원을 완료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프랑스를 제압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초기에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완벽한 군비 태세를 갖춰야 했고, 따라서 관·군·민의 일체적 전시 동원 체계가 부단히 강화되어야 했다.

양차 세계대전과 전쟁의 세계적 확산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교착상태가 장기화되자 모든 교전국은 전쟁의 효율을 향상시키고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후방의 생산 활동을 재조직화해야 했다. 업종과 무관하게 모든 기업이 새로운 생산방법을 채택하여 군수물자를 생산했고 정계·금융계·재계와 연계한 혁신적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확보했다. 관제 발명과 대량생산기술, 군산복합체가 일반화하여 전쟁의 산업화가 극대화된 것이다.
또 정부관료, 기업관료, 노동조합관료는 전시 동원 체제 속에서 긴밀히 제휴하여 민간인에 대한 과두 지배와 효율적 통제를 확대했다. 전쟁 과정에서 총력 동원, 즉 ‘불가능한’ 군사목표에 입각하여 민간부문을 동원하는 국가의 병영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따라 전쟁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 도처에 산재한 전략적 요충지들이 개전 초기부터 분쟁에 휩쓸렸고 산업화가 현대전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활용 가능한 모든 산업적·기술적·인적·자연적 자원의 민족적·초민족적 동원이 요구되었다.
한편 레닌은 이와 같이 제국주의적 전쟁을 계기로 출현하는 국가자본주의적 경향, 즉 국가 전체가 마치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조달하는 ‘단일 회사’로 전화되는 상황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경제적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며 ‘제국주의 전쟁의 혁명적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슬로건을 제창한다. 아울러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에 연루된 피지배계급의 민주주의적 반역과 식민지 민중의 민족자결의 요구가 부후성·기생성·퇴행성을 본질로 하는 제국주의적 수탈·착취의 모순과 해후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전후 영국은 독일에게 전쟁 비용의 배상을 강제하면서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재건하려고 시도했지만 유럽 각국 화폐의 불안정성은 고도금융의 투기화를 야기했고 이는 1920년대 내내 물질적 확장을 지속하던 미국까지 파급됐다. 결국 1929년 뉴욕 증권시장의 붕괴에 따른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서 1931년 파운드의 금태환이 유예되고 고도금융에 의해 유지되던 자유무역 제국주의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전간기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은 세계적인 군비경쟁을 강화했고 그 수준은 1차 대전 이전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1930년대 불황기에도 무기 수출은 일반적인 수출보다 훨씬 완만하게 감소했으며 회복 속도도 훨씬 빨랐다. 특히 전간기 동안 세계적인 무기제조방식의 재편과 국제카르텔의 증가가 결합되어 무기생산사업의 초민족화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1930년대의 대불황과 막대한 전비 배상 압력에 시달리던 독일은 2차 대전을 도발함으로써 소련을 격퇴하고 나아가 미국 식 ‘국내 제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2차 대전 중에는 기존의 군산복합체에 현대 과학기술이 합류하여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기존 무기의 개량과 신무기 개발이 추진됐고 그 결과물인 레이더, 제트기, 로켓은 가공할 파괴력을 과시했다. 무엇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무기는 2차 대전의 종전이 아닌 핵전쟁으로 상징되는 ‘3차 대전’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었다. 또 2차 대전 중 국제적인 수준에서 전시협력경제제도와 연합사령부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냉전 이후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공식적·반영구적·지역적·다자간 동맹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냉전과 ‘공포의 균형’ - 인류 절멸의 위기 도래

일종의 ‘세계정부’로서 국제연합(UN)의 구성에 의해 소련을 포함하는 ‘하나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로저벨트의 이상론은 중국혁명(1949년)을 전후로 해서 소련과 중국을 봉쇄하고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세계’를 방어한다는 트루먼의 현실론으로 수정되었다. 냉전 질서는 마샬플랜을 통한 유럽의 분할과 한국전쟁을 통한 아시아의 분단으로 현실화됐다. 미소 양국을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와 같은 군사동맹체계는 가맹국을 특정한 집단방위조약으로 구속한다는 점에서 국가안보체계와 국가주권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변화시켰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시작된 미소 양국의 핵-군비 경쟁은 1949년 소련의 원자폭탄 폭발 실험, 1952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1962년 쿠바 미사일 기지 사건 등 단계적으로 고조되었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호 발사 성공이 야기한 ‘미사일 격차’는 1960년 미국 대선의 쟁점이 될 정도로 미국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으며 1961년 민주당 정권은 ‘지구에서든 달에서든 로켓 기술에서 소련을 앞지르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군산학복합체를 출현시켜 핵-군비 경쟁을 가속화시켰으며 미항공우주국(NASA)을 중심으로 외기권과 해저공간조차 군사적 목적으로 식민화하기 시작했다. ‘공포의 균형’은 양 진영의 민간인, 즉 전인류와 문명을 상대로 한 ‘상호확증파괴전략(MAD)’ 하에서 성립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은 1955년 반둥회의 이후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표방한 비동맹운동에 대응하여 지정학적 쇼케이스에서 반공과 근대화, 안보와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진영 간 경쟁을 시작했다. 또 미국은 쿠바혁명을 계기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하게 출현한 혁명적 민족해방운동에 대응하여 ‘진보를 위한 동맹’을 제창, 초민족 자본에 종속된 발전을 이식하는 한편 반혁명적/예방혁명적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1968년 이후 베트남 전쟁 비용의 급증은 국제수지 및 재정지출의 대규모 적자와 달러의 약세를 야기함으로써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위기에 빠트렸다. 1970년대 제3세계 국가, 특히 중동 산유국의 군비 증가율은 강대국들의 증가율을 넘어섰는데, 이는 무기 거래를 통해 오일 달러를 환류시킴으로써 위기에 빠진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회복하려는 미국의 목적이 개입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수십 년 동안 군비지출이 20세기 전반부에 비해 가히 놀라울 정도로 증가했으며, 이와 동시에 무기생산과 연구·개발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미국의 경우, 2차 대전 후 군비지출은 거의 지속적으로 GDP의 5%에 달했는데, 그 이전에는 결코 1%를 넘지 않았다. 2차 대전 후 기술연구와 무기생산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산복합체가 중심부 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뿌리를 내렸으며, 군사기술 프로그램들은 민간산업의 기술혁신을 위한 매개로 인식되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레이건 정부의 ‘별들의 전쟁(SDI)’을 계기로 새롭게 부활한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는 핵-군비 경쟁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2차 냉전’이 절정에 달한 1980년대 중반 전세계 군비지출은 연간 1조 달러에 육박할 정도였다. 미국의 군비 증강 시도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핵-군비 경쟁 철회와 자기 해체를 가져왔지만, 이중적자를 미증유의 규모로 확대시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과 함께 신흥공업국의 외채위기를 야기했다.

새로운 세기의 전쟁에 대한 전망 - 전쟁의 역사와 그 교훈

냉전의 해소와 함께 미증유의 규모로 개시된 자본의 범지구적 확장은 2차 대전 이후 유지되어온 국가간체계의 심대한 변형을 초래하여, ‘공포의 불균형’, 심지어 신중세적 무질서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전쟁의 세기를 창출하고 있다.
소련과 동유럽의 와해는 핵·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확산시켰고,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후 현실화된 제3세계에 대한 내부적 배제 경향은 인종·종교 간 갈등의 형태를 띠는 지역분쟁을 폭발시켰다. 제3세계에서 전형적인 ‘새로운 전쟁’은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지원이 삭감 또는 철회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상당수의 국가들에서 국가구조 자체가 붕괴하면서 더 이상 ‘국가-이하’ 형태로 나타나는 갈등을 봉합할 수 없는 위기가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세계 난민 숫자는 1975년 240만에서 1995년 1440만으로 증가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광물자원 개발 이익을 무기 구매로 환류시키는 약탈경제가 빈번히 자행되고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유무역지대에 반대하는 세력을 마약-테러집단으로 범죄화하여 소탕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을 위시한 중심부 국가들이 제시하는 세계적 통치성이란, 결국 전략적 이해에 따라 군사적 개입을 선별화함으로써 배제 또는 ‘대중학살’을 방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20세기 전반기 전쟁 희생자의 85~95%가 군인이었던 반면, 1990년대 후반에는 전쟁 희생자의 80%가 민간인이다). 또 미국의 군사교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안정성을 침해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해 군사적 보복, 심지어 예방적 선제공격을 천명함으로써 무한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 수행중인 테러와의 전쟁은 ‘정권 교체’라는 군사적 목표와 ‘민족형성’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괴리되어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네트워크 중심 전쟁’으로 상징되는 현대전은 극소수 테크노크라트에 의해 수행되고 전쟁에 연루되는 대중 동원의 폭에 있어서는 훨씬 제한적이므로 전쟁에 대한 인민의 정치적 통제의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과거 ‘30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양차 대전 등 헤게모니 이행 과정에서 전개되는 세계 전쟁은 세계적 무질서의 전조이자 구 헤게모니 질서의 종국적인 붕괴의 신호였다. 헤게모니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국가 및 사회집단이 출현하거나 기존의 질서가 포용할 수 없는 요구가 등장했고, 몰락하는 헤게모니 국가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잔존하는 권력을 재강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단 현재 미국이 보유한 군사력에 필적할만한 세계적 군사강국이 출현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도 금융세계화 이후 세계의 자본은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따라서 과거와 같이 상쟁하는 중심부 국가 간의 경합이 군사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 그러나 해외로부터 막대한 양의 소득을 흡수하는 반면 성장을 위해 거대한 규모의 국내외 신용 및 부채에 의존해왔던 미국 경제는 이중적자를 비롯한 대외불균형의 심화 속에서 당혹스러운 형세에 처해있다. 최근 ‘북핵 위기’를 비롯하여 중동과 서남아시아 등 지역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핵-군비 경쟁, 세계 도처에서 발호하는 테러리즘은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과정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역사의 나쁜 방향에 직면하여, 인류는 전쟁과 군사체계에 대한 인민의 민주적 통제라는 과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조직화된 폭력의 국가 독점이 인민의 안녕을 보증할 것이라는 지배적 통념을 개조함으로써 평화와 민주주의에 관한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전쟁의 조건을 변혁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절멸의 위기를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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