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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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다국적 제약기업이 제3세계를 병들게 한다

이덕희 | 민중의료연합
보건의료분야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한다는 것

의사 파업을 둘러싼 소위 의료정책 전문가들의 농담 중에는 '이번 사태로 얻은 수확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의사들이 보건의료문제에 최초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라는 안타까운 말이 있다. 이번 사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둘러싼 정권과 소자본가의 격돌이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던 한편, 전문적인 내용을 갈고 닦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김영삼정부 이래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신약개발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은 중·고등학생들에게조차 '인류의 고통을 덜어줄 신약' 개발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본규모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기존의 다국적 제약기업과 같은 연구결과를 기대하는 게 무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오히려 그 동안의 후보물질 개발이 경이로운 현상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우리나라의 제약기업이 신약후보물질을 개발하는 일이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전세계적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반면 세계 의약품시장 10위에 들 정도로 의약품 소비는 늘어가면서, 이를 통한 이윤유출은 우리 국민의 질병구조가 점차 서구화됨에 따라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 신약개발이라는 과학적 명제가, 이미 현실 세계에서는 다국적 제약기업과 이를 후원하는 정치권력의 공조로 인해 제3세계 국가의 민중에게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는 정치적 명제로 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소개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야기는 보건의료분야의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중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세계에서 HIV(Human Immuno-difficiency Virus) 감염자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나라이다. 최소한 성인의 16%, 임산부의 20%가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며 심지어 군인의 45%가 감염자라고 한다. AIDS를 비롯한 모든 질병은 유전적, 생물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중들이 그동안 겪어왔던 많은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AIDS는 인종문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데, HIV에 감염된 후 AIDS 발병으로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대부분 흑인이라는 점이다. 인종차별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은 건강문제에도 뿌리깊게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AIDS와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국민의 건강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계급적 차이를 줄이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건부는 그 동안 서구처럼 치료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보건의료전달체계를 지역사회에 기초를 둔 일차의료중심체계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공의료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재원부족이었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생산하여 판매하는 의약품에 지불하는 막대한 돈이 주요인이었던 것이다. 만델라 정부의 보건정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구래의 정책과 제도를 깨뜨리고 민중의 이해를 실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저항과 세계은행이 파견한 자문위원들의 신자유주의적 '조언'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유한 백인은 이미 대부분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반면 흑인은 민간보험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것도 큰 문제였다.


아프리카를 둘러싼 다국적 제약기업들의 횡포

1999년 만델라 정부의 보건부장관은 공개적으로, 예산부족 때문에 HIV 양성반응을 보이는 임산부에게 '지도부딘'을 투여하지 못해 연간 3만명의 목숨을 잃고 있다고 밝혔다. AZT가 감염전파를 막는 데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논쟁이 오고갔지만, 사실 논쟁의 밑바닥에 깔린 것은 재원조달 문제였다. 지도부딘은 미국의 한 정부연구기관(NIH)가 개발하고 글락소웰컴이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는 AZT의 상품명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지도부딘을 한달간 투여하는 데 드는 돈은 당시 약 240 달러였는데, 똑같은 성분의 인도산 제품은 48달러에 불과했다.

글락소웰컴은 만델라 정부가 실시하는 시범사업에 쓸 지도부딘에 대해서만큼은 원래 약값의 70-85%를 깎아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만델라 정부는 이를 거부하는 대신 <의약품과 관련물질 관리를 위한 개정법>안을 내놓았다. 이 법은 의사가 처방한 다국적 기업의 약(Original)을 약사가 다른 회사가 제조한 약(Copy)으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하고, 약가결정위원회를 구성하며, 다량의 약을 구입할 때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보너스와 리베이트를 금하는 등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 필수의약품목록(Essential Drug List)를 제정하여 질병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약품을, 모든 공공병원과 공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 및 공공기관과 연계를 맺고있는 민간의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 질병의 약 90-95%는 이 필수의약품목록에 올라있는 약품만으로도 대처할 수 있다(WHO).
새로운 법에 따르면 정부는 필수의약품을 가장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도록 병행수입을 보장했다. 그리고 국제법상 건강상 위급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특허 소유권자의 승인없이 보방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강제 실시권)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랠프 네이더(Ralph Nader)에 따르면 이 조치는 "생산원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미국에서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는 의약품 가격을 70-95% 낮출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의약품연구 및 생산자협회(PhRMA)는 대변인을 통해 남아프리카가 도둑질을 하고있다고 비난했다. "남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분명 다른 방법이 있다. 경제학적인 문제는 경제학으로 풀어야 한다. 도둑질이 문제해결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97년 중반에는 법 조항을 고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보건부장관에게 로비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40개 남아프리카 및 국제적인 제약기업은 새로운 법안이 공포되기 직전에 남아프리카 고등법원에 제소하는 것으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명목은 새로운 법률이 1978년에 제정된 특허법을 어기고 지적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98년부터 국제제약산업연합, 특히 미국에 근거를 둔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압력을 넣었는데 결국 미국 백악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미국의 거대 제약기업은 정치적 로비를 통해 미국의 대외정책 및 무역 정책을 바꾸도록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이 사건과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ade in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협상이 의약품에 대해 20년간의 특허를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병행수입(parellel importing)'과 '강제실시권(compulsory licensing)'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도 여러 분야에서 강제실시권에 관한 조항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입법하려 했던 <의약품과 관련물질 관리를 위한 개정법>은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특허법 테두리 안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강제실시권을 주장하려고 했던 AZT 등 두가지 약은 미국 기업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는 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다국적 기업을 비호하는 미국의 정치권력

앨 고어와 빌 브래들리 사이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전에도 제약기업이 끼어있었다. 브래들리가 선전하고 있던 뉴저지는 거대 제약기업의 연구소와 본사가 모여있는 것으로 유명한 주이다. 고어는 바로 이런 점에서 제약기업으로부터의 선거자금 모금과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제약산업연합의 정치적 로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표 1 참고).



그런데 미국 국내에서도 의약품 가격상승으로 인해 의료비 증가의 압력이 높아지자, 캐나다, 멕시코,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동일한 약품을 병행수입하도록 허용하는 법률이 입안되면서 고어는 꽤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고어는 AIDS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의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AIDS 환자를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제약기업의 이윤을 보장하여, 치료약물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을 방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의료의 아파르트헤이트를 거부한다', '고어의 탐욕이 사람을 죽인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치료약을!' 등의 구호를 내세웠고 심지어 워싱턴 포스트에서조차 고어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1999년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각축전에는 바로 이와 같이, 아프리카 민중의 목숨과 이를 위협하는 제약기업의 이윤에 얽힌 기막힌 얘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전 글락소웰컴이 그동안 16 달러에 판매되던 지도부딘의 가격을 2달러로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아프리카 민중의 건강을 생각하는 듯한 몸짓이지만 사실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판매 전략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연구소에서도 AZT를 생산하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고, 오히려 경쟁이 치열해지면 가격이 떨어지니까 생산확대를 꺼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격인하 조치는, 독점이윤 추구가 위협받게 되자 이윤을 줄이는 대신 시장점유를 공고하게 하여 장기적인 이윤추구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얼마전 만델라가 '지구상에서 신자유주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했던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곧바로 민중의 이해를 실현하는 것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보건의료는 다른 국가정책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인 노선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시장중심, 소비자 부담, 계층간 차별 등은 궁극적으로는 건강상의 차이로 드러나게 되며, 경제 영역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결국 민중의 생명을 위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아프리카 민중의 고통이 가르쳐주는 교훈

전세계적으로 의약품 시장을 매출액 기준으로 살펴보면 미국이 3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럽 29.0%, 일본 15.9%, 중남미 7.7%, 아시아 9.1%, 캐나다 1.6% 등이다. 매출액만 기준으로 말하면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전세계 의약품의 80%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신약개발을 보면 1975년부터 1994년 개발된 약의 45%는 미국이, 14%는 영국이, 그 밖에 기타 국가는 6%에 불과한 약을 개발하였고 스위스, 독일 등 유럽 국가와 일본이 나머지를 비교적 고르게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전세계적으로 의약품 생산과 소비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마다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의 구조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소위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현재 다국적 제약기업은 선진국의 일부 계층을 위한 약을 개발하고 생산·판매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뿐이며 신약개발도 질병 치료 자체의 목표보다 이윤을 중심으로 고려하고 있다. 전세계 인구가 질병으로 인해 지는 부담을 지수화하면 이중 폐렴, 결핵, 설사, 말라리아 등이 차지하는 비율이 2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질병의 치료약이나 예방백신 등의 개발과 치료법 개발 등에 투자되는 돈은 전체 보건의료분야에 투입되는 돈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1992년을 기준으로 추계하면 한해에 약 56억달러가 보건의료분야의 연구비로 쓰이는데 이중 제3 세계 민중의 건강에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돈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제약기업이 신약개발을 앞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치료약물은 다국적 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무역기구와의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상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국민이 부담해야 할 의료비도 변하게 될 것이다.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서 협상에 임하는 관점이 무척 중요하다. 남아프리카 민중의 고통은 민중의 입장에 서지 않았을 경우 우리에게 벌어질 사태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국적 제약기업의 폭력에 맞서는 국제적인 민중의 연대를 시도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에서, 아프리카 민중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1. Global Forum for Health Research, 『The 10/90 Report on health Research 2000』, 2000
2. Bond P., Globalization, Pharmaceutical Pricing and South African Health Policy: Managing Confrontation with U. S. Firms and Politicians,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 29(4), 1999
주제어
국제 보건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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