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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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추위, 너의 정체를 까발려주마!

장귀연 | 편집위원, 서울대사회학과 박사과정
결추위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원에 '오○○ 결추위'라는 조직(?)이 있다. 구성원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위원장은 있지만 자주 바뀐다. 조직 체계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도대체 이 오○○ 결추위는 어떤 조직일까? 오○○를 수괴로 하는 지하 혁명조직인가? 무언가를 결사추진하기 위한 위원회인가?
정답은 '오○○ 결혼추진위원회'이다. 오○○는 나의 대학원 선배로서 37살이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추위는 그의 대학원 후배들이 결성한 것이다.
이런 결추위는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상적인 결혼 연령이 지났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결추위가 존재한다. 그런 사람이 있는 직장, 단체, 모임에는 거의 예외없이 결추위가 결성된다. 모르긴 몰라도 오 선배 역시 여러 개의 결추위를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동문회에서, 그가 나가는 연구단체에서, 친척·친구들 사이에서 말이다.
장난이라고? 물론이다. 장난이고 농담이다. 그러나 많은 장난이 그렇듯이, 장난 속에는 폭력이 감추어져 있다.


성인(成人)이 못된 사람

오 선배의 결추위 얘기가 나온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술자리에서였다.

"아니, 선배님, 정말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어린 후배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오 선배,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나의 친구가 대신 말을 받는다.
"에이, 선배, 올해는 가야지. 내년 되면 시간도 별로 없잖아. 결추위라도 구성해서 확실히 보내드려야겠네요."
"그래, 그럼 네가 위원장 해라."

이렇게 시작된 결추위 얘기는 그날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중심주제였다. 오 선배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는, 왜 그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을까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실연의 상처라는 루머에서 원래 관심이 없는 순결주의자라는 설까지……. 오 선배, 자리를 떴어도 귀가 좀 간지러웠을 거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한 (결혼한) 선배의 집에서 오 선배를 포함한 여러 명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를 초대한 선배는 식탁을 차리느라고 바빴고 주방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던 몇 명이 일어나서 도왔다. 열두어 명이나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식탁차림을 돕는 사람들은 모두 결혼한 사람들이었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 그러니까 대체로 좀 어린 사람들이었다. 그걸 두고 다시 중구난방 떠드는 소리.

"야, 역시 어른들이 다르구나."
"원래 얼라들은 앉아서 받아먹는 법이야."
"(앉아있는 오 선배를 향해) 근데 형은 왜 여기 앉아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선배도 빨리 어른 되어야지. 애들 팀에 끼어서 이게 뭡니까?"

오 선배, 신문을 보느라고 대답을 안 한다.
우리나라에서 성인(成人)의 기준은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이다.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결혼을 하면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성인으로 대우받았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여전히 애 취급을 받았다. 결혼식이 곧 성인식이었다. 형식적으로 관례라는 성인식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부의 양반 가문에서만 치루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혼인날짜가 결정되면 그 얼마 전에 관례를 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결혼=성인. 이 등식은 정말 유구한 전통을 빛내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서 면면히 우리 가슴 속에 흐르고 있다.
그 날 저녁식사 후 담소의 자리에서도 주제는 다시 오 선배의 결추위로 돌아왔다. 결혼에 성공(!)한 사람들 몇 명이 오 선배를 카운셀링해 주겠다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놓는다. 다른 사람들의 연애담을 듣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자신의 연애담을 풀어놓는 사람은 신이 난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 끼어드는 추임새.

"오 선배, 필기해요, 필기."
"그렇게 하면 성공한다니까."
"형, 외우고 있지요?"
"아무래도 결추위 위원장은 결혼 성공한 사람이 해야 될 것 같아."
"아니야, 자문관이어야지."

결혼 안한 오 선배는 연애담을 듣는 흥을 돋궈주는 양념 역할을 한다.
오 선배가 그 자리에서 기분이 나빴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다시 말하지만, 오 선배는 서른일곱살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 자체가 내세울만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거기에 있던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고 공부도 오래 했으며, 최소한 자기 일을 결정하고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충분한 성인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것은 그가 아직 이루지 못한 일로 간주되고, 그 점에서 그는 어린 아이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충고와 자문을 들어서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오 선배는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혼하기가 싫을 수도 있고 또는 얼마 후에 결혼할 수도 있다. 나는 오 선배에 대해서는 모른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결추위를 둘러싼 전제들, 폭력들, 이데올로기들이다.



미혼? 독신?

몇 년 동안은 친구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고 주말마다 바빴고 지금은 후배들의 청첩장이 속속 날아들어온다. 나도 소위 결혼 적령기를 약간 지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결혼하셨어요? 아니면 미혼이세요?"
미혼(未婚)? 미(未)자는 아직 미자다. 즉 미혼이란 '아직 결혼을 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결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전제다. 미전향과 비전향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미전향은 언젠가 전향을 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며 조선일보에서는 열심히 미전향 장기수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미혼이냐는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표현할 말 자체가 없다. 독신? 독신(獨身)은 고독한 몸이라는 뜻인데….

나는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고독하지 않다. 만약 존재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라면, 근원적인 수준에서 고독하지 않은 몸이 어디 있겠는가? 또는 독신이 가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 경험한 일화 하나.

상대 : 결혼 하셨어요?
나 : 아니오.
상대 : (약간 불편한 듯) 그럼 남자 친구는 있으세요?
나 : 네.
상대 : (안도한 듯) 아, 그럼 식은 언제 올리시나요?
나 : 네? 뭐라고요? (황당! 당황!)
이 대화 속에 깔려있는 전제는 이렇다. 모든 사람은 결혼한다. 결혼 '못하는' 사람만 빼놓고.


결추위, 너의 정체를 까발려 주마!

왜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그대로 보아주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결혼하는 사람에게 왜 결혼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런데 통상적인 결혼 연령이 지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많이 있을 수 있다. 마땅한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 것이긴 하되 연기할 개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헤어진 옛 애인을 못 잊어서일 수도 있고, 혼자 사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결혼에 대해 적극적인 신경을 쓰기가 귀찮아서일 수도 있고, 또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타기해야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사람은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다. 이런저런 삶의 길들을 택하기 마련이다. 왜 그렇게 사냐고 묻는 것은 그 삶의 방식이 비정상이고 따라서 교정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함축한다.
이렇게 보면 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그대로 보아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명확해진다. 결혼함은 정상이고 결혼하지 않음은 비정상이다. 정상이란 것은 다수의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고 기존 체계의 재생산에 순기능적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지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왠지 불편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삶의 방식은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 체계의 재생산 방식에 거스르는 것이며 따라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디 결혼에 대해서만 그러한가?
고정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왜 직업을 갖지 않느냐고 묻고 안정된 직장을 잡으라고 촉구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게는 언제 아이를 낳을 거냐고 묻는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고정된 직업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는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일한 방식으로만 재생산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변화고 발전이고 진보고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 가치관, 같은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보는 것, 그럼으로써 전체 사회가 재생산되고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전체주의적 관점이라고 한다.

자, 이제 결추위라는 이 유령조직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결추위, 그것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우리 내부를 떠도는 파시즘의 유령, 그것이 바로 결추위의 정체다. 노처녀의 히스테리적 과민반응이라고?
미안하지만, 나는 늙지도 않았고 처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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