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민주를 위한 연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진보는 진행형이다. 항상 과정에 있는 것이다. 보수가 성립한 후에 진보가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봉건적 지배를 변혁시키던 격정적 시대에도 진보는 새싹을 틔우며 자라고, 악랄한 식민지 지배가 횡행하는 제국주의시대에도, 극우반동이 폭력의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에도, 그 암흑을 걷어내는 힘으로 진보가 항상 추구되었다. 그 진보는 언제나 민중의 힘에 의하여 정의가 추구되는 과정에서 그 방향을 찾고 이상을 그려내고 모습을 갖추는 과정에서 전진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격정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조용한 큰 강물 줄기 흐르듯 하였다.
진보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하던 때도 있었고, 물질적 발전만을 담보하는 듯한 담론의 형태도 있었다. 공화국의 자주독립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이상도 내포하고 있기도 하였다.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사회주의적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20세기를 지나오면서 평화를 내세운 반목과 억압과 전쟁의 그림자를 깊게 드리우기도 하였고 19세기 끊임없는 물질적 발전을 진보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생활의 기반이 되는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 모든 질곡과 모순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의 집약적 시기 - 그 20세기에 집적되고 집중되는 것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은 20세기를 인류문명에 적극적인 차원에서 기여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인류에게 재앙을 뿌리는 제국주의와 세계체제적 모순의 집약적 표현인 분단을 몸으로 감당하면서 인류에게 역으로 경고를 나타내는 징후를 몸소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 세계 거대자본들은 사회주의국가체제 몰락 이후 지구를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한다. 다자간 투자협정을 그들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삼아서 지구촌 어느 한 사람, 어느 동네, 그 앞과 뒤의 동산과 냇물 하나도 빠짐없이 이윤을 증식시키는 상품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것이 없이. 그리고 그 지구촌 곳곳에 환경을 파괴하고 총과 칼이 부딪치는 전쟁을 일구어 내지 않는 곳이 없다. 투자의 이름으로, 인류애의 이름으로 힁행하는 자본과 무기의 투여는 인간을 자연과 상생하는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는 커녕, 실업자와 불안전취업자로, 신체와 정신이 불구가 되는 사이보그 인간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 모순은 한반도 남쪽 한국에도 재벌지배구조로, 이를 유착시켜온 ‘파시스트’ 지배체제로 일관되게 20세기 후반을 지새게 하고 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습속이 만들어저 왔다. 0X처럼 사람들을 판단하고 편가르기 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지식으로 사지선다형에서 정답만을 추구한다. 빨갱이를 가려내어야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지역을 찾는다. 학벌을 가른다. 한 핏줄인 듯 행세한다. 이러한 습속은 상상력을 키우지 못한다. 창의력이 살아나오지 못한다. 서로 소통을 하고 속삭이고 정감을 나누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꿈도 이야기하고 그 꿈을 키우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접속이 이루어저야 소통이 이루질 것이다. 모순을 많이 담지하고 있는 사람은 절망이 많은 동시에 그 절망을 이겨갈 소망을 절실히 키운다. 우리는 오랜 역사에서 민중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고 오늘날 한국에는 민주노동운동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이 민주노동운동은 전세계적으로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은 노동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에는 인간의 전반적 힘과 동기와 지각과 충동과 이상이 모두 엉켜있기 때문에 가족과 남녀와 노소의 세대와 신분과, 그리고 먹는 것, 입는 것, 소비와 여가, 즐기는 것과 자연과 환경과, 죽음과 종교,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삶을 이루듯 거기에 중첩되어 있고 여기에 지배와 복종, 주인과 노예와 같은 관계조차 한가지 축을 이루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는 여기 인간의 삶에 얽힌 모든 결에 새로운 짜임을 찾아 가는 길이다.
여기 [진보를 위한 접속- 준비호 1호]를 간행함에 있어서 “사회진보연대”가 인간의 삶의 구성에서 각자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갖가지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접속과 소통 그리고 연대를 통해 어우려지는 자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산골짜기 골짜기 마다 흘러내려오는 냇물이 샛강을 이루고 이것이 모여서 큰 강이 되듯이, 이 간행물이 진보의 큰 강줄기에 샛강의 물이 정화(淨化)되어 흘러들어 오도록 구실을 다하고자 한다.
진보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하던 때도 있었고, 물질적 발전만을 담보하는 듯한 담론의 형태도 있었다. 공화국의 자주독립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이상도 내포하고 있기도 하였다.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사회주의적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20세기를 지나오면서 평화를 내세운 반목과 억압과 전쟁의 그림자를 깊게 드리우기도 하였고 19세기 끊임없는 물질적 발전을 진보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생활의 기반이 되는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 모든 질곡과 모순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의 집약적 시기 - 그 20세기에 집적되고 집중되는 것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은 20세기를 인류문명에 적극적인 차원에서 기여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인류에게 재앙을 뿌리는 제국주의와 세계체제적 모순의 집약적 표현인 분단을 몸으로 감당하면서 인류에게 역으로 경고를 나타내는 징후를 몸소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 세계 거대자본들은 사회주의국가체제 몰락 이후 지구를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한다. 다자간 투자협정을 그들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삼아서 지구촌 어느 한 사람, 어느 동네, 그 앞과 뒤의 동산과 냇물 하나도 빠짐없이 이윤을 증식시키는 상품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것이 없이. 그리고 그 지구촌 곳곳에 환경을 파괴하고 총과 칼이 부딪치는 전쟁을 일구어 내지 않는 곳이 없다. 투자의 이름으로, 인류애의 이름으로 힁행하는 자본과 무기의 투여는 인간을 자연과 상생하는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는 커녕, 실업자와 불안전취업자로, 신체와 정신이 불구가 되는 사이보그 인간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 모순은 한반도 남쪽 한국에도 재벌지배구조로, 이를 유착시켜온 ‘파시스트’ 지배체제로 일관되게 20세기 후반을 지새게 하고 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습속이 만들어저 왔다. 0X처럼 사람들을 판단하고 편가르기 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지식으로 사지선다형에서 정답만을 추구한다. 빨갱이를 가려내어야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지역을 찾는다. 학벌을 가른다. 한 핏줄인 듯 행세한다. 이러한 습속은 상상력을 키우지 못한다. 창의력이 살아나오지 못한다. 서로 소통을 하고 속삭이고 정감을 나누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꿈도 이야기하고 그 꿈을 키우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접속이 이루어저야 소통이 이루질 것이다. 모순을 많이 담지하고 있는 사람은 절망이 많은 동시에 그 절망을 이겨갈 소망을 절실히 키운다. 우리는 오랜 역사에서 민중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고 오늘날 한국에는 민주노동운동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이 민주노동운동은 전세계적으로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은 노동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에는 인간의 전반적 힘과 동기와 지각과 충동과 이상이 모두 엉켜있기 때문에 가족과 남녀와 노소의 세대와 신분과, 그리고 먹는 것, 입는 것, 소비와 여가, 즐기는 것과 자연과 환경과, 죽음과 종교,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삶을 이루듯 거기에 중첩되어 있고 여기에 지배와 복종, 주인과 노예와 같은 관계조차 한가지 축을 이루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는 여기 인간의 삶에 얽힌 모든 결에 새로운 짜임을 찾아 가는 길이다.
여기 [진보를 위한 접속- 준비호 1호]를 간행함에 있어서 “사회진보연대”가 인간의 삶의 구성에서 각자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갖가지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접속과 소통 그리고 연대를 통해 어우려지는 자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산골짜기 골짜기 마다 흘러내려오는 냇물이 샛강을 이루고 이것이 모여서 큰 강이 되듯이, 이 간행물이 진보의 큰 강줄기에 샛강의 물이 정화(淨化)되어 흘러들어 오도록 구실을 다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