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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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질서확립법', 정면 승부를 해야 할 때이다

장여경 |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실장
'건전'을 지키기 위해 보안이 필요하다니!

혹자는 이 법을 가르켜 '통신국가보안법'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 법이 '한국판 통신품위법'이라고 말한다. '정보통신망이용촉진등에관한법률' 개정안에 대한 이야기다. 이 법은 아예 법률명을 '개인정보보호및건전한정보통신질서확립등에관한법률'로 바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통신질서확립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법률안이 '통신질서확립법'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단지 약칭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법률안이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목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전체 조항의 대부분은 소위 '건전한 정보통신질서의 확립'에 할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 질서 확립'이라는 말은 결코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 말이 섬뜩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왜곡된 근대화 과정과 군사 정권의 모토에서 되풀이되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건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될 때, 특정 집단의 세계관과 윤리를 절대시하면서 다른 세계관과 윤리를 수렴하고 탄압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건전'이라는 말 아래 수많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법률에서도 '건전한 정보통신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장치를 두고 있다.

첫째,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장관은 통신상의 어떤 표현에 대하여 불법으로 '간주'하여 처리할 수 있다. 여기서 '처리'라는 것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장관이 통신사업자에게 불법으로 '간주'된 정보를 삭제하거나(제28조) 취급을 거부하도록(제29조) 명령할 수 있다. 어떤 정보가 현행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불법 정보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법권의 영역임을 간주할 때 이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준사법권을 수행하겠다는 말이 된다.

둘째, 이러한 '처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이 법은 사업자가 자기 통신망에 제공되는 정보의 내용을 사실상 모두 '인지'한 것으로 간주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으며(제36조) 각 사업장에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조치를 처리하는 '불법정보처리자'(제37조)를 두도록 했을 뿐 아니라 소속공무원이 사업장에 출입하여 업무상황·장부 또는 서류 등을 조사(제65조)하도록 하였다. 이는 사실상 사업자로 하여금 일상적인 검열을 수행하도록 강제하여 통신상의 표현을 위축시킬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합헌적인 표현물에 대한 위축적 효과를 초래하게 될 우려'가 있는지의 여부를 위헌여부판단의 기준으로 채용하고 있다.

셋째, 이 법안의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에 대한 것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내년부터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시행된다. 인터넷 내용 등급제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터넷의 내용을 등급화하고 가정, 학교나 도서관에서 특정 등급 이상의 내용은 청소년이 보지 못하도록 기술적으로 선별차단(filtering)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구상이 등급의 기준을 만들고, 판단하고, 부과하는 모든 권한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부과함으로써 등급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검열이 되고 말았다. 이 법률안 제30조와 제31조에 따르면 '청소년 유해 정보'에만 인터넷 내용 등급제를 강제하고 나머지는 정보제작자의 '자율 등급'에 맡기겠다고 하고 있지만, '청소년 유해 정보'의 판단 기준이 매우 모호한 현행 법률 하에서 이는 사실상 대부분의 인터넷 내용물에 등급을 부과하겠다는 말이다. 특히 제작자에 의해 스스로 매겨진 '자율 등급'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의해 적정성 여부가 판단되고 그 등급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 기준에 맞출 때까지 서비스를 거부하도록 하고 있어, '자율 등급'이라는 말을 무색케 한다. 특히 실행 계획에 따르면 글이나 그림에 대한 등급의 적정성 판단을 일차적으로 기계(로봇)가 수행하도록 하여 무분별하고 포괄적인 차단, 즉 검열을 예감할 수 있다.


언제까지 국가가 일일이 결정하고 규제할 것인가?

무엇보다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실질적인 청소년 보호의 효과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언제까지 청소년 보호의 논리로 권력의 '매체 통제'가 정당화되어야 할까? 정보가 범람하는 시기에 청소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스스로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리터러시(literacy) 교육이다. 제도 교육의 실패가 공공연히 지적되고 개방적 성교육이 호소력을 갖는 시대에, 청소년이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언제까지 국가가 결정할 것인가.
매번 표현의 자유 시비를 일으키며 무리하게 추진되는 이런 시도들은 사실상 청소년 보호보다는 기술적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손쉬워진 '매체 통제'를 집행하는데 그 본래 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다. "군대는 그냥 놔두면 적을 만들어 전쟁을 하려 하고, 권력은 그냥 놔두면 법을 만들어 규제를 하려" 하는 법이다.

특히 청소년 뿐 아니라 일반 연구자도 드나드는 도서관에 선별차단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겠다는 발상(제34조)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학교에 선별차단 소프트웨어를 설치할지의 유무도 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강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학교장 혹은 학교운영위원회 등의 자치 기구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선별차단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인터넷 내용 등급제는 여러 나라에서 정부와 사회단체들 간에 계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프라이버시권정보센터(EPIC: Electronic Privacy Information Center)에서는 "… 아동들이 유용하고 적절한 정보에 광범위하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선별차단 프로그램들은 궁극적으로는 인터넷의 교육적 가치를 말소시킬 것이다 … 불건전자료의 이용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다 보면 인터넷이 청소년에게 매우 훌륭한 자원이라는 핵심 지점이 간과되고 말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게다가 준비에만 총 15억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시행되면 사회적 비용이 계속 증가할 텐데, 이는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전가될 것이다. 따라서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와 준비 없이는 '청소년 보호' 명목으로 인터넷 내용 등급제의 시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넷째, 이 법안의 '불순한' 목적을 더욱 의심케 하는 대목은 수사기관에 대한 정보 제공 의무에 관한 규정들이다. 기존의 전기통신사업법 제54조는 수사 기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업자가 보유하고 있는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질서확립법'에서는 이를 보다 강화하여 이용자의 개인 정보, 로그 기록, 채팅 등 이용기록, 인터넷 방송 내용을 사업자가 언제나 기록하고 있다가 수사 기관이 요청할 경우 별다른 사유가 없으면 영장이 없어도 '반드시'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제24조, 제38조, 제48조, 제52조). 게다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불량이용자의 개인정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사업자들에게 제공하도록 하고 있는 점(제39조)은 본 법률의 취지인 개인정보보호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겠다.
이렇게 이용자와 이용자의 행위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불법 정보'를 금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이용자를 컴퓨터 범죄 혐의자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용자의 권리와 익명권을 침해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의 침묵은 결국 권력에 힘을 보탠 것

이 밖에도 일부 개인정보보호 관련 규정이 사업자의 이해에 맞게 개악되고 정보통신부 산하에 각종 분쟁조정위원회를 두도록 하는 등, 이 법안의 문제점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법안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 설득력이다. '개인정보 보호', '청소년 보호', '범죄 방지', '통신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이 권력에 의한 일상적인 네트워크 검열과 감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귀결은 사회운동진영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최근 연일 계속되는 조선일보의 '위험한 온라인' 논리는 사실 그간 우리에게도 먹혀들었던 논리가 아닌가. 우리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우리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다른 사람의 비판과 표현은 불편해하지 않았는가. 몇년째 우리 주변을 은근히 잠식해 온 '청소년 보호 논리'에 대해서, 화제가 불편하기 때문에 혹은 우리 스스로 '건전한 사회'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승복했기 때문에 방조하지는 않았는가. 개인정보 침해나 온라인 성폭력 등에 대해서도 몰이해하고 무능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청소년 보호 논리'는 이미 '청소년 보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또한 온라인만이 문제가 아니다. 분명히 '질서확립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용자와 정보제공자에는 여러 사회단체들이 당사자로 포함된다. 결국 우리의 침묵은 국가 권력, 그리고 통신사업자로 대표되는 자본에 의한 전반적인 매체 통제 논리에 힘을 보탰다.


정면승부를 준비해야 할 때!

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로서는 매우 다급하다. 정보통신매체에 대한 통제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근거 법률이 되고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가 지난해 헌법 소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법률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리기도 전인 7월 12일, 대통령이 주재하는 제5차 정보화전략회의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인터넷 내용 등급 시행을 골자로 하는 '획기적' 법률을 마련했다고 발표하는 등 언론 플레이부터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내년 시행을 목표로 올 9월 정기국회 때 통과시키기 위하여 강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0일 법률안 공청회를 즈음해 YMCA나 여성단체연합과 같은 청소년·여성단체,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를 비롯한 노동단체, 그리고 진보네트워크센터나 피스넷(PeaceNet)과 같은 정보단체를 망라한 27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긴 했지만, 이 법률안을 폐기하기까지 앞으로의 행로가 험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면 승부가 멀지 않았다.


※관련 홈페이지 http://networker.jinbo.net/free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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