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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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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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수교 협상을 통해 본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전략

한승동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편집자 주)
2000년 8월23일자 한겨레신문 특파원리포트에서 한승동 기자는 한국의 교전국 지위상실(더불어 이를 인정하고 만 한일국교정상)로 인한 민족의 비애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이는 북일 수교과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과 그에 기반한 일본의 지배전략-혹은 지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북일 수교를 둘러싸고 야기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전략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독자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 편집부는 이 문제에 대해 한승동 기자에게 질의했습니다.
이하는 한승동 도쿄특파원이 보내준 답변입니다. 본 글을 통해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 하에서 일본이 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많은 것을 시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아무 사심없이 원고를 보내주신 한승동 기자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한국의 지위

샌프란시스코조약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애초 이 조약에서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승국 지위를 갖도록 되어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일 양국은 일제 패망으로 끝난 태평양전쟁을 청산하고 이후 양국관계를 새롭게 설정한 이 조약을 1951년 말에 체결했고 1952년부터 발효시켰습니다. 당시 이미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그 조약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었지만, 미국 지배 아래 있던 남쪽만이라도 전승국 지위를 부여받았더라면 이후 역사는 제법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진행중인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도 교전국끼리의 전후처리 및 강화조약 체결형식이 됐을 겁니다. 당연히 일본은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청구권이니 경제협력이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교전국에 대한 전쟁배상을 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양국관계를 새로 확정하는 강화조약, 또는 평화조약을 맺는 형식이 됐겠지요. 물론 이전의 한일 국교정상화도 모양이 상당히 달라졌겠지요.


미국의 전후 대일 정책과 한국/재일동포의 지위

당초 미국은 분명히 1949년 12월에 작성된 초안에 한국을 전승국으로 명기했다가(최근 기밀해제된 미 국립공문서관 보관자료들에 따르면 1953년 아이젠하워 정권기에 국무장관에 발탁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국 조약초안담당 특사-국무부 고문-가 그렇게 명기했음)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총리 등의 요구로 그것을 삭제합니다. 덜레스는 1951년 7월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에게 그 사실을 통보합니다. 거기에 대해 양 대사는 강력하게 항의하지만, 이미 일은 미국 일방의 결정으로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쪽은 그때 한국을 전승국에 포함시켜서는 안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재일동포들의 지위문제를 들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전승국 국민이 되면 일본은 그들 모두에게 막대한 배상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제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요시다는 재일동포들을 모두 좌익, 즉 빨갱이들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요시다와 같은 보수우파정객들 눈에 재일동포들이 당시 좌익으로 비친 것은 당연했겠지요. 아다시피 미국은 일본점령 후 처음엔 일본을 미국에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국가로 개조하려고 했고, 군대보유와 집단자위권 및 전쟁수행(교전)권도 인정하지 않은 지금의 이른바 '평화헌법'을 작성해 사실상 강요한데도 그런 의도가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 패전 직후 재일동포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렸고 일제가 강요한 모든 억압체제들을 스스로 제거하면서 일본개조에도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말하자면 전승국 국민의 자격으로 행동했습니다. 전범자요 패전국인 일본으로서는 당시 100만이 넘는 그들의 조직적 대응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됐더라면 또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르는데, 1946년부터 이미 미소 대결체제가 윤곽을 드러내고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대소 대결체제로 확실히 방향을 정합니다. 이후 미국이 밀었던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배하고 1949년 중국대륙 공산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일정책은 변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덜레스 등 나중에 미국 정부의 중추가 되는 국무부, 국방부 중심세력들은 일본을 대소 냉전체제 확립을 위한 교두보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일본에 미국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는 한편 대규모 경제지원에도 나섭니다.

그것은 소련의 대유럽 팽창 저지를 위해 서유럽에 대규모로 실시한 마샬플랜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재일동포들은 일본에게는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됐습니다. 이미 미국은 당시부터 재일동포들이 세운 민족학교 등의 교육시설을 비롯하여, 동포사회의 독자적인 시설과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까지 발생합니다.
그들은 공산당, 사회당 등 일본 좌파 정치세력과 노조 등의 주요 지지자이자 구성원이기도 했습니다. 미 점령군은 이런 재일동포의 무장해제 내지 해체를 추진한 거나 진배없습니다. 재일동포들이 그때, 이전부터 대일저항 및 민족해방 방도로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피억압민족들을 사로잡았던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돼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동포들이 이전 억압자들이나 그들 직계 후예들에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이런 사정과 미국의 탄압은, 나중에 90% 이상이 남한출신인 재일동포들이 총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북한에 동조하게 되는 과정으로 연결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냉전대립구도 이후 일본의 지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미 한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미 점령군은 미국이 지배하는 남한 단독정권을, 일본이라는 미국의 아시아 냉전교두보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 육성하려는 전략 아래 광범위한 좌익 및 민족주의세력 탄압에 들어갔습니다. 김구나 여운형 등이 제거된 것도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제주 4.3 사건이나 대구 10.1 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한국내에서도 전쟁은 모든 것을 극단으로 몰고 갔습니다. 보도연맹 등을 통한 양민 대량학살은 식민시대와 해방공간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던(당시 각 지방마다 결성돼 있던 인민위원회 등을 상기해보면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세배격, 단정거부, 친일파제거, 즉각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했던 좌파 성향의 민족주의세력의 조직적 제거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건대 당시 희생자들 다수를 좌파 또는 좌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애매합니다. 좌익이라기보다는 미 점령군(형식상 1948년 남한 단정수립 뒤 미군정은 끝났지만)과 그들이 지원한 우파세력에 대한 반대세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세계에 걸친 미국의 대소 냉전대결구도는 완성됩니다. 당시 그런 상황에서 재일동포를 좌익불순분자로 몰면서 한국에게 교전국 지위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일본쪽 요구는, 미국으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미국에게는 일본이 훨씬 더 투자가치가 있었으며 일본의 전쟁범죄라는 것은 그 단계에서는 이미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공직에서 추방했던 일제 전범자들-그들이야말로 현대 일본 보수우파 지배그룹의 원류들-을 거의 모두 공직에 복귀시킵니다. 전범자들의 공직복귀는 1952년 초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하면서 마무리됩니다.

미국에게는 냉전교두보로서의 일본 지위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전략을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실행하게 하는데, 그들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 때문에라도 미국정책에 적극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한국내에서 친일파들이 미국식 민주주의나 반공을 앞세우고 하루아침에 철저한 친미주의자들로 변모했듯이 말입니다.


비극의 시작 - 교전국 지위의 상실과 분단 고착화

한국의 비극은 미국보다 오랫동안 일제에 저항했던 피식민국이, 일제 패전 뒤 전범국 일본보다 더 지독한 전범국 취급을 당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뚜렷한 상징이 바로 분단입니다. 미국은 소련의 동북아 장악을 막기 위해 서둘러 38선을 긋고 소련군의 한반도 완전점령을 막는 것에만 급급했습니다. 그 뒤 역사는 잘 아시는대로, 한반도는 다시 2차대전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오랜 냉전과 대결시대의 최전선 방패막이로 기능합니다. 같은 피해자인 동족을 상대로 말이지요. 한국전쟁에서만 일제가 2차대전 때 입은 모든 인명피해와 거의 같은 정도의 사람들이 살상당했고, 분단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한민족은 반영구적으로 갈라져 적대적인 대결을 반세기 이상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일 점령군 미국이 한국에게만이라도 전승국 지위를 부여했더라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일 및 대한정책이나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겠지만,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그리고 현재의 북일 국교정상화는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겁니다. 한국은 당연히 교전국으로서의 전쟁배상을 당당히 그리고 훨씬 더 유리한 조건 위에서 받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아마 독도문제도 지금처럼 남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북일 수교과정에서 드러나는 쟁점들

북일 국교정상화와 관련해 북한이 한일 국교정상화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문제를, 남북대결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북쪽이라도 중국 팔로군 또는 러시아쪽, 또는 단독으로 동북지방, 그리고 함경 평안도 지방 등 국내외에서 일제 패망까지 저항을 계속해온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받고 교전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장차 통일한반도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사적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보상액 규모 등의 문제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그런 사실과 그 사실이 갖는 중대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북일 정상화교섭을 한일 정상화교섭에 준해서 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북한은 현재 약자로서의 불리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지난 8월에 열린 북일 국교정상화 제10차 본회담에서 이미 북한은 일본의 식량지원과 경제지원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일본인 납치의혹 등 그야말로 의혹투성이의 일본쪽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지금 일본에 자신들이 주장해온 일부 원칙을 포기하더라도, 그들로부터 필요한 조기 지원을 얻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이 최근 대규모 대북 쌀 지원에 나서겠다고 한 것도 북한의 그런 약점을 파고든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5.16쿠데타 직후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경제개발 조기달성에서 찾으려 했던 박정희 김종필이 급하게 일본의 유무상 경제지원(총 5억달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일본은 당시 변변한 식민지배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구권이란 개념으로 보자면 쌍방이 득실을 따져 서로 줄것 주고 받을 것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은 한반도 지배의 정당성 합법성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이 지어준 공장 철도 등 시설과 교육 등을 자신들이 계산해서 받아내야 할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일본 우파 지배그룹들이 갖는 대한반도관은, 그 연장선 위에 있으며 시시때때로 터져나오는 이른바 망언이라는 것도 그 바탕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히 망언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의 역사교과서 개악 움직임도 같은 선상입니다.

미국은 물론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그 사실도 기밀해제된 문서속에 명기돼 있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대소 냉전대결체제를 안정화시키려던 미국이 종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일본에 훨씬 유리하게 돌아갔지요. 그것으로 미국이 지배하는 일본, 그 일본이 지배하는 한국(안보 경제 모든 측면에서 그렇습니다)이라는 서열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안보군사면에서 미국은 일본 한국을 동시에 통괄하고 있고 일본이 한때 미국에 도전할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긴 했지만, 2차대전 직후 설정된 기본구조는 냉전체제가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근본적으로 변한 바 없습니다. 그것을 부수는 길은 남북접근, 남북연합, 남북통일을 통한 한반도의 주체적 대응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기본 입장

일본의 지배그룹은 앞서 말한대로 일제 전범자들, 말하자면 대동아공영을 꿈꾸며 대륙침략을 감행했던 자들의 직계후예들로 뿌리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일본 개국론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잉, 이토 히로부미 등 현대일본 건국영웅들이 그때부터 부르짖은 征韓論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들은 아편전쟁(1840-42년)으로 중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의 살 길을 서구열강 추종 모방에서 찾습니다. 이후 서구열강의 일원이 되기에 전력했고 중국의 붕괴로, 의외로 쉽게 그 반열에 들어갑니다. 무주공산이 된 조선은 열강들과의 땅 서로 나눠갖기 밀약(미국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에 의해 일본손에 들어갑니다. 미국 영국의 일방적인 응원과 지원 속에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일한 방해세력이었던 제정 러시아마저 제거됩니다.

서구열강들은 중국 약탈을 위해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제거한 뒤 마음대로 목적을 달성합니다만, 일본에게도 조선과 중국 동북지방을 떼줬다가 일본이 성장을 거듭하 면서 중국 전체에 대한 독점적 지배적 지위를 누리려 하자 제동을 겁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이 동남아와 버마에 이르는, 이른바 남방침략을 감행해 자원을 확보하면서 하와이 진주만 미국 태평양해군기지를 급습한 뒤 시간을 벌면서 범아시아 일본블록(대동아공영권)을 안정화시키려던 게 바로 태평양전쟁이었지요. 따지고 보면 미국이 일제 패망 뒤 도쿄군사재판에서 일제를 전범으로 몰고간 것도 희극적인 일입니다. 그들 역시 약탈자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지금의 일본 보수우익들이 바로 그 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들의 전쟁도발이 아시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지나 내나 마찬가지라는 거겠지요.
일본 보수우익들이 나쁜 것은 그런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조선을 비롯한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커녕, 일제가 그들을 지배한 것은 순리라고 강변하는데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모두 무능력자나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 또는 조건을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 보수우익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역사를 터무니 없이 과장하고 미화하면서 새로운 일본 문명권론까지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일전에 폴 케네디라는 사람이 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에서,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의 하나로 간주했을 때 이들 보수우익들은 환호작약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미국에 도전할 정도의 경제대국인 일본이 중국것도 아니고 서양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그의 머릿 속에 한국 또는 조선이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케네디는 냉전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서양문명이 향후 주로 중국과 이슬람권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재의 서구 우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케네디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일본이라는 안경을 통해 동아시아를 바라다본 거의 모든 서구인들은 마찬가지 인식수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 또는 조선은 중국의 일부이거나 일본의 일부입니다. 일본 보수우익들은 그런 서양의 동양관을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독도가 원래 자기네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사실상 거의 자기네 땅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그것은 국제무대에서 모든 것은 한국식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통하게 돼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마치 모든 서양지도에 동해가 일본해로 둔갑했듯이 세상은 일본을 통해 아시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 어느 역대정권도 독도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냉전 이후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전략 - 나이 이니셔티브와 변수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냅니다. 1995년께 나온 조지프 나이(현재 하바드 국제관계대학원이든가 확실히 기억하진 못하는데 좌우간 그곳 학장입니다만) 당시 국방차관보였던가요? 어쨌든 그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동아시아 전략보고(흔히 나이 이니셔티브라고 합니다만, 정식명칭은 아닙니다)가 발표됩니다. 여기에는 중국이 21세기 중반까지 미국과 겨룰만한 초대국으로 성장할 것으로 상정하고 미국이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주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주적 소련이 사라진 자리에 중국을 잠재적국 내지는 경쟁국으로 앉힌 것입니다. 1980년대에 미국을 위협했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냉전 교두보로서의 역할마저 흔들리던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미국의 총애가 사라지는데 대한 불안감이 증폭됩니다.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100억달러 이상의 돈을 내고도 미국 요구대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보국가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클린턴 정부 등장 이후 미국은 1980년대의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일본을 두들겨패는 정책을 취합니다. 일본의 시장을 열게하고 규제완화조치를 요구하는 등 미국적 시장질서를 강요합니다. 그게 오늘날의 이른바 글로벌리즘 바람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글로벌리즘은 아메리카니즘의 다른 이름이지요.
일본의 위기감은 몇년 전 클린턴이 중국을 열흘이나 방문하면서 맹방으로 자처하는 일본에는 들리지도 않았을 때, 이른바 일본통과, 일본무시, 중국과의 직거래론으로 일본을 한바탕 뒤흔든 불안감속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냉전붕괴 뒤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바로 나이 이니셔티브가 등장하는 1990년대 중반 중국경계론과 함께 일본중시론이 다시 등장하면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1996년 클린턴-하시모토의 미일공동선언(안보조약 재해석)과 1997년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 1999년 가이드라인 관련법 제정, 일본 국기국가법 제정 등은 그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미일 안보동맹 재강화론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100% 활용한 게, 1998년 8월31일 북한이 발사한 이른바 대포동 미사일입니다. 그 진상은 차치하고 미일 양국은 그 사건을 계기로 북한위협론을 퍼뜨리면서 자국내 여론들을 그쪽으로 몰아갑니다. 주한 주일미군 존속과 NMD, TMD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텁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란 존재는 미국에게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같은 존재이며, 주일미군 주한미군은 바로 미국이 리드하는 나토군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지배그룹은 과거 서구열강의 일원으로 끼어들 때의 영일동맹과 마찬가지로, 미일동맹도 특정시기 세계를 좌우했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을 때 일본은 강성대국으로 존속했다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지금 좌우를 막론하고 다수 일본 식자들이나 위정자들이 하나같이, 21세기 일본 국가전략에 미일동맹을 근간으로 놓고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 같은 극우에 가까운 우익들 일부가 미국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지만, 그것은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같은 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을 공격하는 것은 미국으로부터 대등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부리는 투정이나 응석같은 것이지, 결코 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파든 극우든 그들이 바라는 것은 최강대국 미국이 인정하는 아시아의 패자, 패권국으로서의 일본 또는 일본블록이고 그것을 미국도 인정하고 대등하게 번영을 함께 만끽하자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에 대든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잘 아는 그들로서는 능히 가질법한 이중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기득권자들의 논리입니다. 이미 기성강자들인 그들이 짜놓은 질서를 21세기에도 그대로 연장하고 유지하자는 전략입니다.
이런 구도는 불행하게도 한반도에 항상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서구가 아시아를 침략해서 전략적 동반자로 상정한 유일한 아시아국가. 일본의 성공은 바로 서구의 아시아 침략행태를 동일차원에서 반복한데서 비롯됐으며, 그것은 곧 다른 아시아국들의 비극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아시아의 희생을 전제로 일어선 것입니다. 일본 우익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성공을 안겨주었던 그 구도에 깊은 향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본 지배그룹들이 현재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중국의 초대국화와 통일한국의 등장입니다. 이들 이웃들이 갖는 공통의 특징 중 하나는 둘다 일본에게 철저히 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이 그들의 과거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진심으로 반성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 등 해외 관찰자들조차 21세기 동아시아 최대 불안 내지 중요변수가 바로 일본의 과거청산 실패, 중국의 초대국화와 통일한국 등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불안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안보보호가 불확실해질 경우 핵무장까지를 포함한 군사대국(이미 군사대국입니다만)의 길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데서 찾고 있습니다. 일본 좌파 일부와 시민단체 등은 일본의 출구를, 과거청산을 통한 아시아 공생에서 찾고 있습니다만 그들조차도 거대중국의 등장에 대해서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해, 거대중국이 일본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또는 그와는 상관없이 거대중국이 일본의 이해와 일치하지 않거나 일본의 패권적 지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데서 비롯됩니다. 우익 또는 극우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신경질적입니다. 그들은 그럴수록 더욱더 일본 내셔널리즘을 자극해 내부결속을 과거의 영광에서 찾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배외주의적 추세의 강화로 발현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때 가능성을 보였던 세계국가로서의 일본이라는 지위획득이 불가능해졌다는데서 오는 좌절감과도 연관이 있으며 우익들은 결국 그 출구를 자신들끼리 똘똘뭉치는데서 찾는 형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미일동맹이 중국을 잠재적으로 간주하면서 한미동맹을 토대로 남한을 미일동맹의 종속체제로 묶어두려 할 경우, 한반도에는 다시 비극적 역사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남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접근해서 공동대응체제를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그런 상황이 굳어진다면,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생존전략을 중국, 러시아쪽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미-일-한 진영과 중-러-북 진영의 대결구도, 바로 새로운 동아시아 냉전대결구도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누구도 단언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단하고 비참했던 근대 100년의 역사에 찌든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남북한 화해와 접근, 조기통일은 한민족 사활의 문제임을 이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 미국의 전략

일본 우익들이 특히 친밀감을 갖는 나라는 대만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우파들입니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도 좋아합니다만, 전략적 가치에서 한국이나 대만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본우익들이 일본중심의 아시아 블록(대동아공영권의 변형형태)을 상정할 때 한국과 대만이 일차적 대상이 됩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이 인도네시아도 대상에 포함되겠지만, 한국과 대만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그들의 동맹세력이 돼야 합니다. 일본 우파들은 대만을 거의 오키나와와 연결된 자국 블록권(이런 개념이 허용된다면)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한국관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최근 일본의 호감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더이상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한데부터 급진전했습니다.

물론 김 대통령으로서도 나름대로 전략이 있겠지만 일본우익들은 김 대통령의 그 선언적 약속에 그야말로 환호했습니다. 그 이후 양국간 방문자들 수가 급증했으며 지금 양국은 투자자유화를 거의 현실화하는 단계까지 진척시켰고, 일반관세를 없애는 자유무역협정 협상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관세장벽을 없애는 자유무역협정이란 결국 미국-멕시코-캐나다(NAFTA)와 같은 일종의 경제블록을 형성하는 것으로 일본중심의 아시아적 경제 분업체계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남북한의 관계진전은 결코 일본우익들에게 달갑지 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일본블록하의 분단된 남북한이 그나마 차선은 될 수 있는데 남북의 접근은 그 가능성조차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통일된 남북한은 일본보다 중국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일 통일한국이 중국으로 경사하고 일본에 적대적으로 될 때, 그것은 일본이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일 것입니다. 일본은 그런 점에서 남쪽만이라도 확실히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자장 속에 확실히 포섭해두는 것이 국가전략상 사활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남북 통일전략도 이런 점들을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또다시 당하겠지만, 잘하면 남북한은 각기 한반도와 관련해 강약점을 지닌 일본 중국 모두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여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이 최근 주한미군 문제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 것도 흥미있습니다. 주한미군은 그 자체로도 미국의 동아시아 존재감, 바꿔 말하면 지배력 유지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오키나와를 근간으로 한 주일미군 유지를 위해서도 존속돼야 합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상황은 곧 주일미군 배치근거도 상실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주한미군 배치가 약화되거나 아예 미군기지가 철수할 경우 미국의 서태평양(미국을 기준으로 볼 때 서쪽) 전략은 근거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주일, 주한미군의 유지는 안보군사적 관점 뿐만 아니라 21세기 전세계 최대 생산기지가 될 동아시아의 경제에의 관여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사활적인 문제라고 미국 스스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미국이 동북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도 관심거리입니다. 극단의 경우, 수천년 동아시아역사의 패턴대로 결국 일본은 중국의 자장속에 빨려들어갈 것으로 보는 시각들도 서구에는 적지 않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상실하면 일본도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극단의 경우 한·중·일, 동남아의 동아시아 거대블록이 미국-서유럽 블록에 대항하는 체제재편을 한번 상정해보십시오.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노른자위 아시아를 통째로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때 러시아와 인도는 어느 쪽으로 붙을까요?

왜 미국이 한반도 통일문제와 직결되는 북한문제에 그토록 집착하고 주한미군문제에 신경쓰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변화가 그런 폭발적인 연쇄반응의 기폭점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어 함께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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