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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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한, 너무나 포스트모던한

장귀연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걸었다. 강남의 거리는 거침없이 드넓고 쭉 곧았다. 도로 옆에는 바벨탑의 욕망처럼 치솟은 빌딩들, 아파트들, 공원들. 나는 휘어짐과 굽어짐이 제멋대로여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엉뚱한 각도에 도달하는 길들에 고만고만한 구멍가게, 철물점, 신발가게 등등이 좁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동네에서만 살았지만, 그러나 한 어린 후배는 언젠가 이렇게 물었었다. "강북 같은 미로에서 어떻게 길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상점들이 왜 상가 건물에 있지 않고 길에 나와 있어요?" 동물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골목의 욕망과 곧게 뻗은 거리를 직선으로 질주하는 욕망의 차이. 현기증. 나는 직선의 강남 거리에만 나서면 방향감각을 잃는다.

계속 걸었다. 롯데월드와 롯데백화점 앞에 도달했다. 롯데월드, 포스트모던의 문화공간(강내희). 백화점, 욕망을 끝없이 변주하는 몽환극의 왈츠(보드리아르). 거기에서 잠시 연좌가 있었다. 최루탄, 임산부를 찍어누르는 방패, 노동자의 눈물, 그리고 진정으로 프리(pre-)모던한 성희롱을 규탄하기 위하여. 그 순간에도, 롯데월드의 롤러코스터는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 없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백화점의 윈도우는 번쩍거리며 소비의 욕망을 반사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바깥, 길에서는 몇 번의 구호소리가 울려퍼졌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노동탄압 분쇄하자!" "구조조정 반대한다!" 그러나 서울의 하늘에는 롯데마크 같은 붉은 해가 석양을 뿌리고 있었고, 포스트모던한 욕망의 건물들은 신 없는 시대의 신처럼 장엄한 주홍빛에 휩싸여 거만하게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연좌를 풀었다.

계속 걸었다. 구두 신은 발이 저려올 무렵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잠실종합운동장 앞 삼성동 사거리. 갑옷 입은 전경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대오가 흐트러졌다.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는 쪽 반, 무슨 일이 있을까 우려하는 쪽 반.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함성 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학생인 듯 싶은 몇몇 사람들이 뛰어가며 하는 말이 언뜻 귓가를 스쳤다. "야, 싸움 벌어졌나 봐." 그러나 그것은 잠실운동장에서 터져나오는 함성 소리였다. 그때 그 시각, 잠실운동장에서는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LG-두산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프로야구, 게임, 시뮬라시옹. 그 바깥에서는 차량의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격렬한 투쟁가. 그러나 시뮬라시옹은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인의 병처럼 밖과 안의 구별을 없애고 실재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어느 쪽의 함성이 현실인지 모르는 채 어리둥절해 하는 내 귀에, 드디어 고단한 걸음에 종지부를 찍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평화적으로 집회와 행진을 마쳤습니다. 세계에 우리의 뜻을 알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셈 서울 행동의 날 행사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때 아직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LG-두산 1차전은 끝나지 않았었다.


분열증

끝없이 걸었던 그 날의 약 일주일 전쯤, 고대 앞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졌었다. 주연(YS)보다 더 흥행에 성공한 조연 김병관 고려대학교 이사장 겸 동아일보 회장의 공연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니까 간단히 넘어가자. 그는 YS를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학생들에게 호통치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피켓을 뺏어들고 손을 흔들어대기도 하고, 김정일 방한 반대서명운동을 벌일 작정인 YS를 위로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사한 CD를 틀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웬 분열증? 물론 김병관씨는 술 먹고 횡설수설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반복하건대, 고려대학교(대학!) 이사장 겸 동아일보(언론!) 회장이다.

편집증을 버리고 분열증으로 가는 지성을, 그는 알콜의 힘을 빌어 상징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료타르는 '지식인의 무덤'에서 지성과 편집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편집증이란 물론 계몽의 거대서사, 즉 사회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의미한다. 계몽(enlightment), 즉 진실의 빛을 비춤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역사를 진보시키겠다는 이념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던 제도가 역사적으로 대학과 언론이었다. 그래서 그 곳들을 지성의 저장고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할은 끝장났다. 철학적으로 진보의 이념은 억압적이며(왜?), 현실적으로 대중은 그것을 원하지 않기(정말?)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무덤으로 가야 한다. 진보, 변혁, 역사, 이념, 진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편집증을 간직한 채 고요히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대학과 언론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힘차게 휘날리는 소비자본주의의 깃발들? 다시 한번, 포스트모던하기보다는 프리모던한 음주가무의 풍류? 그 맨 위에서 펄럭이는 플랭카드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편집증에서 분열증으로!'
분열증은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한다. 편집증이 아닌 분열증이 바로 현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김병관씨의 술 취한 걸음을 따라 갈짓자로 분열되는 지성의 뒷모습.


침묵하는 다수의 그림자?

계속 대학 얘기. 1년 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광란의 10월'이라는 모토를 내건 선본이 당선됐다. 그 선본의 구호는 '좆 같은 게 좆 같은 거지!'였고 그 정확한 의미는 '꼴리는 대로 살자'는 것이었다. 실천 여부에 대해서는, 학생이 아닌 나는 잘 모른다. 서울대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되었다고 떠들어댄 신문보도를 보았을 뿐이고, "학생회실에 카페를 만들었어요. 예쁘고 빵빵한 마담 대기"라는 총학생회 포스터를 지나가다 보고 실소했을 뿐이다.

어쨌든 1년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는 총학생회 선거포스터가 화려하게 붙었다. 우연히 보게 된 한 총학생회 선본자료집 제목은 '마법의 사상'. 대충 읽어봤다. 하하, 마법의 사상, 내가 아무리 쉰세대래도 이건 좀 들어봤다. 마법사들(MagicPower), 겜도사들(GameForce), 길드, 마법타워…. 전형적인 롤플레잉 게임용어들이었다. 즉 리니지, 울티마, 롤플레잉 게임은 아니지만 워크래프트 같은 것들, 그리고 롤플레잉 게임의 유행을 타고 번진 판타지소설들의 언어들. 다시 한번, 게임, 시뮬레이션, 가상과 현실의 클라인 병.
거의 동시에, 서울대 대학원 입시에서 정원미달되는 사태 때문에 각 언론사에서 쳐들어 오는 바람에 대학원생인 나로서는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대학원에 가도 취직이 되지 않기 때문 아니냐?"와 "유학을 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아니냐?"는 두 가지였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며칠 후 한 선배와 술을 마셨다.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박학을 지니고도 십여년째 시간강사로 떠도는 그 선배 왈, "너도 좋은 직장 버리고 고생하는구나."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그러면서 기자들이 물었던 질문의 답을 알았다. 취직도 아니고 유학도 아닌, 한국에서 우리가 대학원에 갔던 이유는 그로써 사회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사회와 역사가 진보하지 않는다면, 진실의 빛은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면, 지성은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면, 그런 세상에서 후배들이 춥고 배고프게 진리를 추구해야 할 이유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결국, '침묵하는 다수의 그림자'(보드리야르)는 무엇인가? 운동권에게 침묵당한 다수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비운동권 학생회에 표를 던지고, 지성에는 빛이 없다며 취직에 열심인 나의 후배들인가? 게임 속에서 분열된 정체성을 구성하고 시뮬라시옹 속에서만 살아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들인가?

이제 다시 처음의 상황, 10월 20일 잠실운동장과 삼성동 사거리로 돌아가 보자. 프로야구장의 함성 소리가 밖의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을 때, 게임과 현실,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그것은 진정으로 포스트모던한 상황이다.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적인 것으로, 현실이 게임으로 포섭된다는 아이러니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침묵하는 다수의 그림자는 '그림자'다. 거대한 자본 욕망의 조명빛을 받으며 시뮬라시옹의 스크린은 돌아가고, 그것의 반사인 그림자들을 만든다. 포스트모던 미학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그 흔들리는 그림자들의 율동이다.
10월 20일 삼성동 사거리에서 나는 말하고 싶었다. 클라인의 병을 깨고 분열증에 걸린 지성을 치유하고 욕망의 빛이 아닌 빛을 만들어내는 싸움에 대해서. 그것이 아마도 그때 그곳에서 했었어야 할 일이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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