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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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촛불을 들 그 날을 위해

유해정 | 인권운동사랑방 총무
연숙이에게.

날이 매섭다. 영하 17도로 떨어졌다는 뉴스에 움찔 놀라 두터운 겨울모자를 꺼내 쓰고 그것으로도 성이차지 않아 양말을 3켤레나 신어보지만 차가운 겨울 바람을 피하기는 역부족인 듯 하다. 장갑과 스웨터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 바람이 손목을 시리게하고 중무장이 게면스럽게, 발은 얼음장처럼 차겁기만 하다. 이렇듯 겨울이면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명동성당에서 노상단식농성을 벌이겠다고 했을 때 너는 놀란 토끼눈을 뜨고 날 바라봤지. 어느 새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얘기. 그러나 '어느 새'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지난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은 아주 오래된 얘기처럼 와닿는다.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움

지난해. 나 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우리가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했던 것처럼, 인권단체에 몸담고 있는 나도, 졸업해 선생님의 길을 걷고 있는 너도 50년만에 이뤄진 남북정상의 만남에 "쉽게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꺼야"라며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속으론 남모를 큰 기대를 걸었었지. 곧이어 진행된 남북이산가족의 눈물겨운 만남과 분단 세월의 산증인이었던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의 송환은 우리의 기대를 더욱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위 제2의 '민족민주혁명당'사건이 터져 마음을 어둡게도 했지만 그건 보수세력의 최후 발악이겠거니 하며 국가보안법에도 새시대가 올거라 믿었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탈 때도 그랬다. 점차 우울해지는 나라안 사정과 거리로 거리로 내몰려 벼랑 끝에 선 민중들의 생존권.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리에 내내 찜찜하고 맘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인권으로 장사했던" 대통령이었기에 대통령 집권 이후 3년간 민간단체가 쉼없이 요구했던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도 빛을 발할 거란 기대를 접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해를 다 접을 시점에 다다르면서 '오판이었구나'라고 깨닫는 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전해진 비보. 1999년 한 학교의 부총학생회장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발목이 묶여, 수배중이던 한 여학생이 죽음을 목전에 둔 동생을 보기 위해 병원에 찾아갔다가 연행됐다는, 그리고 동생이 그로부터 불과 몇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이렇게 허망하고 부끄럽게 지내려고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인권단체에 둥지를 튼게 아닌데 하는 생각.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국가보안법에 묶였던 내 청춘이 싫어, 다시는 내가 겪은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 겪게 하지 않아야지하며 선택한 길. 근데, 돌아본 내 모습이 참 초라하더라.
'세상이 올해는 변할거야'란 기대 속에 방관하며 팔짱끼고 바라보진 않았는지, 한번 더 두들겨서 달구어야 할 쇠덩이를 남들이 두들겨주겠지하며 빨리 쉬려했던 건 아니었는지….


남은 것이 몸뚱아리밖에 없어

새해를 불과 사흘 앞두고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올바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결의했다. 연말연시에 누가 쳐다보기는 하겠냐는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금 농성을 한다고 상황이 변하는 것은 없다며, 괜히 몸 상하지 말고 투쟁을 하려거든 새해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제 남은 건 몸뚱아리밖에 없다며 그것이라도 내던져 지금은 투쟁해야할 때라며 9개단체 14명의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속옷을 챙긴 배낭 하나씩을 둘러매고 12월 28일 명동성당 들머리에 모였다.

너 역시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겠지? 당시 명동성당은 만, 연말 한국통신 파업이후 "더 이상의 농성이나 집회는 허가할 수 없다"며 경찰에 시설물보호요청을 해놓았던 상태였다. 따라서 명동성당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우린 몇번이고 쫓겨날 각오와 천막이 없는 상태로 노상에서 잠을 청해야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했다.
첫날, 비록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천막 역시 치지 못했다. 낮에 깔고 앉았던 스티로폼 위에 침낭을 하나 얹고 그 위에 비닐을 덮고…. 그게 내게 그리고 우리 농성단원들에게 허락된 잠자리였다. 침낭안의 몸을 최대한 웅크려 추위를 면해보려 했지만,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틈 사이로 매몰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온기를 식혀버리고…. 왜 그리도 밤이 길고 무섭던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침낭과 비닐 위엔 성에가 가득했다. 그 후로 2주일간 침낭과 비닐 위에 얼어붙은 성에를 터는 것은 우리의 빼놓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난로를 들고 오지 마십시오. 대신 사람들의 손을 잡고 오십시오.

하루 13시간을 명동성당 들머리에 앉아 침묵 시위를 벌이면서 참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우릴 보긴 하는 걸까?', '우리 요구가 무엇인진 알까?' '정치권의 반응은?'
불어닥친 추위와 코앞으로 다가온 연말에 우린 묻히고 있는 듯 했다. 들머리는 쓸쓸했고 간혹 성당 밖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농성에 결합하고 있는 단체의 활동가들이 매일 찾아와 이곳저곳을 살피고 말벗이 되어주었지만, 내심 기다렸던 건 그들이 아니었다. 좀 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고, 노력 중이라는 정치권의 몇마디 말이 아니라 구체화된 민주당의 당론과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정치권은 '의원꿔주기란 희대의 만행'으로 파행의 길을 걸었다.
'정말 아무것도 논의되지 않은 채 이번 임시국회도 파행만 거듭하다 끝나고 마는구나'하는 절망감이 마음을 후벼팠다.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기대. 그리고 추위와 혹한 속에 탈진해가는 활동가들.
이제서야 말하지만 연숙아, 사실 그 때는 농성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참담했다. 부끄러움으로 시작한 농성은 내게 저무는 한해를 붙잡아놓고,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고 울부짖고 싶을만큼 절박하게 스며들었다. 임시국회시기를 놓치고 나면, 그리고 오는 2월마저 놓치고 나면 두 법안의 올바른 제정 및 폐지는 다시 힘들거라는 위기감.

불씨 하나 없는 농성장에 앉아 차가운 몸과 허기진 배를 웅크리며 찾았던 것은 추위를 막아줄 스티로폼과 몸을 녹여줄 난로가 아니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절박한 이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길, 함께 투쟁에 나서주길 바라고 또 바랬을 뿐이다.


절망 끝에서 발견한 희망

병원행도 마다하고 링겔을 꼽으며 단식농성을 이어나가던 이들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걸까?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혼자가 아니었나보다. 어느샌가 싶더니 많아진 발걸음들.
14명으로 시작했던 초라한 단식농성장은 어느새 20이 50이 3백이 됐고, 쓰러져간 활동가들의 자리엔 "그동안 투쟁을 방기했다"며 찾아온 사람들이 대신 국가보안법 폐지와 올바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신문에서 보았다며 챙겨온 모포를 내주던 택시운전사와 빈 지갑을 미안해하며 은행으로 달려가셨던 아주머니. 수줍은 얼굴로 와서 "저기요"하며 어린 여고생 둘이 건네주던 박카스. 그 박카스가 얼마나 따뜻했던지…, 한껏 움츠려 들었던 몸이 활짝 펴졌다.

부끄러움으로 시작해 외롭고 서럽기만 했던 투쟁은, 어느새 함께하는 많은 이들의 온기 속에서 "우리가 함께 한다면…"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썩어빠진 정치권에 기대지 않고 허울좋은 인권대통령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우리의 힘으로 불꽃을 일으켜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또한 농성은 서로 자기위치에서 발돋움을 하던 개혁법안의 과제들을 하나로 모은 계기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그쪽에서, 국가인권기구는 거기에서 하던 식이 아니라, 이제 인권관련 2대 법안과 더불어 부정부패를 막는 부패방지법까지 인권시민사회단체가 힘을 하나로 집결해 싸워야 함을 일깨워주는 고리가 되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던 지난 13일의 단식투쟁이 마무리 되어갔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선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아직까지 나를 흔든다.
우리의 농성이 끝나면서 우리가 외쳤던 "국가보안법 폐지, 올바른 국가인권위 설치"의 목소리는 묻히고, '혹한기에 유례없는 인권활동가들의 목숨을 내건 노상 단식농성'이란 처절하고 애처러웠던 투쟁이 끝났다고 안도하며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갈까봐, 2월을 넘겨서는 안될 이 문제들이 사그라져 버리거나 또 누군가 꺼져가는 투쟁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힘겹게 타오를까봐 두렵다.

농성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아직 두 법안과 관련한 외면적 활동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이 나를 조급하게만 한다.


너와 함께 촛불을 들 그날을 위해

연숙아, 나의 농성소식을 접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지? 네 몫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는 듯해서 죄를 진듯 미안하고 또한 몸뚱아리 내걸고 간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했지? 하지만 연숙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했지만 아니, 나는 이번 농성을 통해 그들에게 감동했다. 폭설 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시며 하루밖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시던 장기수 어르신들의 모습 속에서, 천식의 몸을 이끌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시던 한 선생님의 모습 속에서, 힘들 거라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시던 신부님의 모습 속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번 단식농성을 통해 희망을 보았다. 우리 비록 이렇게 제각각 자기 자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힘겨울 때 어깨를 하나로 걸 수 있다는 믿음, 모두의 촛불이 필요할 때 제자리에서 성냥을 그을 거란 희망. 이번 단식농성은 막 투쟁을 알아나가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연숙아, 이번 달이 다 가기전에 술 한번 사라. 말솜씨 없어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길랑은 내 술자리에서 풀어내마. 우리 밤이 새도록 함께 나누면서, 함께 촛불들고 나갈 내일을 이야기하자.

2001년 1월 15일 해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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