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11-12.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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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한국사회 민주화에 기여했나?

임필수 | 정책위원장
지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는 글들은 종종 서구의 시민권 발전 모델을 원용한다. 그 글들은 서구에서 시민권이 18세기 공민권(사상과 표현의 자유)에서 19세기 정치적 권리(보통선거권)로, 20세기 사회적 권리(사회 복지)로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관점을 도입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공민권이나 정치적 권리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진보파든 진보정당이든 확장된 공민권과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사회권 확대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공통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정책연합이나 선거연합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제언도 종종 제기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첫째, 과연 서구에서 시민권이 그런 식으로 발전한 게 사실인가? 둘째,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최소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정당한가? 셋째,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공통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게 과연 올바른 시각인가?
우선 서구의 시민권이 자연사적으로 즉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투쟁 없이도 자동적으로 확장 발전되었을까? 서구에서 시민권은 노동자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배자들이 취한 일종의 예방조치였다. 그들은 시민권의 대가로 노동자운동에게 민족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했고, 노동자를 행정의 대상으로 전환했다. 노동자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공민권, 보통선거권, 사회복지는 한편으로 자신이 쟁취한 성과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희생한 대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물은 노동자운동에게 불리한 세력관계가 조성되면 철회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에서 사회복지나 공공서비스의 축소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도 후퇴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보통선거권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지만 이를 우회할 수 있는 경로가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우리는 ‘전문가 지배’라 부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등장 시점에 한국에서도 ‘제3의 길’이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1990년대 신자유주의와 함께 등장한 정치이론은 민주주의 담론을 적극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민주주의로 복귀를 의미하는지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주로 정당을 분석하는 마이어라는 연구자는 민주주의에서 인민주권이란 요소를 제거하려는 추동력이 최근 들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서구 민주주의 이론은 대체로 정치제도들 사이의 억제와 균형을 강조하는 입헌 민주주의 전통과 시민의 역할과 대중의 참여를 강조하는 인민 민주주의 전통이 결합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후자의 전통이 점차 기각된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관점이 점차 수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반정치’라는 감성을 적극 활용하여 매우 위험한 결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인민이 권력에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결정적 요소는 핵심적 의사결정을 탈정치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영국 노동당 블레어 정부에서 사법부 장관을 맡았던 팔코너가 한 말이다.) 정치가는 당선을 위해 선거 주기에 따라 단기적 이해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에 비당파적 전문가에 의한 의사결정이 훨씬 더 적절한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중앙은행 독립이다. 정치가는 단기적 경제성장을 목표로 삼는 통화정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독립적이고 비당파적 결정이 훨씬 더 건강한 경제적 성과를 낳는다는 관점에 따라 실제로 중앙은행 독립이 관철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엘리트 전문가에 의한 정책결정이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보건, 복지나 외교, 국방을 비롯해 모든 문제로 확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중앙일보에는 국회의 국정감사가 심각한 낭비를 초래하기 때문에 국정감사를 폐지하고 전문가로 구성된 감사원의 역할을 늘려야한다고 주장한 칼럼이 실렸다.) 이는 유권자나 유권자가 선출한 대표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성을 지니지 않은 제도에 권력을 위임하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최신 민주주의 이론이나 정치개혁안도 이러한 관점으로 수렴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다. 즉 대중의 참여를 고무하고 시민의 역할을 증진하기보다는 대중의 개입을 억제하는 것을 선호한다. 참여 거버넌스 이론은 선거를 매개로 한 대의과정보다는 전문가로 구성된 비정부기구(NGO)와 이해관계자들의 개입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거버넌스의 주창자들도 정부와 시민단체의 협력이 민주주의의 제일 요소인 듯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거버넌스를 협치(協治)로 번역하자는 주장도 있다.) 또한 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합당한 이유로 지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다수결보다는 일종의 배제적 토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러한 흐름도 전통적인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전망을 제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인민민주주의 전통을 격하하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공평한 사법부’만 남는다. 특히 발전도상국에서 민주주의는 이제 ‘NGO 더하기 사법부’를 의미한다. 발전도상국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시민사회’는 수용할 만하고 법률적 절차는 핵심적 역할을 맡아야 하지만 선거와 같은 대의제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은 자신의 임기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약탈적 성향을 지니므로 기술, 행정, 사법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NGO와 사법부야말로 ‘굿 거버넌스’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이 역시도 대표의 선출이나 권력의 위임 과정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제도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최근 한국에서는 수도이전, 미디어법과 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들일수록 헌법재판소로 향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이는 의회의 권한을 스스로 침식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변화는 세계적으로 보편적 현상인 듯하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나타난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핵심적 정책결정은 점점 더 국제기구를 매개로,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좌우된다. 이는 NGO나 사법부와 같은 전문가 지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이나 정치개혁안이 정치인의 당파성과 탐욕성을 공격하는 것은 일종의 쾌감을 줄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출되지 않았고 따라서 대표성과 책임성을 결여한 NGO와 사법부에게 권력을 넘겨야 한다는 결론을 공유한다면 인민민주주의 전통은 붕괴하고 그것을 한 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심각한 장애에 직면할 것이다. 정당을 매개로 한 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 전통이 구현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는 아니며 그 내에도 심각한 모순이나 긴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코뮨이나 평의회 민주주의도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정당 민주주의에도 미달하는 ‘거버넌스 학파’와 같은 민주주의 이론들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민주화 또는 ‘굿 거버넌스’가 이처럼 인민주권의 원칙을 기각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고 사실상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전문가 지배를 보완하기 위해 인민주의 정치행태를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 즉 민주당과 진보정당 또는 민중운동이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는 왜 민주당과 민중운동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념과 목표, 지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대연합이라는 유령을 불러내면서까지 선거연합을 고려하고 있냐는 것이다. 이는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정당의 성격변화를 추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낳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본말이 전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당의 변화를 검토해보자.
현재 정당의 위기는 누구라도 인정하는 세계적 추세다. 투표율 하락, 투표 유동성 증대, 정당에 대한 애착심 감소가 그 지표로 언급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는 정당으로부터 대중의 퇴각이라 명명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당으로부터 엘리트의 퇴각도 동시에 나타난다. 즉 엘리트는 정당 외부로부터 자원을 끌어들이고 외부로 도약하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정당을 근거지로 활용하기는 하지만 다른 곳 즉 정부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한 스프링보드로 삼는다. 이에 따라 정당의 변모가 발생한다. 첫째, 기존 대중정당은 당원, 기부자, 제휴조직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했지만, 이제 정당은 공적 기금 특히 국가보조금에 의존한다. 이에 따라 정당의 내부 조직기능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률적 규제가 나타난다. 특히 국가보조금을 분배하는 과정은 정당 시스템을 규격화하는 경향을 동반한다. 정당의 자격이나 활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조직적 자율성이 쇠퇴한다. 둘째, 정당은 (사회적 갈등을 대의하는) 대의기구로서의 성격이 쇠퇴하고 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화된다. 정당은 ‘반대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통치하거나 통치할 때까지 기다리는 활동을 주로 수행한다. 이제 정당이 점해야 할 위치는 사회가 아니라 국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당 지도부는 제휴한 집단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고 그들의 특권을 줄인다. 정당은 점점 더 자신이 자기 충족적이며 전문화된 조직이라고 간주한다.
혹자는 이러한 변화를 대중정당의 쇠퇴로 규정하며, 새로운 정당행태를 ‘선거전문가 정당’ 또는 ‘카르텔 정당’이라고 분석한다. 선거전문가 정당 이론은 정당이 더 이상 방대한 조직과 당원을 중시하지 않고 경량화하면서 여론조사 전문가, 선거전략 전문가, 변호사, 회계사가 선거를 주도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카르텔 정당 이론은 이탈리아 베를로스쿠니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를 대표적 사례로 뽑는다. 카르텔 정당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정당이 아니고, 선거 시기에만 잠깐 여러 지역의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여 카르텔을 형성하여 선거를 치르는 조직을 뜻한다. 카르텔 정당은 정당이 사회적 기반과의 연계가 약화되자 그 대응책으로 (정치자금, 선거운동, 정책결정방식에서)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고, 매스미디어의 이용과 권한을 독과점적으로 보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결과 정당과 시민의 유리는 심화되고 정당의 국가에 대한 종속은 강화된다.
우리는 한국의 진보정당이 이러한 정당의 변화를 불가피하다고 간주하거나 심지어 긍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지 우려한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이 일차적으로 점해야 할 위치가 사회가 아니라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즉 사회적 갈등을 대의하는 기능이 아니라 통치기구로서 국가에 편입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가 제공하는 권력과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그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지분’이라도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당과의 연합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진보정당 내에서 민주당과 연합을 포함하는 민주대연합이 적극적으로 고려된다면 이는 일회적인 선거전략이라는 차원에서 그 적절성을 다룰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진보정당이 출발선에서는 이념적 대중정당을 표방했으나 이제는 정당의 기본성격을 바꾸고자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기관지에는 이명박정부의 중도실용주의와 반이명박 민주대연합론을 분석하는 기사를 담았다. 또한 쌍용차투쟁과 기업지부 재편 논란, 현대차지부장 선거를 거치며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는 금속노조를 다루는 기획을 준비했다. 미국경제 불균형과 달러기축통화제 전망, 오바마 정부의 의료개혁과 한국의 의료민영화를 분석하는 기사와 이주노동자운동, 교사운동의 현황을 짚는 기사도 담았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토론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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