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3-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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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대지진,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만든 홀로코스트

아이티 역사와 자연재해의 정치경제

구준모 | 정책위원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자연적이지 않은 재해

1월 12일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순간에 20만의 생명이 사라졌다. 부상자와 이재민은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200만 인구가 집중해있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피해가 집중됐다. 수도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고, 진원지가 불과 10여 킬로미터 옆이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복구에 착수해야 할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지진 발생 후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시설과 유엔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구조대와 구호단체가 긴급구호에 나섰지만 정작 아이티 시민들이 필요한 곳에 물품이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맨손과 작대기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냈다. 대혼란과 참상이 언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2010년 초 재앙적인 지진이 닥치기 전에도 아이티는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빈번하게 겪었다. 지진으로 1770년 6월에 수백 명이, 1842년 3월에 천 명이 사망했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인한 피해는 훨씬 빈번했다. 최근 기록만 보더라도 2004년과 2008년의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모두 3,500여 명이 사망했다. 아이티는 지진과 허리케인이 때마다 할퀴고 지나가는 저주받은 자연재해의 땅일까? 그러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2004년 9월 카리브해 일대를 초토화한 허리케인이 아이티에서 2,500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이웃 나라 쿠바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미국의 사회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19세기 후반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세계적 기근을 연구했다(『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2008, 이후). 그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제3세계가 “기근의 땅”, 즉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으로 현대역사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1877~78년 중국의 대가뭄 당시 기아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천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그러나 1743~44년의 대가뭄 때는 사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가뭄의 원인은 모두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계절풍의 중단이었다. 자연재해의 충격을 흡수하고 복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능력의 변화가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맺는 유기적 관계가 변화하면서 제3세계 농촌 공동체에 결정적인 취약성을 안겨 주었다. 첫째, 제국주의가 소농의 생산을 상품 및 금융 체제로 강제 통합하면서 전통적인 식량 안보가 무너져 버렸다. 둘째, 농민 수백만 명이 세계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전통적인 거래와 농민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했다. 셋째, 제국주의가 지방 재정을 몰수하고, 국가 차원의 개발 전략을 저지하면서 수자원과 관개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제국주의와 결합한 엘리뇨가 수천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한 것이다.

아이티, 노예 혁명과 제국주의의 유산

그렇다면 아이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비극의 근원을 캐기 위해서는 이 땅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티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위치한 이스파뇰라 섬의 서쪽에 있다. 이 섬의 1/3이 아이티이고 나머지 동쪽은 도미니카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이스파뇰라 섬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금광과 원주민이 급감하자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관심을 옮긴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열중하자 카리브해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 간 교역항로에서 교역품을 갈취하려는 해적들이 들끓게 된다. 해적을 피해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은 이스파뇰라 섬 동쪽으로 이주하고, 섬 서쪽에는 프랑스 해적과 ‘일반거주자’(예전에 해적이었으나 지금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1697년 리스윅 조약으로 이스파뇰라 서쪽의 1/3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것이 아이티의 시초다. (당시 이 프랑스 식민지의 명칭은 ‘생도맹그’였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아이티로 쓴다.)
18세기에 아이티는 프랑스의 값진 식민지로 육성되었다. 1780년대에 이르면 아이티는 프랑스 대외교역의 2/3가량을 차지했고, 유럽 설탕 및 커피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공급했다. 프랑스는 아이티 한 곳에서 영국이 북미 13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전체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화 과정에서 300만에 이르는 아이티의 원주민이 거의 전멸했고, 그 자리를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채우게 된다. 18세기 말에 아이티 인구 중 백인이 3만800명, 자유유색인이 2만4,800명인 반면에 흑인 노예는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50만 명 정도였다.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은 모국에서 전해오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그들만의 크리올어도 발달시킨다.
그러나 플랜테이션에서의 극단적인 착취로 당시 아이티 노예들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채 넘기지 못했다. 노예들은 가혹한 착취에 저항했다. 이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1791년 세계 최초의 노예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의 지도자는 흑인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연합하여 혁명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아이티 혁명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고 1804년 1월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 전사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이 사용한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라는 뜻)를 택했다.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일무이한 노예 혁명을 통해 건립된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일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 공화국이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1810~20년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지원했고, 볼리바르 자신이 두 번이나 아이티로 피신했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유럽 열강과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은 아이티를 주권국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바티칸 교황청은 가톨릭 사제들을 아이티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상당수가 노예농장 소유주이던 미국 지배계급의 심기는 특히 불편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아이티 혁명군을 공공연히 ‘식인종’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노예 혁명을 통해 독립한 아이티는 존재 자체가 거대한 위협이었다.
새로운 공화국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이 신생 공화국에 무거운 짐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토지개혁으로 대농장이 소규모로 쪼개져 노예 출신 소농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그러나 식민지 모국과의 무역망이 붕괴되면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지력고갈, 적절한 신규 투자의 결핍이 겹치면서 신생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는 1825년에야 아이티와 외교 및 무역을 재개하는데, 아이티는 그 대가로 1억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프랑스가 노예 손실 비용으로 청구한 이 금액은 당시 프랑스 1년 예산에 맞먹고, 아이티 10년 치 총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따라서 아이티는 탄생부터 외채의 덫에서 허덕이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아이티는 1년 예산의 80%를 프랑스에 외채를 갚는 데 써야 했다. 아이티는 120여 년만인 1947년에야 첫 번째 외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 외채의 규모는 훨씬 커져 있었다.)

미국의 개입과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20세기에도 아이티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관타나모를 점령했다. 미국은 카리브해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대외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이티도 미국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편 아이티는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내정의 혼란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1843~1911년에 대통령이 된 16명 가운데 11명이 민중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1911~15년에는 5명이 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1915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불안한 정정을 빌미로 해병대를 파병하여 아이티를 장악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약 20년 간 아이티를 직접 지배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아이티의 경제와 제도를 미국의 의도 대로 뜯어고쳤다. 아이티에서 외국인의 재산 소유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고, 국립은행을 접수하고, 외채 상환에 적합하도록 경제를 구조조정하고,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빼앗았다. 아이티 민중들은 봉기를 하고 파업을 벌였지만 미군은 잔혹하게 저항을 진압했다. 미군의 점령 기간 동안 6만 명 정도의 아이티 민중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이 물러난 후 아이티는 잠깐 동안 안정된 정국을 맞았으나 1940년대부터 다시 쿠데타와 군정의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한 혼란 뒤에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가 수립됐다. 195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와 뒤발리에(일명 ‘파파독’)가 당선됐다. 그는 1961년 의회를 해산하고 1964년에는 종신대통령을 선언했다. 그는 1만 명가량의 ‘통통 마쿠트’라는 친위보안대를 조직해 저항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납치, 살해했다. 미국은 초기에 뒤발리에의 부두교 민족주의 또는 흑인 민족주의를 우려했지만, 뒤발리에가 강력한 반공주의를 견지하자 그를 지지했다. 뒤발리에는 아이티 공산당을 탄압하고 저항하는 좌파 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혁명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카리브해와 중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도전을 받았다. 특히 1979년 3월 그라나다에서 “새로운 보석 운동”이 에릭 게리 보수정부를 전복시키고, 4개월 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해 1980년 <산타페 문서>로 발표했다. 요지는 카리브해에서 혁명적ㆍ민족적 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쿠바-그라나다-니카라과의 위협에 맞서 관타나모-푸에르토리코-파나마의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의 삼각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쿠바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티의 ‘안정’은 미국의 전략에서 매우 중요했다. 1971년 아버지 뒤발리에가 죽자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일명 ‘베이비독’)가 종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국은 그를 더욱 강력히 후원하면서 아이티를 자국의 패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뒤발리에 부자는 수만 명의 아이티 민중을 학살하고, 수억 달러를 사적으로 착복했지만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부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30년 가까이 지속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아이티 민중들의 저항으로 1986년에 아들 뒤발리에가 국외로 피신하면서 2대에 걸친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아이티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미국은 아이티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아이티를 제2의 푸에르토리코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1970년대부터 경공업과 조립 산업을 중심으로 아이티의 산업화가 시도됐다. 당시 아이티의 임금 수준은 세계 최저였고, 독재체제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에는 약 6만 명 정도가 미국 기업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시급 11센트, 즉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3달러를 받는 고한노동(苦汗勞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취약한 아이티의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986년 아들 뒤발리에가 쫓겨나던 해의 외채 규모는 7억5천만 달러로 1957년 아버지 뒤발리에 정권 시작 때보다 17.5배나 증가했다. 따라서 아이티는 국가예산의 30~40%를 해외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외채의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자로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은 아이티 경제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적용시켰다. 임금 삭감, 국영기업의 민영화, 환금작물 재배로의 전환, 관세의 철폐 등 악명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이티의 농업이 완전히 붕괴했다. 2008년 세계적 식량위기 당시 ‘진흙 쿠키’로 상징되었던 아이티 식량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아이티 민중의 주식인 쌀에 대한 관세는 50%에서 IMF가 설정한 3%로 대폭 인하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이티는 식량을 대부분 자급했다. 하지만 관세 인하 이후 쌀 수입이 1985년 7,000톤에서 2002년 220,000톤으로 30배 이상 급증했다. 국내의 쌀 생산은 거의 사라졌다. 가금류 생산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이 부문에서만 1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편 1982년에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큰 버팀목이던 토종 돼지도 전멸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손쉽게 기를 수 있어서 아이티 농촌 가구의 80~85%가 이 돼지를 길렀다. 돼지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을 제공했고,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역할을 했다. 아이티에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장례나 결혼과 같은 일을 치를 때, 병을 앓을 때, 학비가 필요할 때 팔아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1982년 돼지 콜레라의 확산을 우려한 국제기구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13개월 동안 아이티의 토종 돼지를 모두 몰살시켰다. 대신 더 나은 돼지의 도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수입된 돼지는 아이티의 사회와 생태에 완전히 부적합했다. 그 돼지는 아이티 인구의 80%가 식수난에 처했을 때도 깨끗한 물을 먹여야 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황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했다. 아이티 농민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을 필요로 했던 이 돼지는 곧 “네 발 달린 왕자”로 불렸다. 그 결과 농민들의 단백질 섭취량이 급격히 줄고, 농촌 학교의 등록생 수도 30%나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이티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 50%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5%까지 감소했다. 농촌이 붕괴하고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으면서 식량난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농업을 대체할 산업화 확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포르토프랭스와 같은 도시로 몰렸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거대한 슬럼만 형성되었다. 저임금과 낮은 세금으로 이득을 얻은 미국 자본은 아이티의 기반시설에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더 좋은 투자처를 찾아 떠났다. 아이티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던 관광산업도 1980년대 말 이후 에이즈가 확산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자 급속히 퇴조했다. 따라서 아이티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2000년 아이티의 1인당 실질GDP는 1990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민중운동의 성장과 아리스티드

1980년대 악화된 아이티의 경제적 상황과 뒤발리에 정권의 정치적 위기는 민중운동의 성장을 낳았다. 1983~86년에 확대된 반(反)뒤발리에 운동으로 독재자는 해외로 도주하고 1987년에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됐다. 구체제로의 복귀를 꿈꾸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다시 전복되었다. 1989년 가을에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농민단체, 정지조직, ‘작은 교회’ 공동체의 거대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1990년 3월에 군사정권이 축출되었다.
민중운동 세력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부 아리스티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아이티의 빈민가 포르살루에서 태어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빈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였고, 1980년대 중반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라발라스(‘거센 물줄기’라는 뜻의 크리올어) 운동으로 결집한 아이티 민중연합의 지도자가 됐다. 1990년 12월의 선거에서 아리스티드는 빈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67.5%를 얻어 승리했다. 반면 뒤발리에 정권의 장관이자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였던 마르크 바쟁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겨우 14%를 얻었다. 그러나 취임 후 7개월 만인 1991년 9월에 기득권 세력과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아이티 내부에서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과 민중운동은 군부에 저항했지만, 군부는 또 다시 납치, 고문, 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탄압했다. 약 3년 동안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수십만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카리브해를 건넜다.
이에 대응하여 유엔은 1993년 10월 아이티에 대한 석유 및 무기 금수조치와 쿠데타 주동자들의 해외자산 동결로 군부를 압박했다. 1994년 7월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940”을 통과시켜, 회원국들에게 아이티의 군부를 축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해 10월 미국이 주도한 2만 2천여 명(미군이 2만 명)의 다국적군이 아이티를 공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복귀시켰다. 아리스티드는 복귀 후 1년여의 임기를 채우고 1995년 말 선거에서 87%의 지지로 당선된 그의 후계자 르네 프레발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아이티에 개입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시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에서의 군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미국으로 쏟아지는 아이티 난민들의 행렬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아리스티드는 망명지에서 이러한 지원을 이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 역시 미국을 위시한 열강과 국제금융기구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94년 유엔의 개입은 아리스티드가 다시 축출된 후 이루어진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의 선례가 되었다. 아이티에 대한 해외 세력의 제도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한편, 아이티 민중 스스로에 의한 대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길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티드의 통치 기간에 아이티는 어떻게 변화했나, 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강력히 저항했나? 1991년 첫 번째 당선 당시 아리스티드는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을 계속 이야기했으나, 국제 채권자들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서 균형재정과 부패한 관료제도의 개혁을 약속했다. 반면에 그는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지난 5년간 발생한 불법 살인 행위에 대한 조사 위원회 설치 공약을 완화했다. 미국에 의해 1994년 권좌에 복귀했을 때도 그는 고강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이행을 약속하도록 요구 받았다. 미국과 유럽의 채권국, 초민족 금융기관은 그가 복귀한지 2달 후인 1994년 8월에 회의를 열어 아이티에게 재정 지원의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합체인 <파리 플랜>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파리 플랜은 △공공부문에 고용된 45,000명 중 절반을 해고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을 낮추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역식량 생산 대신 환금작물 재배로 농업을 구조조정하고 △외국 ‘전문가’를 정부에 고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리스티드는 일부를 수용했으나 특히 국영 밀가루 공장과 시멘트 공장에 대한 민영화 계획에 강력히 저항했다.
1995년 9월 IMF는 급진적인 정책을 배제하고,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고, 파리 플랜을 이행하라는 긴급 협정서를 다시 제시했다. 아리스티드는 그 제안도 거부했지만 단지 2년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97년 국제금융기구와 채권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후임 프레발 정부가 1년에 2천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던 국영 밀가루 공장을 단 9백만 달러에 매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과도 있었다. 아리스티드는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동시에 재정 제약 속에서도 지난 190년 동안에 설립된 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세웠다. 수백 개의 문맹퇴치센터를 세워 문맹률이 1990년 61%에서 2002년 48%로 감소했다. 쿠바의 도움으로 의대를 개설하고, 1970~80년대 섹스 관광의 유산으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던 HIV 감염율의 증가를 막았다. 아동노동 착취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고, 재분배 중심의 세제개혁이 이루어졌고, 최저임금도 2배 상승했다.
이러한 아리스티드가 2000년 선거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 국내외의 반대파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2000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대선을 거치면서 아이티의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당분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티드가 이끄는 라발라스가족당이 선거를 통해 지방정부는 115개 중 89개, 하원은 89개 중 72개, 상원은 19개 중 18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까지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 반아리스티드 세력은 곧바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집권한 미국의 부시 정부도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또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에 압력을 넣어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원조와 차관을 중단시켰다. 결국 2004년 2월 반군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에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으로 강제로 사임하여 망명에 오른다.

아이티의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신화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치안유지를 위해 다국적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번 지진 복구 과정에서도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지에서 군대가 파병되고 있고, 한국도 동참할 계획이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을 단다. 그런데 내전이나 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은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유엔 평화유지군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개입이라는 형태를 띠지만 무장해제, 치안유지, 인도적 지원 등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가? 아이티의 사례는 이러한 신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2004년 2월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반군 세력의 쿠데타를 막아달라는 아리스티드의 요청은 외면해온 유엔이 그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날 밤에 바로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곧장 만장일치로 아이티의 치안유지를 위한 다국적군 파병을 결의했다. 바로 다음 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로 해병대 150명을 아이티에 배치했다.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칠레 등이 다국적국에 합류하고, 이 다국적군이 그해 6월 유엔 평화유지군인 아이티안정화임무단(MINUSTAH, 이하 평화유지군)으로 이름을 바꿔단다. 평화유지군 관할 하에 2006년 2월 대선이 치러지고 이 선거에서 프레발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렇다면 평화유지군의 활동 중에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첫째,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보다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해줬다. 평화유지군이 아이티 민중들의 자치권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은 반대로 파병 당시부터 아리스티드의 지위를 부인하고 오히려 아리스티드의 귀국 자체를 막고 있다. 즉 아리스티드의 좌파적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가 아이티에 혹독한 경제제재 조치와 더불어 반군 세력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쿠데타를 사실상 사주한 것이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권력 재편을 기정사실화하고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둘째, 치안과 인권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 육성하고 있는 아이티 국립경찰의 상당수는 과거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사용하여 라발라스가족당 지지자들과 빈민촌 주민들, 좌파 세력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같은 보복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또 이런 범죄에 가담하는 우파 갱단을 비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티드의 축출과 평화유지군의 파병 이후 아이티의 치안과 인권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보고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리스티드 정권이 무너진 후 22개월 동안 포르토프랭스에서만 8천 명가량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70% 정도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셋째, 평화유지군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과 인권 침해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7월과 2006년 12월 빈민촌인 시떼솔레일에서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평화유지군이 갱단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슬럼 지역으로 들어와 도로를 봉쇄하고 가택 수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는 점이 동일했다. 2005년 7월에는 최소한 23명 이상이, 2006년 12월에는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는 비단 아이티 평화유지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평화유지군에 의한 각종 성적 착취의 문제를 인정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은 아이티에서 좌파와 민중세력의 성장을 막고, 미국과 채권국의 이해관계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미국은 현 대통령인 프레발을 아리스티드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로서 지난 수십 년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아이티의 재구조화 작업에 핵심적인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대재앙은 자본주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

따라서 이번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탄생부터 아이티를 옭죄었던 제국주의의 유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가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한 아이티 사회를 만들어냈다. 채권국과 국제금융기구의 개입 속에서 아이티 정부의 행정력은 극도로 취약해져, 실패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지진으로 인한 대량 사망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의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을 세 가지를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이티는 독립 후 200년 간 지속된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경제발전과 근대적인 주권국가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채의 덫은 아이티 경제를 무겁게 짓눌렀다. 2009년 6월 아이티의 외채 규모는 18억8천4백만 달러로 계속해서 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침략과 개입을 반복하면서 아이티 인민들의 주권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아이티는 과소경제, 과소국가로 부를 수 있는 제3세계 저발전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 1980년대 이후 부과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전통적인 농촌 경제마저 붕괴했다. 벼와 돼지를 축으로 하는 농촌 경제가 무너지자 많은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열악한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규모 자연재해, 특히 지진에 매우 취약한 주거형태다.
셋째,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뿐만 아니라 유엔도 채권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티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평화유지군은 군사적 개입으로 아이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구호와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 민간기구(NGO) 역시 아이티 민중들의 운동과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민간기구는 ‘위임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으로 각종 기금과 구호품을 활용해 자신의 이해를 만족시키거나, 아이티의 계급적 문제를 오히려 은폐한다. 민간기구가 오히려 정치적 운동을 상대화하고 국가기능 마비를 합리화하는 대리자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응 방법을 숙고해보아야 한다. 긴급 구호는 필요하지만 매우 불충분하고, 단순한 구호 활동은 종종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외채를 늘리는 방식의 기금 지원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라는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한 개입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아이티 파병 계획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아이티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결책은 분명하다. 우선 미국과 국제기구가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부당하게 부과된 아이티의 외채를 모두 탕감해야 한다.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티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홀로코스트를 중단하고, 아이티 혁명의 의미를 잇는 길이다.

주제어
국제 생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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