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1-2.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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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에서 ‘분노하는 사람들’과 ‘점거하라’ 운동까지

2011년 세계 저항운동 평가

임월산 | 노동자운동연구소 국제국장
2011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격변의 해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2011년이라는 제목 하의 처음 몇 단락은 아마도 부채에 시달리는 유럽에 집중된 경제위기의 분출과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 촉발된 정치적 위기로 채워질 것이다. 그 다음 몇 단락은 필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과 미국을 휩쓴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다면 이는 지속되고 있는 이 운동의 사회, 정치, 문화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 『사회운동』의 다른 글들은 경제위기를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2011년 민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성격, 세계 각 지역의 정치문화에 대한 영향, 좌파운동에 대한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투쟁의 개요

2011년의 투쟁은 실제로 2010년 12월 17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날 튀니지에서 노점 수레를 경찰에 빼앗긴 한 젊은 노점상이 경찰본부 앞에서 분신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이는 수 일간 지속되면서 강력해졌다. 시위대들은 실업과 식료품 가격 폭등, 정부 부패,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것들이 그 노점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들이었다. 거리 시위는 반정부 봉기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는 2011년 1월 14일 독재자 벤 알리를 쫓아내는 것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저항운동은 비슷한 조건에 놓인 주변 지역의 나라들로 퍼져갔다. 이집트는 1월 25일부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는 2월 10일까지 혁명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수 십 만의 젊은 이집트 민중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결집했고 용감하게 경찰과 대결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군중 시위는 바레인,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과 여타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 파업이 반정부 시위와 함께 일어났고 젊은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 힘과 사기를 얻었다. 11월과 12월에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돌아와서 압도적인 경찰폭력과 다시금 맞섰다. 그들은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와 같은 사회 개혁 이행의 실패하는 데 맞서 저항했다. 그들은 또한 최고군사위원회가 정부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고자 하는 혁명 참가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5월 초에는 ‘분노하는 사람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유럽을 뒤흔들었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첫 시위는 높은 실업률(40%의 청년 실업률), 공공부문 정리해고와 사회서비스 축소로 이어진 몇 번의 긴축 조치와, 이러한 조치로 비난받은 집권 사회민주당에 대한 불만 등에 대응하여 5월 15일 스페인에서 발생하였다. 시위는 마드리드의 푸에르토 델 솔 광장(태양의 광장) 및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플라자에서의 텐트 농성으로 이어졌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8월에 경찰이 철거할 때까지 정치계급의 특권 철폐, 실업 해결, 주거권 증진, 교육과 건강 및 대중교통 등 공공서비스의 개선,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강화, 군비지출 축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등을 요구하는 몇 차례의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근거지로 이 농성투쟁을 활용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하고 싶었던 평등한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텐트촌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텐트촌의 관리에 대한 결정, 정치적 입장, 시위 전술은 ‘전체 총회’를 통한 합의로 만들어졌다. 모든 출석자들은 동등한 기반 위에서(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요리, 청소, 기타 일상 업무는 높은 수준의 자발적 지원제를 통해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아랍 세계의 봉기가 그러했듯이,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 역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긴축과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이와 비슷한 텐트농성과 대규모 시위가 5월에서 8월 사이에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오프라인 커뮤니티 역시 독일, 아일랜드 및 기타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발전하였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가시적인 점거는 여름의 끝 무렵에 많이 없어졌지만, 운동 참가자들은 주거권에서 이민자 단속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에 관해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운동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굳게 지속하고 있다. 더욱이 10월에 유럽 전역에서 군중 시위가 다시금 일어났다. 시위는 그리스에서 10월 19-20일과 12월 1일의 총파업을 동반하여 11월과 12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들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조건으로 실행된 세금 인상, 임금 삭감, 공공부문 정리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9월에는 미국이 대중 저항운동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랍의 봄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자극받은 젊은 시위대들은 스스로를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으로 부르며 맨하탄 중심가의 월스트리트에서 몇 블록 떨어진 주코티 공원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공식 요구사항 작성을 거부하며, 소수 금융자본가와 이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1%)의 손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운동의 목표 자체로서 수평적이고 이상적 저항 형태를 강조하며 전체 총회를 주요한 의사결정 구조로 활용했다. 10월 초까지 점거운동 단위들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 도시에 존재했다. 열 명에서 200여 명에 이르는 텐트농성이 뉴욕, 오클랜드, 포틀랜드, 보스톤, 기타 미국 내 주요 도시들에서 경찰에 의해 대부분 철거된 11월 중순까지 어디에서든 지속되었다.
10월 15일 점거 시위는 세계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벌어졌고 99%라는 생각을 진정 지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위들은 미국에서 발생한 점거 운동과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나로 만들었다. 10월 15일 공동 행동의 날 호소는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이 처음 제안했고 나중에 미국에서 채택되었다. 그 날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거리의 민중들은 애초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깃발 아래 조직된 이들이었다. 10월 15일에 이어서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기타 서구 몇 나라들에서도 텐트농성이 진행됐다. 이 나라들은 이전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퍼지지 않은 곳들이었다. 유럽에서처럼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시적인 점거 텐트농성은 없어졌지만 점거 시위대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해서 예산 삭감, 주택 압류, 개인 부채, 경찰 폭력 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슈들에 관한 운동을 계속 조직하고 있다.

운동의 성격

2011년 대중운동은 지역과 국가마다 매우 달랐고 같은 국가 내 도시들 사이에서조차 달랐다. 예컨대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긴축 조치들의 철회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을 만들었지만 미국의 점거 운동은 공식적 요구나 공식적 강령 개발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무라바크 퇴진 이후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들은 정당 건설에 매진해서 11월 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총선에 참여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 실시된 총선에서는 많은 ‘분노하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부했다. 뉴욕의 점거 텐트농성은 주로 조직적 배경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로 구성된 반면 워싱턴의 점거 시위대들은 환경, 사회정의, 반전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을 가진 2011년의 각기 다른 운동들은 몇 가지 두드러진 유사점을 보인다. 이는 이 운동들을 동일한 국제적 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운동 모두 사회 경제적 불만이 쌓인 결과로 형성되었고 급격히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켰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물가 폭등과 공식 경제의 저발전, 유럽에서 사회서비스 축소와 증세, 미국에서 은행과 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및 개인 부채의 증가, 세 지역 모두에서의 높은 실업률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그러나 단지 불만에 쌓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랍세계에서 경제적 불만과 결합된 장기간의 정치적 억압은 시위대를 독재 체제의 타도를 요구하도록 추동했다. 유럽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긴축조치 철회로 집중되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매우 정치적인 비판으로 나아갔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을 면책하고, 권력이 있는 거대 기업과 IMF, 유럽중앙은행과 결탁하는 정치 시스템의 변혁을 추구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유사하다. 점거 시위대들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지출과 글래스 스티걸 법 재도입뿐만 아니라, 기업 로비 철폐를 위한 선거시스템 개혁을 촉구하는 ‘비공식적’ 언론을 대거 만들어냈다. 나아가 시위대들은 텐트농성을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간주했다. 이 세 가지 사안에서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왜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은지 명확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세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전통적 좌파에 친숙한 중앙집중적 조직 형태와의 단절을 드러낸다. 그들은 좌파 정당과 조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개인들의 높은 참여로 온라인 사회관계망을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운동 지도부들은 전체 총회 구조, 화장실에서 선전홍보에 이르는 일들을 다루는 실무팀을 통해 광장 텐트농성에서 창조된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는 중앙집중을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과 경향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에서 이러한 환경은 개인주의를 숭배하고 위계체제와 보편적 사회변혁 이데올로기(예컨대 마르크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진 사회에서 자란 미국 중산층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핵심적이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부들 또한, 미국의 경우보다는 덜 강조하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타흐리르 광장에 넘쳐났던 이와 비슷한 평등주의와 자발주의의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2011년의 운동들이 공공장소에 대한 점거뿐 아니라 운동의 이상적인 재창조도 중심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이 그들이 표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항상 따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폭력적인 시위전술 구사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져 시위 역량이 축소되는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점거 운동은 유색인과 이민자 같은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자들의 지도력 육성은커녕 동등한 참여조차 촉진하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전통적 좌파들은 더 지속적인 조직형태와 더 명확한 강령이 없이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운동들이 진정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운동들에서 확산된 수평주의적 성격은 어떤 측면에서 평가되느냐에 따라 최대의 장점 혹은 최대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큰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나타내며 따라서 좌파가 많이 배워야 할 운동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2011년의 운동들은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적, 국제적 규모로 발전하였으나, 또한 강력한 일국적 성격을 유지하였다.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민중 봉기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뉴욕 점거운동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규모는 다르더라도 그 성격이 유사한 운동을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초기 기획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전략과 전술에 관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타흐리르 광장을 언급하였다. 미국 무정부주의자들은 운동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지역의 시위대들은 서로 메시지와 지지 영상을 주고 받으며 그들이 똑같은 99%의 일부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랍과 유럽, 미국에서 나왔던 많은 담론은 실업, 빈곤, 긴축조치, 정치부패와 같은 일국적 이슈의 틀 안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미국의 개입이라는 지역적 문제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봉기의 배경이 되었지만 이 투쟁들은 일국 독재체제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고 국가적인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그리스 민중들의 분노는 ‘트로이카(유럽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가 요구한 긴축조치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를 향한 것이었지 이러한 지역적 국제적 기구들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전통적 좌파들은 지역적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을 위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의 의미를 논의하지만,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를 대개 무시했다. 대신에 그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공동 식당을 운영하고 공동체 공원을 건설하는데 매달렸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그들이 미래에 바라는 그리스 사회와 그리스 시민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의 점거 운동에서 나오는 선언들은 “모든 미국인들”을 위한 부채탕감과 일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지구적 범위에서 금융자본의 규제 요구보다는 미국 정치시스템의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2011년 운동들의 일국적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은 이전 시기 반세계화/대안세계화운동과의 단절과 지속 양자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과 그 사이의 연계 형성에 대한 주도력은 1999년 시애틀의 반WTO 투쟁과 그 이후의 세계사회포럼에 의해 형성된 네트워크의 바깥에서 온 것이다. 반세계화/대안세계화 운동은 국제회의(WTO, IMF, G7/8) 대응 투쟁 중심으로 구체화된 반면 이 새로운 운동들은 일국 정부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러한 기구들을 대개 무시했다. 그러나 각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일성-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비슷한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에서-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며 서로 배우고 공유하려는 의지도 그러하다.

운동의 영향

세 지역 모두에서 민중들의 운동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아랍권에서 민중봉기는 두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했고 다른 정권들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와 사회 개혁을 쟁취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내전과 나토 폭격이 지속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권의 운동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민중운동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도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싸워 왔다. 튀니지에서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설립되었지만 이집트 민중은 완고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군부정권에 맞서 계속 투쟁 중이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의 퇴임 이후 좌파세력의 정치적 활동은 활발해졌다. 1월 이후에 여러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이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중 이집트노조총연맹(FETU)에 의해서 창당된 민주노동당(DWP)은 이집트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기업의 재국유화와 노동자들이 정한 관리자에 의한 운영, 2)사유화와 독점화 촉진 정책 철회, 3)최저임금 인상, 4)모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 5)종교, 피부색이나 성별에 기반한 모든 차별 철폐라는 다섯 가지 요구를 내걸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타 사회주의 정당 및 조직들과 ‘좌파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세력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노선을 결성하였다. 또한 일부 사회주의 정당들은 새롭게 창당된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혁명은지속된다’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하였다. 선거연합은 11월 초 1차 총선에서 하원 7석 달성이라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직도 영향이 크지 않지만 이집트의 사회주의·좌파운동은 젊은 층의 지지를 천천히 얻어나가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 활동가와 달리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청지를 대체적으로 피해 왔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는 노동자의 파업과 더불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가 궁극적으로 퇴임하는 데 기여했다. 세금 인상과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막지 못했지만 두 나라의 대중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동원하여 권력을 이어받은 과도 정권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도입된 통행료, 지하철 요금과 재산세의 보이콧을 조직하였다. 일부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보이콧 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좌파 정당이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였다.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집권당인 중도 성향의 사회노동당이 보수적 성향의 국민당에 참패한 것이다. 반면 국회에서 2석밖에 없던 좌파연합인 통일좌파(United Left)는 8석을 더 얻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전반적인 좌파정당의 지지율 또한 급상승하여 30%에 달한다.
미국에서 점령운동은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이 왜 금융자본에 있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시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설명은 티파티(Tea Party)의 ‘큰 정부가 개인의 자산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대체하고 있다. 민주당은 재산 격차의 심화에 대한 점령운동의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점령운동이 가지는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있어서 점령운동이 어떠한 영향이 끼칠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이 점령운동과 99%의 대변인으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점령운동의 선거정치에 대한 거부감과 오바마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 이 시점에서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점령운동이 미국에서 정책결정 과정을 더 좌파적인 방향으로 추동할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점령운동은 이미 오하이오 주의 공공부문 단체교섭권 제약 법안을 폐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2011년 대중운동은 좌파 정치운동을 활성화했을 뿐 아니라 노조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일부 지역에서 노조운동과 상호 강화하는 관계를 맺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집트 민주노조들은 이집트노동조합연맹(FETU)을 결성해 국가가 통제하는 이집트노총(ETUF)에 도전하였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 ETUF은 유일한 합법 노총이었고 시위노동자를 회유하고 탄압하는 기능을 하였다. 혁명 이후에 ETUF가 많이 약화된 반면 FETU는 조합원을 배가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위에서 DWP에 대해 언급했듯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그리스노총(GSEE)은 긴축정책 반대운동에 앞장 서 왔고 7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그리스 노조들은 ‘분노하는 사람들’과 협조하여 총파업에 돌입할 때마다 수만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활발해졌다. 11월 24일 포르투갈 노조들이 1988년 이후 최초의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이후 영국 노동자들은 1926년 이래 가장 큰 파업을 조직했다. 미국노조들도 평소에 파업에 대해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거쳐 길거리로 나섰다. 미국노총(AFL-CIO)이나 서비스노조(SEIU), 화물운송노련(Teamsters), 통신노조(Communication Workers of America)와 같은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들이 운동에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자신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점령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표명하고, 이 운동의 요구를 알려내었다. 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도시에서 점거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을 벌이거나 진행 중인 노동자 투쟁을 환기시키며 일자리 창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경찰력 사용에 대한 반발이 특히 심했던 오클랜드에서는 점거 시위자들이 11월 2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요청했고(미국에서는 1940년대 이후로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노동조합은 이에 화답했다. 비록 11월 2일 시위가 총파업 수준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날 거의 5%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었다. 노조원들과 점거 시위자들은 또한 미국의 5대 항인 오클랜드 항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2011년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

2011년에 아랍권,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운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개월 전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점령운동과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 참가가는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고 아직도 대규모 집회를 동원할 능력이 있다. 이집트의 정치는 아직도 역동적이고 대규모 집회가 지속되고 있다. 2011년에 생긴 대중운동들은 2012년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물론 이 운동들이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할 능력이 있는 반자본주의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부패, 탄압과 지나친 빈부 격차를 규탄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정치와 정치적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정치적 표현을 활성화시켰고 급진적 좌파들의 활동과 입장을 위한 공간을 열었다. 더욱이, 기존 좌파조직들이 오랫동안 대중적인 동원에 실패한 가운에 수많은 대중들을 길거리로 불러내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식하면 한국에서 왜 유사한 운동을 하지 못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SNS과 점령운동의 담론을 빌려 대중적인 한미FTA 반대 운동을 촉발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대규모운동을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008년 촛불시위, 보다 최근에는 희망버스 등 우리도,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결국 대중운동을 어렵게 하는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자본의 탐욕은 미국만큼 가시적이지 않고 긴축정책과 실업이 유럽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또 한미FTA의 효과를 피부로 느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러나 중요하게 고려할 주관적인 요인도 있다. 특히, 우리는 2011년의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 추진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SNS 활용은 중요했고 ‘모든 곳을 점령하라’나 ‘우리는 99%’라는 슬로건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한 핵심 요인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카이로에서 뉴욕까지 민중총회가 상징하는 수평적인 집회와 평등한 의사결정 방식, 사람들이 꿈꿔왔던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주체들의 자신감 고취였다. 물론, 각 도시에서 똑같은 집회문화나 형식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카이로에 적합한 운동 형태는 뉴욕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카이로와 뉴욕의 운동방식이 서울에 꼭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에 맞는 운동 형태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다. 그것은 ‘조직화’란 무엇이고 ‘투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좌파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급진적인 좌파조직, 노조, 노동자단체는 물론 2011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중운동들과 유기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는 2012년 뿐 아니라 앞으로 수년 간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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