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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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에서

이상민 | 사무국
5월 19일 광주로 내려가기 전, 신문에서 유난히도 나의 시선을 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민주당 김중권 대표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등 여야정당 대표들이 나란히 5.18묘역 앞에서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분향하는 모습이었다. 97년, 최초로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어김없이 5.18이 되면 우리의 보수정치꾼들은 광주에 들려 5.18묘역 앞에서 한 판 쇼를 하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야 정치모리배들이 광주 5.18묘역 앞에 있을 때, 진정 그곳에 있어야할 5.18유가족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5.18유가족들은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접하며 과연 광주에 내려가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스스로가 되 집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부터 매해 거의 안 빠지고 내려가는 광주일진데, 올해는 왜 이리 가슴이 무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며 19일 오후 광주 조선대학교에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예상대로 '5.18민중항쟁 21주년 정신계승 및 전국 순례단 및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새벽녁까지 조선대학교 곳곳에서는 5.18 민중항쟁 21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다. 조선대학교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 동지들은 '진보와 연대를 위한 준비모임'과 '민중사랑청년연대정치위'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총파업투쟁속보를 상영하며, 갖가지 책자와 그들이 직접 만든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조선대학교 행사장을 간략히 돌아본 후 광주동지들의 일정과 결합하며, 조선대학교를 찾아온 많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상대로 대우차 총파업속보를 상영하며, 정치선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 상영물들과 구호속에는 항상 정권의 폭력이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탄압에 대한 김대중 정권 퇴진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우자동차 총파업속보 영상물과 구호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총파업속보 영상물은 그 동안 매스컴에서도 많이 다룬 보도물인지 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상영속에서도 시청하는 사람들이 20-30명은 끊이지 않았으며, 총파업속보 테이프를 사려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정권의 대우자동차 조합원들에 대한 테러사태가 있는 직후 전국민중대회(준)에서 매일 서울 주요 도심에 비디오를 설치해 이 폭력실태에 대하여 낱낱이 고발하는 영상물을 보고 많은 시민들이 끊임없는 관심과 자연스러운 김대중 규탄발언을 들을 수 있었는데 광주에 모인 전국의 노동자들과 학생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광주 동지들과의 정치선동 또한 조선대학교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주요 구호는 비정규직 철폐와 김대중정권 퇴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진행될 '캐리어 사내하청노조 탄압규탄 및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 오전 10시 캐리어 공장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는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그 울림, 그 현장에는 정권과 초국적 자본의 캐리어 하청노조원에 대한 테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2001년 피로 얼룩진 광주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b>5.18은 현재 진행형!!!</b>

다음날 20일 오전, 광주의 동지들과 함께 '캐리어 사내하청노조 탄압규탄 및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여하였다. 결의대회가 끝나고 학생들 100여명이 선두에 서서 정문 진입을 위해 정문을 뜯어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정문 뒤쪽의 콘테이너 박스가 집회 참가자들에 의해서 밀려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문 뒤쪽에 놓아둔 콘테이너 박스 뒤쪽에서 캐리어 구사대들은 사람이 맞으면 뒤로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력한 수압을 지닌 소방호스와 눈을 따갑게 하는 약품을 섞어 학생들과 뒤쪽 시위대에 뿌려 대며 돌을 던졌다. 이에 뒤쪽에서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가 돌에 맞자 뒤쪽에 있던 시위대가 돌을 깨서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있던 곳은 좁은 1차선 도로 였고 구사대들은 높은 곳에 위치한 상태 였고 넓은 공장안에 있어 시위대의 부상이 속출하였다.

콘테이너와 가려진 정문사이 구사대들의 기압 넣는 외침이 계속 들려오고, 투석전이 계속이 되었다. 구사대들이 던진 돌에 맞아 참석자 다수가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는 사이 공장 앞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몸에 물이 젖은 상태에서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투쟁이 1시간 이상 지나고, 구사대와의 공방전이 더 이상 진전이 없어지면서 대오는 망월동 참배와 국민대회 참석을 이유로 투쟁을 정리하였다.


그 날 오후 도청 앞에서 진행된 '5.18민중항쟁 21주년 정
신계승 국민대회'에서도 정권에 대한 분노와 퇴진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월 광주의 희생 위에서 탄생한 정권, 김대중 정권. 2001년 폭력과 테러로 다시 돌려준 광주의 5.18을 광주의 시민들은 지켜보는 것을 넘어 이제는 분노하며, 외치고 있었다. 5000여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집결한 가운데 진행된 집회에서 한국사회를 총체적 위기로 몰아넣고, 민중들의 삶을 외면하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퇴진의 목소리는 일치하였다. 광주의 동지들과 함께 김대중정권의 실정폭로와 캐리어 하청노조에 대한 폭력을 담은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동안에 우리들의 투쟁에 대한 더욱더 깊은 광주시민들의 관심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 위주로 배포한 유인물은 순식간에 배포되었고, 그 유인물을 읽는 시민들의 눈빛과 집회를 바라보며 발길을 멈추는 시민들의 모습은 작년 이 맘 때 광주에 올라와 시민들을 접했던 광주의 시민들은 분명히 달랐다. '더 이상 광주의 김대중 선생은 선생이 아니었고, 광주를 배반한 정치모래배에 불과하다'는 광주의 어느 시민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 자리에서 광주의 깊은 한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정권 퇴진의 목소리가 일치하고 드높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광주를 떠나며</b>

이러한 일정을 마치며, 광주의 동지들과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광주동지들과 꼭 광주사무실에서 지난 일정을 평가하며, 지역의 운동과 전체 민중운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뒷풀이를 사수하자고 약속했지만 결국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6월 초, 총력투쟁에 힘차게 결합해서 투쟁의 현장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4월 10일 정권의 부평폭력이 있은 직후 얼마 안 된 5월 1일. 전국의 노동자들이 세계노동절 111주년 투쟁대회를 진행하고 있을 무렵, 광주 캐리어 공장에서는 구사대와 용역깡패들이 캐리어하청노동자들을 무참히 짓밟는 유혈사태가 있었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21주년을 맞는 5월 17일에도 광주는 또 한번의 유혈 사태를 맞았다. 이날 캐리어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평소와 같이 캐리어 정문에서 출근선전을 하고 있을 무렵 구사대가 들이 닥쳐, 노동자와 연대하러 온 학생들과 조합원들을 집중구타하며 공장 안으로 질질 끌어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21년 전 광주는 현재 진행형일까. 정권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신념 하에 노동자를 공장에서 내몰고, 농민들을 수입개방으로 옥죄고, 그래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민중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여야 정당대표들이 망월동을 참배하고, 되지도 않는 말로 '5.18묘역 국립묘지화'나 '6.25나 월남전 참전용사와 함께 하는 5.18국가유공자법 제정'운운하며 기자회견이나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우리의 5.18민중항쟁 유가족들은 시위를 할 수밖에 없으며, 비정규노동자들은 정권의 폭력에 맞서 살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지 이유는 명백해져간다.


이제는 라디오에서도 오월이 되면 자연스레 오월의 노래가 나오고, 5.18민중항쟁이 다가오면 5월 내내 5.18 민중항쟁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진행된다. 올해는‘5월로 한마음! 통일로 한겨레!’5·18 21주년 행사 길라잡이-가슴으로 맞는‘5월 영혼’영원하라 '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고, 한 달이 넘는 기간동안 기념행사를 가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혁명정신이 확산되고, 5.18 정신계승이 확산되어 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내가 광주의 5.18민중항쟁을 처음 접하였던 것은 중학생시절, 바로 비디오에서였다. 그 때의 참혹스러운 인간에 대한 폭력의 충격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뇌리에서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역사의 진실과 정방향은 이 충격, 결코 우회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 없는 그래서 힘들더라도 모질게 정권과 맞서 투쟁했던 민중의 힘에 전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5.18민중항쟁 정신계승은 그래서 라디오나 기념행사가 아닌 치열한 현실인식과 투쟁 속에서, 투쟁하는 민중들의 발걸음 속에서 계승되고 전진할 수 있음을 다시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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