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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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3.여름.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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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전쟁

에티엔 발리바르 |
- 역자 해설 -

전쟁과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이미 『사회운동』에 세 차례 게재되었다. 앞서 실렸던 세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실린 「평화를 향한 대장정」(『사회운동』 2006년 1-2월호)은 1982년에 작성된 것으로 뉴레프트리뷰 출판사가 조직한 심포지엄에 제출된 논문을 편집한 『절멸주의와 냉전』에 담긴 것이다. 1970년대 말 미국과 나토가 유럽에 신형핵무기 배치를 강행하면서 강대국 간의 핵전쟁 위험이 다시금 고조되고,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 반핵평화운동이 다시 분출했다. 발리바르는 이 글에서 동서 핵대결의 ‘세력균형’이란 논리의 악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각국들이 먼저 핵무기 도입·배치를 중단·폐기하고 나토 동맹체계를 해소하는 ‘일방적 군비축소‘와 ‘적극적 중립주의’를 단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두 번째 글, 「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사회운동』 2004년 6월호)는 2004년에 출판된 것으로, 앞서의 글이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면 두 번째 글은 냉전이 붕괴된 후의 세계정세를 ‘세계적 폭력’이란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글은 지금의 세계가 전쟁, 이른바 ‘인종청소’, 경제의 파멸로 인한 기근과 절대빈곤, 대재앙(외견상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과 같은 유행병, 가뭄, 홍수, 지진)으로 점철된 잔혹한 폭력의 지대를 창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상이한 이유로 발생하지만 누적효과를 낳고,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원한의 경계선)을 생산한다.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이에 개입한다.
세 번째 글,「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사회운동』 2006년 10월호)은 2006년에 행한 강연문으로, 세계적 폭력시대라는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전쟁이론을 고찰한다. 저자는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들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하고 그의 이론체계에 내재한 난제와 모순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는 현실을 설명하는 묘사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역으로 군사적 목표가 정치의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처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전투로 실현되는 군사전략의 자율화와 파괴 경향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제한전쟁’은 ‘절대전쟁’으로 극단화되고, 정치의 조건 그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왕조전쟁에서 19세기 민족전쟁으로 현실의 전쟁이 전개된 역사는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이 극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면서 폭력의 국가 독점과 민족국가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통합이 점점 더 의문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역사는 한 단계 더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대별되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마오쩌둥의 ‘유격대·지구전’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경고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경유해서) 인식하고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군사전술이란 지향을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마오쩌둥 역시 혁명정당이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문화혁명을 경과하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유격대·지구전 이론을 통해 역전된 국가와 인민의 위계관계가 다시 당-국가를 우위로 재역전되는 경향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억압적 국가장치의 재건)과 절대전쟁으로의 진화 경향(정치의 조건에 대한 파괴) 역시 재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은 2010년에 쓰인 것으로, 앞의 강연문에서도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이란 문제를 부연한다. 이번 글은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계급투쟁을 ‘내전’(civil war) 또는 ‘사회적 전쟁’(social war)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적절한가?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에 나타난 ‘계급투쟁=내전’이라는 등식을 유지할 수 있었나? 러시아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델을 ‘지속되는 내전’으로 보는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 어떤 효과를 발휘했나?
둘째, 자본주의 내부에서 전쟁의 특유성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가? 여기에서 무기경쟁이 자본축적 과정만큼이나 무제한적이라는 문제가 출현하며, 나아가 식민지 분할 또는 포스트-식민지 분할이란 조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서 대중의 분할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현실검증’은 정확히 전쟁 중에 이루어졌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셋째, ‘혁명전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오쩌둥은 역사적으로 가장 클라우제비츠적으로 그의 공리를 재해석하고 실천했으나 고유한 난점에 봉착했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 또는 ‘세계적 폭력시대’라는 조건에서 사회변혁적 전망은 극단적 폭력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만 한다. 전쟁은 항상 이미 정치의 정상적 수단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를 만드는 ‘다른 수단’을 탐색해야 한다는 영구적 과제를 안고 있다.


* * *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은 정확히 말해 하나의 개념이 아니고 확실히 하나의 문제다.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에 관한 어떤 개념을 발명할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그 개념을 재창조할 수 있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이라는 질문을 자신의 문제 틀에 도입하고 완전히 독창적인 내용으로 전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또는 전쟁행위, 전쟁의 상황과 과정에 대한 비판이론을 생산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담론으로서 자신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일종의 시험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전쟁 일반과 특정 유형의 전쟁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속에는 계시적인 분석이 풍부하다. 그러나 무언가 곤란한 것이 발생했다. 전쟁이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시야를 확장하고 그 응집성을 공고히 하도록 촉진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오한 파괴효과를 생산하며 역사유물론을 그 한계들로 끌어당기고 역사유물론이 그 한계들을 진정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전쟁을 둘러싼 토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입, 따라서 평화와 정치를 둘러싼 토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입은 혁명을 추가 항으로 고려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리고 혁명이라는 관념의 유일한 배경인 ‘계급투쟁’의 형태를 고려하도록 강력히 강제함으로써) 이처럼 전통적인 대칭적 양식[전쟁과 평화]을 심오하게 교란했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개념에 끼친 교란효과는 마르크스주의 내부뿐만 아니라 이른바 ‘부르주아’ 이론 내부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의 빈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초기에 표현했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급투쟁과 혁명이라는 개념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 개념들은 ‘정치국가의 종말’을 예상하거나 정치영역의 자율성을 억제했다. 역으로 계급투쟁의 실현이자 계급투쟁의 장애물로서 ‘전쟁’과 ‘혁명’의 조합은 결국 심오하게 비정치적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전쟁을 이해하고 전쟁을 다루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로서 남아 있을 뿐더러 역사유물론이 지닌 한계의 특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비정치적 성격이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하면서 출현한다. 이는[전쟁이 비정치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이론화하려는 가장 심원한 시도의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적절성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정치라는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결책 또는 종결점은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연속적으로 세 안내선을 따라감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의 연계성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것이며 그 문제들의 함의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세 안내선 각각은 특정 저자와 텍스트에 특권을 부여한다. 물론 그 안내선은 진정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중복되지만 분리해서 검토될 만하다. 그것들은 우선 계급투쟁을 ‘내전’(civil war) 또는 ‘사회적 전쟁’(social war)으로 개념화하는 문제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와 전쟁의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적 전쟁’ 또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특유한 형태, 목적, 정치적 결과라는 문제다. 세 번째로는 혁명과 전쟁의 역사적 관계라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전쟁’이라는 결정적인 쟁점, 혁명 과정 또는 혁명 상황에서 군사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라는 문제다. 이는 혁명의 군사화를 통한 혁명적 정치의 반혁명적 정치로의 반전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문제로 나아간다.


내전으로서 계급투쟁: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개념

계급투쟁(Klassenkampf)과 ‘내전’(Bügerkrieg)의 등식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안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 내부와 그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그 등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어떤 난점이 수반되는지, 그것이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어떤 자취를 남겨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주의적 이해 속에서 그것이 강력히 부활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현재의 정치적 담론, 특히 내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적’ 개념과 ‘그람시적’ 개념 사이의 대안이라고 묘사하고자 하는 형태를 취하는 정치적 담론을 구조화하는 어떤 딜레마들을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레닌주의적 부활은 결정적이다.
이 문제는 미셀 푸코의 도발적 개입으로 인해 최근 더 두드러졌다. 1976년 콜라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의에서 그는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유명한 표어를 전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Fortsetzung)’으로 간주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고, 오히려 정치 그 자체가 전쟁의 다른 형태라고 썼다. 사실 푸코는 클라우제비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계급투쟁’이라는 표현의 계보학을 제안한다. 그 계보학은 봉건사회의 계급제도와 정복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종전쟁’에 따른 귀족과 부르주아의 대립을 해석하는 17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역사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을 ‘인종전쟁’의 변형에 따른 최근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 자신이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한 적이 전혀 없었다.) 푸코는 19세기 반혁명 측의 경쟁자였던 ‘인종투쟁’(der Rassenkampf)이라는 관념도 그러한 부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계급투쟁에 기반을 둔 세계역사 이론을 ‘발명’한 배경 중 일부를 지적하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유용하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그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를 얼마간 왜곡하며, 놀랍게도 마르크스가 정확히 그의 이론의 중심에 두었던 것, 즉 화해 불가능한 적대라는 관념을 마르크스에 반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해 불가능한 적대라는 관념의 최상의 이름은 일반화된 의미에서 정확히도 ‘전쟁’이다.)
우리는 실제 정식화로 되돌아가야 한다. 계급투쟁과 사회적 전쟁 또는 내전의 등식은 두 개의 문구에서 유래하며, 이는 『공산주의자 선언』 1장의 처음과 끝에서 발견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조합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공멸하는 것으로 끝났다. (…)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들을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전이 공공연한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폭력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이러한 동일화는 여러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첫째는 그것의 직접적인 원천과 관련되는데, 그 원천도 그 의미의 일부분을 결정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텍스트가 팔림프세스트[흔적 위에 덧쓰기]라는 것을 안다. 거의 모든 구절은 고대 또는 현대의 앞선 저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지만, 그러한 조합의 결과는 정말로 새롭고 독창적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맥락이 특히 연관성을 맺고 있다. 헤겔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칸트적 기원을 지닌 적대라는 바로 그 관념은 『생시몽주의의 교리에 대한 폭로』에서 유래한다. 바로 이 결정적인 텍스트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라는 이원적 양식을 제공하며, 노예소유자와 노예로 시작하여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생시몽주의자들은 ‘사회학적 전통’의 한 기둥이 될 관념을 스스로 채택하고 또는 체계화하는데, 그 관념은 산업화가 역사 속에서 군사적 지배형태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전쟁을 상업과 생산으로 대체하는 경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결론을 역전하려고 했는데 그는 산업혁명과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단지 전쟁의 다른 형태를 개시할 뿐이라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어떤 용어법과 은유적 담론에 의존하는데, 그러한 용어법과 담론은 좁은 배경을 지닌 것도 있고 넓은 배경을 지닌 것도 있다. 좁은 배경을 지닌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계급들 간에 죽음에 이르는 전쟁’(guerreà mort entre les classes)이라는 블랑키주의적 담론에서 직접 끌어온 것이다. 이는 신자코뱅적 담론이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파생된다. 더 광범위한 배경을 지닌 것도 동일하게 중요한데, 그것은 벤자민 디즈렐리의 소설에 나오는 서로 싸우는 ‘두 개의 국민들’이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회적 전쟁’(guerre sociale)에서 볼 수 있듯이 1840년대 새로운 산업 사회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 전체와 관련된다. 이러한 담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정식화의 의미에 관하여 나는 세 가지 점에 집중한다.

1.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에 대한 전쟁 모형을 부르주아 혁명 이후 정당 정치로서 정의된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이란 관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이해하고자 했더라도 그 모형은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수반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내전이 잠재적인 ‘국면들’과 내전이 공공연해지고 가시화되는 다른 ‘국면들’ 사이의 진동에 관해 문헌이 지시하는 바를 발전시키는 것인 듯하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정치는 바로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이행, 즉 잠재적 투쟁의 가시화(따라서 역시 투쟁의 의식화, 조직화)에 관한 것이며, 아마도 그 역도 그렇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 적대에서 하나의 결정, 즉 ‘승리’ 또는 ‘패배’라고 불리는 것에 이른다. (또한 우리는 상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는 세 번째의 교란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고대 문명의 쇠락에 대한 헤겔적 정식화를 상기시키는 ‘비극적’ 사례다.) 비록 그 당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더라도 정치에 대한 이런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에 포함된 개념의 상관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이미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여기에서 얼마간 전도된다는 것은 실제로 진실이다.
2. 역사의 전체 시대와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체 과정에 걸친 내전으로 계급투쟁을 표현하는 것은 계급들 그 자체가 ‘진영들’ 또는 ‘군대들’로 묘사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계급을 군대로 표현하는 것은 계급정당 또는 (계급정당에 종속되는) 계급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어떤 사고보다도 앞선 것이다.
3. 마지막으로 그 관념은 계급의 양극화와 자본주의의 경제적 과정의 파국적 결과라는 표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수반되는 완벽한 목적론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로 진전할수록, 자본주의 그 자체 내부의 산업혁명 속에서 우리가 진전할수록 시민사회는 더욱 더 상대방에 대해 외부적인, 근본적으로 외부적인 적대적 집단으로 실제로 분할되며, 과거의 사회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부르주아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를 아사라는 절망적인 상황 또는 반란에 처하게 할 때 최종적인 대결이 발생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이러한 모든 점은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심오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고,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그것[계급투쟁과 내전의 등식]은 잠복 기간 후에 혁명과 파국이 다시금 밀접히 상관관계를 맺는 새로운 상황에서 재가동될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마르크스는] 그것[등식화]을 곧바로 중단했고, 이를 중단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엥겔스의 ‘역사유물론’ 교리의 출현이 가능했다. 우리는 왜 그런지 이해해야 한다. 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계급투쟁과 내전의 등식은 포기되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1848년부터 1851년까지 혁명과 반혁명은 실제 ‘내전’ 양식을 보였고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와 계급정치의 관계를 그렇게[그러한 등식으로] 표현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즉 공산주의 반대방향으로 극성이 작동했다. 또한 그것은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를 그렇게 이해하는 게 부적절함을 경험했다. 그 결과로서 ‘계급 군대’라는 관념과 ‘계급 전체의 정당’이라는 관념의 관계가 역전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2.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이러한 비극적 경험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또한 내전의 각각 새로운 유형은 내전의 계급구조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 또는 내전이 계급구조를 분열시키고 왜곡시키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다.
3. 이러한 경향에 관한 가장 거대한 예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1918~1921년 레닌의 이론과 실천이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부활은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여기에는 수많은 예비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예비적 검토 대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독재’라는 통념을 두고 후속하여 이루어진 토론부터 레닌과 볼셰비키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표어에 착수하도록 촉진했던 전쟁 정세에 대한 묘사에 이른다. 여기서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낡은 사회와 새로운 사회 간 장기적인 ‘삶과 죽음이 걸린 투쟁’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투쟁은 군사적 수단과 행정적 수단, 폭력적 또는 ‘테리리즘적’ 전술과 비폭력적 또는 대중 ‘교육학적’ 전술을 결합했으며 따라서 그것은 정치 지도부(또는 정당)가 영구적인 전략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이러한 계급 전쟁도 비(非)전쟁, 또는 반(反)전쟁인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국가가 ‘소멸’ 과정의 비국가 또는 반국가로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수많은 변증법적 정식화는 실제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다룬다. 예를 들어, 군대로서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을 단련하기 위해 필요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과 계급 없는 사회로 전진하면서 동맹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4.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딜레마에 대한 묘사로 여기의 첫 번째 검토를 이론적으로 마치고자 한다. 나는 그러한 딜레마를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다. 칼 슈미트 또는 안토니오 그람시, 무엇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포스트-레닌주의적’ 개념인가? 우연치 않게도 이러한 대안은 특히 1980년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또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탐구되었고, 그 결과 그 영향을 받은 다른 곳에서도 탐구되었다. 분명히도 슈미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특정 측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정치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반작용했다. 이는 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예방적 반혁명으로 구축하기를 원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개념은 외부의 적(즉 민족의 적)이 내부의 적(국가의 계급의 적)에 대해 우위에 있는 형태를 지니지만, 실제로 그는 내부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우선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람시에 대해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적이라는 관념(심지어 계급의 적이라는 관념)의 우선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방식으로 전쟁 모델과 관계를 맺고 있은 채로 남아 있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헤게모니’의 모색이 되며 그 전략적 핵심은 서로 다른 수준의 ‘세력관계’와 관련되며, 그 전략적 핵심은 ‘기동전’에 대한 ‘진지전’의 우월성에서 절정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우월성은 상황과 사회구조 그 자체에 의존하더라도 그렇다. ‘진지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반혁명의 억압’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의 ‘수동혁명’에 대한 대안이다.


전쟁과 자본주의

나는 두 번째 쟁점에 대해서는 도식적인 방식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 쟁점은 전쟁과 자본주의, 따라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본 전쟁의 역사성이다. 그 쟁점은 막대한 문헌에 걸쳐 있다. 역사유물론은 엥겔스의 창조물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일반 이론[역사유물론]이 어디에 뿌리는 두는지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경제학 비판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사회의 ‘발전 법칙’을 해석하고 사회 또는 사회구성체(Gesellschaftsformation)가 또 다른 사회 또는 사회구성체로 변증법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해석하는 완벽한 도식으로 확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다른 방식도 동일하게 결정적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을 복잡하게 하고, 또는 심지어 계급투쟁의 전형적인 경향을 역전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필요성과 관련되는데, 이는 그런 사회적 과정들을 ‘최종심급에서’ 동일한 진화 법칙으로 감축시킨다. 여기서 종교 문제와 전쟁 문제는 두 개의 매우 결정적인 문제다. 엥겔스는 두 개의 문제를, 특히 그 두 번째인 전쟁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고, 전쟁 문제에 관하여 마르크스에 틀림없이 영향을 끼쳤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1848년 독일 혁명의 군사적 국면에서 조직가로서 엥겔스의 개인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제도의 역사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지금 논의해야 할 ‘전쟁’은 계급전쟁도 아니고 폭력적 적대라는 ‘일반적’ 또는 ‘일반화된’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전쟁, 특히 민족전쟁이며, 또한 동시에 내전, 예를 들면 미국 남북전쟁으로 그것은 마르크스의 관심을 대단히 끌었다. 1857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을 한번 훑어보면 여러 권이 완전히 또는 대부분 유럽 내외부의 외교와 전쟁에 관한 기사와 평론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유럽의 민주주의자인 동시에 (특히 그들이 훗날에 적대관계로 돌아선 영국과 러시아 동맹이 강요한 반혁명적 질서를 공격할 때 그러했다) 자율적인 역사적 행위자로서 부상해야 할 국제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를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그 문제들을 다루었다. 여기에 엥겔스가 군사 범주들과 과거 전투 사례에 대해 『신아메리카백과사전』에 기고한 설명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에세이도 추가해야 한다. 이제 이처럼 막대한 문헌들의 집대성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문헌들이 역사적 유물론을 창조하는 데 수행한 역할을 평가할 때다. 그러나 그 문헌들이 구축하려 했던 이론의 본체를 어느 정도나 그 문헌들이 실제로 해체하는지에 대해서도 토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의 가설은 이렇다. 엥겔스에게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또한 1812년 프랑스-러시아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초기 저작)의 관념들과 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비판적 영유가 발생했고, 그것은 이미 건설적 기능을 획득했다. 다른 것들이 뒤따르는데, 매번 강조점이 우리가 클라우제비츠의 전투의 ‘공리들’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다른 측면으로 이동하며, 종종 클라우제비츠의 해석을 역전시키는데, 특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의 구별, 현대전쟁에서 ‘도덕적’ 요인의 우선성,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세전략에 대한 방어전략의 우월성이라는 결정적 관념들과 관련된 해석을 역전시켜며, 이는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관념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키도록 한다.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엥겔스가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하고자 했던 ‘군사주의의 변증법’(Dialektik des Militarismus)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또한 그는 우리를 제국주의의 초기 국면으로 이끄는 당대의 경험들이 끼친 영향 하에서 전쟁행위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개념화가 전쟁행위가 계급투쟁과 맺는 관계에 대한 보편적 평가에 이르지 못했고, 더군다나 자본주의에서 무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것에서 전쟁행위의 역할에 관한 어떤 확실성에는 더욱 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엥겔스가 인정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하게 한다.
전쟁과 군사주의의 변증법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 방식에는 두 개의 다른 ‘모순’이 상호작용한다. 하나는 군사기술이 군대의 조직과 전략적 모델의 변화에 끼치는 영향과 관련되며(이는 생산력의 발전과 유비된다), 그리고 인민 또는 대중을 징병제 군대에 편입하는 것이 끼치는 효과와 관련된다(이는 사회적 생산관계와 유비된다). 다른 모순은 민족-국가의 역할과 민족들 간 경쟁의 증대, 그리고 그것이 경제의 국제화와 노동자계급들 사이의 국제주의의 발전과 맺는 적대적 관계와 관련된다. 엥겔스는 ‘기술적 개량과 새로운 무기류를 향한 경쟁이 절대적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에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안길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으로부터 무기경쟁이 자본주의 축적 그 자체의 과정만큼이나 무제한적이라는 생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엥겔스는 징병제 군대가 계급투쟁을 국가장치 그 자체의 핵심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상쟁하는 자본주의 국가 간의 일반적 전쟁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민족주의를 국제주의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망설이는 예측으로 변화한다. 이를 숙고할 때 이는 역사유물론에 강력한 불확실성의 요소를 초래하며, 우리는 이미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딜레마,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예상할 수 있다. 자국 정부에 대항하여 각국 노동자계급을 동원하고자 노력했던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에 20세기의 대 유럽내전이 발발했다.
나는 이에 따라 자연히 수반되는 문제로서,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전쟁이론의 이러한 일반적 문제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다른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엥겔스 이후 군사주의의 변증법은 제국주의 이론으로 변형되었고 그것은 지배적 민족들이 세계의 식민지 독점을 위해 경쟁하는 ‘국면’에 자본주의가 도달할 때 군사주의는 더 이상 역사 발전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고 또한 그 동력이 된다는 관념의 형태를 취했다. (역설적이게도 당대에 널리 공유된 이러한[군사주의가 자본주의의 동력이라는] 사회주의적 관념은 그 후에 파시스트 국가들뿐만 아니라 ‘케인즈주의’ 자유주의에서도 자본가 그 자신을 위한 긍정적인 가정과 계획이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것과 군사적인 것 간 상호작용이라는 문제를 다시 개방했고,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전쟁 그 자체의 결과로서 출현하고 세계적 규모에서 군사화된 국가권력 간 대결에서 주요한 ‘전략적 행위자’가 된 후 그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2. 이는 두 번째 결정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코 진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문제는 국제주의의 실제 뿌리와 실질적 성격이다. 국제주의는 그 하에서 피착취계급이 세계 정치에 특정한 방침을 강제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국제주의의 ‘현실검증’은 정확히 전쟁 중에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기정사실로 묘사했던 것, 즉 프롤레타리아 내부에서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소멸은 이제 그 정반대 방향으로의 진화를 향해 열린 위험천만한 과정으로 보였다. 한편으로 국제주의는 평화주의와(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평화주의를 설명한 최근 가장 뛰어난 사례는 아마도 반핵 사회운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념화한 E. P. 톰슨의 ‘절멸주의’ 이론일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 전통이 옹호했던 이른바 혁명적 패배주의 사이에서 동요했다. 다른 한편, 고려 대상인 대중들이 동일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유사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주민들이라는 사실, 즉 거대한 식민지 분할과 포스트-식민지 분할의 양측에 있는 국가들과 지역들에 속하며,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또한 아마도 상당할 정도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지닌 주민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국제주의는 심대하게 교란되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쟁행위의 ‘유물론적’ 이론이라는 관념과 그 관념의 역사적 기능이 소련의 군사 교리에 야기한 결과에 대한 토론을 피할 수 없다. 소련의 군사제도는 내전의 결과로서 나타났고, 그 당시에 트로츠키와 다른 이들은 적군을 창설하고 그 전략을 고안했다. 정치-군사-산업 복합체가 소련 국가의 핵심부에서 획득한 중요성을 고려할 때 (2차 세계대전 전에 이미 그러한 중요성을 획득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치 독일과 벌인 ‘대조국수호전쟁’에서 거둔 값비싼 승리 이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정치-군사-산업 복합체의 구성은 냉전 동안에 소련과 그 위성국을 실제로 지배했다. 따라서 『대소비에트백과사전』의 연속적 판본이 완벽하게 전쟁 문제를 다루며, 그곳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성전(聖典)화 된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따라서 전쟁행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역사적-비판적 검토는 우리를 국제주의라는 쟁점으로 이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국제주의는 고전적인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부터 일부 영감을 끌어왔지만 그것이 유토피아와 맺는 강한 관계를 끊기 위해 분투하면서 역사의 실제 경향으로 제시되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는 사실상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고(이는 분명히 생시몽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관념이다), 혁명적 계급투쟁의 내부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추측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고, 지극히 해결하기 어렵지만 점점 더 계급투쟁 그 자체의 관점에서 볼 때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는 민족 기능의 변화, 민족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다. 실제로 한 세기 내내 지속된 탈식민화 과정에서 사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조합은 역사에서 계급 요인과 민족 요인의 연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이끌었고, 또한 코민테른 시대로부터 삼대륙[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와 그 이후 시대까지 이론과 조직 양 측면에서 부활한 국제주의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이끌었다. 이러한 국제주의에 관한 새로운 인식도 이제는 과거에 속하며, 해방된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가 그 후 민족주의적이거나 군사주의적인 권력이 되었으므로 비판적 평가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과 정치’라는 문제의 세 번째 핵심적 측면을 토론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 세 번째 문제는 ‘혁명전쟁’의 형태와 효과와 관련된다.


전쟁과 혁명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문제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것에 도달했다. 우리가 분리해서 고찰했던 두 개의 안내선, 즉 (일반화된) 내전으로서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표현으로서 군사주의는 하나의 단일한 실제적 문제로 합병된다. 곧 어떻게 혁명을 ‘만들’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이 개입한 혁명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무엇이 그들의 핵심적 목표였는가?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변형의 하나의 거대한 ‘순환’으로서 ‘현대성’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순환 속에 자신을 ‘혁명 내부의 혁명’으로서 끼워 넣고자 노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포스트-현대성’의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그렇게 노력했다. 여기서 ‘포스트-현대성’이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포스트-민족적인 ‘새로운 전쟁’의 출현이다. 새로운 전쟁이 여전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다뤄질 수 있는지 여부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인데, 왜냐하면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은 특정 혁명 이론들을 그 이론들의 원래 의도에 반하여 전도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정교화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전쟁’이란 문제는 최소한 프랑스혁명과 그것이 유럽 정치질서에 끼친 영향으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후 벌어진 토론의 모든 요소에 원형을 창출했다. 즉 공세적인 반혁명에 대항하는 ‘방어적 전쟁’, 규율과 사기가 지휘관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대중’ 군대라는 새로운 유형의 창출(따라서 ‘정치위원’의 출현, 또는 슈미트적 용어법에 따르면 ‘독재’라는 고대 관념의 부활),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조합하는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대결(예를 들어 공포정치와 방데 반란의 사례처럼, 양측에서 ‘봉기’의 순간을 지니는 대결), ‘파르티잔 전쟁’과 ‘게릴라 전투’라는 관념의 탄생(그것의 혁명적 성격은 즉각 쟁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러시아, 스페인, 독일에서 그것이 제국주의 등등으로 전환된 ‘혁명적 민족’[프랑스]에 대항하여 수행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처럼 전형적인 ‘현대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선 적이 없지만 그 패러다임을 변형하거나 재접합하고자 했다. 전쟁의 혁명적 활용과 맺는 관계는 ‘혁명’ 그 자체의 개념이 하나의 의미만을 지녔는지 여부를 질문하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에서 전쟁은 단지 하나의 사건처럼 보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그 결과를 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전쟁이라는] 그 사건을 영토적 정복 체계로 변형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브뤼메르의 18일』에서 ‘국가 기계’(State Machine)라고 부른 것을 재창조하고 더욱 확장함으로써 [혁명의 결과를 변화시켰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전쟁은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특권적인 혁명적 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전쟁인가? 또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 전쟁인가? 두 가지 경향이 출현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항상 분리되지는 않더라도 개념적으로 대립된다. 두 경향은 (농촌과 도시에서 벌어지는 ‘게릴라’ 전쟁을 포함하는) 혁명적인 대중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대한 대중의 저항, 즉 내부로부터 수행되는 ‘전쟁에 대항하는 혁명적인 전쟁’이다.
우리는 1914-1917년 동안 레닌의 활동과,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여 중국 공산당이 이끈 ‘인민전쟁’ 동안 마오쩌둥의 활동에서 이러한 지향들을 발견한다. 두 사례에서 그것은 클라우제비츠적 공리 일부로의 놀라운 귀환과 관련되며, 그 공리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틀로 이동된다. 이러한 틀은 엥겔스가 준비한 것으로, 그와 동시에 엥겔스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이른바 ‘관념론적’으로 강조한 것을 비판하며 그에 대응하는 유물론적 등가물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제가 계급투쟁을 군대 그 자체의 내부에 잠재적으로 도입한다는 관념에서 발견되었고, 따라서 군사 문제에 대중의 관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전형적인 공포를 국가와 그 군사기구에 대항하여 대중이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 등장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켰다. 그러나 오직 레닌과 마오쩌둥을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적 조합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통일체로 대체됨으로써 그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레닌은 2차 인터내셔널과 그것의 평화주의적 의제가 붕괴된 후 클라우제비츠를 집중적으로 독해했고, 『전쟁론』에 주석을 달고 그 여백에 논평을 썼다. 그는 ‘제국주의 전쟁의 혁명적 내전으로의 전환’이라는 구호를 입안했고, (최소한 자신의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시도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인민의’ 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 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이 동반하는 공포가 시간이 지남이 따라 [귀결되는] 정치적 결과라고 묘사했다. 그 구호는 ‘절대적’ 전쟁행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탱될 수 없게 된다는 필연성에서 비롯되는 ‘방어’ 내부에서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완벽히 독창적인 해석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 구호는 국가를 희생하여 계급정치의 조건을 재창조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오직 인민을 무장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인민이 받아들인 무장력을 인민이 사용하는 것을 통제할 수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호는 이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상이 될 것이다. 또는 역사가 적법한 폭력의 국가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이동하자마자 그 구호가 정치적 환상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적 조합의 대체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고 제안한다. 슈미트의 개념에서 주권 개념은 국가의 핵심부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계급투쟁을 선제적 방식으로 억압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가 국가의 독점과, 대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활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서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구출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안을 제시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아마 가장 일관성 있게 클라우제비츠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절대적으로 아마 가장 클라우제비츠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한 개나 두 개가 아니라 모든 공리를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대장정’을 마친 후, 1938년 옌안(延安)에서 마오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에 관한 특별 세미나를 조직했고 그는 심지어 그 세미나를 위해 『전쟁론』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마오의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초기에 제국주의 적과 지배 부르주아는 무장을 한 반면 프롤레타리아와 소농은 무장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강제하는 방어전략은 궁극적으로 그 반대로 역전되며, ‘가장 강한 것’이 ‘가장 약한 것’에 의해 실제 전멸에 이르게 된다. (마오의 전략 사상이 전통적인 중국 철학과 역사기록에도 뿌리를 둔 것이 아닌지 조사하는 것도 여기서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적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은 이제 ‘지구전’으로 불리며, 전쟁의 지속시간은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소세포핵이 삼중의 결과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소농 대중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데 필요한 시간이 된다. 삼중의 목표란 다음과 같다. (1)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대항해 지역적인 게릴라 공격을 수행함으로써 적군을 희생시켜 자신을 무장한다, (2)전투지역을 전국적 수준으로 확대함으로써 전략술을 ‘학습한다’, (3)마지막으로, 민족의 모든 피지배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표현하여 외부 권력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헤게모니를 이전시킴으로써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장기간 내재적 권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의 맹점은 현재 오히려 분명해 보인다. 즉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적 맥락이 실질적으로 무시된다는 사실, 마치 민족적 세력들만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전략적 계산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위대한 구호인 ‘자력갱생’은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니고, 그것은 그 후 중국혁명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전쟁과 그 정치적 주체의 정치적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결과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도착했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점이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행위와 대중의 게릴라 전쟁 간 위계적 관계의 역전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전이 재래식 전쟁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 영향을 주는 아포리아를 얼마나 ‘해결’하는가? 오히려 그러한 역전은 아포리아를 대체한다. 즉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이 ‘절대전쟁’(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자신이 구축하고 활용해야 하는 ‘도구’의 절대적 주인이 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마오의 난점은 인민을 군대 즉 혁명정당으로 변형하는 조직의 내재적 권력이 오직 국가 그 자체가 될 때만이 전략적 역전을 완전히 수행하고 정치적 기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문화혁명’ 동안에 마오주의적 비전이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되더라도 그러했다.)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그것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혁명전쟁을 ‘최종’ 목적(Zweck)까지, 즉 적의 완전한 파괴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즉 ‘절대 전쟁’을 ‘제한 전쟁’으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과정의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진동하는 주체로 남아 있다. ‘분자 전쟁’(엔첸스베르거), 또는 ‘제국 전쟁’(하트와 네그리) 에 대한 일부 현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모습(예를 들어 ‘대중’(multitude))으로 감축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은유를 제외한다면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질문이 ‘게릴라 전쟁’을 둘러싼 토론에서 중심이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다. 게릴라 전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특히 쿠바 혁명의 승리와 그 모델을 지방의 파르티잔 거점(focos)을 연결하는 대륙적 (또는 심지어 다대륙적) 반제국주의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로 확장하려는 시도 후에 전면에 부상했다. 이러한 최근 역사의 많은 사건들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왜냐하면 결국 군사독재와 미국의 개입, 내부의 분열과 정치적 모험주의에 의해 분쇄된 혁명의 한 시대가 남긴 결과와 유산에 대한 동시대의 평가에 개인적 논란과 배신이라는 문제가 여전히 늘 동반될 뿐만 아니라, 군사화된 계급투쟁의 각 사건이 사실상 지역과 민족의 역사가 다른 이름으로 계속된 것이라는 사실이 지니는 중요도를 그 많은 논쟁이 무시하면서 그 논쟁이 여전히 추상적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원을 지니는 운동과 이데올로기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그러한 운동과 이데올로기는 내부로부터 마르크스주의적 담론을 사실상 상당히 대체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끼쳤다. 라틴 아메리카 경우에 넓은 의미의 ‘정치신학’, 예를 들자면 특히 ‘해방신학’의 형태를 취하는 ‘정치신학’은 그 분명한 사례다. 그러한 개입이 없다면 최근의 멕시코 사파티스타와 같은 ‘포스트-군사적’ 게릴라 운동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파티스타는 ‘방어 전략’이라는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아갔고, 대중적 저항을 국가권력 장악과 자발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지배적 사회질서의 점증하는 군사화와 사회운동에 테러행위를 수행하는 예방적 반혁명 기법에 대응했다. 따라서 사파티스타는 정치적 ‘자기억제’라는 점에서 ‘진지전’이라는 그람시적 관념에 새롭고 예상할 수 없었던 내용을 부여했다.


윤리, 정치, 인간학

위에서 환기시킨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은 이제 21세기 초반에는 비가역적인 과거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문제들이 논의된 변증법적 용어들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전쟁’은 정교한 기술과 ‘고대적’ 야만을 결합시키며 외부적 개입을 ‘시민들의’ 적대 또는 내생적 적대와 연결시킨다. 새로운 전쟁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새로운 전쟁은 마르크스가 우선시한 계급 결정론보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홉스적’ 모형의 부활로 보인다. 일반화된 적대라는 새로운 전쟁의 모형이 ‘적법한 폭력을 독점’하는 현대 국가제도 이전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에 출현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그 모형은 ‘포스트-제도적’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제국주의의 정복 또는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중요한 요인을 동반하더라도 그것은 특유한 ‘혁명적’ 내용이나 전망이 없으며 오히려 민족주의적, 종교적, 또는 문화적 내용이나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정치, 전쟁, 혁명이라는 범주를 지속적으로 긴밀히 엮었던 마르크스주의의 고심과 노력의 거대한 순환이 모든 관심을 잃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첫째, 그것은 정치적 교훈을 깨닫게 한다. 『공산주의자 선언』 이후 150년 이상으로 ‘평화적 전략’(더욱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주의적인 혁명 전략)과 ‘무장혁명’ 전략(즉 비판의 무기와 무기의 비판) 양자는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는 데 실패했다.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일 뿐이며, 자본주의는 거대한 영역의 사회적인 무정부 상태 또는 아노미 상태를 발전시킨다. 이는 혁명적 변혁이라는 문제가 잘못 정식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혁명에서 전쟁이 전략 또는 전략적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조건, 요소이며 근본적인 사회적 변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혁명적’ 전망도 착취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적 폭력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전쟁’이 역사유물론의 경계 또는 한계(Grenze)라면 (종교도 마찬가지인데, 부분적으로는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전쟁은 역사유물론의 갱생(또는 아마도 초월)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도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착취 과정이 (다른 요인들도 기여하는) 폭력의 일반경제[일반질서]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 계급투쟁과 내전의 최초 등식이 대체되거나 다시 개념화될 수 있다면 그렇다. 그 결과로, 상이한 형태의 ‘전쟁’은 항상 이미 정치의 ‘정상적’ 수단이지만 정치를 만드는 ‘다른 수단’에 대한 탐색은 영구적이며, 잠재적으로 전복적이다.
주제어
평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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