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반란을 찾아서
  • 2015/06 제5호

4월혁명 밤의 시위대

혁명의 숨겨진 주인공 도시빈민

  • 오제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1960년 4월혁명은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결과 이승만 독재를 무너트린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4월혁명의 주인공으로 대학생들을 떠올린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1960년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주인공은 분명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힘으로 4월혁명이 가능했을까? 4월혁명 전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망자는 총 186명이다. 이 중 대학생은 22명인데 반해, 도시빈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층노동자(61명)와 무직자(33명)는 무려 94명이나 된다. 4월혁명 당시 도시빈민의 희생이 컸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4월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빈민의 ‘밤시위’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4대 정부통령 선거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이에 마산의 민주당 당원들은 당일 곧바로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규탄 시위를 벌였다. 낮에 시작한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동참한 가운데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낮시위를 주도한 민주당 당직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과 체포가 있은 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녁 7시 정도가 되자 민주당 마산 시당사 앞에는 다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몇몇 청년들의 주도 아래 남성동파출소를 향해 진격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들은 돌멩이 막대기 등 손에 잡히는 것만 있으면 닥치는 대로 파출소로 던지고, 파출소로 진입하여 사무실 집기 비품 등 가릴 것 없이 때려 부수고 공문서 서류 등을 찢고 팽개쳐버렸다. 

3월 15일의 밤시위는 마산 시내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밤시위 당시 시위대를 주도하는 청년, 학생들은 불이 훤히 켜진 건물에다 대고 “불을 끄시오!”하고 큰 소리로 경고했다. 경찰이 시위대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등화관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는 바람에 온 시가는 암흑천지, 어둠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시위대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특히 자유당 마산시당 사무소, 국민회, 서울신문 마산지사 등을 지날 때 몽둥이로 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돌팔매질로 건물을 파손시켰다. 

밤의 익명성은 사회적인 약자가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3월 15일 밤시위는 학생보다 시민이 주도했다. 특히 도시빈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일례로 당시 마산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귀환동포’가 다수 거주하는 신포동 주민 중에, 품팔이, 부두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홍등가의 여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늘진 곳에서 군말 없이 숨죽여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려주는 어두운 밤에 그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과 응어리진 한을 폭발시키려는 듯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3월 15일의 격렬한 밤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2차 마산항쟁 과정에서 재개되었다. 2차 마산항쟁은 1차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도시빈민을 비롯한 시민의 호응과 열기 또한 훨씬 압도적이었다. 시위대는 여러 파출소를 타격하는 한편, 마산시청, 창원군청, 경찰서, 소방서, 자유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형무소 등에도 돌 세례를 퍼붓고 건물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손했다. 또 밤시위 과정에서 불빛을 내보내 시위대의 행동에 지장을 준 제일은행 마산지점, 마산일보사에도 투석 세례를 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마산의 항쟁을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의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일 뿐이었다. 소외된 도시빈민들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의사와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힘의 행사 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밤은 자신의 언어를 표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다. 권력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의사와 요구를 분출할 수 있는 밤은, 그래서 권력에게는 두려운 시간이었다. 실제로 마산에서 시위대가 타격한 시설들은 대부분 권력기관 혹은 권력과 밀착한 어용기관이었다. 특히 정권의 첨병으로서 민중의 원성을 많이 받았던 경찰 시설이 많이 공격당했다. 이는 당시 밤시위를 주도한 도시빈민들이 이승만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만이 컸음을 잘 보여준다.
 

‘피의 화요일’의 도시봉기

4월혁명의 클라이맥스인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서울, 광주, 부산에서도 도시빈민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날 그들은 ‘낮’에도 자신의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권력과 치열하게 맞섰다. ‘밤’에는 시위가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래서 이날은 ‘피의 화요일’이 되었다.

4월 19일 광주의 오전 시위는 고등학생만의 시위였다. 그러나 오후 들어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파출소가 보이면 공격해서 유리창을 부수곤 했다. 시내 쪽 파출소들은 모두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밤이 되었을 때 시위대는 “폭력 경찰 때려죽여라. 민주 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가 경찰서 주변에 모여들자 경찰은 실탄사격을 개시했다.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7명이 사망했다. 7명을 직업별로 분류해보면 공원(노동자) 2명, 취업준비 중인 속성학원생 2명, 무직 3명 등이었고, 학생은 단 1명도 없었다.

4월 19일 부산에서도 다양한 집단이 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구두닦이, 전차표 파는 사람, 음식점 종업원, 넝마주이, 엿장수 등 도시빈민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특히 구두닦이, 넝마주이들은 인상적인 외형 때문에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4월 19일 부산진경찰서 습격에 적극 가담했다. 오후 2시경 서면로터리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가 부산진경찰서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경찰은 총을 난사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경찰차와 소방차, 트럭에 불을 지르며 저항하였다. 연기와 총성으로 뒤덮인 서면 일대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월 19일 밤 서울에서도 일부 시위대가 경찰에게서 무기를 탈취하여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다가 종로3가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40여 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밤거리를 달리며 시위하던 시위대는 동대문, 청량리 주변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모조리 불태우고 30여 정의 카빈총을 빼앗았다. 이들은 서울 동북부를 누비며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 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창동 지서 경찰들과 한참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 무렵 안암동 고려대 뒷산으로 퇴각했다. 계엄군은 시위대 1500명을 포위하여 고려대 안으로 몰아넣었다. 계엄군이 무장한 시위대를 무리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대신 투항을 유도하자, 결국 시위대는 무기를 벌이고 자신 해산했다. 반면 고려대에 들어갔던 시위대 중 약 200명의 어린 소년들은 철조망을 뚫고 안암동 쪽으로 도망쳐 4월 20일 아침 신설동 로터리와 성북구청 사이에서 계엄군 지프의 유리창을 모조리 부수는 등 과격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3대의 버스와 12대의 택시를 탈취해서 거리를 폭주하면서 구호를 외치다가 아침 7시 20분경 출동한 성북서 기동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도시 무장봉기나 다름없는 이러한 과격한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 중에는 소수의 대학생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야간중고등학교나 공민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고학생을 비롯한 도시빈민이었다.
 
 
대구시청 앞에 몰려든 많은 군중들이 집회를 갖고 있다.
(1960.4.20)
 
4월혁명 당시 도시빈민의 시위는 사회경제적인 불만과 권력에 대한 분노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정하게 ‘조직’과 ‘연대’의 힘도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도시빈민 중 고아,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은 나름의 조직을 만들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또는 학생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력과 연대가 도시빈민들의 자연발생적인 불만, 분노를 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게 한 것이었다.

1960년 4월 26일 주요 도시에서 4월 19일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시위가 재개됐다. 모두가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고 결국 이날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부산, 대전, 대구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에 도시를 휩쓸던 시위대는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 즉 양아치로 불리는 불량청소년과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의 직업소년들이 태반이었으며, 이밖에도 깡패, 홍등가의 여인, 품팔이, 넝마주이, 노동자가 더러 끼어있었다. 
 

4월혁명의 기억 속에서 
잊힌 도시빈민

4월혁명 과정에서 도시빈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4월혁명의 주인공으로 도시빈민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왜 도시빈민은 4월혁명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까? 도시빈민과 더불어 4월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학생들은 도시빈민의 과격한 행동을 ‘파괴’와 ‘혼란’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이승만 하야 이후 질서를 회복하는 데 앞장서는 방식으로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했다. 지식인과 언론도 도시빈민의 과격한 시위를 비난하고 대학생의 질서 정연한 시위 모습을 칭송하면서 이러한 구별을 더욱 분명히 했다. 4월 19일 이후 주요 도시에서 치안을 담당한 군 수뇌부 역시 과격한 시위를 벌인 도시빈민을 일반 학생과 구별되는 ‘깡패’와 ‘불량배’로 간단하게 낙인찍어 버렸다. 즉 그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내세우기 어려웠던 도시빈민은 혁명의 주인공 자리를 박탈당하고, 대학생만 혁명의 유일한 주체로 남게 되었다.


이렇듯 4월혁명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행동 이외에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직업소년 등 도시빈민은 혁명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4월혁명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수 있었을까? 도시빈민의 급진적인 시위 형태는 결국 시위대와 독재정권 사이의 대립을 화해불가능한 적대적 대립으로 만들었다. 학생 일반의 설득력 있는 호소력이 결합된 조직적 시위와, 이들이 만들어 낸 시위 공간에 적극 참여한 도시빈민의 자발적이고 급진적인 시위는 서로 불과 기름의 관계처럼 작용하면서 시위를 혁명의 성격으로 발전시켰다. 도시빈민도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4월혁명의 당당한 주체였음에 틀림없다. ●

 

<기획연재 : 우리의 반란을 찾아서> 목차

1894년 동학농민운동
1919년 3.1운동
1929년 원산총파업
1946년 전평총파업
1960년 4.19혁명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1991년 5월투쟁
1996~97년 총파업
2008년 광우병촛불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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