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5/07 제6호

노동자 교육은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서 멈췄는가

  • 홍명교 편집실 미디어국장
노동교실에서 노래부르는 청계피복지부 노동자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동의 대가는 한곳으로 몰려 어느 부류의 족속들만 배를 부린다. (…) 우린 왜 그런가를 배워야 한다. 깨우쳐야 한다. 그 깨우침과 직결된 노동교실은 저들이 빼앗아갔다. 무식한 녀석들이 알기 시작하면 시끄러워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청계피복노조, 1978년
 
1970년 11월 스물둘의 재단사 전태일의 죽음은 마른 들판을 태우는 불씨였다. 당대의 대학생,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자생적인 민주노조운동도 일기 시작했다.

전태일이 죽고 불과 2주가 흐른 후 전태일의 동료들은 2만 5000여 명에 달하는 청계천 인근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지역 업종노조를 결성했다. 청계노조는 198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해산 조치에 의해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까지 수년간 크고 작은 투쟁을 벌이며 수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해나갔다.

청계노조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했던 주된 무대는 바로 청계노조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이었다. 동화시장 건물 2, 3층과 옥상에 걸쳐 자리 잡았던 노동교실은 당시 청계노조가 평화시장 등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만나는 매개였고, 이렇게 모인 노동자들의 관계맺음과 교육이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격렬했던 투쟁마다 조합원들은 노동교실의 문을 봉쇄하고 무기한 농성을 전개하는 방식의 전술을 구사했다. 조직화와 배움, 관계맺음과 저항이 모두 노동교실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사실 청계피복 노동교실은 육영수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1972년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청와대까지 초청된 청계노조의 한 간부가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 육영수에게 ‘평화시장 여성들에게 공부할 장소를 달라’고 답한 게 계기가 됐다. 이듬해 동화시장 건물에 ‘새마을노동교실’이란 이름으로 개소하려던 노동교실은 자본가들의 일방적 가로채기로 운영권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2년 후 봄날 청계노조는 기습적인 건물 점거 투쟁으로 운영권을 되찾는다.
 

배움, 투쟁, 연대의 공간

1975년 스무 살이었던 신순애 씨는 동화시장 5층 다림사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극악한 조건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는 어느 날 공장 안에 날아들은 노동조합 유인물을 보고 노동교실을 찾았다. ‘중등 수업 무료’ 문구 하나 때문이었다. 청계의류공단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처럼 국민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에 와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와야 했던 여공들이 지닌 배움에 대한 열망. 그것이 노동교실을 키우는 힘이었다. 어린 시다들과 미싱사들의 특별한 우애 역시 노동자들이 노동교실을 아끼게 된 요소였다. 신순애 씨는 “공장에선 칭찬보다는 야단맞는 일이 더 많은데, 노동교실에는 웃음과 사랑과 행복이 가득했다”고 증언한다. 

청계피복 노동교실은 교양교육(중등기초과정, 일반교양)과 조합원교육, 기술교육(재단, 봉제 등), 도서실 운영 등 세 가지 체계로 운영됐다. 그러나 오히려 교양보다는 기술교육이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작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이소선 여사가 노동교실 실장으로 오게 된 후에는 노동교실 앞에 붙어있던 ‘새마을’이란 수식어도 빠지고 운영도 안정화됐다. 노동 상식이나 연극, 한글 교실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교육이 이뤄졌다. 

지역노조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청계노조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 특히 노동교실은 투쟁을 경험하고 운동의 주체가 되어가는 또 다른 의미의 ‘학교’였다. 임금 인상, 노동시간 감축, 단협을 만들고 노조를 지키는 투쟁 등 많은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타 노조에서 투쟁이 일거나 청계노조 소속 사업장에서 문제가 벌어졌을 때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연대하는 기풍 역시 존재했다.

청계노조의 노동교실 이후, 70년대 중반부터 개혁적인 교회들에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노동야학들이 생겼다. 이들은 검정고시라는 실용적 목표가 아닌 노동 현실에 대한 인식, 노동법 학습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야학들은 다시 수많은 소모임을 배양하며 1980년대 노동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예비하는 주체들을 모았다. 실제로 1981년 청계노조 강제해산 때 구속되지 않았던 일부 조합원들은 청계모임을 결성해 인근의 야학생들을 다시 모아냈는데, 이는 해산 이후 청계노조 부활의 단초가 되었다. 
 

산업선교와 야학운동

1960년대까지 단순히 시혜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던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가 보다 목적의식적·사회운동적 지향을 갖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기독교 야학은 자생적으로 뭉쳐 노조를 만들고 임금체불, 근로기준법 준수 투쟁을 벌인 노동자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고, 중요한 투쟁들에 실천적으로 결합했다. 

다양한 산업선교 그룹들과 가톨릭노동청년회, YMCA 등은 도시 곳곳에서 소모임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유신 이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생활실습, 교양, 음악과 오락, 성경공부, 노동의 의미와 노동법, 노동운동사 등을 가르치는 교육을 전개했다. 1960년대 이후 산업선교 활동을 하던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와 관계를 맺으며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형성하고 최초로 민주집행부를 세운 여성노동자들은 어용 간부들에 맞서 치욕스럽지만 영광스러운 투쟁을 할 수 있었다.

5월 광주항쟁 한복판을 관통한 들불야학 역시 이 흐름의 한 축이었다. 노동야학이 침체에 빠진 학생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당시 전남대 학생활동가 박기순, 윤상원은 동분서주하며 사람과 재정을 모아 야학을 세웠다. 갑오농민전쟁에서 착안해 ‘들불’이란 이름도 지었다. 1979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들불야학은 단숨에 많은 지역주민들과 공장노동자들을 모았고, 당대 광주지역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광주항쟁 시기 도청을 끝까지 사수해 1980년대 사회운동 전반에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자취방 야학과 노동자대투쟁

1970년대의 노동교실, 노동야학이 시대적인 모순에 맞선 주체를 조직하고 대중운동을 예비하며 토대를 구축하는 시기였다면, 1980년대는 그야말로 노동야학이나 비공개 소그룹이 물밀듯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무수한 노조 건설과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 나아간 본격적인 실천의 시대였다. 

대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노동 야학 형태의 교육운동을 고민하고 이념적인 토대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국어, 사회, 역사, 미술 등 다양한 교과 교육과 취미교육, 문집 발행 등이 주된 커리큘럼이었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찾기 위한 전선으로 나서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주체들의 주된 고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노동야학들은 1983년 야학연합회 사건 등에 의해 해산되거나 비공개 소그룹으로 전환해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이를 계기로 상당수의 역량이 노동현장으로의 진출로 집중된다.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에서 비공개적 형태의 야학, 현장진출 순의 진로를 당연하게 여기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소모임들은 노동자들을 모으고, 노동운동가로 훈련시키는 공간이었다. 사업장별로 열성 조합원들이 모여 학습모임을 꾸렸고, 노동법이나 경제, 역사 등을 공부하거나 신문 사설을 읽고 정세와 노동운동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소모임, 야학 등은 이후 지역과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활동가로 교육하는 주요한 장소였다. 학출 활동가들은 소규모 학습모임을 통해 현장의 노동자들을 조직해나갔다. 이런 활동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발현된다. 구로공단 10개 공장에서 2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무후무한 동맹파업에 참가했고 이는 이후 폭발적인 노동자대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후 1987년에 새롭게 결성된 노조만 1060개에 달했고 쟁의건수는 3458건이었다. 1년새 50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270만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나섰고, 이는 전노협 건설의 동력이 되었다. 이때 노동자교육은 민주노조 만들기를 위한 실무·전술 지원으로 집중된다.
 

대중조직으로, 지역으로

1987년 이후 노동자교육은 노동조합 안에서 이루어진 일상적 교육과 노조 바깥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노동자교육으로 나누어진다. 전노협에서는 재정과 역량상의 어려움, 교육사업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경향, 간부들의 잦은 교체와 당장 닥친 투쟁에 집중하는 문제로 교육 자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정권의 탄압이 심해서 생기는 제약도 컸다. 일회성의 정세 교육이나 실무 전수가 교육의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조 바깥에서도 활발한 노동자교육이 시도됐는데, 부족했던 전문성을 강화하면서도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형태를 지향했다. 그러나 부족한 수업 내용 등으로 인해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런 형태의 노조 밖 교육기관을 거쳤고, 많은 중도 이탈을 감안하더라도 완전한 실패라고 볼 순 없다.(천성호, 《한국야학운동사》, 학이시습)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20년이 지났다. 초기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나 산별노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교육이 많았다. 전노협 때보다는 훨씬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졌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강좌나 심화된 내용의 사회과학, 철학 강좌도 여럿 개설됐다. 산별노조마다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기초-중급-심화, 조합원-간부-대표자별로 나뉜 차별성도 갖추었지만 여전히도 안정적이고 성과가 쌓이는 구조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로 노조에서의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의식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거나 활동가들이 재상산되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게 교육 활동가들의 전반적인 평가다.

2000년 전후로는 노조 바깥에 사이버노동대학, 노동자교육센터,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등 여러 교육기관들이 만들어졌다. 노조의 싸이클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교육 커리큘럼과 꾸준한 활동가 양성을 하겠다는 것이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다만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고,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진단도 조금씩 다르긴 하다.
 
여성노동자들이 독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1981, 경향신문
 

노동자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대중조직은 꾸준한 교육을 토대로 조직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조직이 확대되고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당면 투쟁에 매몰돼 재생산 구조를 만드는 것 자체를 놓치고 있다. 차세대 리더쉽이 만들어질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여기엔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당장 조합원들은 ‘교육’이라고 하면 지루하다는 인상이 크고 참여에도 소극적이다. 소규모의 토론식 교육은 진행도 어렵고, 진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활동가도 부족하기에 그저 유명한 강사들을 섭외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단기적인 성과에 목을 매, 닥친 일정을 거칠게 소화하거나 도구적으로 진행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 노동운동은 대공장-남성-정규직 중심의 틀을 넘어 청년-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지난 과거를 봤을 때 교육은 곧 조직화, 대중운동의 부활과 맞닿아 있다. 민주노조 운동이 내재적 힘을 갖고 성장했을 때마다 언제나 그 뒤엔 ‘교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과 맞닿은 교육 기획은 전무하다. 그것을 추동할 활동가집단도 보이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투자, 급진성의 삽입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어딘가 한참 모자라다. 문제는 뛰어난 강사들에게 높은 출석률로 여러 차례의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 학습의 중심이 되어 노조를 강화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차세대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구조적인 비판의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통일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미래 노동자운동의 방향과 맞닿아 있어야 할 게다. 지역마다 학습모임들도 계속해서 생겨야 한다. 극소수의 전문강사들에게 의존하는 교육을 넘어 일상적 교육이 이뤄지려면 세포분열하는 재생산 시스템은 필수다.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활동가 기초과정> 참여식 수업의 한 장면
 

노동자교육의 새로운 위상을 위해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교육이 미진한 오늘의 현실을 방법론에 집중해 진단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교육 방법이 만악의 근원이었다면 모순적인 세상의 한복판에 무방비상태로 놓인 개인들의 존재 조건과 사회구조 문제를 도외시하거나, '참여가 곧 주체를 만든다'는 식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오히려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지식교육을 중심에 놓고, 단계별로 내용에 어울리는 형식을 구축해야 한다. 개방적이고 참여식이면 무조건 좋다고 일반화해선 곤란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뭐든 잘 안다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교육을 어떤 직업을 갖거나 실력을 배양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인식하는 교육관,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도 팽배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의 효과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급하게 성공이냐 실패냐를 논하기 전에 노동자 지식교육의 일상성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권리를 실현하겠다는 노동교육 근본의 지평에서 다시 사고해야 한다. 

이제 노동자교육운동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를 위하여 첫째로 노동자지식교육의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이는 끊임없는 평가를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비판적 인식을 확장하는 매개(미디어)가 있다면 보다 많은, 조직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전국적 규모의, 자가증식하는 교육 시스템도 필요하다. 그것은 1980년대 들불처럼 일었던 학습소모임의 두 번째 전성기를 여는 것이어야 하고, 미조직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고, 교육하고, 조직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전국적인 노동자교육운동의 부흥을 통해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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