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란을 찾아서
- 2015/08 제7호
5.18 대중봉기의 대의는 무엇이었나
미완의 쿠데타와 성공한 쿠데타
한 개인에게 모든 국가권력을 집중시키고 종신 집권을 가능케 했던 유신체제는 그 개인이 사라지면 붕괴할 운명이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유신철폐 시위는 예상하지 못한 도시 하층민들의 격렬한 항쟁으로 확산되었고, 비상계엄선포와 공수부대 투입으로 겨우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그 여파는 10월 17일 유신 선포 7주년을 유신체제의 마지막 기념일로 만들려는 전국적인 반정부운동의 속개를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의 몰락을 예감한 권력자들이 한 발 더 빨리 움직였다.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고 유신체제는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그것은 정보기관 권력자가 감행한 쿠데타 시도로서 미완으로 끝났지만, 박정희가 각별히 총애한 육사 출신 장교들의 또 다른 쿠데타로 이어졌다. 훗날 신군부라 불린 ‘하나회’ 장교 집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12월 12일 자신들이 지휘하던 군대를 동원해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반발하는 일부 장교들을 총격전까지 벌이며 무력으로 제압했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유신은 무너졌으나 그 체제에서 육성된 ‘박정희의 아이들’의 쿠데타는 민주화를 수용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국가주권의 최후 보루인 군대를 앞세워 주요 정보·권력기관을 장악한 ‘하나회’와 그 지지세력은 시국수습방안으로 5월 18일 0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이 선포되고 야당 지도자들은 가택 연금되거나 연행되었다. 모두가 기대하고 요구했던 ‘민주화의 봄’은 오지 않았다.
봉기의 시작
5월 18일 일요일에 오직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만이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이미 투입되어 있던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전개했다. 며칠 전 5월 15일 서울에서 30개 대학 7만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자진 해산한 것(‘서울역 회군’)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진압을 시도했다. 적을 절멸하도록 훈련받은 그대로 광주 시민들을 적으로 대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검시보고서에 따르면 불과 열흘의 항쟁 기간 동안 곤봉이나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당해 ‘타박사’한 경우만 14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5월 19일 이후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거리로 몰려나오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5월 20일은 첫 번째 분수령이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곳곳에서 거리 시위를 벌였고 저녁에는 200여 대의 택시가 금남로에서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도청을 향한 길목과 광주역 광장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해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다. 5월 20일 밤과 21일 새벽까지 광주MBC, 광주KBS, 세무서 건물이 불타올랐다.
오월의 소설을 대표하는 《봄날》의 작가 임철우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 밤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지요. 그 열흘 기간을 통틀어 가장 극렬하고 처참한 시가전을 순전히 육탄전으로 시민들은 치러냈던 것이지요. 수많은 이들이 그날 밤 거리에서 죽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그때 일을, 그 장면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만 같았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어떻게 저 평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한 덩어리로, 그야말로 미친 듯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을까.”(《실천문학》 2013년 겨울호)
시민군의 출현
광주 시민들의 강렬한 저항에 직면해 5월 21일 오전 계엄사령부는 자위권 발동을 위해 실탄을 지급하고 시내 외곽으로 공수부대를 일시 철수하는 방안을 준비했다. 5월 20일 밤의 ‘작은 승리’를 경험한 시민들은 21일 도청을 향해 운집해 시위를 전개했고 계엄군의 최후 저지선을 위태롭게 했다. 결국 오후 1시를 전후로 계엄군은 도청 앞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물론 5월 19일과 20일에도 산발적인 총격이 있었고 그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21일의 집단적 발포는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은 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광주에서 가까운 화순과 나주부터 비교적 멀리 있는 강진과 해남, 곡성과 구례까지 곳곳에서 경찰서,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를 털었고 탄광에서는 폭약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탈취한 M1과 카빈소총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폐물이었고, 최신 무기 M16으로 무장한 2만여 명의 계엄군과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총을 제대로 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도청 지하실에 배치한 다이너마이트나 TNT는 위협용이었기에 폭파시키지 않았고 나중에는 뇌관도 분리해뒀다. 무장투쟁이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계엄군을 절멸하려는 의지도 패퇴시킬 능력도 없었다. 시민들의 무장은 ‘정치투쟁의 최고 형태’라기보다는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한다는 상징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시민군이 출현하자 계엄군은 오후 5시경부터 시 외곽으로 철수해 광주 봉쇄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는 계획되어 있던 퇴각과 봉쇄였고, 차후 적절한 시점에 ‘소탕 계획’을 실행하려는 작전의 일환이기도 했다. 시민들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이 계엄군의 작전을 변경시킨 것은 분명했지만 치열한 교전 끝에 시민군이 계엄군을 패퇴시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5월 21일에 시민군의 총격이나 공격행위로 사망한 군인·경찰은 0명이었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2007년)에 따르면, 항쟁 기간 동안 군인·경찰 사망자는 27명이며, 이 가운데 차량사고 7명(계엄군 3명, 경찰 4명), 오인사격 13명, 오발사고 1명을 제외하면 시민군에 의한 사망자는 5명이다(5월 22일 2명, 23일 1명, 27일 2명). ‘오인 사격 13명’은 5월 24일 공수부대와 전교사 병력이 서로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교전하다가 사망한 것을 가리킨다.
고립된 해방광주
5월 21일 오후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고립된 ‘해방구’가 되었다.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하고 기동순찰대를 구성하여 방위와 치안을 유지하고 자치 질서를 세우려 노력했다. 한편으로 종교인, 지역 유지, 엘리트 등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를 회수하면서 계엄군과 협상을 통해 무력 진압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와 같은 해법은 계엄군의 불응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수습파와 달리 항전파는 무기 회수에 반대하면서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매일 도청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해 항쟁의 대의를 결집시키고, 결국 5월 26일에는 ‘투항’으로 기울어가는 수습파를 도청에서 몰아내고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와 계엄군의 진입에 대비하는 기동타격대를 결성했다.
투쟁위원회의 실질적 지도자인 상황실장 박남선(26세)은 골재차량 운전사였고, 기동타격대 대장 윤석루(24세)는 자개공이었다. 그리고 대변인 윤상원(30세)은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 항쟁 기간에 ‘투사회보’를 발행하고 항전파를 조직한 활동가였다.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날 밤이 마지막이라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시민군은 도청과 YMCA 등에서 500여 명 정도가 최후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 항전의 의미는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깨끗하게 죽겠다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옥쇄(玉碎)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윤상원은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도청을 빠져나가길 바랐고, 남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을 설득해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려고 했다. 5월 26일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광주항쟁의 대의를 설명했다. “시민들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 또 이웃을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한 것입니다. 군부쿠데타에 의한 권력 찬탈의 음모를 분쇄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봉기한 것입니다. 우리들 시민 모두는 평화롭게 이 사태가 수습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5·18광주항쟁의 대의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절대 전쟁(absolute war)이 아니라 그에 대항하는 반(反)전쟁, 국가폭력에 맞서는 반(反)폭력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대의는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1980년대 급진적 민중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 구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새로운 사회운동과 정치 주체의 형성을 가져온 역사적 계기였다.
학살자와 생존자의 명암
열흘의 항쟁 기간 동안 민간인 사망자는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총 606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행방불명자와 암매장자 등이 제외되어 있어 정확한 통계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12·12 쿠데타와 5·18 학살을 주도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1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같은 해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사실상 학살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은 흐지부지되었다. 면죄부를 받은 학살자들은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에서 정치·경제적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반면에 5·18항쟁의 생존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최근까지 자살자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