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5/09 제8호

시리자의 성공과 한계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 구준모 편집실장

결성 : 좌파 통합의 필요성

2001년 유로존 가입 전후, 그리스에서는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1994년 다시 정권을 잡은 후 그리스 사회당은 노동자 기반의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색채를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택했다. 특히 1996년에 사회당 지도자이자 수상이 된 코스타스 시미티스는 인플레 억제, 민영화, 노동비용 감축, 금융자유화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사회당은 이러한 노선을 당의 현대화로 포장했다. 2000년 사회당의 현대화 프로젝트가 정점에 달해가자, 이에 맞서기 위해서 소규모의 급진좌파 조직들이 ‘좌파의 단결과 공동행동을 위한 조직’을 결성했다.

그리스에는 역사가 오래되고 항상 5~10퍼센트의 꾸준한 지지를 얻는 공산당이 있다. 그러나 공산당이 좌파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분열을 겪은 후에도 공산당은 노동조합과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이 남아있었으나, 매우 분파적인 정당이었다. 공산당에서 분리한 세력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생적인 운동을 아나키즘으로 폄하하고, 대중 집회 외부에서 독자 집회를 여는 식이었다. 공산당은 2000년대 부상한 대안세계화운동은 물론이고, 다양한 좌파 세력에게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공산당을 제외하고 가장 큰 급진좌파 정당이던 시나스피스모스(좌파운동생태주의연합, 이하 SYN)에게 기회가 되었다. 그리스 선거제도상 3퍼센트 득표를 넘겨야만 국회 진출이 가능했는데, 2004년 선거에서 급진좌파의 원내 진입을 위해 SYN을 지지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총선 대응을 위해 SYN와 여러 급진좌파 조직들이 연합한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출범했다. 즉, 신자유주의 정권에 맞서기 위한 좌파 통합의 필요성 속에서 시리자가 등장한 것이다.
 

성장 : 운동과의 굳건한 결합

시리자를 결성하는 전후 과정에서 SYN은 과거의 중도좌파적 노선을 버리고 좌선회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된 대안세계화운동과 반전운동은 노선 전환과 좌파들 간 연대의 좋은 기회였다. 2004년 총선에서 3.3퍼센트를 득표해 국회 진출에 성공한 시리자는 당시 분출한 다양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4년 12월의 SYN 당대회는 시리자를 계속 유지하면서 대안세계화운동과의 결합을 강조한 알렉코스 알라바노스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했다. 사회당의 신자유주의와 공산당의 종파주의에 맞선 신좌파들의 연합체로 시리자를 성장시키는 노선이 채택된 것이다.

이런 노선 속에서 당 내에 청년층과 노조 기반을 보강하려 노력했다. 특히 청년층의 조직적 육성을 위해 2006년 아테네 시장 선거 후보로 32세의 엔지니어 치프라스를 선출했다. 이 결정은 많은 논란을 낳았으나 결과적으로 10.5퍼센트를 득표함으로써 시리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했던 것은 2006년 봄부터 2007년 여름까지 분출한 운동이었다. 그리스의 신민주당(중도우익정당) 정부는 사립대학교 설립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이에 반대하는 그리스 대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캠퍼스별로 총회를 열고, 수만 명이 참석하는 시위를 이어갔다. 시리자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국회 내에서 학생운동을 대변했다. 대규모의 운동과 의회 내 투쟁은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 시민들의 여론을 변화시켰고, 결국 신민주당 정부는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리자는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운동을 통한 정당의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2007년 중반 선거에서 시리자는 5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14석(총 300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시리자가 좌파적 색채를 더욱 분명히 띠고 운동에 참여하자, 이 무렵 시리자에 참여하는 좌파 조직도 더 늘어났다. 정세적인 운동과의 굳건한 결합을 통해 승리하는 경험을 하면서 좌파들의 대안 공간으로 성장해나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2월 SYN 총회에서 치프라스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부터 시리자는 여론조사에서 10퍼센트 내외의 높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도약 : 그리스 위기와 반긴축 투쟁

시리자는 다양한 좌파와 사회운동에 당을 개방하는 전략을 선택하며 성장했다. 2008년 12월 경찰의 발포로 15세 고등학생이 사망한 사건은 큰 투쟁을 불러왔다. 시리자는 이 시위를 지지하며 참여했다. 반면에 공산당은 아나키스트들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주류 언론과 정당들은 이 무렵부터 시리자의 과격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SYN 내부의 차이를 드러냈다. 의회 중시 현대화론자들과 운동 중시 좌파들 사이에, 그리고 치프라스와 알라바노스 사이의 내부 경쟁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10월 선거에서 시리자의 득표는 4.6퍼센트로 하락했다.

하지만 그리스는 곧 경제위기의 격랑에 휩싸이게 되었다. 2010년 5월 사회당 정부는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의 첫 번째 각서에 서명했다. 트로이카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그리스 정부에게 엄격한 긴축정책을 강제했고, 이에 맞서는 운동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선거 후에 2년 동안 긴축 및 노동악법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17번이나 벌어졌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2011년부터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반긴축 투쟁에 시리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시리자의 좌경화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분리했다. 2010년 SYN 우파는 3000명의 당원과 4명의 의원과 함께 탈당해 민주좌파를 결성했다. 사회당 정부에 환멸을 느낀 사회당원들도 일부 가세했다. 민주좌파는 사회당을 대체할 중도좌파 정당을 꿈꿨으나, 실제로는 어떠한 사회적 기반도 없이 언론 플레이에 열중하다 실패했다.

2012년 2차 구제금융 각서로 인한 위기는 그리스 사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모든 정치 세력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사회당 정부가 붕괴되며 치러진 선거에서 치프라스는 ‘반긴축 좌파정부’를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그리스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 시리자를 비롯해 공산당, 극좌파, 사회당 반대파까지 모두 포괄하여 긴축반대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선거운동판 전체를 한 순간에 뒤흔들었고, 시리자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결국 2012년 6월 선거에서 시리자는 26.9퍼센트를 얻어 제2당이 되었다. 긴축에 대한 일관된 반대와 사회운동 속에서 신뢰를 얻은 시리자가 대중들의 불만을 모아낼 하나의 대안을 제안하면서 급성장한 것이다.
 

시리자의 성공과 한계

시리자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대중운동과의 적극적인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급진좌파들이 투쟁에 적극적인 것은 공통된 특징이지만 분파적인 태도와 패쇄적인 조직구조, 낡은 언어의 틀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리자는 선거를 위한 여러 조직들의 연합체라는 성격 때문에 시작부터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회운동과 결합하면서 그 성격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시리자는 지역위원회를 통해 노동자와 ‘분노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현장투쟁을 지지·지원하고, 지역 차원에서 다른 세력과 공동 활동을 벌였다.

또한 대중운동에 대한 적극성은, 관념적 정파 논쟁 속에 매몰되지 않고 운동에의 복무 속에서 다양한 좌파 조직들이 공존할 수 있는 틀이 되었다. 사회당과 공산당을 대체할 대안 좌파가 필요하다는 조직적 목표, 분출하는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한 의회 안팎에서의 성장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공유한 것이 차이를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리자는 지루하고 분열적인 논쟁을 피하고, 정세를 중심으로 개방적이고 실천적인 강령을 만들 수 있었다. 강령을 현상에 대한 단일한 분석과 결정된 정책들의 조합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 사회의 변혁 속에 놓인 정치적 과정으로 사고하는 특징은 대중운동과의 결합이나, 정세적인 개입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시리자의 큰 한계는 굳건한 사회적 기반의 부재이다. 그리스의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당과의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데, 최근까지 그 최대 분파는 사회당이었다. 시리자의 노동운동 내 지위는 사회당, 공산당 다음 순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리스 노동운동 자체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의 30퍼센트 가량을 조직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민간 대기업이거나 공공부문에 한정되어 있다. 법적으로 21명 이상이 모여야 노조를 결성할 수 있는데, 민간 기업의 97퍼센트가 20명 미만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직된 노조도 기업별·부문별로 매우 잘게 쪼개져 있다. 유럽과 그리스의 지배계급과의 투쟁이 중장기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과 맞설 튼튼한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핵심이 되어야 할 세력이 적고 취약한 것이다. 시리자의 약한 측면이다.

또 다른 한계는 국경 밖에 있다. 현재 그리스의 경제 위기에 열쇠를 쥐고 있는 세력은 트로이카, 즉 유럽의 지배계급과 그 기구들이다. 그런데 시리자가 동원하고 직접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유럽이 아니라 그리스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시민들일 뿐이다. 국경 밖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과정에 영향을 미칠 범유럽 차원의 반긴축 투쟁과 유럽연합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 없이, 시리자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는 유럽 좌파의 약한 측면이다.

상황의 전개에 일희일비하며 시리자를 희망이나 배신의 아이콘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이다. 우리의 약한 측면을 알고,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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