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0.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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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 (2)

홍근수 | 운영위원, 향린교회 담임목사
봉수교회를 두 번 방문, 예배하고

평양에 온지 이틀째 오후에 우리는 봉수교회에 갔었다. 8월 통일대축전을 위한 성만찬 예배를 이남 동포와 함께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들은 이 예배를 위해 세 번째 모였다는 것이다. 본래 오기로 한 날 오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어제는 8월 15일이어서 평양에 와 있는 우리가 꼭 참석할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왜곡규탄집회가 시작되려는 시간에 결국 거기 불참하고, 오후 3시에 부리나케 봉수교회로 향했다. NCC총무인 김동완 목사를 비롯하여 다른 대표들 외에도 이번에 방북한 목사들 몇 분들이 봉수교회를 방문하였는데 20여명 가량 되는 것 같았다. 이번 우리들을 수행하던 손 목사라는 이와 김혜숙님이 안내하였다. 작년에 만나 구면이 된 강영섭, 리태규(그는 이름은 본래 리성봉이었다) 목사 등이 우리를 반겼다. 리춘근 목사는 보이지 않았다. 봉수교회에서 이승만 목사 등을 반갑게 만났다. 그는 나를 예전에 보았다며 반가와 했다. 이번 행사에 해외 대표들도 봉수교회에 모두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박순경 교수와 함께 맨 앞자리로 안내되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설교는 리태규 원로목사와 김동완 목사의 두 설교가 있었다. 시간관계로 성찬식은 생략한다 했고, 우리는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버스 편으로 교회를 떠나왔다.
우리는 일주일간 평양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봉수교회를 두 번째 가보게 되었다. 그것은 8월 19일 주일을 평양에서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예배를 위해 또 다시 그 교회로 갔다. 이 날은 전날과 달리 대표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봉수교회에 갔었다. 기독교인들은 주일에는 으레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관광일정을 변경하였고, 또 봉수교회 측에서도 간부 목사들이 일찍 교회에 나왔었다. 버스에 가득 차서 갔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교인이었다. 더 많지만, 사실은 백두산 관광가느라고 함께 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내가 서울에 있다면 이 시간쯤이면 교회로 헐레벌떡 가고 있는 시간이지만, 오늘 아침은 봉수교회로 가고 있었다. 설교를 하기는, 서울에 있으나 평양에 오나 마찬가지 '팔자'인지 나는 그 역사적인 봉수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북에서 최초의 교회당 건물이라는 역사적인 봉수교회 강단에 서서 설교한다는 것은 여간 뜻깊은 일이 아니었다. 강영섭 목사, 이태규 목사, 장승봉 목사 등 이북의 목사들과 남에서 간 김동완 NCC총무를 비롯,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참석하였다.
노영우 목사가 사회, 김광수 목사가 기도, 성명옥 목사가 헌금기도 등을 하고 봉수교회 여성이 독창,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위원장인 강영섭 목사가 축도를 하였다. 나는 이 날 "소금과 같은 소수자"라는 제목으로 역사적인 봉수교회에서 설교하였다. 예배 후 우리는 밖에 나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의 서기장 오경우 목사에게 향린교회에서 바치는 헌금 500불을 전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보다!

2001년 8월 18일(토). 이 날은 내게는 역사적인 날이다. 한반도에 태어나서 한반도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 가보았기 때문이었다. 평양에 온지 나흘째, 나는 백두산을 향해 떠났다. 우리는 아침 일찍 5시반부터 일어나서 백두산 정상에 오른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나는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고 즐겨 부르고 익숙한 노래, "백두산으로 찾아가자"를 속으로 불러보았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 뛰는 백두산으로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만주 벌판 말을 달리던 천사들의 투쟁의 고향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서해에서 동해에서 남도의 끝 제주도에서 그 어디서 떠나도
한 몸에 넉넉히 안아 줄 백두산
온 힘으로 벽을 허물고 모두 손 맞잡고 오르는
백두산이여 꺾이지 않을 통일의 깃발이여" (윤민석)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천지를 볼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일기예보에 의하면 백두산에는 비가 온다고 하여 오늘 천지를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수년 전에 중국 용정으로 가서 백두산 -그들은 장백산이라 칭하였다- 에 올라갔을 때도 비바람과 짙은 안개구름으로 그만 허탕을 쳤는데…. 오늘은 기어이 볼 수 있도록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는 비행장으로 나가서 수속을 하였다. 북측에서는 비행기 두 대를 준비하였다. 오늘 묘향산 간 팀이 내일 또 오면, 그들도 또 비행기 두 대가 있어야 할 모양이다. 우리가 북에 그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평양 온 것보다 두어 배나 더 됨직한 곳으로 비행하였다. 삼지연 공항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착각할 정도였다. 마치 비행기로 독일을 처음 가보던 때처럼 검은 숲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발 1,000미터나 되는 높은 고지에 펼쳐진 거대한 숲의 대평원을 보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아래 펼쳐진 광활한 숲은 정말, 이 곳 백두산 지역의 웅장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삼지연 비행장에서 내려서 작은 버스에 분승하고 백두산을 향해 달렸다. 산밑에 왔으나 길은 멀었다. 백두산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곳 나무들은 3대가 사는데 1대를 잘라내면 또 3대를 심어, 숲이 지금처럼 계속 유지되게 한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높이가 2,775미터로 한반도에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북에서는 그 높이가 2,772미터라고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곳은 9월만 되면 벌써 눈이 내린다고 하였다. 산꼭대기의 눈은 봄이 되어도 녹지 않은 상태에서 또 새로운 눈이 내려 하얗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 백두산의 경사는 중국에서 올라갈 때보다 덜 가팔랐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 이 곳의 나무는 벌목을 못하도록 김일성 수령이 지시하였다며, 비록 나무가 필요해도 백두산의 나무는 벌목할 수 없게 하여 숲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산을 올라갈수록 고산지역이어서 그렇겠지만,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갈 지'자로 버스들이 헐떡거리면서 올라갔다. 마침내 우리는 높은 산꼭대기, 향로봉에 내렸다. 그 곳은 가장 높은 지점은 아니었으나 하얀 색깔로 필기체로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 1992년 2월 16일 새김"이라고 쓰여있었다. 아마 흰 페인트를 입힌 것 같았다. 여기에 화장실 등 시설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도보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안내 동지는 오늘 날씨가 최고로 좋다면서 백두산의 날씨는 여러 가지 조화를 일으키는데, 오늘 그것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은 행운이라며 잘도 둘러댔다. 그는 이 백두산 천지에는 가끔 괴물이 나타나는데, 아마 곰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과 이 곳 천지못에는 '삼천어'라는 생선이 사는 데 몇 년 전에는 5㎏인가 하는 큰 고기를 잡아서 수령님께 바쳤다는 것 등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 천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라고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난다. 천지에 떨어진 물이 서남쪽으로 떨어지면 압록강이 되고 동북쪽으로 떨어지면 두만강이 된다고 들었다. 그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역시 그는 이 곳에 와보지 않고 말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안내 동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천지물은 바닥에서 밑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모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천지가 있다는 쪽으로 보니 안개구름이 잔뜩 끼여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천지가 살짝 보이기도 하여 천지를 조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금방 짙은 안개로 다시 뒤덮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일 높다는 장군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등 시간을 보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 꼭대기, 그러니까 한반도의 지붕 같은 곳에 왔다. 더욱이 신비로운 백두산 꼭대기에 있는 천지, 그것이 비록 지금 이 순간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목사들이 둘러서서 기도를 하였다. NCC의 김동완 목사가 기도하였다. 그는 주로 남북 분단현실과 통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안개구름이 걷히어 천지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들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천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었다.
오늘도 천지를 보지 못하는가, 마음을 태우며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천지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런데 잠시 후에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거짓말같이 천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조금 전 기도하였기에 천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백두산을 내려오다 우리는 풀밭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었다. 정말 백두산 밑에서 피크닉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인들 할 수 있었는가? 실로 감개무량했다. 햇볕은 우리 위를 쨍쨍하게 내리쬐는 가운데 그늘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었다. 밥맛이 좋았다.
거기서 다시 우리는 <3지연 대기념비 노천박물관>이라는 곳에 내려 구경하였다. 항일전투 때의 군복을 입고 완전무장한 대형 김일성 동상을 조각해놓은 곳이었다. 서울의 4.19 혁명공원의 조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하였다. 한총련 학생대표는 "이런 것을 세우는 돈으로 굶주린 인민들을 먹일 것이지…."라고 평했다며 남쪽 신문이 보도했다 한다. 3지연이라는 말은 본래 연못이 3개였다는 데에서 연유했다고 하였다. 우리는 잠시 호숫가를 거닐며 한가한 시간을 잠시나마 가졌다. 날씨가 맑으면 이 곳에서 백두산이 잘 보인다고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짙은 구름이 끼여 보이지 않았다. 그 곳 주위에는 숙박시설이 숲 속에 많이 있었다. 전국에서 오는 학생들이 이 곳에서 숙박을 한다고 하였다. 이내 주위는 어두웠다. 우리는 삼지연공항으로 와서 야간비행으로 평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두산 정상에 오른 것, 특별히 천지를 본 것은 이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번에 천지를 두 눈으로 본 것은 이번 평양행 최고의 경험으로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나리라. 남에 없는 백두산, 북 사람들이 이 백두산의 영기를 받아 그렇게 다부진가 생각되기도 했다.


(묘)향산을 다시 가보고

우리는 주일 늦은 오전, 10시쯤에 묘향산을 향해 달렸다. 진관 스님은 홍 목사 때문에 오늘 묘향산 등산을 못하게 되었노라고 농담같은 불평을 하였다. 날씨는 정말 쾌청하였고 넓은 길은 잘 건설해 놓았으나 아직은 길이 매우 한산하였다. 지난번의 가을과, 달리 이번에는 늦여름이어서 그런지 삼라만상이 푸르고 싱싱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들에는 큰 나무들이 없는 듯 보였으나, 가까운 길가의 산에는 큰 나무들과 숲이 더러 보였다. 청천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흐르고 있었고, 군데군데 벌거벗고 멱감는 어린아이들과 고기잡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남의 시골풍경과 무엇이 다른가?
묘향산에 도착하니 거의 점심때가 되었다. 먼저 우리는 보현사를 관람하였다. 그리고는 호텔로 내려가서 걸직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곧장 국제친선전시장을 관람하였다. 지난번에 한번 와본 곳이기도 하여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먼저 김일성 주석관, 그 다음으로 건너편 김정일 위원장 기념관 쪽으로 이동하여 관람하였다. 거기 재미있는 작품 한 개를 보았다. 나무로 된 것인데, 지게를 지고서 한 손으로 밥 그릇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밝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이는 에콰도르의 Vdundad 출판사장이 바친 조각선물이라고 하였다.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 보고 살자. 알고 살자. 알고 말하자." 어느 외국인이 친선박물관을 둘러보고 그렇게 많은 나라로부터 선물을 받은 데 놀라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어떤 외국인은 북이 고립된 줄 알았더니,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벗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탄성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같은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이 여기에 도취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 기념관을 보는 중에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김정일의 54회 생신일에 바친 선물, 지구를 두 손으로 받드는 모양의 조각이었는데 그 밑에 쓰여진 다음과 같은 한문 글귀에 눈이 갔다. "萬民之救世主 新加披 新有限公司 富振海敬贈 1966.2.15 54回 生辰." 이는 물론 중국의 어느 분이 축 생신 인사로 한 말이겠지만, 왠지 김정일 위원장이 북측 인민들에게는 구세주일지는 몰라도 만민의 구세주라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침 북측의 텔레비전기자가 소감을 묻기에 쓴 말을 해 주었다. "북이 인민의 친구냐? 인민의 적이냐?" 순간 그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왜 인민의 친구라는 북에서 문선명, 김종필, 빌리 그래함 같은 반통일·반공·반북적인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전시하고 있는가? 인민의 적으로부터 받은 선물도 그리 자랑스러운가?" 그대로 보도되었는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과연 방영할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일기도 하였다.


주체탑처럼 높이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역시 '서울에 돌아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구속될 것이라는 말도 돌아 어수선하였다.
8월 20일 월요일, 평양에서의 여섯 번째 날이었다. 아침에 우리는 주체사상탑으로 갔다. 이 탑은 김일성 광장 맞은 편에 위치한 것으로, 꼭대기의 봉화불은 밤이 되면 전기로 이글이글 타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높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서 평양시내를 한번 둘러보고 내려왔다. 이 탑은 김일성 주석의 70세 생신일인 1982년에 맞추어 건립되었다 한다. 김일성의 생일이 4월 15일이라고 하여, 정면에 헌시를 새긴 돌의 높이와 폭이 4m와 15m로 했고 그의 나이 70년의 날수를 계산하여 총일수가 25,550이라고 하여 화강석을 그 숫자만큼 가지고 탑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 탑의 높이는 150m, 봉화불의 높이가 20m라고 하였다. 1층의 정문 정면에는 그 탑을 세우는데 헌금을 한 많은 사람들, 주로 외국인들의 명단을 돌에 새겨 붙여놓았다. 15인승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의 꼭대기에 올랐다가 온 사람들을 보고, 어떤 목사님은 "탑 위에 올라갔다 오더니 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며 농담하기도 하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체탑 꼭대기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평양시내를 둘러보았다. 이 주체탑과 김일성 광장 사이에 대동강이 흐르는데, 이 탑 양쪽으로 대동강 가운데에 두 개의 분수가 하늘높이 치솟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혁명열사능을 찾았다. 520여명의 열사들이 묻혀있다는 이 곳은 나 자신이 지난번에도 와본 곳이었으나 기분은 새로웠다. 입구에 검은 돌에 구릿빛 글자를 새긴 것은 이런 것이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을 위한 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혼은 조국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김일성"
새로운 것은 작년에 북으로 보내졌던 장기수출신들 가운데 윤용기, 리종환님 등이 안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들과 김창준 목사 묘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독촉하는 소리에 걸음을 빨리 하였다. 김창준 목사는 감리교 목사로 북에 가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지냈던 분이다. 돌비석에 사진을 새긴 혁명열사능을, 북에서는 잘 해놓았다고 생각했다. 혁명가들의 동상들을 평양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놓았고, 김일성 주석은 매일 아침 그 곳에 와서 그 동상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기도'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다시 우리는 호텔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신인현, 함세환, 이두균 등 장기수 어르신들이 호텔로 찾아와 정말 기뻤다. 그들은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날 일부 사람들은 평양의 단고기(개고기)를 먹으러 식당에 갔다. 아마도 각자가 따로 분담하는 것 같았다. 단고기를 밝히지 않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려호텔 식당에서 중식을 하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우리는 창작사를 들렀다. 나는 지난번과는 달리, 그들의 작품을 한 점 샀다. 유명한 조각가인 리현순님의 작품인 도자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순희 대표를 위해 작은 액자, 글씨를 하나 사서 선물하였다. 그는 매우 좋아하였다. 이 곳에도 예외없이 많은 구호들이 붙어있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김정일 동지는 조선의 운명이고 혁명의 심장이며 승리의 가치입니다. 김일성; 수령결사 옹위 정신의 최고로 사신 불요불굴의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따라 배우자; 사회주의 붉은 기를 끝까지 지키자; 사회주의 지키면 승리이고 버리면 죽음이다; 오늘 조선은 김정일 동지의 의지와 신념에 따라 전진하고 세워진다; 순결한 량심과 의리로 김정일 장군님을 받들어 모시자;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다.

통일을 위한 몸짓이 '돌출행동'으로 규탄받는 '우리의 서울로'

8월 21일 화요일, 이 날은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오는 날이었다. 1주일 동안의 휴가도, 환상적인 경험도 다 마치고 이제 삭막한 현실로 돌아오는 날이다. 그 어떤 경험도 처음에는 새롭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될 때 의미를 잃는 법이다. 평양에서의 환상적인 생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도, 계속되는 현실도 아니다. 우리는 서울의 '현실'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그 현실 속으로 돌아와서 살아야 한다. 그 현실의 세계는 통일을 위한 민족적 나들이가 '돌출행동'이 되는 곳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공항으로 나왔다. 어떤 사람에게 1주일은 짧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길게도 느껴졌으리라. 내게는 금방 가버린 일주일이었다. 평양에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영객과 군악대, 꽃다발 주는 아이들이 공항에 나와 도열하고 있었다. 김포공항에 간다는 설이 이미 파다하였지만, 기장은 기내방송을 통하여 인천공항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에 김포공항에 다 와서야 갑자기 공항을 인천에서 김포로 바꾸게 되었다며 이 점을 양해 바란다는 방송을 하였다. 과연 김포에 도착하였을 때, 출입국관리소 안에 많은 사복경찰관들이 들어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먼저 나가던 사람들이 제지를 당하여 못 나간다고 하여 남았다. 강정구 교수, 김규철 의장, 천영세 의장 등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가버렸고 몇 사람만 남아서 싸울 길도 없었다. 밖에 재향군인회 등 우익들과 학생들 등 환영객들이 대치하고 있다며 이 곳에서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고, 일단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다들 나가자고 하여 나도 나왔다. 밖에 나와보니 전경들이 환영객을 에워싸고 있는 판이었다. 내가 나오기 전, 보수우익세력과 환영객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폭력이 있었다고 하나, 나는 늦게 나오는 관계로 그 '역사적'인 폭력행위를 보지 못하였다.
통일연대는 연세대로 간다고 일단 버스를 탔다. 뜻밖에 이혜진, 이병일 목사가 버스로 와서 나를 찾았다. 짐을 그 쪽에 부탁하고 나는 일행과 함께 연세대 노천극장으로 갔다. 거기서 통일연대소속 방북단의 귀환 환영대회를 하였다. 환영대회는 자연히 규탄대회와 같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일연대소속 동지들이 7명이나 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물론 예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각오한 일은 아니었을까? 대회가 오래 진행되고 있어 너무 늦었기에 나는 노진민 선생과 함께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계는 이미 6시가 넘고 있었다. 교회에 오니 퇴근하지 않고,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영강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과 강정구 교우가 연행되었음을 잠시 보고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6박 7일간의 평양 방문을 모두 마쳤다. 다만 열 네 명인가가 경찰에 연행된 채 말이다.
주제어
평화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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