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6/01 제12호
저출산은 과연 '누구에게' 문제인가?
세계 각국의 저출산 대책과 여성권
한중일 3국이 저출산 대책을 내놓은 속내
지난 10월 한국에서는 ‘제3차 저출산고령화 기본계획’이 발표되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과 중국 역시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 일본은 ‘1억 총활약담당상’이라는 저출산 담당 장관을 두고 세 번째 저출산사회 대책을 내놓았고, 중국도 35년 만에 1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2자녀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처럼 동북아의 세 나라가 저출산 문제 해결을 국가의 우선과제로 설정한 것은 노동인구가 감소되면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세금을 낼 노동력 인구의 부족, 소비를 담당해야 할 경제활동인구의 부족을 메우려는 것이다.
과거 동북아 성장의 핵심 요인 중 하나는 ‘인구’였다. 한국이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했던 발판도 값싼 노동력으로 수출중심의 산업을 일궈왔기 때문이고, 중국 역시 압도적인 규모의 값싼 노동력 풀을 통해 지금의 경제성장력을 이뤄왔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내수경제의 하한선인 ‘인구 1억’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위기라고 한다. 중국의 생산인구는 2011년을 정점으로 하여 앞으로는 감소 추세에 있고, 일본은 2110년에는 4286만 명으로 줄어들어 초고령사회에 들어설 것이며, 한국의 경우도 내년부터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들어 2025년 초고령사회로 진입까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들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북아 3국은 저출산 대책을 국가 최우선의 과제로 내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 절체절명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웨덴의 성공 사례에서 배울 점
동북아 3국이 이러한 문제로 골머리를 않는 동안 저출산을 극복하여 주목받고 있는 유럽 나라들이 있다. 프랑스와 스웨덴이다. 프랑스의 경우 1990년대에 1.65명까지 떨어졌던 출산율이 2008년에 2.0명, 2012년 2.01명까지 상승했다. 프랑스의 경우 ‘아이는 여성이 낳지만 사회가 함께 키운다’는 사회풍토의 변화가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국립가족수당(CNAF)기금’을 별도로 두어 두 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에 가족수당을 지급하고 있으며, 여성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부모휴가법’을 제정하고 공공보육을 강화하여 출산과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프랑스와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그 정책 자체가 아니라 그 정책이 펼쳐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봐야한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경우 사회적으로 출산과 양육을 책임진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나의 시민을 양성한다는 생각 아래에서 아동과 여성의 권리를 중심에 두고 장기적인 대안을 만들어 간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의 3차 저출산 대책이 발표된 지 세 달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누리과정 지원금을 대폭 삭감했다.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라 함은 단지 출산율만 높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출산, 양육의 문제를 모두 아울러야 하며, 하나의 인간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전 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저출산 대책으로 고용과 복지를 언급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철학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한때는 보육료 지원으로만 일관하던 저출산 대책을 이제는 만혼과 비혼이 문제라며 결혼장려에만 힘쓰고 있다. 긴 안목을 가지고 제대로 된 제도를 시행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노동인구통제론에 입각한 저출산 담론의 허구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출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인구 구성이 고령화되는 것이 전지구적인 문제라고 떠들어대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빈곤화이다. 인구가 늘면 생산이 늘고 빈곤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노동인구통제론에 입각한 저출산대책이 과연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저출산 대책은 경제력 제고를 위한 대책인지, 인류의 삶을 높이기 위한 대책인지에 따라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먼저 경제력 제고를 위한 저출산 대책이 합당한가를 보자. 고도성장시기에 출산율이 올라가고 노동력이 많아지면서 경제는 성장했지만 분배의 문제, 생태의 문제 등이 남았다. 현재 저출산 위기의 문제는 생산가능 인구가 줄고 고령인구가 늘어나면서 연금이 고갈되고 경제가 성장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들 진단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불안정한 노동이나 실업에 시달리는 젊은 층도 여전히 많다. 출산을 늘린다고 빈곤, 실업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인구가 늘어난다고 삶의 질이 나아지지는 않듯 말이다. 이미 세계 경제가 저성장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출산율 저하 역시 당연한 결과이지 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다음으로 저출산 대책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대책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의 3차 저출산 대책에 실소를 내뱉는 것은 국가가 나서서 미팅을 주선해준다는 어이없는 내용이나 대책의 실효성 때문이 아니다. 일-가정 양립이라는 이전 시기의 대책에서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과 국가를 ‘지키기 위한’ 대책 아래에서 여성은 수단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저출산 문제의 해법으로 수많은 나라에서 언급되는 이민정책도 이주민을 수단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보장하지 않은 채 노동력만 이용하려는 발상일 뿐이다. 게다가 저출산 대책은 효과도 없다. 일본의 경우도 2003년에 ‘저출산사회대책기본법’을 제정한 이래 내놓은 세 차례의 대책이 있었지만 출산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120조원이 넘는 정부예산으로 저출산 대책을 시행했지만 출산율은 계속 하락했다.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들의 권리가 어떻게 지켜질 것인가를 놓고 대책을 세운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저출산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인류가 출산을 하지 못해 재앙을 맞이한다는 설정의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SF영화가 있다. 영화에는 불임의 시대를 지나며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에 극적으로 임신을 하게 된 15살 소녀가 등장하는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영국의 여러 정치 집단들이 개입하고 방해한다. 소녀는 죽을 고비를 넘겨 아기를 낳고 희미한 희망을 찾아 바다를 건너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처럼 출산의 문제는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다. 출산은 한 개인이 엄마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요구와 이해가 맞물려 나온 사회적 산물이다. <칠드런 오브 맨> 안에서는 출산을 막으려는 자와 출산을 원하는 자와의 사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은 여성에게 달려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출산의 권리를 어떻게 가지고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저출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하지 않고 빈곤의 문제가 생겨난 게 아니라, 경제가 위기이고 빈곤의 두려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저성장의 경제가 해결된다면,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 고령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사회의 위기를 여성에게 전가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가 보장된다면 저출산이라는 ‘문제 아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저출산 대책이 나온 지금, 사회적 산물인 출산 정책 구성에 대한 시각부터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정말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저출산 대책인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