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16/03 제14호
어디 살든 무시 안 당하고 제 힘으로 살면 좋겠소
영매 씨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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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주영매고 조선족이오. 나이 오십 넘어서 한국 땅에서 살고 있소. 중국에서 나는 학교 선생하고 남편은 광업회사를 다녔소. 92년쯤에 나라에서 경제 개혁을 하면서 기업들이 많이 파산했고 이래저래 상황이 안 좋았소. 돈이 필요하게 됐지. 그래서 나하고 동생이 러시아로 나가서 보따리 장사를 했소. 그것도 98년인가 러시아가 경제위기 겪으면서 장사가 안되서 돌아왔지.
그렇게 있다가 남편이 먼저 한국으로 들어와서 15년이 되었고 영주권을 취득했어요. 나는 2012년에 혼인비자로 들어왔지요. 근데 주변에 보면 비자가 여러 번 바뀐 사람들도 많소. 한국 정책이 계속 변해서 우리도 스트레스 너무 받아. 방문취업비자(H-2)로 나오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안되면 단기비자(C-3)로 와서 바꾸기도 하고. 요샌 재외동포비자(F-4)로 바꾸는 추세요. 작년부터 재외동포비자로도 공장이나 농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어서 그리들 하는 것 같소. 하나 있는 딸은 유학생비자로 나와서 경기도에서 대학교 다니고 있소.
조선족들이 한국에 한 60만 명 넘었다 하니까 인제 뭐 들어올 만한 사람은 다 들어왔지. 지금은 퇴직했거나 학교 갓 졸업한 애들이 들어오는데 웬만한 젊은 애들은 중국 큰 도시에 가든지 일본 같은 데도 가는 것 같소.
우리 세 식구는 한국에서 다 떨어져 있소. 남편도 건설 쪽으로 지방 일 다니니까 한 달에 한두 번 보고. 딸애까지 셋이 모이는 건 두어 달에 한번 될 것 같소. 다른 집들도 뭐 비슷하오. 간병 일이나 가정집 일을 하는 친구들 봐도 내내 일하는데 붙어 있으니 식구들 잘 못 보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니까 집에는 꼬박꼬박 가도 남편하고 딸한테 전화나 자주 하는 정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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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뭐 벼룩시장 같은 거 보고도 찾은 적 있고 여기저기 친구들이 얘기해 주기도 하고. 그리해서 업체에 연락하면 업체에서 오라 해서 얼굴 보고, 일할 만한 공장에 보내주지요. 지금 일하는 공장 직원 100명 정도 되는데 우리 층에는 40명 정도 있소. 동포는 20명쯤 되고. 다른 층에는 동포가 더 많소. 아마 전체로 보면 절반 넘을걸요. 여자들은 뭐 제품 분류나 불량품 골라내는 거 하고 남자들은 좀 힘쓰는 거나 기계 쓰는 거 하오.
외국 사람은 베트남 사람 몇 명 있소. 그 사람들은 결혼한 사람도 있고 비자가 없는 사람도 있소. 위에서 뭐 검사 나오면 다 숨어 있지. 중국 한족들도 두어 명 있소. 한족들하고는 중국말로 얘기하는데 뭐 별로 대화할 일은 없소. 옆에 가까이 있는 조선족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쉴 때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 사람, 중국 사람으로 나뉘오.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서 이제 회사에 얘기도 안 꺼내오. 우리 조 반장은 조선족이라 말은 잘 통하오.
차별은 뭐 어디 없는 데가 있겠소. 무조건 있지. 인자는 그러려니 하는 거지. 우린 반만 한국 사람 아니오? 그러니 한국 사람이 아무리 못해도 욕 안하고 중국 사람은 잘해도 괜히 시비를 걸고 그러지. 승진도 어렵소. 여자들은 반장이 끝이지. 남자들은 주임도 되고 하는데 그 이상은 한국 사람만 시키오.
그리고 언제더라? 병원 간다고 옆에 동포 사람 하나가 조퇴시켜 달라 했더니 막 찡그리면서 한참 생각해가지고 할 수 없이 가라고 하더만요. 한국 사람이 그러면 그냥 가라고 하더니. 관리자 마음에 들면 잘해주는 거 같은데 동포들한테는 대체로 별로인 것 같소. 기분 언짢게 하는 말도 좀 안했으면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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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이 많으면 많이 일하고 적으면 적게 일하오. 바쁠 땐 토요일 일요일도 없소. 한 달에 하루만 쉴 때도 있었으니깐. 근데 지난 설날에는 한 주간 일이 없어서 휴식했소. 쉰 거는 월급에서 빼버릴 것 같아. 잔업 특근 없으면 딱 120인데 쉬면 더 빠지지. 그냥 100에서 200 사이 왔다 갔다 한다고 보면 되오.
우리는 정식 직원 아니니까 업체 통해서 월급 받소. 근로계약서는 썼던 거 같은데 잘 기억 안 나오. 서명하라고 해서 서명하고 업체에서 가져갔소. 일은 크게 힘들지 않은데 시급이 좀 올랐으면 좋겠소. 남편도 벌고 있지만 딸 시집도 보내야 하고 노후 준비도 해야 하니. 한국이 물가도 참 높지 않소. 남편이 현장 뛰기 하면서 돈 못 받을 때도 있고. 참 그 체불 같은 거는 있어서는 안 되오.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그런 일 당하는 경우 몇 번 봤는데 어찌 일을 시켜놓고 월급을 안 준단 말이오. 여기 구로랑 저 대림 쪽에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 있고 얘기 많이 들리는데 돈 제때 딱 맞게 주는 게 제일 중하다고 그라오. 식당이나 청소일 같은 거 하는 친구들 얘기 들어봐도 돈 못 받을 때가 젤로 맘이 안 좋다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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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은 회사에서 쉬라고 하는 날이 쉬는 날이오. 휴가는 맘대로 못 쓰오. 언제 그만두라 할지 모르는데 일을 해야지. 휴가는 딱히 없소. 특근이 없으면 토요일 일요일엔 쉬지요. 주말에 가끔씩 친구들 만나오.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사람 말고 주로 중국에서 같은 고향 사람이나 소학교 동창들이요. 뭐 자식 얘기도 하고 돈 벌면서 힘든 얘기도 하고 그러오. 나라에서 동포들 정책이 뭐가 바뀌면 그런 얘기도 듣고요.
동포 누군가가 한 번씩 안 좋은 죄지어서 방송에 나오고 그러면 우리도 기분 안 좋아서 친구들이 한마디씩 하기도 하오. 나는 뭐 암말 않고 가만있는 편인데 그런 일 있을 때는 괜히 한국 사람들 눈치가 보이오. 몇 명 소수가 그런 죄 짓는 건데 우리가 다 그런 것마냥 정부고 방송이고 말하면 참 안 좋소.
한국에서 일해서 그 돈으로 자식 교육 더 시키고 부모 모셔야 되니까 거의 대부분은 딴 신경 안 쓰고 무던히 일만 하지. 그러니까 동포들한테 나쁜 말 안하면 좋겠소. 어디 나라 어느 동네든 좋은 사람도 있고 별로인 사람도 있는 거고. 한국 사람이든 동포든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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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일 안했으니 돈 많이 못 모았고 남편이 오래 있었으니 좀 낫소. 한 십 년 더 벌 수 있으려나 모르겠소. 우린 전에 번 거는 딸아이 교육비로도 쓰고 부모님 봉양도 하고 좀 모아놓고 그랬소.
나중에 늙으면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가족들이 여기 다 있으니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살 거 같소. 두 번째 고향으로 여기고 정 붙이고 살아야겠지.
딸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저 좋아서 여기서 살거 같은 눈치오. 좋아 지내는 한국 남자가 있는 거 같기도 한데 말은 안 해주오. 어디서 살든 떳떳하게 무시 안 당하고 제 힘으로 살면 좋겠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