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건강과 사회
  • 2016/05 제16호

심슨 인형공장이 불타던 날

4.28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

  • 이진우 의사·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부장
 
<심슨 가족> 중 ‘MoneyBart’ 오프닝은 현실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우스꽝스런 심슨 가족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항상 그렇듯 가족들이 긴 쇼파에 앉아 TV를 켜면 멈춘다. 그리고 심슨을 그리고 있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하청공장이 나타난다. 노동자들이 그린 그림은 오염과 독성 물질 가득한 공장의 라인을 따라 티셔츠, 장난감이 되어 팔려나간다. 노예가 된 팬더, 죽은 돌고래의 혀, 노쇠한 유니콘의 뿔이 포장 작업의 도구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핵심엔 ‘20세기 폭스사’가 있음이 밝혀진다.
 

아시아 하청공장에서 만든 심슨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애니메이션이 거두는 이윤의 속살, 착취의 구조를 드러내는 이 100초 짜리 애니메이션은 얼굴 없는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Banksy)가 연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심슨 가족>이 한국의 하청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이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고 말했다.

사실 이 작품은 오래 전의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993년 5월 <심슨 가족>의 주인공 ‘바트’ 인형을 생산하는 태국의 한 인형공장에 일어난 참사가 그것이다. 이 화재사고로 174명의 여성 노동자를 비롯해 18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작은 화재가 대형 참사가 된 이유는 노동자가 인형을 훔쳐가는 것을 방지하겠다며 공장 문을 잠근 채 일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국제자유노조연맹은 “노동자를 죽이고 몸을 망가지게 하는 발전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 아니”라며 촛불을 들었다. “선진국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장난감을 만드는 과정에 개발도상국 노동자의 피와 죽음이 묻어 있다”는 각성을 반영한 것이다. 국제자유노련은 각 회원 조직에도 4월 28일 행사 진행을 요청했고, 약 70개 나라에서 ‘촛불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렇게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은 국제적인 행사가 된다.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

국제노총(ITUC)은 4월 28일을 ‘국제 산업 재해 사망, 부상 노동자 추모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을 기억하는 날이다.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활동이 집중되는 기간이다. 

사실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은 캐나다와 미국의 노동자운동에서 유래한다. 1984년 캐나다 노총(CLC)은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다친 노동자들을 매년 기리기로 선언하고, 4월 28일을 추모의 날로 정했다. 이날은 1914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포괄적인 '노동자 산재보상법'에 대한 의회 최종심의를 마친 날이었다. 1991년에는 ‘노동자 애도의 날에 관한 법(Workers’ Mourning Day Act)’이 통과되면서 법정 추모일로 확립됐다. 캐나다 의회는 4월 28일 회의를 산재 사망 노동자를 위한 묵념으로 시작하고, 노동부 장관은 의원들에게 산재 현황을 설명한다.

1987년에는 미국노총(AFL-CIO)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을 채택한다. 1970년에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안전보건청과 국립안전보건연구소가 1971년 4월 28일부터 업무 개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캐나다와 미국에서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로 기념하던 4월 28일이 ‘국제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96년이다. 같은 해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에 참석한 국제자유노련(ICFTU, 현 국제노총)의 대표자들은 1993년 태국 인형공장에서 화재로 죽어 간 188명의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밝혔다.

이제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은 캐나다뿐 아니라 브라질, 스페인, 대만, 아르헨티나, 벨기에, 브라질, 도미니카공화국, 룩셈부르크, 파나마, 페루, 폴란드, 포르투갈 등 13개 국가에서 공식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110여 개 나라에선 1만여 회의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산재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1988년 7월 2일, 15살의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사회화되면서 산재 문제와 노동자의 안전, 작업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안전보건활동을 시작하면서 1990년부터 7월을 ‘산재 추방의 달’로 정하고, 매년 7월 2일엔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2002년부터는 ‘4.28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기해 4월을 ‘노동자 건강권의 달’로 정하고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산재 왕국이다. 32세 조아무개씨 4톤에 깔려 사망, 44세 서아무개씨 작업 중 바다에 빠져 사망, 45세 송아무개씨 몸이 협착돼 사망, 37세 노아무개씨 굴삭기에 끼여 사망, 이아무개씨 지게차에 치여 사망. 지난 2개월 간 죽음의 일터 현대중공업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만 다섯명이었다. 최근 14년간 매년 평균 9만명 이상의 산재 노동자가 발생했고, 해마다 2422명, 하루 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있다. 산재 은폐도 일상화되어 있다. 실질 산업 재해는 12~30배에 달할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쯤 되면 기업에 의한 거대한 학살극이라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4월은 기억과 추모의 시간이 되었다. 반복적인 대형 재난사고로 많은 시민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결국 안전하지 않은 일터의 원인은 같다. 자본이 이윤을 위해 안전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고, 정부는 규제 완화만을 외치며 자본을 감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회를 민중에게 안전한 곳으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그것이 산 자인 우리가 죽은 자들을 추모하고 잊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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