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6/06 제17호
일상이 된 불안, 달라진 구조조정의 풍경
조선업종 노동실태와 구조조정이 미칠 영향
익숙한 그림이 없다
익숙한 ‘구조조정’의 이미지는 이것이다. 회사가 위기를 선언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노동자에게 정리해고 통보가 날아든다. 노동조합은 해고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런 장면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더라도 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고부가가치의 상선 및 해양플랜트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고숙련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업 정규직 역시 다른 업종의 정규직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고령화되어 있다. 조선업 정규직 노동자 중 30퍼센트 이상이 향후 5년 내에 정년퇴직할 예정이기 때문에, 자본으로서는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할 필요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조선업에는 이미 정규직의 세 배를 상회하는 숫자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존재한다. 현재 조선업 인력 구조조정에 관한 논의가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 그 중에서도 이른바 ‘물량팀’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이유다.
조선소의 기능직은 원청업체의 정규직 노동자,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사내하청업체의 물량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량팀이란 특정 작업물량을 처리하는 동안에만 고용하는 공사팀을 일컫는다. 물량팀은 팀장이 사내하청업체에서 특정 작업물량을 도급받은 형태, 즉 ‘하청의 하청’으로 존재하며, 팀마다 10~50여명 정도의 규모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원청보다 하청이, 하청보다 물량팀이 더 일하기 까다롭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일을 떠맡게 된다.
그밖에도 공사 기간을 맞추기 위해 긴급하게 투입되어 초단기로 밤낮 없이 일하는 ‘돌발팀’ 등 더 기형적인 노동조건도 존재한다지만 일반적으로는 위와 같이 셋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조선소에 납품을 하는 외부 하청업체(밴더)의 노동자도 존재한다. 하청업체 노동자들 역시 조선업 구조조정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사내하청 중심의 성장
2000년대 조선업의 성장은 사내하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조선업 기능직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율은 2002년에 처음으로 정규직을 넘어섰고, 2014년엔 정규직의 3.5배 규모로 성장했다. 같은 기간 원청 정규직 노동자의 수에는 큰 변동이 없어, 3만 5000에서 3만 7000여 명 수준을 유지했다.
회사는 정규직 노동자 정년퇴직으로 생기는 빈자리만 채우는 수준에서 정규직을 추가 고용했다. 대부분의 조선소에서 정규직 채용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선별적으로 ‘발탁채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발탁채용의 관행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및 사내하청업체에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고, 노동조합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세계 조선업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한국 조선업의 고용은(사내하청 중심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조선업체들이 조선업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경제위기의 여파로 많은 중소조선소들이 일감을 확보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 반면에 ‘빅3’라 불리는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은 해양플랜트로의 사업 확장을 꾀했다. 국제유가 급등과 함께 심해석유 시추와 관련된 해양플랜트 부문의 발주가 크게 증가하던 시기였다.
해양플랜트 공사는 공사금액도 크고 투입되는 노동력도 많은 대형 프로젝트다. 조선산업의 고용은 다시 증가했다. 이때 해양플랜트 사업을 위해 대거 채용된 사내하청 노동자는 대부분 몰락한 중소조선소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이었다.
선택 아닌 선택, 물량팀
사내하청업체에 고용되어 일하느냐 물량팀에서 일하느냐는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문제처럼 받아들여진다. 약간의 숙련만 쌓인다면 사내하청업체에 직접 고용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으로 일한다면 안정적인 고용과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물량팀에서 일하면 고용이 불안하고 더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대신 숙식이 제공되며 잔업·특근수당을 포함하면 사내하청 노동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물량팀 노동자 스스로도 ‘힘들게 일하더라도 짧은 기간 바짝 벌 수 있는’ 길을 택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이 ‘선택 아닌 선택’이 노동자들에게 좋은 것일 리 없다. <2015년 조선업종 물량팀 노동조건실태 연구>(금속노조)에 따르면 물량팀 노동자들은 가장 큰 어려움으로 불안정한 일자리(43.74퍼센트), 임금체불(18.46퍼센트), 산재위험(14.95퍼센트)을 꼽았다.
같은 연구에서 물량팀 노동자들에게 ‘취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가’를 물어 1순위, 2순위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자 1순위에서는 71.99퍼센트가 원청사 정규직이라 말했으며 조선업종 외의 타 직종을 원한다는 경우가 13.79퍼센트였다. 2순위로는 조선업종 외의 타 직종이 35퍼센트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하청업체 정규직을 원하는 경우가 32.42퍼센트였다. 이 조사 결과는 물량팀이라는 선택이 차악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동시에, 물량팀 노동자 입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그다지 매력적인 일자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저임금 일자리와 해고가 만연한 시대, 노동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조선소 물량팀에 유입된다. 짧은 기간 고임금을 벌기 위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등등.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선소 물량팀은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선택하게 되는 ‘최후의 보험’이라 불린다.
제조업보다 건설업과 유사
조선업 생산직 노동의 첫 번째 특징은 주문제작 방식으로 운영되어 수주를 해야 일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회사가 수주를 하지 못하면 당장 일감이 사라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현재 수주를 받아둔 해양플랜트는 18기이다. 올해와 내년에 각각 9기씩 인도하고 나면 수주한 물량은 모두 끝이 난다. 추가 수주가 없다면 해양플랜트 사업은 중단될 수 있다. 중소조선소나 사내하청업체의 경우에는 물량이 떨어져 회사 문을 닫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두번째 특징은 표준화하기 어려운 노동이란 것이다. 선박이나 해양플랜트는 규모가 크고 복잡한 상품이다.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 개의 블록을 각각 제작하여 조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문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선박이나 해양플랜트라 할지라도 프로젝트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자동차공장처럼 정형화된 생산물을 반복적으로 만드는 일이 아닌 것이다.
셋째, 업무와 직종에 따라 노동조건은 천차만별이고, 각 직종에 따라 필요한 기술도 다르다. 대표적으로 용접, 취부(선체 조립 용접 전 도면에 맞춘 가용접 작업), 도장(부식을 막고 모양을 내기 위하여 도료를 칠하는 공정), 전장(전기계통의 작업) 등의 직종이 있는데 이는 조선소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에서도 활용 가능한 기능들이다. 따라서 노동자들 스스로도 조선이라는 업종보다는 직종에 대한 정체성이 강하다.
이상의 특징은 조선업이 제조업보다 건설업과 유사하다고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울산 같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해양플랜트와 육상에서의 건설플랜트 일을 번갈아가며 그때그때 일감이 있는 곳에서 일하곤 한다.
다른 접근이 필요해
조선업 비정규직의 고용조정은 ‘해고’라는 방식으로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업종노조연대(현대중공업노조·대우조선해양노조·삼성중공업노동자협의회 등 조선업계 빅3 노조와 금속노조 조선분과소속 7개 지회 참여)가 ‘해고 반대’가 아닌 ‘총고용 보장’을 구호로 걸고 있는 이유다. 사내하청이나 납품업체의 경우 집단 해고보다는 업체 폐업의 형태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량팀 구조조정은 ‘해고’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리고 팀별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실업 상태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얼마만큼의 규모로 인원이 감축될 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조선업 일자리가 사라진 후에 이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 될 수 있다. 해양플랜트 노동자의 경우 육상플랜트 노동자와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이번 조선업 구조조정은 이전의 인력 구조조정과는 양상이 다르다. 이 싸움은 정규직 해고에 저항하는 싸움이 아니라 구조조정 과정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위협받을 하청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이는 비정상적인 다단계 하청, 기간제 고용이 만연한 우리 사회 노동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 투쟁 경험에 갇히지 않는 노동자운동의 대응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