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6/07 제18호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여성운동, 나의 경험 말하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6월 6일 ‘여성혐오를 뒤엎자’는 주제로 열린 집회에서 외친 구호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인가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고립시키지 않고 서로 연대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변화의 토대를 만드는 일!
집회 내내 이어진 자유발언에서는 사람들의 용기가 느껴졌습니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의 고단함을 토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했던 폭력을 고발하는 내용들이었지요. 침묵이 아닌 연대가 세상을 바꾼다며, 더 이상 참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에 모두가 조금씩 들떠 있는 분위기였어요. 힘차게 ‘투쟁!’을 외치는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생각에 신기하고 반가웠던 날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더군요. 저에게 페미니즘은 때로는 골치 아픈 쟁점이었고 끊임없는 싸움에서 오는 피로감이기도 했거든요. 공동체를 바꿔내는 이념이자 운동이 되어야 할 페미니즘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부정적으로 왜곡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지만 무기력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반(反)성폭력 운동의 경험
저는 2004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페미니즘과 ‘반(反)성폭력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했던 학생회는 MT를 가든, 어떤 행사를 하든 언제나 반성폭력 내부규약을 정하고 토론했습니다. 이 약속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발언과 행동을 금지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거나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하지 않으며, 이성애로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보장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반성폭력 내부규약은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 등을 포괄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했습니다. 성폭력 사건에는 ‘피해자 중심주의’로 접근했습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 여성’에 대한 비난이 뒤따르는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성폭력에 대한 이러한 개념 규정과 해결 방식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규약의 조항들은 ‘조심하면 되는 리스트’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금지조항이 늘어나는 만큼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규에서 벗어난 행동은 곧 ‘성폭력’이라는 도식적인 이해를 낳았고, 남녀 간 권력관계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불편한 상황’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으로 단순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 것인지를 논의하기 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라는 한정된 방식의 해결로만이 남았습니다. 폭력과 피해에 따른 사건처리가 반복되면서,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운동으로서 반성폭력 운동의 역할은 점차 침식되었습니다.
그즈음 대학의 생리공결제와 여학생 휴게실 등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제기하며 만들어졌던 정책들도 ‘남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공격받기 시작했습니다. 제도 도입의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복지 정책으로만 남아버린 탓에, 마치 여학생들만 ‘특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었습니다. 학생회 선거에서도 여학생 휴게실에 발마사지기를 설치해주겠다, 치마 속이 보일 수 있으니 계단 난간 사이의 공간을 막아주겠다 등의 정책은 쏟아졌지만, 여성들이 왜 별도의 휴게실을 필요로 했는지, 왜 치마를 입으면 불안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이힐이 끼지 않는 보도블럭 깔기 같은 정책이 서울시의 친(親)여성정책으로 발표되던 때였습니다. 여성의 권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노동자의 현실
그러던 중 이랜드·홈에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벌어져 연대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의 일입니다. 영화 〈카트〉를 통해 소개되어 많이들 알고 있는 마트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제가 여성 차별의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여성들의 노동은 하찮게 여겨져 왔는지, 회사가 어려워지면 왜 여성들이 가장 먼저 해고되었는지 묻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는 일상생활에서 반여성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개인적 실천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고, 사회 전반의 모순을 짚어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사회 각계각층에 여성들이 진출하면서 여성차별문제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이상 차별받는 여성들이 없는 것처럼, 심지어는 남성보다 더 잘나가는 것처럼 비춰졌고요. 이제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는 선언만이 남은 듯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되었습니다. 마트노동자 뿐 아니라 KTX승무원, 기륭전자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많은 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이 아스팔트 위에 앉아 투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투쟁에 나선 그녀들은 여성상위시대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여성들의 진짜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정부 정책은 여성들을 저임금·불안정한 노동으로 몰아넣고, 집에서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까지 하는 슈퍼우먼을 만들겠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았거든요. 뿐만 아니라 저출산 문제까지 여성들이 해결해야 하는 몫으로 떠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일부 여성단체들은 정부와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고위직으로의 여성 진출, 여성할당제, 여성취업률 확대 등 정책에 환호하며, 이를 여성운동의 큰 성과로 의미부여하기에 바빴습니다. 소위 ‘잘나가는 여성들의 시대’라는 착시효과가 대중적으로 나타나게 된 데에는 이러한 흐름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그나마도 잘 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여성노동자운동에 주목하고 여성의 이중부담에 응답해왔는가, 그것도 반성해볼 일입니다. 노동자운동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기는 했지만 그 열악함과 딱한 사정에 주목했을 뿐, ‘왜 여성인가’ 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오늘날 여성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여성노동력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는 어떻게 강화되어왔는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각종 제도와 정책 개입만으로 축소되고 있는 여성운동을 다시 대중적인 운동으로 복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삼중의 부담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가 여성해방운동의 주체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11년 제가 사회에 나와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만든 노조라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학교 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온 몸이 땀에 젖도록 급식을 하지만 100만 원도 받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 함께 싸울 수 있었습니다. 누구누구의 엄마, 누구누구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지부장, 지회장, 조합원 등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고 자신의 소신껏 활동을 펼쳐나가는 모습은 두근거리는 변화였습니다.
아직까지도 노동조합 운동은 정규직·남성들의 운동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새롭게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이 점점 더 조직 내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노동조합의 활동 방식에 대한 고민도 키울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2014년, 정규직 전환 약속을 믿고 성희롱을 견뎌 오던 20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고 계약만료로 해고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강남역에서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살해된 그녀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무수한 모멸감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난 또 다른 그녀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 노동자운동이 여성노동자를 배제하고 희생양 삼았던 것을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는다면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꾸자
저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페미니스트가 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곧 ‘여성우월주의’, ‘이기적인 여성들의 방어논리’, 혹은 ‘여성들의 피해망상’으로까지 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그 많은 논란과 비난을 개개인이 넘어서고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의식화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검열하거나 여성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기에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여성들,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간의 여성운동을 돌아보고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도, 자기가 속한 공간, 즉 가족과 일터를, 그리고 사회를 바꾸려는 운동으로의 확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되새기는 요즘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