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6/07 제18호
재생산의 위기와 여성운동
재생산의 위기 심화가 낳은 퇴행, 여성혐오
오늘의 여성혐오는 재생산의 위기가 심화된 결과 나타난 퇴행적 증상이다. 재생산의 위기란 남성의 경제력과 여성의 가사양육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남성생계부양 가족모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족형태를 지탱하던 가족임금(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과 복지국가라는 물질적 기반은 지속적으로 해체되고 있다. 어려움에 처한 것은 가족구성과 유지만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과 관계 역시 위기에 직면했다.
재생산의 위기 과정을 돌이켜보면, 성역할 위기 신호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은 부족한 가계수입과 가사·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공백을 탄력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가족을 유지하는 비용이나 자원이 불충분해지면 여성은 가사양육 노동을 늘리는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수입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의 탄력적 노동은 무한정 늘어날 수 없어 탄성이 한계에 도달하면 재생산의 위기가 발생한다.
한국사회가 재생산의 위기에 빠진 것은 IMF위기 이후 여성들의 이중부담이 심화되면서부터다. 여성들은 부족한 가계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노동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나 가사양육의 사회화는 시장적 방식으로 불충분하게 추진되었고, 이는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의 부차화와 결합되어 여성의 이중부담이 심화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출산율 저하는 이중부담이 더는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는 가족구성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기피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젊은 남성들은 연애과 결혼 과정에서 남성에게 요구되는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요원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재생산의 위기는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남성생계부양 가족모델의 붕괴는 70~80년대 신자유주의가 세계경제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서구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중상층 이상의 남녀만이 핵가족형태를 유지하고, 나머지 계층 대다수는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은 계층 간 격차를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된다.
그러나 재생산의 위기가 성별 간 갈등, 나아가 여성혐오라는 퇴행으로 비화되는 것은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행태가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는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한국과 일본이다. 남성의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보니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남성의 좌절감도 큰 것으로 보인다.
여성혐오 어떻게 넘어서나
여성혐오는 재생산의 위기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만약 남성들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는 문제로만 접근한다면, 남성생계부양 가족모델이 다시 작동하도록 하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여성과 남성의 갈등을 조정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 역시 성별 간 갈등을 유발한 사회구조를 간과하여 무력한 해법이 되거나 미봉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청년을 비롯한 사회 구성원의 삶을 위협하는 경제위기에 대한 객관적 인식, 가사와 양육이 여성에게 전가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방안, 여성을 남성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여기는 관계로의 전망을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 재생산위기에 대응하는 여성운동의 과제라 할 것이다. 즉, 노동력 재생산의 방법과 그와 연동된 성역할, 남녀관계 모두를 재설계해야 하는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전망 속에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여성운동의 재건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 여성운동이 걸어온 길
이제 우리는 한국 여성운동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가야할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으로 출발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95년 ‘성주류화 전략(성평등의 효과적 달성을 위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성별 구성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정책이나 프로그램에 성인지적 관점을 강제하는 전략)’을 채택해 정권과 파트너십을 맺고 국가정책을 통해 여성의제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여성정책을 입안할 전문가 그룹을 형성, 여성정치인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여성할당제를 비롯하여 일-가정양립 정책 등이 추진됐다.
하지만 가사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된 ‘사회서비스 정책’은 재생산 위기의 관리 수준에 머물렀다. 시장화된 방식으로 진행된 사회서비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들고, 구매자의 경제력에 따라 서비스가 제공되어 보편성이 결여됐다.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재정을 대거 마련해야는데 이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긴축정책기조를 거스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일-가정 양립정책’은 여성의 가사부담을 전제하고 노동을 탄력적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여성노동을 부차화·유연화하는 문제가 있다.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장시간 노동을 축소하고, 생계가능한 수입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일가정 양립정책과 역행하는 노동유연화가 추진되어 노동시간 단축과 충분한 수입 보장이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긴축재정과 노동유연화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일관된 기조였고, 이들 정권이 여성정책을 수용한 이유도 재생산 위기를 여성을 활용해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아래 여성정책이 더욱 후퇴한 측면이 있지만, 위기관리에 여성을 활용한다는 기본적인 관점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성주류화전략은 재생산의 위기를 넘어서는 데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
반성폭력 운동, 노동자운동의 도전과 과제
한편 반성폭력 운동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유의미한 실천을 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변형하는 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개인을 처벌하는 문제로 축소됐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드러내고 응징하는 방법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는 남녀관계와 그것이 발 딛고 있는 가족형태를 비롯한 사회구조 전반의 변화를 도모하는 매개를 어떻게 찾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여성운동의 주요한 주체이기도 한 노동자운동은 재생산의 위기 속에서 이중부담을 감내하는 여성노동자를 집단적으로 세력화하지 못했다. 물론 IMF이후 노동시장으로 쏟아져 나온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의 노동이 반찬값으로 치부당하는 현실에 맞서 투쟁한 것은 사실이다. 여성 직종을 중심으로 비정규직이 확대되었고 노동조건이 악화됐기에, 2000년대 이후 여성노동자들의 노조 가입과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당연시하고 가사양육을 여성의 역할로 전제하는 성별분업구조에 맞서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운동이 성별임금격차를 축소하는 유력한 경로로 인식되고 있진 못하다. 보육정책이나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을 강화하는데 가장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사회적으로 ‘여성’의 문제라기보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로만 이해되거나, ‘여성’이 부각되는 방식은 고령의 ‘어머니’들의 딱한 사정으로, 또는 가계수입을 보조해야하는 ‘아내’들의 불행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이 노동자운동에 합류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여성주체가 확산되기 위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위기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재생산의 위기란 곧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혐오라는 퇴행적 증상까지 나타나는 오늘날 여성해방 운동의 과제는 더더욱 가볍지 않다. 우리의 전략은 혐오에 대항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그 길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성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주체성이 존중되고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개인으로써 자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너져가는 자본주의와 그것을 지탱하던 가족형태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사회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을 지금처럼 2등 시민으로 남겨둔다면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획은 성공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로 여성해방을 사고하고, 여성해방을 위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에 더 많은 여성들이 함께하는 것만이 위기를 넘어서는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