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6/09 제20호
다 포기해도
종종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에 들어가 본다. 이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 가면 전국 월세·전세 매물을 볼 수 있고 동네별 시세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도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머물던 곳을 떠나거나 새로운 공간을 구하려는 이들이 남긴 게시물은 행간에 저마다의 사연과 우여곡절을 숨기고 있다.
전세살이 6년 만에 임대아파트로 옮긴다며 좋아하는 사람. 커피숍을 차렸다 반년 만에 망해 도로 내놓는 사람. 강아지 때문에 원룸에서 쫓겨나는 사람. 층간소음에 지쳐 온 집안을 계란판으로 도배한 사람. 반지하에서 반지하로, 서울의 지하에서만 수평 이동하며 사는 사람. 공간을 소개하는 말들도 유심히 본다. ‘내 집 같은 하숙’,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옥탑방’. 뻔뻔한 광고 언어의 화법을 닮아 있지만, 실은 씁쓸한 농담에 가깝다. ‘1층 같은 반지하’가 제목에 들어가면 조회수가 높다. 알면서도 속는 유혹적인 문구다. 그러나 겪어 본 사람은 알다시피,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2인분 같은 1인분’은 가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요즘은 매일 밤 이곳을 눈팅 중이다. 이사 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난히 녹록지 않다. 몇 년 새 치솟은 월세 시세는 내 통장 잔고를 훌쩍 상회해 있고, 정부 지원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혼 1인 가구에, 설상가상으로 반려묘 세 마리와 함께라니. 서울땅에서 집 구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인 셈이다. 어떤 조건을 포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집을 구하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의 연속이기도 하다. 삼포 세대니 몇 포 세대니 하는 세대 구분 속에서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것은 피로한 일이다. 하지만 과도한 삶의 비용 때문에 현재를 버텨내는 일 외의 모든 가능성에 무감해진 것이 지금의 청년세대라면, 나 역시 그 단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횡재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주거빈곤은 재생산되고 대물림된다. 2년 단위로 바뀌는 주거 환경에 따라 살림살이를 늘리고 줄이며 갚아도 끝이 없는 대출금 이자와 싸워보지만, 대부분의 ‘흙수저’들에게 내 집 마련은 요원한 꿈이다. 이 쳇바퀴 속에서 오늘의 삶은 미래에 저당 잡히고, 장시간노동과 자기착취는 기꺼이 감내된다. 주거빈곤은 도시 생활 보편의 문제가 되었다.
늦은 퇴근을 할 때면 사무실 앞 새로 생긴 공원에 새떼처럼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본다. 즐거워 보이지만, 한편으론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거대한 상점들만 남았다. 편히 쉴 집과 동네를 잃어버린 우리는 회색 도시의 틈새에서 손톱만한 여유라도 느껴보려 안간힘이다. 옥상이건 굴다리 밑이건 공터만 있으면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으려 든다. 할머니들은 좁은 골목에 한 뼘의 버려진 땅이라도 있으면 꽃을 심는다. 그것이 주거 공간에 대한 인간의 본성이라면, 혹시 아직 포기하기는 이른 게 아닐까. 다 포기해도, 더불어 살아가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