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할 권리
- 2016/09 제20호
삶을, 삼성을, 세상을 바꾸는 우리!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라두식 지회장 인터뷰
75년 무노조 경영을 깨고 삼성에 노조를 세운 주인공.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2013년 7월 설립 당시 노동운동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햇수로 4년 차, 신생 노동조합의 티를 벗고 훌쩍 성장한 모습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조합원들은 삼성전자서비스가 아닌 협력업체와 고용관계를 맺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들이 삼성전자 제품을 선택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편리한 AS시스템이라는데, 막상 그 AS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푸대접을 받으며 일했다. 오랜 시간 쌓인 분노가 조직화의 기폭제가 되어 터졌다. “우리는 삼성의 앵벌이였다!”
동료를 가슴에 품고
처음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진 것은 최종범 열사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2013년 가을, 노조 가입자가 1500명까지 치솟자 사측은 표적 감사, 일감 뺏기 등 온갖 탄압으로 조합원들을 찍어 눌렀고, 탈퇴자가 늘어나고 있던 때였다.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다고, 자신의 죽음이 “부디 노동조합에 도움이 되길”바란다며 떠난 서른셋 젊은 동료의 마지막 메시지는 조합원들을 다시 똘똘 뭉치게 했다. 당연히 삼성 직원인줄 알았던, 우리 집을 방문하는 AS기사들이 “배고파 못 살았”다는 충격적 실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시민들도 함께 분노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라두식 지회장은 아직도 당시 투쟁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한겨울에 서초동 그 차가운 맨땅에서 비닐 몇 장 덮고 20일 동안 농성을 했어요. 12월 24일에 장례를 치르면서, 갓 돌 지난 종범이의 딸 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우리처럼 힘들게 살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놓자고 다짐했죠.”
어느덧 해가 바뀌어 2014년이 되었지만 임단협 교섭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회는 지역별로 쟁의권을 확보해나가며 투쟁의 전술을 고민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대체인력 400여 명을 준비해놨었어요. 그래서 ‘게릴라성 파업’을 택했는데, 날짜를 정해놓지 않고 당일 아침 기습적으로 파업을 때린 거죠. 대체인력이 움직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점을 노려 지역별 순환파업을 했죠. 1월 13일 부산·양산 권역이 첫 파업을 했고, 다음날 경기 권역이 했어요. 말도 많았어요. 갑자기 파업을 때리면 어떻게 하냐고… 그런데 결국 다 나왔어요. 파업 참여율이 거의 100퍼센트였죠. 조합원들 스스로 ‘할 수 있을까? 동료들이 나올까?’ 걱정이 앞섰다가 막상 파업하고 모이면 희열을 느끼는 거죠. 그렇게 자신감이 붙은 상태에서 2월 5일부터 8일까지 최초로 전국 동시파업을 했고, 역시 성공적이었어요.”
첩첩산중
삼성의 다음 수는 폐업이었다. 주요 간부들이 속해있고 조직력이 좋은 해운대, 이천, 아산센터를 폐업시켰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폐업센터 조합원들은 지역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이슈를 만들고 삼성의 실체를 폭로했다. 노동자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주요 센터를 폐업했는데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도리어 투쟁의 선봉대가 되었으니 삼성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테다. 지역 시민들은 노조를 깨기 위해 자기가 사는 지역의 AS센터의 문을 닫아버린 삼성의 행태에 같이 분노했다.
“우리가 흔들림이 없으니까 4월에 다시 집중교섭이 열렸어요. 상대는 협력사대표들을 대리한 경총이었는데, 내용 진척 없이 시간만 흘러갔어요. 집중교섭을 한다니 조합원들 기대감은 무척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으니 사기가 저하됐어요. 다시 투쟁력을 끌어올려야 했죠. 삼성전자서비스 수원 본사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전 조합원이 집결하는 계획을 잡았어요.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1차 상경투쟁을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양산분회 염호석 분회장이 사라졌다. 그는 5월 17일 정동진에서 유언장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주십시오.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라는 글을 남겼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곧바로 유족들을 만나 장례절차에 대한 위임장을 받았죠. 그러나 석연찮은 이유로 부친이 약속을 번복했고, 그 즉시 경찰병력이 백주대낮에 장례식장에 난입해 호석이의 시신을 탈취한 거지요. 속된말로 ‘눈이 뒤집힌’ 우리는 시신을 뺏기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어요. 그 과정에서 당시 수석부지회장이었던 저를 비롯한 20여 명이 연행되었죠.”
지회는 바로 다음날 전 조합원 무기한 파업을 선포하고 서초사옥 앞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지회장을 포함한 몇 명이 또 연행되었다. 검찰은 연행된 노동자들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결국 당시 지회장과 현 지회장 등이 구속되었다.
해 뜨는 정동진으로
절망과 희망이 힘을 겨루는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소중한 동료 둘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지도부마저 구속된 가운데 지회는 45일 동안 전면 파업을 이어갔다. 전면 파업 중엔 집회뿐만 아니라 선전전, 퍼포먼스, 거리공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했다. 이건희·이재용 집 앞, 삼성미술관 리움, 삼성 디지털플라자 등 삼성과 관련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투쟁을 알렸다.
금속노조·민주노총의 집중 지원과 당시 결성된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 등 시민사회의 연대도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삼성의 강력한 언론 통제를 뚫은 양심 있는 진보언론과 인터넷 매체들의 보도가 이어졌고, SNS 등 다양한 경로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미디어 전략을 펼쳐 여론을 주도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열사에 대한 삼성의 부담이 컸던 데다가 정세도 삼성 편이 아니었다. 그룹의 수장 이건희 회장이 와병 중이었고, 세월호 참사로 정국도 불안정했다. 다시 교섭이 열려 마침내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지회의 최초 요구안에 비해서 왜소한 결과물이므로 더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고, 우리 힘이 아직 부족함을 인정하고 조직을 지키며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잠정합의안을 투표에 부쳐, 6월 28일에 통과되었다. 이로써 삼성에서 최초로 임단협을 체결한 민주노조가 탄생했다. 길었던 농성을 마치며 전 조합원은 가장 먼저 정동진으로 달려가 염호석 열사의 영전에 임단협을 바쳤다.
맨손에 쥔 무기
노동조합 설립 후 임단협을 체결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그동안 지회는 열사투쟁 두 번, 전면 파업 50일, 무기한 농성투쟁, 지도부 구속까지 물불 가리지 않는 투쟁을 했다.
라 지회장은 “사실 저는 1년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할 줄 몰랐어요. 3년에서 5년 정도는 걸릴 거라 생각했거든요”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왜 그랬는지 되묻자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 노동조합 시작하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 주위에서 다들 ‘삼성에선 해봤자 안 될 거다’라는 얘기만 했으니까요.”
맨손으로 골리앗과 싸우던 다윗들에게 무기가 생겼다. 단체협약으로 노조 활동의 근거를 만든 것이다. 또한 수리 한 건당 수수료로 100퍼센트 성과급이었던 임금체계를 바꿔 기본급 120만 원과 식대, 가족수당 등 고정급을 마련했다. 노동자 본인이 부담하던 차량유지비·통신비 등 업무 비용도 회사에서 지급하게 되었다. 한 달 수리 60건 이상에 대해서는 성과급을 지급하여, ‘투명성·안정성·독립성·향상성’에 근거해 임금체계를 합리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라 지회장은 최초의 임단협에 부족함도 많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세세한 문구보다는 체결 자체에 대한 자긍심이 컸죠. 예전엔 부당한 일이 있어도 말 한마디 못했는데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점이 제일 중요했어요”라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삼성을 넘어 재벌을 바꾸자
라 지회장은 첫 임단협 체결 후 2년 동안, 현장은 ‘늘 전시상태’였다고 표현한다. ‘까라면 깠던’ 예전의 노동자들이 아니기에 현장에서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사측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임단협 조항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빈 곳을 파고들어 장난질을 하며 노동자에게 하나라도 내어주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특히 조합원 수가 적은 분회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지회 임원들은 2기 임단협 투쟁을 준비하면서 전국을 돌며 조합원들을 직접 만나고 현장의 요구를 모아냈다. 그리고 올해 4월, ‘재벌개혁, 삼성부터’라는 슬로건을 걸고 2기 임단협 투쟁을 시작했다. 삼성의 경영권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대국민 투표를 진행하고, 삼성재벌의 심장부 서초동에서 ‘재벌개혁’을 외치는 결의대회를 몇 차례나 열었다.
“삼성그룹이 어떤 곳입니까. 저희 임단협의 결정권을 가진 건 삼성전자서비스도 아니고, 삼성전자도 아니고, 미래전략실 그리고 최고 권력 이재용 부회장이예요. 삼성이 가장 아플만한 곳을 건드리는 투쟁을 해야 저희 요구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긍심을 위해서도 시민들과 공감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해야 돼요. 우리는 작은 조직이지만, 실제로 삼성을 변화시켜왔어요.”
이런 죽음 막으려 노조 했는데…
그런데 2기 임단협 투쟁 중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성북센터 에어컨 수리 기사가 노후 빌라 외벽의 실외기를 수리하다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올해 6월의 일이었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외주업체 노동자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이 사고는 언론에 의해 ‘민간 기업에서 일어난 제2의 구의역 참사’라 불렸다.
사측은 개인 과실로 몰아가려 했지만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장례식장을 지키며 유족들과 함께 싸우고, 사회적 추모 분위기를 만들었다. 라 지회장은 그 사고를 접하고 ‘이런 현실을 바꾸려고 노동조합 시작했는데 3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조합원 동료들에게도 소식을 계속 알렸어요. 진짜 한 달 동안 사이버 전사가 된 것처럼 잠도 안자고 밤새 SNS에 소식 올리고…. 혼자 많이 울기도 했어요.”
유족들이 회사와 합의하겠다고 입장을 바꿨을 때, 그는 ‘유족 분들이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말했다. 이건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일하는, 또는 비슷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 모두의 문제이고, 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원인을 바꾸는 것이 노동조합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인이 조합원이 아니었음에도 진정성을 가지고 함께 싸우면서 노동조합도 한 단계 성장했다. 그동안 현장에서 조합원과 비조합원 간 갈등이 컸지만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일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이번 사고는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비조합원들과의 관계도 ‘동료’로서 접근해야 된다는 생각,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은 전체 노동환경을 바꿔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비조합원 동료들도 ‘쟤네들이 자기들 이익만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슷한 일 하는 이들과 뭉치자
지회는 올 초부터 비슷한 조건에 놓여있는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통신 노동자들과 함께 ‘기술서비스 노동자 공동투쟁본부’를 꾸려 공동투쟁을 전개해왔다.
“금속노조는 제조업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같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어도 차이가 커요. 저희와 가장 비슷한 노동자들과 함께하면 뭔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케이블, 인터넷 설치기사들은 우리가 일하면서 자주 보는 사람들이에요. 5년, 10년 바라보면서 공동투쟁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앞장서서 뭉치고, 나아가 다른 서비스업과 제조업까지 점점 더 확대해서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동력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라 지회장은 남은 임기 동안 특히 조직 확대에 역량을 쏟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또한 언젠가 삼성을 넘어 AS업계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들뜬 얼굴이 되었다. 삼성이 하면 표준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도 업계에 영향력이 크다.
“분위기란 게 있어요. LG전자서비스, 동부대우전자서비스, 동양매직, 청호나이스, 린나이, 웅진코웨이…. 이 사람들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직장을 옮겨도 같은 업계에서 돌고 도는 사람들이에요. 한두 군데 노조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와르르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힘이 생길 거예요. 전국에서 같은 이슈로 동시에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파급력이 대단하겠죠.”
내 꿈은 노동3권 전도사
라 지회장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새로 갖게 된 꿈이 있다고 한다.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노동조합 일을 시작하고서, 이런 것들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노동의 가치라는 걸 마흔세 살에야 알았다는 게 창피해요. 맨 처음에 ‘노동자권리수첩’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니까요. 이걸 왜 지금까지 아무도 안 가르쳐줬을까 하고…. 그래서 전국의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청소년들에게 제가 배운 걸 알려주고 싶어요. 너희는 미래의 노동자다. 이 아저씨는 마흔 세 살에 알았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이것만은 잊지 말아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가 바로 노동이고, 노동자에게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있다고.”
‘삼성에서도 노조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며 한국 사회에 노동3권을 전파했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앞으로도 특히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노조 할 권리를 확산시키는 주인공이 되리라 기대한다.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의 요구를 결합한 투쟁으로 거대한 재벌권력과 당당하게 맞장 떠 온 이들. 최종범, 염호석 두 열사를 가슴에 묻으며 ‘100년 가는 노조가 되자’고 했던 다짐처럼, 삼성재벌을 바꾸고 한국 사회에 희망을 전파하는 노조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