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6/12 제23호

박근혜 게이트를 통과하는 우리의 자세

스무고개 같은 정국, 안개처럼 돌진하자

  • 홍명교
 
안개 덮인 헬조선, 철옹성의 벽에 틈이 생겼다. 성 안의 극소수만 공유하던 은밀한 거래가 바깥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성벽을 더 높고 호화롭게 쌓고, 권력자와 재벌의 곳간에 보물을 갖다 바치던 괴물들이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뉴스가 연일 터졌고, 그렇게 한 달이 갔다.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들었다. 처음에도,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가 성벽을 향해 모여들었다. 5천을 예상했지만 3만이 모였고, 5만을 내다봤더니 15만이 모였으며, 백만을 기대했더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10만을 얘기하면 5만이 모이고, 5만을 얘기하면 2만이 나왔던 과거를 생각하면 하늘이 놀랄 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저마다 외로운 섬이었던 우리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만났다.

이제 숫자를 헤아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백만이 점령한 거리의 기억만으로도 민중의 뜻은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삶을 옥죄던 사슬의 실체가 무언지, 성벽 너머 무엇이 이토록 지독하게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는지 말하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들의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회복시킬 새로운 진지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이 무너지면 어떤 세상을 만들지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결말은?

사태가 녹록치만은 않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성벽을 향해 절규하고 거리엔 굶주림과 죽음이 넘쳐났지만, 성벽 안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 밖 함성을 이용해 주인을 바꿔치려는 내부의 속셈이었다. 친박으로는 집권 연장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조선일보의 영악한 프로젝트였다.

조선일보는 검찰의 칼날을 이용해 상황을 정리하고 있고, 거리의 투쟁에 대해선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조직운동과 시민 사이에 분리 장벽을 쌓고 있다. 언제라도 저들이 원하는 타이밍에 촛불을 거두고 광장을 비우길 기도하고 있다.

박근혜 뒤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 뒤에 재벌 자본이 있었고, 이들을 둘러싼 체제가 변혁되지 않는 한 우리 삶은 조금도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야, 사태의 전말을 알 수 있다. 우리 입을 가로막고 굴종케 해온 억압, 삶을 짓누르는 모든 차별과 불평등, 국가권력에 의한 감시와 폭력을 넘어서야 금 간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니 박근혜만이 아니라, 박근혜를 만든 체제, 박근혜를 둘러싼 체제를 무너뜨려야 진정한 변화를 마주할 수 있다.요컨대 박근혜만 쏙 빠진 ‘또 다른 박근혜 체제’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결말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헬조선 뒤엎자는 사람들

이것은 빼앗기고 억압받은 모두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수립하자’고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청소년들이 광장으로 나와 ‘헬조선을 바꾸자’고 외치고 있다. 또래 청소년들이 침몰하는 배와 함께 가라앉는 참극을 생중계로 목격한 세대, 비정규직이 아니면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부모의 삶을 보며 자란 세대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도 거리로 나섰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행동을 통해 일어선 여성들은, 그녀들이 일터와 삶에서 받고 있는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감춰지고 묻혀진 모순과 억압이 분화구처럼 폭발하고 있다. 그것을 부차적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성벽을 무너뜨리고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공동의 고민거리로 받아들이고 함께 극복할 과제로 삼아야 우리 모두가 더 강해질 수 있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시민들을 만나야 하고, 대중의 일부가 돼야 한다.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벽을 무너뜨리고, 토요일 밤의 민주주의가 일터로 스며들어야 한다. 조합끼리 할 수 있는 것보다 노동조합 없는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싸움을 기획하고 조직해야 한다. 성벽 안 분쟁이 좌충우돌하는 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의 힘을 기르고 확산시켜야 한다.
 

기만과 배신 넘어 

87년 6.29 선언의 기만을 떠올려보자. 5,6월 내내 수백만의 시민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야당들은 민중의 기대를 배반해 분열했고, 그해 겨울 노태우 당선으로 귀결됐다. 92년에는 보수 3당이 합당을 선언함으로서 재편을 이뤘고, 이는 다시 김영삼 정권 출범을 낳았다.
 
한편 노동자들은 87년 직선제 쟁취에 만족하지 않고 공장의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옥포만에서 서울까지 폭발적으로 일어난 7~9월 노동자 대투쟁과 전국적인 민주노조 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과 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일터 안의 독재에 맞서 싸웠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어나갔다. 광장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일터에서 실천한 셈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목표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벽을 향해 피 흘리며 돌진하는 늑대보다는 삶의 모든 공간으로 퍼지는 안개가 되어야 한다. 보수재집권의 함정을 간파하고, 정치공학적 셈법에만 치중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박근혜 게이트의 물주 노릇을 하며 더러운 거래를 한 재벌들이 민중의 삶을 파괴해왔음을 폭로해야 한다. 이를 기점으로 87년의 기만과 92년의 배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노동자 대투쟁을 조직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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