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오늘여성
  • 2017/05 제28호

대학 반성폭력 운동과 영페미니스트의 등장

  • 김유미
삽화: 최설

 

싸움의 시작

1993년 8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나붙은 대자보는 대학가를 휩쓴 ‘반(反)성폭력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대자보의 작성자는 계약직 조교였다. 그녀는 자신이 화학과 신정휴 교수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재임용에 탈락했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엔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지금보다 협소하여 ‘비정상적인 인물이 행하는 일탈적 사건’이라거나, ‘남성 성기를 강제로 삽입하여 순결을 빼앗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은 이러한 통념에 반하는 것이었다.

남성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 정도 일로 법정까지 가야 하느냐, 피해자가 재임용에 탈락하여 억울한 마음에 벌인 일 아니냐는 식이었다. 1심 재판에서 신 교수가 피해자에게 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여자 옆에 가려면 3000만 원 준비하라”는 농담이 횡행했으며, 2심 재판은 ‘교양 있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수준이라며 신 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마침내 1999년 대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피해자와 여성운동 단체, 피해자를 지지하는 대학생들은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싸움이 괴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겪었던 폭력과 혼란의 순간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수강신청을 거부해 신 교수의 강의를 폐강시킨 것은 작지만 큰 승리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지역 대학 캠퍼스에서는 자칭 ‘영페미니스트’들의 실천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들은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성폭력에 반기를 들었고, 금기처럼 여겨지던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해 입을 열었다.
 

성폭력에 주목하다

1990년대의 한국 사회를 규정한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군사 독재의 해체와 현실 사회주의권 체제의 붕괴다. 1980년대가 변혁운동의 폭발적 성장기였다면 1990년대는 그것이 쇠퇴·분화하던 시기였다. 사회운동 내에는 변혁의 지향을 버리고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동시에 민족·민주·계급 중심의 담론이 포괄하지 못했던 성·생태·문화 등을 주제로 한 운동이 주목받았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1960~1970년대 서구 신좌파 운동의 기치가 한국 사회에 뒤늦게 도착한 셈이다.

경찰에 의한 경희대 여학생 성폭력 사건(1984),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7) 등 1980년대에 사회적 문제가 된 성폭력 사건들은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이 되자 성폭력을 여성 문제로 이해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의 여성단체들은 성폭력 예방 캠페인, 상담소나 쉼터 운영, 개별 성폭력 사건 대응과 함께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에 힘을 모았다.
1995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한국의 법조문은 성폭력을 ‘정조에 대한 죄’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여성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의 것이 되어야 할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범죄라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의 법제정 운동은 이처럼 가부장적이고 낙후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고민 속에서 진행됐다.
 

‘영페미’ 뭉치고 떠들다

우리의 선배들이 자신들의 옳음에 대한 윤리적 당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적대와 부정한 정치권력에 대해 투쟁했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적대와 성을 둘러싼 권력에 대해 투쟁한다. - 영페미니스트 기획집단 달과 입술,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중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성폭력에 맞선 실천의 구심은 대학 캠퍼스로 이동한다. 대학 반성폭력 운동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기존 여성단체들을 ‘올드페미니스트’, 본인들을 ‘영페미니스트’라 규정했다. 여성단체들이 법 제정과 개별 성폭력 사건의 법적 해결에 주력한 것에 비해, ‘영페미’들의 운동은 더욱 급진적이고 재기발랄했다.

신 교수 성희롱 사건과 함께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을 상징하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이화여대 대동제 고대생 난동 사건, 다른 하나는 연세대 집회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성폭력 사건이다. 1996년 5월, 이화여대 학생들은 수년 동안 반복되어 온 고려대 학생들의 대동제 난입 및 폭력 행위를 ‘여성 집단의 자율적 공간과 문화에 대한 남성적 폭력’이라 규정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같은 해 여름 연세대학교에서 집회에 참여했다 연행된 여학생들은 경찰에 의한 성적 모욕, 추행, 구타를 증언하며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두 사건은 서울지역 대학의 영페미니스트들이 학교의 경계를 넘어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각 대학에는 여성위원회, 성정치위원회 등 다양한 여성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모임들은 성폭력 사건에 대응할 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 ‘성정치 문화제’, ‘안티 미스코리아 문화제’, ‘월경 페스티벌’ 등 다양한 기획으로 페미니즘을 알렸다. 1998년에는 여성영화제가 시작되었으며, 《IF》, 《달나라 딸세포》, 《두입술》 등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한 매체도 발간됐다. 대학가의 페미니즘 실천·담론은 PC통신의 보급과 맞물려 온라인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고, 격렬한 논쟁의 장을 열었다.
 

성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첫 번째 특징은 성폭력 개념을 확장하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에 피해자 관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간이라는 극단적 폭력이 여성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배제, 폭력과 연속선상에 있는 문제라는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성폭력을 ‘성적인 폭력’을 넘어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규정했다. 또한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피해자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가해자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사회 통념을 반박했다.

두 번째 특징은 공동체의 성찰을 통한 성폭력 문제 해결을 꾀했다는 점이다. 성폭력이 단순히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여성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큰 위협으로 작동하며, 그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학 공동체를 ‘학생사회’라 명명했고,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이 공간이 더 나은 공동체, 더 정의로운 공동체로 변화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러한 인식은 특히 반성폭력 자치 규약 및 학칙 제정 운동으로 드러난다. 대학에서는 단과대와 과학생회 별로 토론을 거쳐 자치 규약을 만드는 운동을 벌이고, 대학 당국에는 성폭력상담기구 설치와 반성폭력 학칙 제정을 요구했다. 성폭력 가해자에게도 법적 단죄나 보상이 아닌 실명 공개와 사과를 요구했다. 가해자 공개 사과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임과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사과이며, 공동체 전체가 그 사건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달과 입술, 《나는페미니스트이다》)”였다.
 

반성폭력 운동의 곤란

반성폭력 운동은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개별 사건에 관철시키는 것을 ‘운동’이라 의미부여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 방식은 여러 곤란에 부딪혔다.

여성이 겪는 수많은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모두 성폭력이라 규정하고, 사건 해결의 매뉴얼을 따라가는 일은 반복적인 사건 처리 속에 활동가들이 소진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사건이 성폭력이 맞나?’, ‘대체 어디까지가 성폭력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지난한 논쟁이 이어졌다. 피해자는 자신의 괴로움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호소함으로써 정당성을 증명해야 했다.

반발과 공격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성폭력 2차 가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성폭력 사건 자체보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탓하거나, 공동체를 위해 사건을 덮으려는 행동 등이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성폭력 사건의 비공개 처리 원칙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과 개념들은 공동체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토론하며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는 다른 방향의 효과를 낳았다. ‘2차 가해’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누구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졌으며, 사건 처리는 소수의 여성 활동가들에게 과중하게 지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성폭력 운동은 대중적인 운동으로서의 급진성과 확장성을 잃어 갔다. 이는 반성폭력 운동이 변혁운동의 쇠퇴와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페미니즘이 사회를 바꾸는 운동과 만날 수 있는지, 여성의 권리를 위해 무엇을 변혁할 것인지를 찾지 못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끊임없는 사건 처리와 문화주의적·개인적 실천으로 귀결되었다. 또한 운동의 성과로 대학 내 학칙이 제정되고 성폭력상담소 등의 기구가 만들어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운동의 필요성은 사라져 갔다.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한가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때면 “변하는 게 없는 것 같다”는 한숨 섞인 탄식이 반복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없지는 않다. 성폭력은 피해 여성이 쉬쉬하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가해 남성의 범죄 행위라는 점, 여성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 접촉과 언어 성폭력 역시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돼지흥분제로 여성 강간을 모의한 일이 젊은 날의 추억거리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 행위라 인식되는 것 역시도 ‘당연한’ 변화는 아니었다. 여성들이 수많은 반발과 조롱에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 온 사회적 합의다.

여전히 여성들은 극단적인 폭력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 여럿 존재했다.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과 분노를 이끌어냈다. 2015년에 연달아 폭로되었던 진보논객 데이트폭력 사건은 ‘데이트폭력’을 심각한 문제로 제기했다. 몇몇 대학에서 불거진 이른바 ‘단톡방 성희롱 사건’은 남학생들로만 이루어진 단체 대화창에서 동료 여학생에 대한 노골적인 성적 대상화와 성폭력적 발언이 오가는 현실을 드러냈다. 문화예술계 등 특수한 집단 안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는 성폭력 행위들이 트위터를 통해 연달아 고발되기도 했다.

이들 각각은 사건의 성격도 달랐지만 사건 이후의 과정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다시금 ‘페미니즘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이 그 시대의 조건과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맞는 페미니즘 운동, 반성폭력 운동의 곤란을 넘어서는 운동은 어떤 것인지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덧붙이는 말

김유미 | 우리 시대, 우리 세대 운동의 비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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