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 2017/06 제29호
황새울 지킴이들의 전쟁같은 나날
누구에게나 오래도록 멈춘 어느 하루, 깊이 각인된 풍경이 있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들판, 해질녘 노을의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풍경은 2006년 5월의 황새울이다. 황새울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로 평택 미군기지의 확장예정지였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주민들은 정부가 벌인 대대적인 군경합동작전 일명 ‘여명의 황새울’에 의해 고향을 잃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던 예쁜 초등학교는 잔해더미로 남았고, 그 위엔 ‘평화’라고 적힌 깃발 하나만 외로이 펄럭이고 있었다. 대추리 초입의 다리 위에는 미술가들이 만든 큰 조형물이 쓸쓸히 마을을 지킬 뿐이었다.
“올해에도 농사짓자!”
그 즈음 나는 틈만 나면 같은 학교 선후배들과 함께 평택 대추리로 향했다. 정세의 눈과 귀는 내내 평택에 쏠려 있었다. 정부의 군사작전 ‘여명의 황새울’은 2006년 1월 미국과의 장관급 전략대화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이뤄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던 ‘자주외교 자주국방’, ‘동북아균형자론’의 실체는 하나같이 ‘굳건한 한미동맹’을 전제로 하는 군사안보전략일 뿐이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막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단지 ‘고향을 지키기 위한 싸움’도, ‘양키고홈’의 저항도 아니었다. 미국의 군사세계화 전략에 맞서 아시아 민중의 평화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었다.
사회운동·인권운동·대안미디어 활동가 상당수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평택범대위)를 구성하고, 대추리로 향했다. 일부 빈집에 거처를 마련했고, 방송국도 세웠다.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고, 벽에 시를 쓰고, 놀이방이나 도서관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주말마다 수많은 시민들이 찾아왔고, 평일에는 상주하는 활동가들이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켰다.
국방부가 토벌대처럼 들이닥치더라도 황새울은 ‘사람 사는 곳’이었다. 주민들은 매일 같이 “올해에도 농사짓자”고 구호를 외쳤다.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던 날
그해 봄 황새울은 내내 전쟁터였다. 3월, 국방부는 대추분교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세 차례에 걸쳐 물리력을 동원해 퇴거시키려 했지만 쇠사슬로 몸을 묶어 온몸으로 저항한 주민과 활동가들의 격렬한 저지로 무산됐다. 주민들은 삶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잃지 않기 위해, 나아가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패권 유지를 위한 전쟁기지가 되지 않도록 모든 걸 걸고 싸웠다.
그러자 정부는 농지를 파괴해 논갈이를 막으려 했다. 이 역시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논에 물을 대는 농수로를 파괴하려 했다. 285만평에 달하는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의 농사를 방해하기 위해 물길을 막았다. 불도저 수십 대를 동원해 논을 파헤쳤고, 굴착기로는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양수장 농수로관을 파괴했다. 농기계가 지나가는 걸 막기 위해 다리를 무너뜨렸고, 수십 개 중대 규모의 새까만 경찰 병력을 동원해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밀어냈다.
주민들은 그렇게 조금씩 들녘 안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던 사람들, 논바닥 곳곳이 을씨년스럽게 파헤쳐진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농사일이 멈추었고, 일상이 멈췄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황새울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5월이 되기 무섭게 노무현 정부는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 군 공병대까지 동원한 대규모 집행을 결정했다. 5월 2일, 국방부는 주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다음날인 3일 오후엔 윤광웅 국방장관이 직접 나서 행정대집행 강행 의사를 최종적으로 밝히며, 주민들을 맹비난했다. 경찰 1만여 명과 용역경비업체 직원 500여 명 투입이 예고되었다.
이에 평택범대위는 “결사항전”을 각오했다. 이날 늦은 밤 11시 대추초등학교에는 주민과 연대 온 시민 500여 명이 모여 군경이 동원된 대규모 침탈을 대비했다.
밤 사이 연대하는 시민들은 점점 불어났다. 나 역시 행정대집행이 있던 5월 4일 학교에 있었다. 전날부터 마을에 들어가 선후배들과 함께 다가올 폭거를 막기 위해 함께 했다. 대학생과 인권활동가, 노동자 말고도 500여 명이 학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을 쪽으로 점점 대규모의 경찰 병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와 마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긴급 상황이 보고됐고, 사람들은 연행이 되더라도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우려대로 1001, 1003 방패를 든 전경 수백 명이 들이닥쳤고 수 시간의 싸움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묶고 팔짱을 껴 대추리의 상징과도 같았던 학교를 지키고자 했다. 당시 한명숙 총리를 위시한 노무현 정부가 학교를 무너뜨리려 했던 것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심리적 성벽을 무너뜨려야 이 저항도 꺾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을 게다.
당시 학교 벽엔 대추리 주민들 얼굴 하나하나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국방부의 포크레인은 그 얼굴들도 죄다 무너뜨렸다. 작은 학교가 있던 자리엔 잔해더미만 쌓였다.
황새울의 노을을 잊지 않기 위해
2007년 5월, 935일째 촛불행사를 끝으로 주민들은 고향을 잃었다. 1015만 4000 제곱미터에 달하는 황새울 들판은 값비싸고 무시무시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황새울에 살던 주민 44가구 100여 명은 인근 노와리에 ‘대추리 평화마을’을 세워 집단 이주했다. 고향을 잃었다는 설움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 더 이상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대추리 이후 우리는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기자회견 중심의 이슈파이팅을 이어갈 뿐이었다. 하지만 반전평화의 열망이 식어버린 것은 아니다. 제주 강정에서, 경북 성주와 김천에서 한반도 평화를 지키고 군사패권의 확장을 막기 위한 주민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평택 미군기지 이전확장 저지 투쟁을 대추리만의 문제로 가두지 않고, 한반도 평화의 문제로 다루기 위해 애썼던 반전평화운동은 오늘날 사드 배치 철회를 위한 성주 주민들의 싸움을 그들만의 저항에 갇히지 않게 할 마땅한 책임과 권리가 있다. 대추리의 함성과 눈물이 허망한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연대를 전국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것이 황새울의 노을을 기억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라 믿는다.
“그 너른 들판을 사시겠다고?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니깐.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 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 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나올 것 같다.” - 평택 대추리 이장 김지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