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7/10 제33호

다시 ‘다른 유럽’을 꿈꾸어야 한다

유럽 노동운동의 고민과 실천

  • 류미경
‘브렉시트’는 신자유주의적 유럽 통합의 실패를 드러냈다. 그 이면에서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는 구호로 대표되는 ‘대안 유럽’ 운동 역시 실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세계사회포럼 등장을 계기로 형성된 유럽사회포럼은 유럽통합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럽 차원의 신자유주의 확산을 역전시키려던 기획이다. 대안 유럽을 향한 운동은 2005년 유럽헌법조약 비준반대운동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여기 참여했던 유럽의 사회운동은 유럽헌법조약 제정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제도적으로 공고화하려는 시도로 보고 노동권과 여성권을 비롯한 보편적 권리를 바탕으로 유럽차원의 새로운 인민주권을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초민족적인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아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금융을 억압하고 ‘사회적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반유럽’ 정서에 기댄 우익 포퓰리즘을 이겨낼 만큼 강력한 대안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대안 유럽 운동은 2005년 최고조에 달했다가 대중적인 운동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200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사그라졌다. 유럽 통합 과정에 개입해 신자유주의적 유럽이 아닌 다른 유럽을 건설하려던 유럽의 노동조합 운동은 현재 어디에 있나? 
 
 

‘사회적 유럽’의 모호성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시작과 함께 유럽 각국의 노총은 대체로 ‘사회적 유럽’을 자신의 전략으로 받아들였다. 유럽의 노동조합은 유럽 통합으로 인해 노동조합이 전통적으로 취해온 일국 차원의 전략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상품·서비스·자본·노동력 이동의 자유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고용을 일국이 아닌 유럽 차원에서 규율해야 하며, 유럽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된 보편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 각국 노총은 유럽노총(ETUC)과 각국 산별노조의 대표체인 유럽산별노조연합을 통해 유럽연합의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하거나, 국제적인 공동행동을 조직하려 했다.

이처럼 사회적 유럽 전략 안에는 노동자 국제연대라는 이념적 요소와 조합원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는 실용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긴축정책을 통한 평가절하와 임금·연금 삭감, 공공부문 고용과 공공서비스 축소를 통한 내부 평가절하라는 유럽 각국 정부의 대응은 사회적 유럽 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유럽연합이 부과한 긴축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각국 정부는 고용에 대한 법적 보호를 약화하고 불안정 노동을 확산하는 ‘노동개악’을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에 재정건전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 대응을 택하고 ‘사회적 타협’ 체계를 약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대안적인 사회·경제 질서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보다 ‘사회적 대화’ 혹은 교섭의 주체라는 제도적 지위 방어를 과제로 삼았다. 신자유주의적 유럽 통합을 역전시킨다는 장기적 전략보다는 조합원들로부터 제기되는 단기적으로 긴급한 요구를 우선했고, 따라서 일국적인 대응을 추구했다. 

유럽노총은 유럽연합이 도입한 ‘새로운 경제 거버넌스’를 비판하고 유럽연합의 긴축 정책 폐기를 주장했지만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위기의 효과로 노조의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 일국 차원의 방어적 대응은 ‘국가경쟁력 강화’ 논리에 취약했고, 임금과 노동조건을 압박하는 나라별·사업장별 경쟁을 벗어나지 못했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노총의 대응

그렇다면 유럽 노동운동은 ‘브렉시트’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유럽노총은 각국 노총이 ‘사회적 유럽’이라는 초국적 수준의 전략을 추구하는 조직적 틀이다. 유럽노총의 핵심 역할은 각국 (혹은 소지역) 노총이 취하는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해서 공동 행동의 바탕이 되는 공동 입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유럽노총은 2017년 5월 총회에서 “경제위기는 사회위기 정치위기로 이어졌다”며, “긴축이라는 잘못된 처방이 광범위한 반유럽 환상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했다. 또, “경제위기의 정치적 후유증은 유럽·노동·세계화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고 진단하며 유럽 내 임금·노동조건 격차 축소와 유럽의 사회적 측면 강화를 “유럽의 미래”를 위한 공동 과제로 채택했다.

우선 최근 10년간의 임금 하락에 대응하고, 생산성 증가를 따라잡고 임금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유럽 전역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캠페인(European Pay Rise Campaign)을 개시했다. 첫째, 초국적 기업과 그 공급사슬을 포괄하는 임금인상 교섭을 요구하고 최저임금 제도의 강화와 단체협약 효력 확장을 위한 입법을 추동한다는 입장이다. 둘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각국 재정정책 검토에 개입해 ‘임금 억제’ 위주의 정책을 철폐하고, 단체교섭 제도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키는 한편, 단체협약 적용률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해 유럽 차원의 최저임금 인상 공동 목표를 설정(각국 중위임금의 60%를 상회할 것)한다는 방침이다. 셋째, 노동자간·기업간 부당한 경쟁과 임금 착취에 맞서기 위해 ‘임금의 상향평준화’를 추구하고 성별임금격차를 축소하는데 역량을 기울일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경제위기와 긴축의 후과로 반유럽·반이민 세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유럽 전역에 걸친 권리의 상향평준화를 추동하고자 한다. 

유럽노총은 2016년 3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유럽 경제·통화동맹 심화’ 계획으로 제시한 ‘유럽의 사회적 권리 기둥’에 관한 논의에도 개입해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정규직 고용을 고용의 표준적 형태로 지속’, ‘집단적 권리 강화’, ‘특히 단체교섭을 촉진하고 단체협약을 보호할 것’ 등이 강조점이다. 
 
 

네덜란드·스페인·이탈리아노총의 이유 있는 변신

유럽노총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공동 대응과 별도로 각국 노총들은 경제위기의 후과로 인해 약화된 노동조합의 위상을 복원하고 정치위기 사회위기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펼치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을 특징으로 하는 네덜란드노총(FNV)은 불안정 노동이 확대되고 노조 조직률이 하락하면서 ‘사회적 대화’보다는 ‘조직화 전략’과 ‘대중 행동’을 우선시 하고 있다. 지난 5월 개최된 네덜란드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스키폴 공항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투쟁 사례’, ‘건설현장에서 원청과 체결한 단협이 해당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도록 한 사례’ 등이 성공적인 사례로 보고되며 ‘공세적 투쟁’이 강조됐다. 또 청년 불안정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 형성을 목표로 진행된 ‘청년과 단결’ 캠페인이 보고됐는데, 청년들의 운동은 ‘전투성’, ‘투쟁’, ‘운동’, ‘우리는 승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숨어있지 않을 것이다’ 등의 슬로건으로 묘사됐다. 한편 총선에서 드러난 자유당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에 위기감을 반영하듯 ‘바닥을 향한 경주’를 제어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단결 강화가 토론 곳곳에서 의도적으로 강조되기도 했다. 불안정 노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노조 안으로 포함할지가 주된 과제다.

스페인노총은 ‘광장운동’으로 전통적인 노동조합운동이 도전을 받자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국제주의와 페미니즘 등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적 요소를 강화하는 혁신을 과제로 삼고 있다. 지난 6월 말 개최된 스페인노총(CCOO)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러한 안팎의 비판이 영향이 엿보였다. “CCOO가 움직인다!”는 슬로건으로 위기 상황에서 제기되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와,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내부를 혁신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스페인노총은 계급 기반 노동조합 총연맹으로서 노동자들의 권리 방어, 특히 위기 및 위기대응 정책의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장기 실업자 청년, 노년,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들 등에 초점을 두겠다고 선언했다. 또 노동조합의 국제주의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주되게는 유럽연합의 난민에 대한 반인권적 조치(난민 캠프)와 무책임성에 대판 비판, 터키·팔레스타인·서부사하라 민중들과의 연대를 천명했다. 규약개정 논의에서는 페미니즘을 스페인노총의 이념으로 명시하자는 안이 발의되었고 “CCOO는 여성·남성노동자로 이루어진 페미니스트 조직이며 평등을 지향한다”는 문구가 채택됐다.
 

이탈리아노총(CGIL)은 노동조합이 청년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의미 있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대만 하는 세력’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불안정 노동을 확산하는 악법 폐기 운동과 함께 ‘보편적 노동권리 헌장’을 제정하는 운동을 펼쳤다. 〈보편적 노동권을 위한 헌장(이하 헌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캠페인은 최근 몇 년간 노동 개악으로 불안정한 형태의 고용이 확대되면서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가 늘어났다고 본다. 그러니 헌법상의 권리가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도록 헌법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를 새긴 법을 새롭게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탈리아노총은 이 운동을 제안하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될 존엄성을 복원하는 법 제정에 관한 대중적 논쟁을 촉발”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법 제정을 위한 운동은 완결된 법안을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노동 개악이 파괴한 헌법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모든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대대적인 토론을 약 9개월 동안 조직했다.
 

다시 ‘다른 유럽’

유럽의 노조들은 극우 포퓰리즘이 발호하는 현상을 유럽연합의 모순과 정치적 통합·민주적 제도의 결핍을 원인으로 보고 변화의 거점을 ‘유럽’으로 사고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은 기본적으로 “위기와 긴축에 대한 대응은 국제적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지닌 시기 줄곧 주장해온 바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사회적 측면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둔 대응은 결국 유럽연합 자체 개혁을 더욱 심화하는 데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다른 유럽’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관계를 기초로 할 때 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요구가 노조의 범위를 뛰어넘는 공동체와 사회의 이해관계에 부합해야 하고, 투쟁이 지역적, 일국적 차원에서 조직되더라도 국제적인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
 
 
필자 소개

류미경 | 민주노총 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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