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오늘세계
  • 2017/10 제33호

위로부터의 동아시아 말고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맨땅에서 헤딩하는 동아시아 국제연대 불지피기

  • 김모두

 

자본주의의 위기와 동아시아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는 곧바로 세계화됐다. 세계 곳곳에서 달러 부족 사태가 일었고, 유럽에선 유로 가치 하락으로 인한 재정위기가, 라틴아메리카 등 여타 지역도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한편 동아시아는 위기를 겪었지만 신속한 회복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중국·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G7을 대체하는 G20에 동참했다. 특히 중국은 세계 최대 달러 보유국가로 성장했고, 오늘날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미국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1980년대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경제에 통합된 중국은 급속한 성장으로 동아시아 지역주의를 추동했다. 이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도 ‘세계 공장’의 반열에 가세했다. 1980년대 일본, 19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은 동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을 준거 삼아 가치사슬을 조직하고, 특히 제조업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를 늘렸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한때 동아시아 발전 모델은 ‘대안 자본주의 유형’으로 주목받았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한 이들은 “동아시아엔 동아시아만의 정체성이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동양적 가치’의 복권을 기도했다. 유교자본주의론·아시아적 가치론이 대두됐고, 이는 기업문화를 가부장적으로 구성한다든지, 근면성에 대한 예찬을 통해 노동력을 극도로 착취하는 것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사실 동아시아 제조업이 급격한 성장을 겪은 건 미국 소비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무역적자·재정적자·가계부채를 통해 이 메커니즘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모순이 위기를 불러왔고,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은 해소되지 않았다. 

최근 동아시아는 극심한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고용이 붕괴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베트남 같은 구 사회주의권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무제한적인 노동력 공급이 멈춰서는 루이스 전환점(개발도상국에서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에 도달해 임금이 오르고, 이로 인해 고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에 다다랐고, 노동쟁의가 급격히 늘어나 해외 자본이 내륙지방이나 동남아시아 등으로 떠나고 있다. 수억 명의 농민공들은 일자리를 잃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베트남은 여전히 고성장이 기대되는 신흥국이긴 하지만, 30살만 넘어도 취직이 어려워지는 등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는 자본의 유동성을 방어할 장치를 해체해버려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취약하다. 그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환보유고를 막대한 수준으로 늘리고 있지만, 이는 사실 안정성의 상징이기보단 그만큼 미국경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경제의 위기와 함께 동아시아 국가들이 겪을 충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위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내부화되고 주체에 미치는 영향이 맞아떨어질 경우, 심각한 격동을 불러올 수 있다.

동아시아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심각한 위협도 존재한다. 국가 간 복합적인 갈등과 겹겹의 모순으로 인해 해결책을 찾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중국은 분단된 타이완, 일국양제라는 모순적 상태에 놓인 홍콩 시민사회와 갈등을 겪고 있으며, 남중국해 분쟁 등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적극 부응하는 가운데 역사적 갈등은 덮고, 우경화 드라이브를 강화하면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또 다른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성과 비대칭성이 동아시아 미래의 장밋빛 전망을 어렵게 한다.
 
ⓒ로이터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추락하는 자본주의를 구제할 한줄기 동아줄인가? 아니면 급기야 중동을 압도하는 화약고가 될 것인가? 한반도와 일본 등에서의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점증하는 동아시아 전쟁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동아시아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노동자운동·사회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불안정성

세계 자본주의가 마주한 위기는 단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만은 아니다. 오늘날 동아시아 경제 구조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성장을 의미하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서구에 맞선 동아시아 경제의 상대적 상승은 팽창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새로운 모델도, 축적체제에 기초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임금·위안화 평가절하에 기초한 수출주도 공업화를 극단적 형태로 반복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로의 통합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앞으로 동아시아가 저렴한 원료와 노동력을 획득할만한 여지가 줄고, 생산비용이 상승하며, 세계에서의 경쟁이 극심해지면, 결국 동아시아의 고성장 가도는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또 다른 압력이 된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의 재편은 새로운 헤게모니를 열기보다는,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보다 심각한 국면으로 이끈다. 노동자계급은 심각한 고난을 직면하고 있고, 자본은 이를 해결할 방도를 못 찾고 있다.

중국의 주요 산업이 해외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중국경제의 잠재력이기보단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취약성의 징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안으로는 ‘조화사회’, 밖으로는 ‘일대일로’ 등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섣불리 성패를 점치긴 어렵다. 중국은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극심한 노동 착취는 지속되고 있다. 

최근 정리해고 급증과 노동의 불안정화도 위기의 양상 중 하나다. 중국·베트남에선 미조직 노동자들의 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조직적인 방식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순을 조직화할 실천이 없으면 민족국가를 경계로 계급 내 적대만 심화될 수 있다.
 

‘동아시아 담론’

‘동아시아’라는 키워드가 재부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등장한 유교자본주의론 식의 망상, 자민족 중심주의, 세계체계에 대한 몰이해 등 한계적인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가 동아시아의 실체를 가늠하려 할 때 걸림돌로 작용한다. 나아가 동아시아는 인근 국가들 간 연대 의식이 부재하고, 역사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누적돼 있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에 따른 일자리 변동은 각국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관계보다는 국가라는 틀 안에서 위기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사회가 직면한 인종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동아시아란 무엇인지’ 대중적으로 인식하고, 타국 노동자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하면서, 국경과 민족·종교를 넘어 노동자들이 마주한 억압과 모순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운동 차원의 연대도 가능하고 대안체제를 구상하는 일도 무망한 일이 아니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출현한 것은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다. 사회변혁 전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일국적 변혁을 넘어선 대안 담론이 필요해졌고, 그 틈바구니에 동아시아라는 화두가 제시됐다.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 민중적 시각에 근거하면서, 자본주의·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실천 방향이 제시됐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동북아허브국가’를 제창한 참여정부 초기까지 활발하게 이어졌다. 국내외 역학관계의 변동에 따라 담론의 논리와 지향성도 변화했고, 이념적 지향에 따라 다양한 분화도 겪었다. 동아시아에 대한 사유와 실천이 학계 내 담론에 국한되어선 안 되겠으나, 그렇다고 사회운동이 이런 논의와 무관하게 종별적 실천을 펼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학계의 담론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효과는 오늘날의 노동자운동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것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무엇이 ‘동아시아’인가?

동아시아라는 지역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동북아, 동양, 아시아태평양 등 여러 지역명이 차별적으로 사용되었고, 여기엔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연루되어 있다. 이를 테면 ‘아세안+3(한중일)’을 넘어선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구상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구상 간 충돌에서 일본과 중국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참여를 요구했고, 중국은 동아시아 구상에서 미국의 관여를 원치 않았다. 또, 한국 정부가 동아시아를 말할 땐 자국 중심의 욕망이 드러나 보편성을 담지하기 어려웠고, 동서남북으로 광활한 영토를 지닌 중국은 자신을 ‘동아시아 국가’라 규정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동아시아’는 단순히 지역 범위를 지시하기 어렵다. 학술적·이념적·제도적 권역 등의 2차적 용법을 지니는 매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각각의 동아시아론이 어떤 이념적 지향을 갖는지, 어떤 사회적 현실과 접점을 갖는지에 따라 다른 전개를 보이기도 한다. 1990년대 초 동아시아 담론이 최초 제기됐던 시기에는 사회 변혁의 지향성을 지닌 동아시아 대안체제론이 제기됐고, 반대로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이 찬양받던 1990년대 중반에는 유교자본주의론이 등장했다. 참여정부 시절 ‘동북아허브국가’처럼 경제중심적인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급부상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담론은 한계를 안고 있다. 각각에 대한 선택적 비판과 옹호를 거친다고 해서 대안체제를 제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란 게 과연 실체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각국의 사회·문화는 매우 상이한 측면이 많아 하나의 실체로 묘사될 수 없다. 문화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시대적 환경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동아시아’를 사고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위치한 정치·경제·국제정세적 현실을 지표할 단어가 그뿐이다. 동아시아는 역사·정치·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상대 국가의 존재가 다양한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각국의 정치권력과 자본의 기획으로는 극복 불가능할 정도로 복합적이며, 상반된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을 증폭시킬 뿐이다. 동아시아 대안체제론이 갖는 지향으로 인해 다른 담론들이 받는 비판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무엇이, 왜 동아시아인가’에 대해 해명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렵다.

동아시아는 고정된 경계나 구조를 가진 실체가 아니다. 지역을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에 따라, 유동하는 역사적 공간이라고 규정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동아시아 연대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려면, 동아시아 민중의 삶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가능성이 가시화돼야 한다. 민족이나 전통문화와 같은 동질성에 기대지 않고, 지극히 ‘현실’의 모순에 착목하는 가운데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아시아 민중이 마주한 전쟁 위기와 글로벌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일 것이다. 이 모순들에 있어 우리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하나이며,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다. 베트남 노동자들의 극심한 노동 강도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 수십년 간 미군기지 철수 투쟁을 해온 오키나와 민중이 겪는 전쟁 불안은 남한 사람들이 마주한 한반도 전쟁위기의 공포와 다르지 않다.

사회운동이 주도해, 타국의 사회운동적 실천 및 대중 정서를 참조 삼아, 실천을 입체화해야 한다. 자국을 기준으로 타자를 평가하지 않고, 서로가 마주한 정세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차이를 발견하되, 이를 자국 내에서 분절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때 대중운동만이 그 추동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동일성의 균열을 조직하는 사회운동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를 ‘동아시아 국제연대’,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 실천’이라 부를 수 있다.
 
▲ 2010년 5월, 대규모 파업을 벌인 중국 난하이-혼다자동차 부품공장 노동자들 ⓒ로이터통신
 

위로부터의 동아시아

물론 동아시아 연대는 손쉬운 과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역사적·국제정치적 난맥상과 군사적 위협들이 이를 어렵게 한다. 한반도 문제만 해도 총체적인 난국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예방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미군 주둔을 강화하는 등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을 펼쳐왔다. 이는 미중 간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고, 한반도와 남중국해에서의 갈등을 야기했다. 나아가 최근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실물화하고 핵무기 보유국으로서의 지위와 체제 인정을 끌어내려 하면서, 양국의 치킨게임은 악무한을 거듭하고 있다. 남한 정부마저 북핵을 근거로 사드 배치를 강행하면서 중국과의 갈등이 첨예화됐다. 이런 조건은 동아시아 민중들이 ‘평화권’에 근거해 사태를 직시하기 어렵게 한다. 타 국민에 증오를 드러내고, 전술핵 재배치를 지지하거나,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찬성하는 등 여론을 나쁜 방향으로 끌고 가는데 일조할 뿐이다.

각국 정부와 자본에 의한 위로부터의 기획은 꽤 가시적이다. 자본은 값싼 노동력을 위해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동하고 있고, 각국은 동상이몽 속에서 ‘위로부터의 동아시아’를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라는 시야가 지배계급에 의해 독점되는 상황에선 연결을 구축한다고 해도 해방보다는 지배의 효과를 낳을 위험이 크다.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역사적 갈등과 이로 인한 자민족 중심주의는 민중 간 연대도 어렵게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제법보단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된 불평등조약을 통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왜곡된 국민국가로의 이행을 겪었다. 한반도와 동남아시아는 식민지, 중국은 반식민지,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냉전기에는 전범국과 분단국가가 됐다. 따라서 국민국가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아닌, 사회운동적 국제연대를 발전시켜야 대안세계화 운동의 지역적 전망을 도출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저항의 틀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동아시아 대안체제론’이다. 패권적 아시아가 아닌 민주적 아시아, 자본의 아시아가 아닌 사회적 아시아로 저항적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자국 문제에 갇히지 않고 범아시아적 차원의 노동규범과 사회규약을 마련하기 위해 초국적 실천에 힘을 모아야 할 때란 거다.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된 이 담론은 구체적 대안이 부족하고 실천의 과소라는 한계를 노정했다. 세계경제에 대한 분석도 미비했고, 대안을 상상하는 것에 그쳤다.

민중운동 차원에서는 미약하나마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2004년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이후 대륙별로 국제연대가 시도됐고, 아시아에선 같은해 6월 ‘아시아 민중·사회운동 서울회의’가 개최됐다. 여기서 발표된 공동 성명은 “아시아의 민중·사회운동은 세계경제포럼과 신자유주의,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모였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후 연대는 사안별 연대와 포럼 등으로 이어졌지만, 최근에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 2004년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민주노총 역시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소홀히 하진 않았다. 2005년 홍콩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 맞서 원정투쟁이 이뤄졌고, 이는 이후 홍콩노총과의 연대가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방글라데시 등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현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을 때, 민주노총은 적극 연대에 나섰다. 이런 구체적 실천이 보다 강화돼야 한다.

10년 전 한 국제연대 활동가는 아시아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긴 호흡과 더불어 실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공동 실천 의제를 마련”하고, “아시아 노동·사회운동의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교류를 조직”해, “자주적인 민주노조운동, 급진적인 사회운동 역량을 강화”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아시아 사회운동 연결망 구성을 목표로 세우고 의식적인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민주노총은 이런 목표의식 하에 아시아 노조활동가 초청 교육·교류 과정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산네트워크와 연루된 핵심 국가(중국, 베트남) 활동가들의 참여가 어렵고, 노조의 투자가 부족한 점 등은 한계로 남았다. 오늘날 동아시아 연대 앞에 놓인 장벽을 극복하기엔 여전히 구체적 전략과 실천의 과소 문제가 남는다.

따라서 우리는 국내외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해야 한다. 첫째, 이주노동자 운동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통계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남한 내 체류 외국인 중 취업자는 96만 2000명으로, 100만 이주노동자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중 70퍼센트가 제조업, 서비스업, 건설업으로 민주노조 운동의 포괄 범위에 분포한다. 이처럼 남한과 타이완 등 유입국에서 벌어지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주목하고, 노동자들의 ‘이주’를 대륙적 차원에서 운용해야 한다. 이주노조 활동을 통해 맺은 인연으로 관계를 잇고 있는 네팔 신미고(네팔이주노동자연대센터; 《오늘보다》 2017년 5월호 관련 글 참조)와의 연대가 좋은 예다.

둘째, 해외 진출 한국 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을 매개한 국제 연대도 모색해야 한다. 가장 핵심적인 중국과 베트남은 정부 지휘 하에 노동자운동을 통제하는 ‘공식 노조’ 체계라 네트워킹이 물리적인 한계도 있다. 하지만 국내 이주노동자도 많고, 본국으로 돌아간 숫자도 그만큼 많으니 상황이 좋아지기만 기다릴 순 없다.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꾀할 때다.

셋째, 전략적인 지원 경로를 찾아야 한다. 현재 중국 내의 비제도적·자생적 노동자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은 북반구 비정부기구와 다소 우경화된 노총들을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있다. 이는 아시아 노동자운동의 급진적 성장을 굴절시킬 수 있고, 이념적 한계도 드러낸다. 한편, 중국 정부의 극심한 기본권 탄압은 이 운동의 자가 발전을 억압하고 있다. 인근 국가 사회변혁적 노동자운동의 개입과 연대가 필요하다. 돈만이 아닌 경험의 교통으로 국제연대의 새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주적이고 급진적인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넷째, 단기적인 난점을 극복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높이기 위해 아시아 사회운동 차원의 대안미디어가 필요하다. 각국의 상황과 운동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것은 교류와 연대를 위한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기적인 네트워크와 공동 행동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노동자운동만이 아니라, 평화운동과 생태운동 등 동아시아가 직면한 모순에 저항할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꾸준히 관계맺음을 유지해야 한다. 예컨대 아시아의 반전·평화 활동가들이 서울에 모여 아시아 사회운동 평화포럼을 열고, 한반도 전쟁 위기에 맞선 공동 행동의 날을 조직하고 실행한다면, 기존 지식인 중심의 실천을 대중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중장기적으론 동아시아 내 초국적 자본의 착취에 맞선 아시아 노동자들의 연대와 공동 투쟁도 모색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암담하고 무망한 일이다.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연대 구상은 ‘조건에 기댄 연대’보다는 각국의 운동이 갖는 고민을 동아시아 민중 내에서 활발하게 교통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려질 것이다. 이를 통해 각국 사회운동이 공동의 조건을 확인하고, 변혁적 이념을 공유해야 한다. 단, 타 지역 노동자계급이 안고 있는 고투를 나눠 갖는 일은 동아시아 각국이 지닌 비대칭성과 적대, 몇 겹의 분단선 때문에 어느 정도 불가능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타국 운동이 지닌 특수성이 자신의 문제로 읽힐 수 있도록 (언어적·맥락적으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번역이 이루어지는 매개가 바로 ‘동아시아’다. 동아시아에 대한 영역 규정 역시 이러한 계급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재설정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투자도 강화해야 한다. 각국 사회운동과 노동자들은 인근 국가의 운동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무관심한데, 우리는 이러한 백지 상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 많은 국제 활동가가 필요하고, 노조 차원의 투자도 늘어야 한다. 민주노총 내 국제담당자는 1명에 불과한데, 이런 조건에선 공세적 사업이 어려울 것이다. 높은 관심과 전망을 둘러싼 토론, 전폭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
 
 

참고 자료

노동자운동연구소, <아시아 지역 노동운동 보고서>, 2012

박상현, <동아시아와 세계체계 연구 : 쟁점과 전망>, 2011
박태우, ‘아시아 노동자들 “최저임금 인상, 뚜좽”’, 《한겨레》
윤여일, 『동아시아 담론』
이창근, <아시아 노동자 연대 강화를 위해 긴 호흡으로 나아갈 때>, ≪사회운동≫ 79호
임필수, <오바마의 군사전략과 위협받는 동아시아>, ≪오늘보다≫
조성재 외,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 동아시아의 일자리 변동>(한국노동연구원)
통계청, ‘2016년 외국인고용조사 결과’, 2017
LG경제연구원, <2017-2021 중기경제전망>, 2017
‘Workers over 30 face grave unemployment crisis’,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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