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 2017/12 제35호
추모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2009년 동지(冬至)
홈리스행동은 매해 동짓날 서울역 광장에서 ‘홈리스 추모제’를 연다. 조금씩 성격은 다르나 대전과 대구에서도 같은 날, 같은 이름의 추모제가 열린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그래서 어둠이 가장 깊은 동지(冬至)가 홈리스의 상태와 닮았다 느꼈기 때문이다. 같이 모여 그 해 돌아간 동료들의 넋을 위로하고 “얼지 마”, “죽지 마”라고 주문하며 겨울을 잘 이겨내자고 다짐하는 자리다. 추모제를 닫는 사회자의 발언은 대개 “이 겨울 건강하게 잘 보내시고, 내년 이 자리에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로 끝나곤 했다. 집이 없는, 집 같지 않은 곳에 사는 홈리스들에게 겨울을 이겨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겨울에는 삶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홈리스의 사망 실태는 통계조차 없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작성한 통계가 전부인데, 2005년 이후로 매해 300명 이상의 홈리스가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역시 자료 확보의 어려움으로 2009년 이후로는 집계가 멈춘 상태다. 그리고 2009년 동짓날 진행된 홈리스 추모제 역시 행사 도중 멈춰 서고 말았다. 경찰의 군홧발이 빈곤에 압사당한 홈리스들을 추모하는 그 자리마저 짓뭉갰기 때문이다.
2009년의 홈리스 인권 실현 과제
홈리스의 높은 사망률(전체 인구집단의 2~3배)은 이들의 고단한 삶의 투영이다. 따라서 홈리스 추모제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살아있는 이들의 정화를 다짐하는 의식만은 아니다. 죽임에 가까운 죽음이 재발하지 않도록 그 해 홈리스 복지와 인권 보장 수준을 평가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09년 추모제에도 “죽음의 행렬 방치하는 이명박 정권 규탄!! 홈리스 인권 실현을 위한 6대 요구”가 걸렸다. 당시의 계획서를 보니 아주 세부적인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현재의 요구와 다른 것이 없었다. 이렇게나 변하지 않는 현실이라니.
여섯 가지 요구 중 당시의 상황을 드러내는 몇 가지를 꼽으면 이렇다. 첫째, 거리의 홈리스 여성을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거리 노숙을 하는 여성이 분명 존재함에도 당시 정부의 거리 홈리스 여성 지원기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더욱이, 그해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던 상담보호센터 한 곳마저 재정난으로 폐쇄하면서 여성 거리홈리스는 의지할 곳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둘째, 서울시의 ‘명의도용 사전 예방 대책’을 규탄하고 현실적인 예방대책을 요구하였다. 2009년, 서울시는 “노숙인·부랑인·쪽방 주민에게 서면 동의를 받아 신용정보업체를 통해 ‘대출 불가자’로 등록”한다는 대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후 ‘자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당사자가 철회요청을 하면 철회하되,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인지 수사’를 요청키로 했다. 홈리스 명의도용 범죄가 발생하는 구조는 손대지 않은 채 이들에게 신용상의 불이익을 주고, 자칫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량코드를 부여하려는 어이없는 대책이었다. 결국 이 대책은 단체들의 저항과 국가인권위의 전면 재검토 권고에 의해 무효가 됐다.
셋째, 홈리스 의료지원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서울시는 매해 홈리스 진료예산을 적자 편성하고, 의료기관에 진료비를 연체(2009년도 연체액 4억 원)시키는 것을 관행으로 삼았다. 병원 입장에서 홈리스 환자를 반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더해 2009년에는 건강보험이 유지되고 있는 홈리스들에 대한 의료지원을 제한하기 까지 했으니, 홈리스들의 치료받을 권리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광우병 촛불에 놀란 가슴, 추모 촛불을 짓밟다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요구하며 2009년 12월 22일 낮, 서울역 광장에서 “홈리스 인권 실현을 위한 6대 요구 쟁취 결의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치고 서울시청까지 행진도 벌였다. 물론 사전에 신고 된 집회였다. 그런데 경찰은 “집회 시간에 대통령이 지방에서 올라오며 청와대에 들어가는 길이니 좀 당기거나 늦춰 달라”고 요구하였다. 정해진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일정상 무리한 요구였고, 요구를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대통령이 행진을 본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통령 행렬과 겹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주간 일정이 마무리되고 추모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추모제의 시작을 알리는 촛불이 점화되자 남대문서 정보과 담당이 안달하기 시작했다. 시경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촛불을 끄지 않으면 진압해야 하니 촛불만 꺼달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광우병 촛불에 덴 MB 가슴이라지만 100명 남짓한 이들이 든 추모 촛불에까지 경기를 일으킨단 말인가? 그러나 경찰들은 쏜살같은 세 차례 해산 방송 이후 추모제 현장에 난입했다. 촛불을 밟아 끄고, 만장을 부러뜨리고, 참가자들과 이에 항의하는 시민 12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그렇게 2001년부터 매해 동짓날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그해 돌아간 홈리스들을 애도했던 추모문화제는 강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연행자 전원이 석방된 이후인 12월 30일, “다시 여는” 추모제를 진행해야 했다. 같은 장례, 같은 제사를 두 번 지내는 식이었다. 부정한 정권의 촛불 강박증이 스러진 홈리스들의 원혼마저 짓밟았기 때문이다.
MB의 추억
잠잠했던 MB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나 역시 2009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소심한 일갈을 도모한다. MB는 대선 전해인 2006년, 서울시장 재임 당시 ‘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을 도입했다. 그가 입에서 아이디어를 뱉어내자 사업은 보름 만에 시작됐다. 그가 애정하는 건설 사업에 홈리스들이 참여하고, 임금의 절반은 서울시가 절반은 민간 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MB 특유의 스타일로 홈리스의 일자리 기근을 풀 것으로 기대되었고, 그의 치적 중 하나로 남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내용은 달랐다. ‘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을 통해 취업한 이들은 현장에서 작업복도 안전모도 다른 경우가 많았다. 호칭부터 “노숙자 아저씨”로 불리는 등 작업 현장에서의 차별이 심했다.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나 4대 보험과 같은 노동관계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업체에 대한 근로감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로 시행 1년이 되자 참여자의 52퍼센트는 사업에서 퉁겨져 나왔다. 물론 대통령이 된 MB는 이런 일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얼마 있으면 동지(冬至)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동짓날 서울역 광장에서 추모제가 열리고 세상을 등진 홈리스들의 넋을 위로할 예정이다. 冬至(동지) 팥죽을 나눠 먹으며 同志(동지)가 되자며, 홈리스 당사자들을 홈리스 운동으로 초대할 계획이다. 권력 쥔 자들의 강박증에 쉬이 밟히고 꺼지지 않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