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 2018/01 제36호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민주주의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탄소 민주주의 -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
에너지와 민주주의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위원회가 공사 재개를 권고하고 문재인 정부가 이를 따르기로 한 것을 두고 바람직한 숙의민주주의의 실험이자 사회 갈등 해결의 모범 사례로 평가하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해관계자 연합이 설파한 경제적 손실 논리가 힘을 얻었고, 에너지 전환은 바람직하지만 당장 추진하지는 않아도 되는 일이 되었다. 결정을 내린 공론화위원회는 3개월의 운영 끝에 해산했고 결정의 정치적 책임은 공중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기회주의적이고 기계적인 중립을 지킨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에너지 문제와 결합할 수 있는 낱말일까?
석탄과 노동운동이 만든 민주주의
올여름 출간된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은 이러한 질문에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다. 저자 티머시 미첼은 책에서 화석연료, 특히 석유를 중심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조망한다. 그는 중동의 정치·경제를 설명하는 ‘석유의 저주’, 즉 풍부한 지하자원이 오히려 경제 체질을 허약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마비시켰다는 개념이 실제로는 석유의 생산과 분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며, 기존 시각을 비판한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석유가 아니라 오일 머니만 논한다.”(p.12) 저자는 대안적 접근법으로 중동의 역사에 관한 사회-기술적 이해를 제시한다. 석유가 채굴·정제·운송·소비되는 과정에 관한 사회-기술 시스템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자본 및 국가 권력의 작동과 결합하여 오늘날 민주주의의 특수한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탄소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데에 화석연료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노동운동의 저항과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자본의 전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강조한다.
저자의 논지는 석탄과 석유가 현대적 노동운동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탄광 노동자들은 석탄 채굴 과정에서 상당히 자율적인 결정 권한을 가졌다. 탄광의 붕괴를 피하면서 어디를 파나갈지를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의 자율성은 탄광 노동자들에게 ‘기술적 힘’을 부여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석탄은 증기와 열·전력을 공급하는 핵심 에너지원으로 사회 곳곳에 필수적인 자원이 되었다. 이런 석탄의 흐름은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에 상당한 권력을 줬다. 석탄 에너지 네트워크의 한 지점에서 석탄 공급을 방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탄광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힘을 부여한 것이다.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빈도와 강도는 다른 주요산업에 비해서 훨씬 높았고, 노동조합 조직률과 힘도 대단히 컸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요구를 실현하는 동력이 되었고 20세기 전반기에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석유 기술의 발전
반면 석유 시대의 에너지 네트워크와 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동자들의 힘은 석탄 시대와는 달랐다. 석유 채취 과정에 필요한 노동력은 석탄의 그것보다 매우 적었으며, 운반도 철도가 아니라 주로 송유관이나 유조선을 이용했다. 석유의 채굴 장소는 석탄과 달리 도시나 산업단지에서 매우 멀리 위치했다. 이러한 차이는 석유의 생산-운반-소비 네트워크에서 노동자들의 조직된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다. 송유관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되었고, 파괴되어도 비교적 손쉽게 복구할 수 있었다. 석유 에너지 시스템은 석탄 에너지 시스템보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 방해받을 가능성이 적었던 것이다. 석유는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 권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영향력 행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대 민주주의가 주조되는 데에 이러한 특성이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 시스템이 자본-국가-노동운동 간의 복합적 갈등과 투쟁의 장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는 석유 자본들이 자신들의 독점을 유지하고 막대한 지대를 얻기 위해 석유 자원의 희소성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다한 역사가 생생히 그려졌다. 20세기 전반에 이미 석유는 풍부한 자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고, 채취 과정에서 비용도 적게 들었다. 세간의 상식과는 반대로 석유 자본들은 중동에서 석유의 생산을 저지하고 늦추기 위해서 석유 탐사권을 사들이고,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하거나 경쟁했다. 또한 책에는 1970년대 석유 위기 과정에서 중동 국가와 석유 자본이 취했던 전술들, 정치적 이슬람주의 운동과 미국의 공모와 제국주의적 개입이 해온 결정적인 역할이 흥미롭게 설명된다. 책의 절반 이상은 사실 석유를 중심으로 본 중동의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재생에너지 = 에너지 민주주의?
그러나 100년의 역사를 추적한 저자는 탄소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대해서는 주저한다. 그는 우리에게 두 가지 경고만을 던진다. 첫째, 피크오일(석유의 생산이 정점을 지나 점점 감소하는 현상)과 기후변화의 위기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환경론자 일반의 경고다. 두 번째 경고는 좀 더 논쟁적이다. 저자는 화석 연료로부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라거나, 에너지 시스템의 탈집중화가 곧 에너지의 민주화라는 환경주의자 주류의 사고를 비판한다.
이 책의 교훈은 누구도 사회-기술적 시스템의 구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p.400)
저자는 에너지의 기술적 형태가 정치에 반영된다는 결정론을 거부한다. 대신 자연-사회의 이분법이나 전문가-일반 시민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회-기술적 논쟁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저자의 경고가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싶다. 저자는 오늘날의 에너지 민주주의 전장에 대해서는 모호한 말들만 남긴다. 나는 그 이유가 탄소 민주주의에 관한 티머시 미첼 식의 ‘사회-기술적 이해’에 있지 않은지 의심한다. 그는 서구 세계와 중동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들을 석유 자원을 둘러싼 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위로 드러내 주었다. 하지만 거기에 맞선 저항의 주체와 저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술은 사회-기술적 시스템에 끼워 맞춰질 뿐 적극적 행위자의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조직 노동자들의 저항은 석탄이나 석유 특유의 기술적 시스템에 종속되어 그 효과로 설명될 뿐이다.
에너지 민주주의는 갈등적 전장
저자의 분석대로 탄소 민주주의 형성의 주요 행위자가 제국주의 국가들과 석유 자본들이었다면, 이들에 맞선 투쟁의 주체들은 조직된 노동운동과 반체제적 대항운동이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경고한 피크오일과 기후변화 위기의 시대에도 저항을 보다 직접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날의 민주적 변화를 가로막는 제국주의와 자본에 대해서도 이들이 걸림돌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위기의 숙명론과 모호한 가능성을 언급하는 데 그친다.
민주주의는 갈등의 전장이고, 민주주의의 특유한 형성에는 계급 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묻어난다. 화석연료 채굴과 연소로 인한 사회·경제·환경적 피해들, 기후변화로 인한 사회-자연적 재해들은 에너지 전환을 당위성으로까지 끌어올린다. 그러나 미래의 에너지 대안에 관한 합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에너지 대안은 사회-경제적 대안의 상과 분리되어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장주의적 경쟁이 중심이 되는 에너지 전환을 꿈꾸고, 어떤 사람은 시장에 분권화와 사회적 경제가 융합된 에너지 전환을 꿈꾸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사회주의적인 에너지 전환을 꿈꾼다. 대안들 사이에 날카로운 쟁점이 존재한다.
『탄소 민주주의』는 이 쟁점에 대해 침묵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 가지만은 명확히 밝힌다. 제국주의와 자본의 막강한 권력과 싸우면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지 않는 이상 온전한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위원회의 경험을 에너지 민주주의를 위한 논쟁과 실천의 장을 넓히라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주의적 미래 구상 속에서 에너지 전환은 불가능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탄생도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