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사회운동
- 2018/04 제39호
제주 4·3 평화공원엔 채워야 할 여백이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제주4·3평화공원에는 비어 있어 오히려 두드러지는 여백이 세 개 존재한다. 이 여백들은 현재까지 제주4·3과 관련해 ‘우리’가 이룬 성과와 한계 모두를 반영한다. 이 의미를 똑바로 직시할 때, 제주4·3사건 70주년을 맞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과제들이 새삼 이해될 것이다.
첫 번째 여백 _ 글씨가 없는 비석
첫 번째 여백은 ‘백비(白碑, 글씨가 없는 비석)’다. 백비는 제주4·3평화공원 내 제주4·3평화기념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보통 특정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울 때는 그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는 명칭 및 관련 사항들이 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는 아무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으며, 아직 세워져 있지 않고 드러누워 있다. 이것은 ‘제주4·3’의 역사적 의의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3특별법’ 및 ‘4·3위원회’가 발간한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수식어를 모두 제외하면, “제주4·3사건은 …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된다. 이런 정의는 한편으로 주민들의 희생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주4·3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평가를 생략하고 있다. 즉 제주4·3사건을 규정하는 ‘항쟁’과 ‘학살’이라는 두 축 중 ‘학살’만 남아 있고, ‘항쟁’의 역사는 사라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에 제주4·3을 ‘학살’로 규정하게 한 점은 분명 매우 큰 성과이지만, 제주4·3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한계’다. 제주4·3에 ‘정당한 이름’이 부여되면, 이 백비에 그 이름이 새겨질 것이다.
두 번째 여백 _ 이승만의 얼굴은 어디로
두 번째 여백 또한 제주4·3평화기념관 내에 존재한다. 이 기념관은 크게 두 가지 전시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우선 사진 및 패널 설명에 의한 전시이다. 이 전시는 제주4·3을 ‘폭동’으로 간주하는 ‘폭동론’의 내용을 매우 논리적이며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또 한국의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해방 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그 자체로 한국의 현대사 박물관으로 칭찬받기에 손색이 없다.
다른 하나의 전시방법은 미술 작품인 ‘아트워크(art work)’를 통한 전시다. 아트워크는 전시할 사료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작품으로 사료를 대체하고, 제주4·3사건을 보다 입체적이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친근하게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문제는 이 아트워크에 매우 유감스러운 여백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박불똥의 ‘행방불명(제주사람들)’은, 철판에 뚫린 구멍들로 행방불명된 3천여 명의 제주도민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구멍에 꿰어진 철선들은 총알의 궤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행방불명된 제주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재현하고 있다. 행방불명의 최종책임자가 이승만 당시 대통령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한 이승만의 얼굴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은 사라진 채 전시되고 있다.
‘행방불명’은 수정되긴 했지만 전시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라진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작품도 4·3의 가해자로 지목된 ‘미군’과 관련되어 있다.
세 번째 여백 _ 이름 없는 위패
세 번째 여백은 위패봉안소에 있는 ‘빈 위패’다. 위패봉안소에 안치된 위패는 제주4·3 당시 희생된 사람의 수를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다. 4·3 당시 전체 제주도 인구의 10퍼센트가 넘는 3만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추정되는데, 그중 신원이 확인되고 사망한 사실이 인정된 사람의 위패 약 2만여 개가 모셔져 있으니 그 규모만 해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 위패들 사이에 이름없이 비어 있는 위패가 중간중간 눈에 띈다(<그림 4> 참조). 위패들은 마을 단위로 모셔져 있기 때문에 마을별 위패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는 빈 위패는 아직 죽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예비로 남겨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을 단위로 모셔진 위패들 중간에도 빈 위패가 존재한다. 이 위패들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 위패들에는 원래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 위패를 제작하여 안치한 곳은 제주도의 ‘4·3실무위원회’였다. 제주도에서는 4·3과 관련되어 죽은 모든 사람을 ‘희생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모든 희생자의 위패를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진행된 ‘4·3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① 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②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 자로서, 현재 우리의 헌법 체제 하에서 보호될 수 없다 할 것이므로 희생자의 대상에서 제외토록 하되,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소위 ‘무장대’ 출신의 희생자들은 ‘희생자’로 판정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위패는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2만여 개나 되는 위패 중 일부를 제거하면 나머지 위패 전체를 옮기는 대규모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래 무장대 출신 희생자의 위패를 제거하고 나머지 위패를 옮기는 대신 무장대 출신 희생자의 위패가 있는 곳에 빈 위패를 채워 넣은 것이다. 이는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은, 이름이 각명된 위패와 그렇지 않은 위패의 차이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사정을 자세히 모르면 그냥 단순히 비어있는 위패일 뿐이지만, 의혹을 품는 순간 그 빈 위패는 ‘무장대’ 희생자들의 부재를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4·3과 관련된 성과와 한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제주4·3평화공원. 이곳의 여백 세 곳을 확인했다. 이 여백을 채우는 것이 제주4·3 7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이 과제를 집약하는 표현이 “역사에 정의(正義)를, 4·3에 정명(正名, 바른 이름)을”이라는,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뉴스레터의 구호이다. 이 두 가지를 여백 세 곳에 각각 어떻게 채워 넣을지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