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필름X정치
  • 2018/05 제40호

흑인 영화의 시선으로 태어난 히어로 <블랙 팬서>

  • 성상민
※ 영화 <블랙 팬서>의 중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격동의 60년대 미국, 흑인 히어로가 탄생하다

1966년 미국은 곧 찾아올 격동의 시기 직전에 놓여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2차 세계 대전 후 최대의 호황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처럼 보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결코 허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속살에는 온갖 모순과 갈등이 가득했다. 흑인과 여성을 비롯한 사회의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혐오는 계속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이었다. 누구나 손쉬운 승리를 확신했던 베트남 전쟁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참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동시에 온갖 문제로 가득 찼던 때였다.
 
 
그때 마블 코믹스에서는 최초의 흑인 주인공이자 최초의 흑인 히어로가 탄생했다. 스토리 작가 스탠 리(Stan Lee)와 잭 커비(Jack Kirby)의 손아래 ‘블랙 팬서(Black Panther)’가 만화 <판타스틱 포>를 통해 처음으로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공교롭게도 급진 흑인 운동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블랙 팬서 파티)’이 공식 창당하기 3개월이나 전에 ‘블랙 팬서’라는 이름이 먼저 쓰였다. 스탠 리는 히어로 블랙 팬서와 흑표당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언했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인연이었다. 둘 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시절, 본격적으로 흑인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대중문화에서 ‘흑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연은커녕, 비하적으로 다루지나 않으면 다행인 존재였다. 작품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쉽지 않았으며, 설사 운 좋게 등장한다 해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충실한 하인’이거나 ‘반항하는 무법자’ 둘 중 하나였다. 이럴 때 등장한 블랙 팬서는 너무도 충격적인 캐릭터였다. 흑인이 주인공인 데다 심지어 악당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히어로다. 게다가 블랙 팬서의 고향이자 그가 다스리는 국가 ‘와칸다’는 아프리카 국가 하면 흔히 떠오르는 낙후된 국가가 아니라, 최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이상향으로 묘사되었다. 미국인들이 흑인에 대해서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모조리 뒤집은 블랙 팬서는 미국인들은 물론,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블랙 팬서는 인상적인 첫 등장 이후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캡틴 아메리카’ 정도를 제외하면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의 디씨(DC) 코믹스에 밀렸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인 블랙 팬서는 더욱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차 사라지던 블랙 팬서가 부활한 것은 다름 아닌 마블 코믹스가 2000년대 이후 필사적으로 추진하던 영화화 프로젝트에서였다. 토르,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같이 아는 사람만 알던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영화화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인지도를 알렸다. 블랙 팬서는 2016년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처음으로 출현하며 비로소 한국에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2018년, 영화 <블랙 팬서>가 개봉하며 블랙 팬서는 영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흑인 히어로, 2010년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

대다수의 히어로 영화가 그렇듯, <블랙 팬서> 역시 내용 자체는 단순하다. 영화의 핵심 플롯은 외부인의 방문을 엄격히 차단하며 막강한 국력과 기술을 숨긴 아프리카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와칸다를 배경으로 ‘블랙 팬서’의 지위와 와칸다의 주도권을 누가 계승할 것인지를 다투는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서사는 단조롭게 보일지라도,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건들과 캐릭터는 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물론 아프리카의 흑인들 모두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랙 팬서>를 연출한 감독 라이언 쿠글러의 행보 또한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이자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던 2013년 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Fruitvale Station)>는 2009년 1월 1일, 미국 오클랜드 주 프룻베일 역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삼았다. 백인 경찰이 흑인 ‘오스카 그랜트’를 지하철에서 소란을 벌였다는 이유로 폭력적으로 진압을 하다가 경찰이 실수로 총을 발포하는 바람에 오스카 그랜트가 사망한 사건이었다. 영화는 오스카 그랜트가 2008년 12월 31일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행적을 극으로 재구성하며 미국 사회의 흑인이 얼마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리얼리즘 화법으로 그려내었다.
 
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출처 네이버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로 주목받은 뒤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인 ‘워너 브러더스’의 투자를 받고서 제작된 <크리드>(2015)는 더욱 라이언 쿠글러의 지향점을 강하게 드러냈다. <크리드>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록키> 시리즈에서 주인공 ‘록키 발보아’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흑인 권투 선수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 ‘아도니스 크리드’를 주연으로 삼은 스핀오프 영화였다. <록키>가 주인공 ‘록키’를 전면에 놓은, 전형적인 백인 하층민의 성공담을 그린 영화였다면, <크리드>는 어느덧 노년이 된 록키가 라이벌의 아들을 훌륭한 권투 선수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줬다. 백인이 주연이고, 흑인이 조연이었던 원래 시리즈와 달리 주연과 조연의 관계를 뒤바꾸며 흑인 배우의 감동적이며 통쾌한 복싱 액션을 보여주는 동시에, 은유적으로는 인종 간의 화합과 이해를 전달하는 다양한 면모를 지닌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블랙 팬서>는 어떠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까?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영화의 두 주인공인 ‘트찰라’(채드윅 보스만)와 ‘킬몽거’(마이클 B. 조던) 사이의 대립이다. 갑작스럽게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와칸다의 왕위와 ‘블랙 팬서’의 힘을 계승한 트찰라는 싸움 대신 화합을 원한다. 아버지를 비롯해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닫던 원로들과 달리 그는 와칸다가 지닌 막대한 힘과 기술을 많은 이들에게 개방하여 우호를 다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트찰라의 정반대 편에는 킬몽거가 있다. 그는 트찰라에게는 큰아버지이자, 미국에 밀정으로 파견된 ‘은조부’ 왕자의 아들이다. 흑인들이 모여 사는 하층민 구역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은조부는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미국 흑인들의 삶에 충격을 받고 그들에게 무기를 나눠주어 폭력적인 혁명을 꾀하려다 자신의 형이자 트찰라의 아버지인 ‘트차카’에게 살해당했다. 아버지를 잃고 홀로 자라나던 킬몽거는 은조부의 뜻을 잇는 것은 물론, 트찰라가 지닌 와칸다의 왕위와 블랙 팬서의 힘을 가져가 와칸다의 막강한 기술력으로 백인이 기득권이 지닌 세상을 벌컥 뒤집어 놓으려 한다. 당연하게도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고, 결국 이 둘의 싸움이 영화의 핵심적인 시퀀스가 된다.
 
출처 네이버영화
 
트찰라와 킬몽거의 갈등은 한편으로는 미국 흑인 운동의 역사를 상징한다. 트찰라에게는 백인과 유색 인종 사이의 이해와 화합을 강조하며 ‘비폭력 투쟁’을 벌인 마틴 루터 킹이, 킬몽거에게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공존은 불가능함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현장 투쟁과 흑인의 자치권을 요구하던 말콤 X와 ‘백인의 폭력에 맞서는 흑인들의 자기 방어’를 강조하던 ‘흑표당’이 연상된다. 두 운동 모두 미국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흑인 해방’이라는 목표도 비슷했다. 하지만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달랐기에 갈등과 대립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백인의 차별과 압박을 평화로 구현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대항 폭력으로 맞설 것인가? 결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블랙 팬서>에 대한 열광적인 호응,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열망

<블랙 팬서>가 은유하는 현실의 모습은 트찰라와 킬몽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막강한 자본과 기술을 지니고 있음에도 같은 흑인들을 돕기 꺼려하는 와칸다의 원로들에게서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상승하자 어느덧 흑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는 미국 중산층 이상 계급에 위치한 흑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블랙 팬서의 힘을 완전히 계승하기 위해 허브의 즙을 마시고 킬몽거가 꿈에 빠지자, 배경은 와칸다지만 공간은 자신이 옛날 아버지와 살던 흑인 동네의 싸구려 아파트인 광경에 놓인 모습에서는 미국 흑인 상당수가 놓인 딜레마를 생각하게 만든다.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나 자신의 진정한 고향은 아프리카 대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리카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도 쉽게 다른 인종들과도 섞이지 못한다. 킬몽거의 캐릭터는 이러한 역설을 반영하고 있다.
 
트찰라와 킬몽거가 주로 미국의 흑인들을 은유하고 있다면, 와칸다는 식민지 독립 이후 혼란의 시기에 놓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현실을 비춘다. 와칸다를 구성하는 부족들 사이의 갈등에서는 여전히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쉽게 내전이 발생하는 상황이, 와칸다의 부를 일궈낸 지상 최강의 광물 ‘비브라늄’을 놓고 벌어지는 암투에서는 다이아몬드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의 땅에 매장된 수많은 자원이 역설적으로 아프리카에 끝없는 갈등과 투쟁을 낳은 원흉임을 말한다. 킬몽거가 트찰라를 몰아내고 와칸다의 국왕이 되자, 자신에게 반기를 내걸었던 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려는 모습에서는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독립한 뒤에는 지독한 독재자가 되고 만 역설을 생각게 한다. 이러한 끝도 없는 내전과 갈등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쉽게 폭력의 타깃이 되고 만다. 그런 참혹한 현실까지도 <블랙 팬서>는 ‘히어로 물’이라는 장르의 어법으로 유려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이렇게 <블랙 팬서>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흑인들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아내서 그런 것일까. <블랙 팬서>는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마블 코믹스의 영화들이 전 세계에서 막강한 흥행 파워를 선보이고 있는 것에, 흑인 배우들을 총출동시켜 자신들의 이야기를 히어로 장르로 만든 것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결합한 결과이리라. 동시에 현재 흑인 자신들이 놓인 현실들을 <블랙 팬서>를 통해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마음도 함께 담겨있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블랙 팬서>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영화는 단순히 트찰라를 선, 킬몽거를 악으로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킬몽거가 트찰라가 패배하는 결말이 흑인들의 현실을 도외시한채 그저 ‘화합’만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전개가 아니냐는 지적이 존재한다. 또한 킬몽거를 폭력적이고, 정적을 가차 없이 쓸어내려는 존재로 그리며 ‘흑표당’을 비롯한 급진적인 흑인 운동을 여전히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낸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블랙 팬서>는 사상 최초로 흑인의 이야기를 히어로 물의 어법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성공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마치 근래 여성 혐오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주목받자 조금씩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에 삼은 영화나 작품이 증가하는 것처럼, <블랙 팬서>의 성공과 호응 역시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사회 운동 역시 여러 대중문화 작품들에서 조금씩 감지되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놓치지않아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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