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책보다
  • 2019/01 제48호

사회운동은 어떻게 문재인과 다른 길을 갈 것인가

윤소영,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 서평 ② ‘비판의 위기’부터 극복해야

  • 김태훈
‘오늘의 멍청이는 사기꾼일 따름이다. (今之愚也詐而已矣. 공자, 《논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핵무장이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 오인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대안으로서 역사적으로 이미 실패했다. 이러한 이론적 결함은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인민주의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보수주의와 인민주의가 우파와 좌파를 대변하는 한국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격은 오바마의 신자유주의보다 오히려 트럼프의 인민주의에 더 가깝다.

윤소영 교수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은 거침없다. 여기에는 사회운동이 숙고해야 할 쟁점도 상당하다. 최근 약화하고 있으나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촛불 정부’에 기대가 컸다. 제대로 된 비판은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공약했던 개혁을 흔들림 없이 잘하라는 책려였다. 제도권 밖의 ‘좌파’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온존하는 부르주아 정권이라는 원론적 비판에 머물렀다. 대부분은 문재인 정권이 한국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꾸리라 막연히 기대했다. 이명박근혜 정권보다야 나으니 말이다.

이러한 비판의 소멸 혹은 비판의 위기 역시 현 정세의 위기적 측면을 구성한다. 진정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은 문재인 정부의 사기극 비판에 이어 그 배경으로서 참여연대(비정부기구)와 386세대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지식인의 결함을 비판한다. 이는 386세대의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역사에 대한 학식이 없는 자가 역사의 주체를 자임하는 것”)
 

한국의 불행

 
알튀세르는 엥겔스가 말한 ‘독일의 불행’(deutsche Misere)에 빗대어 ‘프랑스의 불행’(misère française)에 대해 말한 바 있다(《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서문 〈오늘〉).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노동자 운동의 진정한 이론적 문화의 부재”).

그런데 한국은 부르주아 혁명도 실패했고,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도 실패했다. 반면 중국은 부르주아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는 성공한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청말 서양의 군사기술을 채택해 산업화를 시도하려는 양무운동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한 변법운동을 일으켰지만 결국 근대화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신해혁명과 5·4운동으로 이어지며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 성공한다.

한국에도 중국의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에 해당하는 온건적 동도서기파와 급진적 문명개화파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결정적 차이는 한국의 문명개화파가 결국 개신교를 수용한 데 있다. 개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신해혁명 대신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이 나타나고, 5·4운동 대신 신민회의 분화가 나타난다. 독립협회의 후예인 신민회 회원 중에서 윤치호(감리교)와 안창호(장로교)는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고수하며 민족해방운동을 등한시했다. 반면 독립을 우선시한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동녕은 무장투쟁을 준비했고, 이동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한인사회당을 건설한다. 이러한 분화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에 개신교가 민족해방운동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었다.
 

재야의 등장과 인민주의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 부상하자 개신교는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기울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친일을 친미로 대체하여 이어진다. 해방 이후 친미반공주의의 주류는 평안도에서 탈북한 중·상층 장로교도였다. 보수적 개신교 반공주의는 박정희 정부 이후 장준하와 《사상계》로 상징되는 재야와 분화된다. 재야는 박정희 비판을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지만, 반공주의가 더욱 중요했다. 보수적 반공주의와 인민주의적 반공주의가 분화한 것이다.

장준하의 박정희 비판을 계기로 동인이 분열되고, 장준하도 정계에 진출하며 《사상계》는 1970년 폐간한다. 1966년 창간한 《창작과 비평》의 재야 사관을 상징한 것은 강만길의 분단 사관이었다. 그 핵심은 해방 또는 개항부터 통일국가까지가 분단시대라는 것이고, 분단시대는 통일운동이 주도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사가 아니라 정치사·운동사에 치중한 분단사관의 인민주의적 한계는 1980년대 한국 사회 성격 논쟁 과정에서 분명해졌다(《한국의 불행》, 2015).

한국 사회 성격 논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자, 변혁의 전망에 대한 논쟁이었다. 민족해방파가 식민지성과 반(半)봉건성에 주목하며 반反제국주의·반反봉건 변혁 전망을 주장한다면, 민중민주파는 해방 이후 사회 성격이 신식민지성 내지 종속성과 독점성으로 성장·전화했고, 변혁의 전망도 반反제국주의·반反독점으로 성장·전화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부활을 모색한 1980년대는 짧게 끝났다.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드디어 남한에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운동권의 핵심 세력들이 공개적 전향을 통해 주류화, 즉 지배 엘리트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지 않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트로츠키주의적 알리바이나 침묵, 부정의 태도도 나타난다(《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경세학의 역사

 
한국 현대 지식인의 결함, ‘한국의 불행’은 중국과 달리 전현대한국에서 경세사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 소급할 수 있다(《봉건제론》, 2013). 이는 중국의 유가 사상이 복고주의적이라 보는 서구적 편견과 달리 유가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과학의 친화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백가쟁명 과정에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핵심적 대상으로 하는 경세사학이 기원한다. 명·청 시기에 ‘중국의 포이어바흐’ 왕부지는 생활 수준의 상승을 기준으로 역사의 진화를 설명했고, 창업기, 수성기, 중쇠기에 주목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인식했다. 또한 신권주의의 관점에서 왕권주의·황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제시했다. (‘천하는 한 가족의 사유물이 아니다’) 왕부지의 역사이론을 매개로 중국의 유가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로 이행할 수 있었다.

전현대 한국에서는 경세학이 발달하지 못했다. 지주전호제에 적합한 조세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율곡 이이의 경세학은 동인(왕권주의 주장)에게선 거부됐고, 서인에게선 상대화됐다. 숙종의 환국 정치, 영·정조의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이 소멸했고, 이는 외척의 세도 정치로 귀결됐다. 일조편법·지정은세법과 같은 조세제도에 대한 논쟁은 주변화됐다.

한편 서구에서는 계몽주의가 경제학 발전의 토대가 됐다. 헬레니즘 시대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에서 계몽주의의 이론적 역사로 이어지는 계보를 찾을 수 있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란 군주정이 참주정으로 타락하면서 귀족정이 출현하고, 귀족정이 과두정으로 타락하면서 민주정이 출현하며, 민주정이 간민정 또는 난민정(ochlocracy)으로 타락하면서 군주정이 회귀한다는 것이다. 간민 혹은 난민(ochlos)이란 엘리트와 대립하는 대중이라는 의미로 간민정은 결국 인민주의의 정치이다. 폴리비오스는 이러한 정체의 순환을 멈추는 해법으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세 가지 정체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 정체론을 제시했다.

번영 속에서 쇠망을 예상한 폴리비오스의 관점은 중세에 잊혔다가 현대에서 볼테르를 거쳐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로 이어진다. 로마제국의 쇠망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적 분위기 덕분이다. 폴리비오스는 정체순환론을 ‘증명된’ 역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계몽주의자들이 생존 양식론을 ‘이론적’(reasoned/conjectural) 역사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다. 이론적 역사란 문학적 역사에 대한 대안이면서 동시에 사료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역사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역사이론으로서 사론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역사인 것이다.  

역사의 과학성을 부정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한 볼테르의 뉴튼주의적 역사주의가 ‘이론적 역사’의 발단이다. 프랑스 중농주의를 거쳐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으로 계승되었다. 중농주의의 경제법칙관은 스미스를 거쳐 마르크스로 계승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학 내부에서 맬서스와 리카도-밀의 논쟁이 전개되면서 이론적 역사는 잊힌다. 리카도-밀은 역사를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했지만, 그 대안으로 나타난 메콜리의 휘그사관은 역사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후 마셜의 현대 경제학은 스미스의 이론적 역사를 계승한다. 이렇게 뉴튼과 공자를 수용한 영국의 계몽주의는 경제학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주류로서 386세대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살펴보고, 아시아와 유럽에서 경세학의 계보를 정리해봤다. 한국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경제학과 자유주의가 취약하다. 그러다보니 반경제학이 아닌 경제학 비판이란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지양해야 할 마르크스주의는 더욱 취약하다.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에 나오는 장하성, 김상곤 등 참여연대 출신의 폴리페서들이나 정성진 등 진보 학자들에 대한 비판들은 단순한 ‘디스’라기보다 지식인의 역사(지식의 내용과 지식이 형성되는 맥락으로서 경제와 정치를 포함하는 지식사, intellectual history)에 대한 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주목하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제도·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개인의 행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재론 위기와 비판》의 386세대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주가 거품에 비유해보면 ‘공황 직전의 비이성적 열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386세대라는 ‘작전세력’, 다시 말해 바람잡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은 주류교체론을 내세웠다. 노무현이야말로 이인제, 이회창이라는 지역주의, 학벌 중심의 구주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자신의 선거 홍보자료에 해당했던 책인 《대한민국이 묻는다(2017)》에서 노론의 세도정치, 친일파 청산 실패, 군부독재와 지역주의로 이어져 온 “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말한다. 이를 위해 “학벌, 학력, 성별, 집안이나 배경, 지역 또는 외모 등에 차별받지 않고, 오직 능력이나 실력으로만 경쟁하고, 실패해도 회복할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작 문재인 정부의 인사청문회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었다.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 또한 지연과 학연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울대를 한양대로, 한양대를 지방대로 대체하고, 경상북도를 경상남도로 대체하는 것이 학연과 지연을 지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고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연고를 무시하는 것은 관념적 인간관이다. 오히려 학연이 지연, 지연이 혈연으로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인간관계라는 의미에서 우연한 연고인 혈연과 지연은 학연으로 지양해야 한다. 나아가 진리의 추구를 통해 학연을 지양해야 한다.  

1980년대 이문열·박완서·이병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386세대의 인민주의적 반지식인주의에 대한 선행된 비판이었다. 이들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마르크스주의가 실은 사이비 사상일 따름이라 비판했다. 현 상황에서 해석해보건대 1980년대 386세대의 얼치기 마르크스주의에 경고한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사이비 사상이 횡행하는데, 그 징표는 ‘과거에 대한 반성, 현재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통찰의 결여’다. 사이비 사상은 ‘정신적 유행’일 뿐만 아니라 ‘변형된 출세주의’일 수 있는데, 이들은 사적 불만을 해소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도구화했다.

비판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구분하고 판단한다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자유한국당과 태극기 부대와 같은 보수세력이 남아있다. 다른 한편에는 문재인 정부가 진보를 참칭한다. 1980년대 한국 사회 성격 논쟁과 같은 변혁전망을 둘러싼 지식인의 논쟁은 자취를 감췄고, 노동자 운동은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성적 집단으로 전혀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윤소영 교수와 과천연구실의 최근 저작은 길을 찾고 있지 못하는 작금의 사회운동에 깊은 문제의식을 안겨준다. 사회운동은 문재인과 참여연대 출신 폴리페서들의 역사인식과 인민주의적 한계를 계급적·과학적으로 비판하며 분별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또한 경제학 비판이자 역사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재건과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으로 혁신이라는 이중적 과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필자 소개

김태훈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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