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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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꽃. 양.

호성희 | 편집부장
많은 질문만 던져주고..

오늘은, 아니 지금은 반드시 글을 써내야 한다. 귓가에 “이제 남은 글은 말이지...”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영화 한편을 본 감상문쯤이야 쉬운 거 아닌가 하고 타박할 줄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던진 많은 질문 중 어떤 하나에도 나는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울산영화제 ‘검열논쟁’으로 서울상영을 기다리지 않고도, 두어 시간, 컴퓨터 앞에 쪼그려 앉아서 ‘진실’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도 내겐 행운인 셈이다. 몇 년간의 제작과정에서도 많은 이를 힘들고 지치게 했던 이 영화를 말이다. 어제 야간근무를 하던 중 뒤적거린 정보에 의하면, 곧 ‘밥․꽃․양’의 서울상영과 토론회가 열린다 하니, 검열 없는 영화 상영을 지지하고 이 영화와 함께 고민했던 많은 사람의 생각은 그때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듯 싶다. 결국, 영화를 보며 지나쳤던 단상만 주절주절....쩝.


밥하는 아줌마

그녀들은 늘 밥을 짓는다.
집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심지어 파업 투쟁의 현장에서도...
하지만 그녀들이 밥짓기와 밥먹기를 거부하고 겨울의 찬 바닥에 누웠을 때,
그녀들의 ‘밥줄’을 온 몸으로 울부짖을 때,
그(놈)들은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남편, 시부모, 아들만 둘입니다....시어머니가 살아 계시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님입니다....딸, 마누라, 어머니 역할 다 합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붙잡아 두었던 그 ‘아줌마’이다. 나는 이 말을 던져놓고도 계속 망설인다. ‘그녀’라 할까, ‘그이’라 할까, ‘그 노동자’로 할까? 결국은 ‘아줌마’라 해놓고도 안절부절 하다 문득 이름이 궁금해진다. 며칠 전에도 이런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다. 부득이하게 특정한 사람을 거론하게 되었지만,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의 부인이 나와는 동기이고 회원이다. 안부를 묻고자 해도 “요즘 부인은...마누라? 아니 사모님은...어 형수님은(엉! 이건 정말 아니구)...” 적당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서, 특히 여성이 여성을 부를 적당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막막해졌다. 결국은 ‘***회원’으로 하자고, 어떤 여자선배와 함께 힘들게 결론을 내렸다.
호칭에는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구성원은 노동자이다. 아줌마들이 집에서 늘상 해먹는 음식을 이야기하며 입맛을 다시며, 단식투쟁으로 허허한 배를 달랠 때 외친 것은 이것이다. “우리도 노동자고, 조합원이요!”


투쟁의 꽃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 하나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버려도 될 만한 꿈 하나가 있다. 학교 다닐 때 누군가(누군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많은 사람이 항의방문 갔을 정도면, 아마 총, 부총 학생회장 급은 되었을 거다.) 연행이 되어서 항의 시위로 나가던 중 전경에 가로막혀 지루한 교문투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여학생들을 모아서 사수대 바로 뒤에서 있는 힘껏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갈라지는 목을 가다듬으며 전경을 향해 쉴 세 없이 분노를 쏟아 붓고 있을 때였다.
“에이 씨발, 시끄러워죽겠네!” 푹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다. 평소의 내 성격대로라면 당장에 달려가 모자를 벗기고 대갈통을 한 대 쳐버렸겠지만, 나는 그냥 어안이 벙벙했다. 그 날 정리집회에서도 어김없이 사수대의 느즈막한 입장과 사수대장의 발언, 박수갈채가 이어졌지만, 나는 ‘그 날’ 박수를 치지 않았다.
버려도 될 꿈? 그 일이 있기 전부터 나는 그런 꿈을 꾼 적도, 또한 상상을 하면서 가끔씩 마음의 위로를 삼아 본 적이 있다. ‘무술의 달인, 성희! 위기에 빠진 사수대를 구하다! 빠샤!’

“우리에겐 식당이 돌아가는 한, 정리해고는 없습니다.”
IMF, 정리해고 법제화, 98년 현대자동차 노사의 277의 정리해고 합의. 공장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기계를 부수어서라도 정리해고만은 막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밥짓기를 멈추지 않고 손에 주걱이며, 양철통 등을 들고 두드리며 투쟁했던 아줌마들에게, 노조위원장이 목숨걸고 막았으나, 모두(?)를 위해 희생할 때라고 말한다. 회의장 앞에서 아줌마들이 “노조위원장님, 우리가 여기 있으니 힘내세요!”라고 한 외침은 너무 멀어 들리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너무 화가 났던 것은, 우리가 싸웠던 것은 정리해고 자체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려는 아줌마를 막아섰던 것이다. 말․도․못․하․냐․고!!


희생양

144,133,276,277
처음엔 이 숫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를 잘 보겠다는 욕심에 선택한 고속보기가 자꾸 필름을 끊어놓았기 때문에 작업복을 입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왜 그렇게 숫자에 열중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합의한 정리해고자 277명, 그때 식당조합원이 276명, 퇴사하지 않고 남아 조합 하청 식당에서 2배의 노동강도와 반의 임금으로 살아가는 144명의 식당조합원, 복직된 133명의 남성 노동자들.

사회진보연대 7․8월 합본 호를 뒤적거렸다. ‘여성의 빈곤화’와 ‘빈곤의 여성화’, 다른 말이란다. 갸우뚱?!
여성의 빈곤은 과거이고 현재이고, 잔인하게 진행될 미래이다. 그래서 빈곤의 모습이 ‘여성’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당신을 포기할 순 있어도, 내 현실을, 내 밥줄을 포기할 순 없다.”
그 아줌마, 더 잔인한 노동강도에서 밥짓기를 계속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할 수 있는 건, 체면을 차리려 해도 나오는 눈물과 어디에다 정확히 화를 낼 줄 모르고 안절부절 해 하는 것. 그래도 이 영화가 있어서 다행인 것은, 혼자 지쳤다고 도망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행군이라는 것은 선착순이라고 말을 한다. 그것도 꼴지가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선착순이라고 말을 한다.
꼴지가 낙오하면 그 꼴지를 욕하면서, 그러나 또한 꼴지가 낙오 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결국에 낙오하면 그 꼴지에게 모든 죄과가 퍼부어지는 잔인한 선착순이라고.
밥꽃양이라는 영화는 바로 인생에서 부닥치는 잔인한 선착순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아직은 노동자 안에서 남녀차별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가 갖고 있는 통계에서 실제로 밥꽃양에 나오는 식당노동자와 같은 사람은 단순직 노동자와 그 중에 여성노동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것을 아직 내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나 역시도 여전히 자본에게는 피해를 받으면서도 지금 갖고 있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하여 여성노동자를 포기해야 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며, 아직도 이를 풀어내기에는 절박함이 그렇게까지 와 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러나 꼭 봐야할 영화인 것이다.
내가 자본에게는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의 입장이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당하기 위해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서 있는 피해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또한 바로 이 모든 이야기는 잔인한 선착순에서 꼴지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현재 시스템에서 이 잔인한 선착순을 거부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으며 그 모든 시초는 정리해고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상징적인 존재인 현대자동차노조에게서부터 다시 이 잔인한 선착순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라넷 게시판에서
주제어
노동 여성
태그
총선 그리스 재정위기 치프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