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2 봄.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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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경제성장의 이면과 정치적 의미

『차이나 붐: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 책 소개

조유리 | 정책교육국장
어떤 사람들은 미중의 전략적 경쟁을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는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미국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지위가 하락하자, 중국의 경제적 성장을 막기 위해 무역전쟁을 넘어 정보통신산업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내 반도체 생산체제 구축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른다면,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정책을 인위적으로 구사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제칠 것이라는 예상이 뒤따를 것이다. 과연 세계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나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는 미국의 세계질서보다 더 평화롭고 평등할까. 

 홍콩 출생의 중국계 미국인 훙호펑은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거란 믿음에 의문을 표한다. 중국을 편향적이고 선택적으로 이해하여, 중국의 경제적 부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1.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 이유

 
훙호펑은 『차이나 붐: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2015; 국역: 글항아리, 2021)를 통해 두 질문에 답한다. 첫째, 1980년대 이후 중국이 빠르게 부상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정치적 조건을 밝히기 위해 그는 무려 18세기에서부터 중국 경제의 변화와 국가 지도자들의 대응을 추적한다. 둘째,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기에 처한 서구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나. 그는 중국 경제 성장의 효과와 한계를 분석하면서, 중국이 세계 경제를 구원하기는커녕 그 위기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책의 순서대로 그의 논지를 따라가 본다.


1) 자본주의는 왜 중국이 아닌 영국에서 태동했나: 1650~1850년


훙호펑은 16~17세기에 이어, 18세기 중국은 세계에서 상업이 가장 발전한 국가였다는 최근의 연구에 주목한다. 심지어 상업의 발전 정도는 18세기 유럽을 능가했고, 당대 중국인의 생활수준도 유럽인의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과 유럽의 발전 경로는 분기하기 시작한다. 유럽에서는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한 반면, 중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유럽인의 생활수준은 상승했지만, 중국인의 생활수준은 하락했다. 

왜 그럴까? 훙호펑은 영국과 달리 중국에서 강력한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강력한 자본가 계급이 있어야, 농촌에서의 잉여를 집중하여 기술발전에 사용하고, 그것을 토대로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상업의 발전이 독립적인 자본가 계급의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중국의 상인들은 향신·국가 엘리트로 변모하거나 인근에 있는 유럽의 식민 항구 도시(포르투갈의 마카오, 스페인의 마닐라,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등)로 이주하기를 선택했다. 

중국에서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것은, 청이 상업을 통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통념과는 달리, 청은 일관되게 상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관료들도 민간 상인의 발전에 의존하여 지역의 식량을 확보하고, 기반 시설을 만들고, 군사 작전에 물자를 조달했다. 민간 상인은 상업세 인하나 저리의 대출 등 청 정부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정부의 전략은 청과 영국에서 유사했다.

영국과 청의 정부에 차이가 있었다면, 노자 갈등에 대한 태도에서였다. 면방직 작업장을 장악한 상인들이 공장 소유주로서 노동자와 갈등할 때, 영국 정부가 전적으로 공장주의 편에 서서 노동 소요를 탄압했다면, 청 정부는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공장 소유주에게 고용보장의 의무와 임금·노동일에서의 양보를 요구했다. 도시에서 발생한 식량폭동에 대해서도 영국 정부는 인민의 생존권 대신 상인의 소유권을 옹호했다면, 청 정부는 폭동을 제압하는 동시에 상인에게 식량 가격의 인하를 요구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상인 자본이 성장하여 강력한 자본가 계급이 형성됐다면, 청나라에서는 자본가의 재생산이 제한되었고, 자본가 계급이 향신·국가 엘리트와 동등한, 독립적인 집단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요컨대 정부의 태도가 자본가 계급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강력했던 청 국가의 능력은 18세기 후반에 급격하게 쇠퇴한다. 훙호펑에 따르면, 상업은 발전했으나 경직된 재정 체제로 인해 새로운 세입원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청의 세금 수입은 18세기 내내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정부 지출이 제약되면서 관개 시설이나 운하같은 공공 기반 시설을 유지하거나 관료의 봉급을 인상할 수 없었다. 상업의 발전과 은의 유입으로 인플레이션까지 발생하면서, 관료는 뇌물에 의존하게 됐고, 지방 정부는 불법적인 세금 징수에 의존했다. 중국 국가 엘리트의 실패는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인과 중국인의 생활수준이 분기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 국가가 주도한 농촌 잉여의 자본으로의 전환: 1850~1980년


독일, 러시아 등 모든 후발 산업 국가는 최초의 산업국가인 영국과 달리 자본가 계급의 자생적 노력만으로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으며, 잉여를 추출·집중해 자본으로 전환하는, 즉 시초축적을 지원하는 국가의 역할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후반에 산업화를 시도한 일본이나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관점에 따라 훙호펑은 1850~1980년의 중국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농촌의 잉여를 산업 영역에 집중시키려는 국가의 시도를 분석한다.

첫 번째 시기는 청의 몰락기인 1850~1911년이다. 이 시기 청의 중앙정부는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잉여를 집중시키는 데 실패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8세기 말, 청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도시 폭동과 종교적 봉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청 정부는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을 군벌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향신, 국가, 상인 엘리트가 결합하여 지방에 분산된 군사-약탈 엘리트가 형성됐다. 같은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시행해 이후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했고, 농촌의 분산된 잉여를 집중시켜 미쓰비시, 미쓰이 등으로 대표되는 기업집단(자이바쓰)에 자금을 조달했다. 반면 중국에서는 지방의 군사-약탈 엘리트가 농촌의 잉여를 추출하여 자신들의 폭력 수단을 축적하는 데 사용했고, 나아가 중앙정부가 산업 기업을 조성하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같은 조건에 있었던 일본과 청이 국가 엘리트의 대응에 따라 다른 경로로 분기했다.

두 번째 시기는 혁명, 내전, 제국주의 열강과의 전쟁이 지속된 1911~1949년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 농업 발전이 지속되었음에도, 중국 엘리트들은 그 잉여를 산업 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국가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아편전쟁에 패배한 이후에도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완전히 식민화되지는 않았고, 중국의 농촌 경제 역시 식민지적으로 재구조화되지 않았다. 농업 생산성은 상승했고, 농촌의 면직물 산업도 성장했다. 중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이 영국의 면직물보다 두껍고 내구성이 좋아 역으로 영국으로 수출될 정도였다. 그러나 농촌의 잉여를 산업 발전에 투입할 유능한 주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자본의 시초 축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개혁개방 직전까지인 1949~1980년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압축적인 자본의 시초 축적에 성공하게 된다. 건국 초기에 중국 공산당은 토지 개혁과 농촌 협동조합 활성화를 시도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농촌의 잉여를 도시의 산업 발전을 위해 투자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 공산당은 인민공사를 건설해 농촌을 집단화하고, 그 잉여를 추출해 산업 발전을 도모한다. 농촌에서 시장이 폐지되고, 인민공사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모든 생산물을 관리하며, 도시 공업에서 생산한 비료와 농업 기계를 농촌에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농촌의 잉여는 도시로 이전됐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전할 수 있었고, 농촌과 도시의 생활수준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마침내 중국 공산당에 의해 농촌의 잉여가 자본으로 전환됐다.

산업화를 위한 농촌 집단화와 농업-공업의 잉여 이전 체제는 소련이나 다른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중국은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지 못하게 하는 호구 제도를 도입했고, 경기 변동에 따라 도시에서 발생하는 실업을 완충하기 위해 농촌을 활용했으며(상산하향), 농촌이 치른 희생의 대가로 농업 기반 시설, 농민의 기초 교육과 보건에 투자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마오 시기 중국의 독특한 특징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을 이끌 세 가지 유산을 남겼다. 국유기업과 기반 시설 네트워크, 교육받고 건강한 농촌의 산업예비군, 낮은 대외채무로부터 비롯하는 외국 정부와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율성이다. 
 

3) 중국의 호황: 1980~2008년


훙호펑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가파른 성장을 동아시아의 냉전과 탈냉전이라는 동학 속에서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냉전의 한쪽에서 중국은 국유기업 네트워크, 농촌의 잉여 노동력, 낮은 대외채무라는 세 유산을 형성했다. 다른 한쪽에서 일본과 동아시아 네 호랑이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전략에 힘입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훙호펑은 동아시아 냉전의 양대 결과가 탈냉전 이후 결합하면서, 중국이 빠르게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단 중국 개혁·개방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여기서 개혁은 ① 1980년대 초반 농촌의 탈집체화, 시장 부활, ② 1980년대 후반 도시의 국유기업 개혁과 가격 개혁, ③ 1990년대 국유기업 개혁의 가속화라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개방은 아시아의 화교자본에 대한 개방에서 전 세계의 초국적 자본에 대한 개방으로 확대됐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중국의 당-국가는 국가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던 중앙집중적 국가에서, 사적 자본의 축적을 보호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는 분권화된 국가로 변화했다. 국가 성격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였다. 1980년대 초 농촌 개혁은 농촌에 시장을 부활시켜 소득 상승으로 이어졌고, 농촌의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종신 고용이 폐지된 부정적 효과가 상쇄됐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도시의 국유기업 개혁은 노동자 복지 후퇴, 임금 하락, 고용 안정 약화로 이어졌다. 동시에 가격개혁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부정부패, 사회 양극화가 나타났다. 대중적인 불만이 물가 인상과 맞물리면서 천안문 소요가 발생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간부-자본 계급과 결합하여 노동자의 소요를 가차 없이 진압했다. 이 사태는 정치 자유화 봉쇄와 도시 노동자의 권리 약화, 나아가 미국 중심의 금융 세계화로의 편입이라는 이후 중국의 발전 경로를 규정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중심은 간부-자본계급, 자수성가한 사업가, 중산층 전문직 등 신흥 부유층이 장악했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핵심 간부의 가족들은 국유기업을 통해 주요 경제부문을 장악하고, 이익을 얻었다. 국유기업은 당-국가가 제공하는 재정, 금융, 정책 특혜를 받으며 막대한 자산을 축적했다. 문제는 이런 국유기업들이 사영 기업보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유은행은 수익성이 없는 국유기업에 방만한 대출을 지속하여 부실채권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1999년의 구제금융과 2009년의 만기 연장에도 국유기업의 개혁은 지체되는 반면, 투자는 계속되고 있다. 국유부문의 부실이 중국경제를 위협할 수 있는데도 중국이 국유기업에 보조금과 금융 특혜를 제공하는 이유를, 훙호펑은 중국의 특징적 경제구조에서 찾는다.

사영 수출기업은 국유은행을 통해 외화수입을 고정된 환율의 인민폐로 교환한다. 이때 수출 부문에서 무역 흑자가 발생하면, 중국 은행시스템에서는 외환보유고가 증가하고 그만큼 인민폐의 양도 증가한다. 국유은행은 이 증가한 유동성으로 국유기업과 지방정부의 고정자산 투자를 위해 대출한다. 중국은 고정자본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성장을 지속한다. 수출 부문의 호조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번영의 토대를 이룬다.

수출 부문의 성장은 탈냉전 이후 마오의 유산과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결합한 결과였다. 수출 부문이 성공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탈냉전이라는 조건으로 1990년대 들어 국제적으로 중국의 수출 제조업 부양을 위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달러 페그제와 위안화 평가절하, 미국 클린턴 정부의 무역 최혜국 대우 연차 심사 폐기,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승인 등이다. 둘째, 마오의 유산으로 중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오랜 기간 저임금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농촌의 경제성장을 억압하며, 농민의 이농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셋째, 중국은 기존의 동아시아 생산 네트워크에 결속되었고, 동아시아의 막대한 제조업 자본이 중국에 투자됐다. 중국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동아시아의 수출 지향 제조업체들이 중국으로 생산라인을 옮기도록 유도했고, 이를 통해 기술과 경영 노하우, 해외의 소비시장까지 확보했다. 또 동아시아의 자본이 중국에 투자되어, 총자산은 작지만 수익률과 총수익이 모두 높은 사영 수출기업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수출 부문의 성장이, 앞서 설명한 국유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가능하게 하면서 중국의 부상을 이끌었다. 

동아시아 생산 네트워크로 편입한 중국은 다양한 기술 수준에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여, 일본, 동아시아 네 호랑이, 말레이시아·태국 등 동남아 신흥국의 수출 제조업체를 위협하고 있다. 일본이 선두에 선 동아시아의 다층적 하청 생산 네트워크(기러기 대열 모델)는 2000년대 들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생산 네트워크(판다 중심의 원형 대형)로 변화했다. 동아시아 국가의 중국 의존도가 증가하면서 중국 경제의 한계와 취약성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한계와 취약성으로 확장했다.
 

4) 중국의 성장이 개발도상국에 미친 영향


산업혁명 이후 국가 간 경제성장의 불평등은 계속해서 증가했고, 특히 부유한 서구 지역과 나머지 지역의 격차가 벌어졌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의 부상은 이런 경향을 반전시켰다. 훙호펑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중국 내에서 도농 간, 성 간 불평등이 크게 확대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가장 가난한 지역도 실질 소득 증가율이 세계 평균보다 높았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은 세계 불평등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는 어떨까? 만약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현재와 같이 세계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중국의 평균 소득이 세계 평균소득에 도달하는 향후 30년간 중국의 성장은 세계 불평등 감소에 기여할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세계 경제성장률까지 하락하거나 심지어 더 낮아진다면, 중국은 세계 불평등의 감소에 기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세계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성장률이 하락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개발도상국이 중국과의 무역과 투자를 통해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거나, 중국의 성장 모델을 이식할 수 있다면, 세계 불평등은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의 무역과 투자로 직접적인 이익을 얻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수출국, 그리고 인도처럼 인구가 아주 많은 국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제조업이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에 미치는 영향은 상이하다. 중국은 아시아의 다른 제조업체로부터 부품과 기계류를 수입하여 최종 제품으로 조립한 다음, 다른 지역으로 수출한다. 중국과 지역 생산 네트워크를 공유하는 아시아 인접국은 중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에 천연자원을 공급할 뿐이며, 따라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직접적인 이익을 볼 수 없다. 천연자원을 수출하는 국가들은 ‘네덜란드 병’(천연자원에만 의존하고 산업 발전에 소홀해 결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는 현상)이나 ‘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조업과 경제 부분을 성장시켜야 하는데, 이들 국가의 산업은 중국 제조업체와의 경쟁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나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정부가 광산 기업을 통제하거나 소유하여, 천연자원 부문에서의 수익을 경제성장을 위한 장기투자에 사용할 수 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자원 채굴마저도 해외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자원 채굴을 위해 진출한 중국 기업은 그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 전망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고, 따라서 아프리카 국가의 경제 성장은 제약되고 있다. 

다음으로 인도는 독자적인 고속 성장을 통해 세계불평등의 감소에 기여하리라고 예상되는 유력한 후보다. 그동안 인도는 중국과 지정학적 경쟁으로 인해 무역·투자의 연계가 적었고, 인도의 경제 성장은 중국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최근 인도의 경제 성장은 국내 소비를 중심으로 하며, 수출과 투자의 비중은 낮아, 중국과는 정반대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도가 중국의 경로를 따라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5) 중국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나


훙호펑은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지만, 미국의 도전자라고 여겨지는 중국이 사실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지함으로써 그 쇠퇴를 지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는 중국에 의해 세력 균형이 재형성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미국 달러 헤게모니에서 시작한다.

미국의 달러 헤게모니는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확정되었고,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보완되었다. 미국은 1950~1960년대에 절대적인 경제적 패권을 누리면서 군사력을 강화했고, 서유럽과 일본이 달러 사용을 지지하는 대가로 안보 우산과 무기를 제공했다. 달러-안보 연계가 형성되자, 미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해체되어도 서유럽과 일본은 달러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탈냉전 이후 안보의 위협이 사라지자, 유럽은 달러에 대한 대안으로 유로화를 구상했지만, 유로화의 지배력은 제한적이었다. 미국의 주요 도전자였던 일본이 1990년대 장기불황에 빠지고, 유럽도 2000년대 유럽통합의 위기를 맞으면서, 미국은 쇠퇴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지배력을 통해 아직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

서유럽, 일본과 달리, 중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에 의존하지 않고 있고, 지정학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심지어 2008년 이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미 재무부 채권의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국은 달러 자산을 투매하여 미국의 통화 위기, 금융 붕괴, 재정 위기를 일으킬 수 있고, 이는 달러 헤게모니의 최종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훙호펑은 중국이 수출 주도 성장 모델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달러 헤게모니에 도전할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우선 1990년대 이후 수출 지향적 성장으로 형성된 중국 내 기득권 세력이 중국 경제 구조를 소비를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의 무역흑자는 오직 미국과 유럽에서만 발생하며, 중국의 대미, 대유럽 수출의 전체와 대부분은 달러화로 결제된다. 따라서 중국은 달러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은 분명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조정하고 있다. 2차 세계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의 다수 국가에 경제적, 군사적 안보를 제공함으로써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아시아에서는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했다. 중국은 캄보디아와 미얀마의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수임하거나 그에 투자하는 등 인접국에 투자, 대출,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자, 중국은 자신의 경제적 영향력을 외교적 무기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나 일본과의 영토 분쟁과 관련해 다른 국가에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경제 관계를 단절하겠고 위협했다. 이제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이 동아시아에 남아주길 바라면서 중국의 영향력을 저지하려 한다. 

중국의 영향력 확장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아프리카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치체제에 무관하게, 미국과 유럽보다 더 관대한 조건으로 아프리카 국가에 투자함으로써 아프리카 국가의 환심을 얻었다. 아프리카 국가들도 달라이 라마 같은 정치적 이슈에서 중국을 지지하면서 그에 보답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나이지리아 등 중국과 밀접한 국가들조차 중국에 대한 불안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처럼 중국은 단기간에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중심이 되지는 않겠지만, 세계 정치의 동학을 변화시키고 있다. 
 

6) 미국과 중국은 함께 지구적 위기를 막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훙호펑은 중국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쇠퇴시키는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기는커녕, 미국의 쇠퇴로 인한 변화에 의존하여 성장했으며, 이제는 바로 그 질서마저도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위기를 맞았으며 그 대응으로 세계화를 진전시켰다. 중국은 그런 미국의 변화한 전략에 힘입어 수출을 확대하며 성장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중심의 질서는 다시 위기에 처했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세계 경제의 불균형의 한 축이 중국 경제의 불균형이다. 미국이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을 늘리며 세금을 인상하려 해도, 중국이 계속해서 소비를 억제하고 무역 흑자를 유지하려 한다면 불균형을 재조정할 수 없으므로, 양 축에서의 조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중국은 성장 과정에서 가계 소비를 억압하고 과도하게 고정자본 투자와 수출에 의존했고, 그 결과 거대한 불균형이 야기되었다. 특히 그는 중국에서 과잉투자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지닌 지방정부는 각기 자율적으로 산업정책을 추진하는데, 지방 정부들은 수출지향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와 내수지향적인 국유기업의 생산 능력, 인프라 건설을 두고 경쟁한다. 거대한 투자에도 수출기업은 어느 정도의 이윤을 산출했다면, 국유기업에 대한 투자는 점차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방정부 사이의 보호주의 정책과 금융 시장의 저발전으로 이미 포화상태의 지방과 부문의 국내 기업의 투자는 계속해서 심화한다. 심지어 국유은행은 지방 당 실권자들의 명령이나 대인관계에 의해, 수익이 높은 사영기업보다 부실하고 방만한 국유기업에 신용을 제공한다. 이런 비효율적 자원 배분은 이윤 하락과 경제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위기의 폭발은 중국 정부의 금융구제와 대규모 경기부양책에 의해 이연되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고 위안화 평가절상을 억제함으로써 국유기업과 수출 제조업자를 보조하고, 농촌에서 대규모 산업예비군을 창출하여 상대적인 제조업 저임금을 유지하고 있다. 즉, 불균형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훙호펑은 중국 경제와 세계 경제의 재조정을 위해 분배를 조정하여 노동의 몫을 대폭 증가시키고, 도시와 농촌 간의 불평등을 축소하며, 국유 부문의 특권을 축소하는 재분배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 당-국가 엘리트에게 이런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경제 개혁을 위해서는 당-국가 엘리트의 특권을 견제하기 위한 민주화와 자유화가 필요하다. 중국의 사회정치적 개혁이 있어야 중국의 경제적 재조정이 가능하고, 중국 경제의 불균형을 조정해야 세계 경제의 재조정도 가능하다. 
 
 

2. 중국식 경제발전이 위험한 이유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훙호펑은 답은 간단하다. 중국이 미국의 질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단기간 내에는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중국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곳곳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1) 중국의 성장둔화는 국내외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0년 중국은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에 등극했고, 수출규모로는 독일을 제치고 1위가 되었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아직 세계 평균보다 낮다. 중국이 향수 수십 년간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세계 평균에 도달하는 데에는 30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156-157쪽). 

그런데 중국의 경제성장은 벌써 둔화하고 있다. 훙호펑은 중국 GDP 성장률이 8% 밑으로 떨어진 2013년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전 30년 동안 중국의 GDP 성장률이 8% 아래로 떨어진 것은 1990~1991년과 1999~2000년 두 번 밖에 없었고, 일시적인 하락 후 다시 빠르게 반등했다(257쪽). 훙호펑의 예상대로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계속 하락하여 2019년에는 5.9%를 기록했고, 코로나19의 영향이 있던 2020년에는 2.3% 성장에 그쳤다.

훙호펑은 중국의 금융 체계는 이미 부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경제성장의 둔화를 견딜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지적한다. 부실채권으로 인해 금융 체계가 무너진다면, 채무불이행과 파산의 악순환을 야기할 수 있다(243쪽). 중국 정부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부채를 관리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중국이 GDP 성장률 1%포인트 이상 하락을 감수하면서도 헝다그룹을 파산하게 내버려 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을 포함하여, 중국 금융 체계 전체의 부실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비슷한 위험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또 그는 중국 정치제도의 불안정성에도 주목한다.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강력한 국가적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파른 성장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중국 정부는 다른 방식으로 세원을 찾을 수 있었기에, 2006년 농업세를 폐지하거나 2008년 새로운 노동계약법을 도입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지방정부들은 ‘안정 유지 기금’을 운용하는데, 시위가 발생하면 시위자들에게 현금으로 보상함으로써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257쪽). 

그러나 성장 둔화가 오래 지속되면, 이런 방법들로는 내부의 불만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국가에 도전하는 사회적 소요가 나타날 수도 있다. 훙호펑은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당-국가 엘리트가 대중의 분노를 공격적인 민족주의로 전환하려 시도하고 있고, 그것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258쪽).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대만 무력 통일을 공언했으며, 2021년 내내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훙호펑은 중국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이런 상황이 반복하여 나타날 수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2) 중국과 동아시아, 중국과 세계는 점점 하나가 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는 중국과 수출 지향 생산 네트워크로 결합되어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중국에 생산을 위한 원자재를 공급한다. 중국은 최종 제품을 생산하여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국가로 수출한다. 중국은 세계경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대한 일부가 되었다.

특히 훙호펑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살펴보자. 중국이 부상하면서 일본을 선두로 하던 동아시아의 산업질서는 중국 중심의 수출지향 산업질서로 전환했다. 기존의 산업질서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기러기 대형의 위계에 따라 각기 다른 최종 소비재를 서구 시장에 수출했다. 일본이 가장 기술적으로 발달한 제품을 수출하면, 한국과 대만은 중간 수준의 제품을, 동남아시아는 부가가치가 가장 낮은 제품을 수출했다. 이제 변화한 산업질서에서 일본은 중국에 자본재를 수출하고, 한국과 대만은 중국에 고부가가치 부품을 수출한다. 중국은 이 자본재와 부품으로 완제품을 만들어 서구의 부유한 국가들로 수출한다(130-134쪽). 

동아시아 국가의 무역구조 변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1990~2000년대에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대중 수출은 대미 수출을 넘어섰으며, 일본의 대중 수출은 대미 수출을 따라잡고 있다(135쪽).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증가하면, 중국의 수출 부진이 연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수출 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생산 네트워크 속에서, 동아시아 국가는 의도치 않게 중국 금융체계의 부실로 인한 위험을 공유하게 된다. 
 

3) 중국은 경제적 영향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


중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나 일본과 영토 분쟁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주권 주장을 침해하는 국가에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경제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위협했다. 2012년 일본 정부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자, 2013년 중국 정부는 일본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중국에게 넘기고 중국 영토로 인정할 때까지 희토류 원소를 일본에 수출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중국 내에서는 대규모 반일 시위가 일어나,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2012년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군도를 둘러싸고 필리핀과 갈등을 빚을 때에는 중국이 관광을 중단했고, 베트남에도 비슷한 위협을 했다(202-203쪽). 

2016년 한국의 경험은 더 생생하다.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발표하자, 중국 정부는 실질적인 경제보복에 나섰다. 11월 18일 롯데그룹의 성주골프장이 사드 부지로 선정되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는 중국에 진출한 롯데 계열사의 전 사업장에 세무조사, 소방·위생점검, 안전점검을 진행했다. 2017년 2월 28일에는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해 한국을 징벌”하겠다고 경고했고, 3월 3일 한국 관광을 전면 금지했다. 8일에는 중국 내 55개 롯데마트 점포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15일에는 한국을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 20일, 결국 한국은 중국의 경제보복을 WTO에 제소했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증가할수록, 또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할수록, 중국의 정치적 압력은 강해질 수 있다.
 

4) 중국은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 한다


2013년 중국은 국방백서에서 ‘해외에서의 이익이 중국 국가 이익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해외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인민해방군의 핵심 목표라고 명시했다. 중국은 경제적 이익 방어를 위해 국제 용병도 고용했는데, 특히 에릭 프린스 같은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210쪽). 그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특수 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었다. 퇴역 후 그는 안보업체인 블랙워터를 창업했고, 미 국방부와 계약을 맺어 이라크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제 그는 중국 최대 국유기업 중신그룹(ZTE)의 지원을 받아 홍콩에서 보안·물류 회사인 프런티어서비스그룹(FSG)을 운영하고 있다.

무력을 사용해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다. 우선 2017년 8월 중국은 처음으로 해외 군사기지를 보유하게 됐다. 이 군사기지는 아프리카 동부 지부티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수에즈 운하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다. 현재는 아프리카 적도기니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있으며, 이것이 완성되면 중국은 아프리카 동서에 하나씩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 군사기지가 중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한다.

중국 자체적으로 민간군사기업(PMC)을 육성하고 있기도 하다. 일대일로 사업으로 해외로 나가는 중국 기업과 중국인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중국 민간군사기업의 능력이 뒤처지고 있지만,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이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3. 우리가 중국에 주목하는 이유

 
중국의 부상이 수반하는 여러 위험에도, 많은 개발도상국은 중국의 부상을 기회로 인식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해온 국가들은, 중국과 미국을 서로 경쟁시키며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 했다. 

미얀마가 그런 사례다. 1990년대 이후 미국과 EU는 미얀마 군사정부의 민주주의 탄압을 이유로 미얀마에 각종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이 기간에 미얀마는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각종 인프라 건설에서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큰 이익을 봤다. 그러나 중국 투자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면서 미얀마는 거대한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점차 불안감을 느꼈다. 중국의 국유 광산 투자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적 불만도 고조되었다.

 2011년경 미얀마 군사정부는 정치 개혁을 시도하며 미국과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한다. 이후 미얀마는 중국과의 경제적 우호관계를 누리면서도 미국과의 경제적, 정치군사적 관계를 동시에 개선하려 했다. 2013년에는 벵골만과 중국의 서남부 윈난성을 잇는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가 건설한 가스관을 개통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타이의 군사훈련에도 참여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했다(204-205쪽).

훙호펑은 미얀마 외에도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미국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실용적이고 일시적인 접근을 해왔다고 본다. 한국 역시 그가 지적한 국가들 중 하나다. 그는 중국이 개발도상국에 미치는 영향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만, 그 함의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는 미국 중심의 질서에 올라탔다. 쇠락하는 질서 속에서 호황을 누린 중국은 세계 경제 불균형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한다. 중국 내부적으로도 중국 공산당의 소수 지도부에 의해 전체 경제가 통제되면서 거대한 부실이 야기되었다. 이제 중국은 해외에서도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연결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경제를 활용하며,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력을 확보하고 있다. 만약 중국과 경제 관계를 맺는 국가가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중국의 정치적 이익에 종속될 위험이 크고,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이익을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 중국에 대한 단기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 위험한 이유다. 

『차이나 붐』은 훙호펑이 이전에 썼던 여러 논문을 묶어 2015년에 한 권의 책으로 낸 것인데, 여전히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준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그에 대한 대응,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동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국 자본주의는 중국의 정치체제와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고, 벌써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이 트럼프-시진핑 시기의 미중갈등이나 바이든-시진핑 시기의 전략적 경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의 분석은 2022년 현재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승리주의 혹은 패배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 역사적 궤적 속에서 중국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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