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2 봄. 178호
첨부파일
2022_봄호_09_책소개_고대사.pdf

욕망을 걷어내고 바라본 한국 고대사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소개

이진호 | 인천지부 회원,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인천지부 조직국장

1. 서론

 
한국 고대사라고 하면 무언가 고리타분하고 현재와 먼 것으로 느껴진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맞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수호할 사명을 가져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한국 고대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당대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 이해보다는, 특정한 목적이 더 강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주변국과 쟁점이 되는 ‘역사왜곡’ 문제와 결부지어, 현대의 정치적·외교적 이해관계에 따른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크다. 이와 같은 한국 고대사 이해는 다른 견해를 제기하기 어려운, 사뭇 ‘정신교육’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역사 교육이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이뤄진 탓도 클 것이다. 

과학적·합리적 역사 이해가 아닌, 특정 목적을 전제한 역사 이해는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토론과 비판이 가능한 학문적 논쟁보다는, 이해관계를 따지는 정치적 논란이 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일어난 한국 고대사 관련 해프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하라고 지시했다. 2017년 6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보통은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역사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광양만, 순천만,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들이 남은 아주 넓었던 역사”라며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가야사 연구·복원은 정부 100대 국정 주요 과제로 선정되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는 큰 틀에서는 가야사 복원이라는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체계적 연구 없이 무리한 발굴과 복원이 이뤄질 것이라는 우려를 드러냈다. 당시 한국고대사학회장이었던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역사의 특정 시기 연구를 대통령이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면서 “역사학과 고고학계 일부는 환영하고, 일부는 갸우뚱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7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관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뜨거웠다. 당시 역사학계는 도 후보자가 의원 시절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소위 재야사학계에 편향된 입장으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과 ‘하버드대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는 데 기여했고, 민족주의 사관에 물든 재야사학자들을 국회로 초청해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줬다고 보고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도 후보자는 “확실히 싸워야 할 문제가 있으면 싸우겠다.”라는 발언을 하여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재야사학계의 주장대로 ‘식민사관에 잠식된 역사학계’에 맞서 싸우겠다는 발언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도 후보자는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체부 장관에 그대로 임명되었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관 논란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이 우리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큰 문제다. 과학적·합리적 역사인식을 방해할 뿐더러, 민족주의적 인식에 내재한 욕망을 자양분으로 삼아 위험한 주장이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앞서 나온 ‘재야사학계’의 주장이다. 사실 ‘주류’사학에 대비되는 ‘재야’사학이라는 용법은 적절치 않다. 이들의 연구방법과 목적은 학문이라면 갖춰야 할 기초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학과 비슷하게 보이려고 흉내를 내지만 ‘가짜 학문’이다. 이를 영어권에서는 ‘슈도히스토리(pseudo-history)’라고 하며, ‘유사(類似)역사학’, ‘의사(擬似)역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맹자』에 나오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을 가리키는 ‘사이비(似而非)’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이비역사학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가 여전히 일본 식민사관을 추종하여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공격한다. 이들은 위대한 역사와 거대한 영토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역사인식을 체계적 연구와 토론이 아닌 윤리적 당위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조금이라도 문제를 제기하면 ‘친일 식민사관’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상대를 ‘친일파’라는 ‘적’으로 규정하고 선동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사이비역사학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로 갈리는 사람들도 사이비역사학의 틀은 공유하기도 한다. 가짜 지식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소비되는 건 반지성주의의 확산을 가리키는 위험한 징후다. 특히, 우리나라의 사이비역사학은 ‘쇼비니즘’(극단적 민족주의)과 결합되어 있어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이와 같은 사이비역사학에 무대응으로 일관해왔다. 그 수준이 학문적으로 매우 저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비역사학이 점차 확산되자 최근 이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대응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고대사를 전공한 소장학자들이 주축이 돼 2015년 결성한 ‘젊은역사학자모임’이 그 대표주자다. 재야사학계를 ‘사이비’로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 행태를 ‘역사 파시즘’으로 규정한 이들의 주장은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들이 2017년 출간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은 적지 않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2018년 출간된 젊은역사학자모임의 두 번째 책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는 우리 사회 역사인식의 ‘욕망’을 드러내 철저하게 비판한다. 여기서 욕망은 사이비역사학의 왜곡된 욕망이자, 오랜 기간 주류 역사학계에서 통용된 민족주의 역사관의 욕망이다. 필자들은 사이비역사학의 확산에는 기존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오랜 기간 한국 사회의 역사교육이 과거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 이해 이전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이뤄지면서, 사이비역사학 같은 가짜 역사가 퍼질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에 실린 여러 연구자의 글들을 따라 사이비역사학의 뒤틀린 욕망을 넘어, 교과서의 역사지식이 내재하고 있던 민족주의적 욕망을 넘어,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는 사뭇 다른 한국 고대사 

 
한국 고대사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대륙까지 걸쳐있었던 고대국가의 영역지도, 시시각각 변동한 삼국의 영역지도, 활발한 국제 교류를 보여주는 지도 등이다. 삼국시대 각국의 전성기로 ‘4세기 백제(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광개토왕, 장수왕), 6세기 신라(진흥왕)’를 꼽았던 일종의 ‘공식’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 교과서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다. 교과서의 내용은 학생들에게 평생의 지식이자 정답이 되며 우리 사회 시민의 ‘상식’이 된다. 

그러나 역사연구는 계속되기에, 교과서의 역사 지식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다. 더불어 고대사를 영토 중심으로 인식하는 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생산력과 국가행정력에 상당한 한계가 있었던 고대 사회의 영역을 현대 국가의 영토와 동일하게 사고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도 지속적인 ‘역사왜곡’ 논란의 대상이자, 대륙을 향한 욕망을 품은 사이비역사학의 주요 관심사가 바로 고대 국가의 영토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 유념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교과서 속 내용과는 좀 다른 한국 고대사에 대해 알아보자. 
 

1) 수수께끼의 나라, 고조선 


고조선은 흔히 ‘한국사 최초의 국가’로 불리며, 상당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단군을 교조로 삼는 대종교와 ‘기원전 2333년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된 국경일’인 개천절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고조선이 이해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조선에 대한 환상과 쇼비니즘이 결합하여 탄생한 극단적 사례가 위서(僞書) 『환단고기』다. 『환단고기』에 대해 할 말도 많지만 생략하고, 고조선은 정말 ‘우리 민족사의 순수한 원형’, ‘찬란했던 과거의 문명’일까? 기경량은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의 첫 장 「고조선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환상에 싸인 고조선이 생각보다 알 수 없는 나라임을 알려준다. 

고조선은 수수께끼의 나라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당대의 이야기인지,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지,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인지, 비파형 동검·탁자식 고인돌·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의 유물이 맞는지 등등에서 확실한 것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를 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곰·호랑이 등은 실존했던 각 부족 형태의 정치체이며, 단군신화의 의미는 환웅부족이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연합해 고조선을 형성했고,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배제했다는 것이란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하지만 고려 시대 문인 이승훈이 저술한 『제왕운기』에는 우리가 아는 내용과 상당히 다른, 곰과 호랑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판본의 단군신화가 나온다. 이와 같이 현재 역사학계는 단군신화가 고조선 당대부터 존재했다고 볼 뚜렷한 증거가 없으며, 단군신화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신화가 아닌 실체를 갖춘 고조선 관련 기록은 중국의 고대 역사서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자』라는 책으로, 기록상 고조선의 존재가 확인되는 시기의 상한은 기원전 4세기 무렵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와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최근 역사학계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본디 랴오허 강(요하) 일대였으나, 연나라의 침공 이후 평양 지역으로 옮겨졌다는 ‘이동설’을 널리 수용하고 있다. 비파형 동검·탁자식 고인돌·미송리형 토기 세 유물이 고조선 영역의 지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세 유물의 분포지는 상당히 다르다. 무엇보다 문화는 국경을 넘어서도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유물로 확인되는 문화적 분포권과 고대국가의 영역을 간단히 동일시해 버리는 태도는 위험하다. 


2) 고구려와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역사전쟁’


‘대륙으로 뻗어 나간 우리 역사’라는 점에서 고조선과 함께 주목받는 고대 국가가 고구려다. 고구려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어린이 위인전은 물론 각종 콘텐츠의 단골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추앙받는 ‘위인’이다. 심지어 방송사에서는 광개토왕을 우리 민족사의 영토를 넓힌 ‘동방의 알렉산더’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교과서에서도 여러 군데로 뻗어 나간 지도와 함께 광개토왕·장수왕이 치세한 5세기를 고구려의 전성기로 소개하기도 한다. 안정준은 「광개토왕비 발견과 한·중·일 역사전쟁」에서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며 그 통념의 저변에 있는 위험한 욕망을 드러낸다. 

광개토왕비는 5세기 초반까지 고구려 수도 국내성 지역이었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멸망 후 오랜 기간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가 청나라 황실이 봉금 조치를 해제한 이후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883년 일본군 중위 사코우 가게노부가 지안 지역 현지 조사 임무를 수행하다 우연히 광개토왕비를 발견, 비의 전체 탁본을 구하여 일본에 반입하면서 광개토왕비문을 둘러싼 한·중·일 역사전쟁이 개시되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신묘년(391년)조’라고 불리는 문구다. 일본 측은 신묘년조를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는 4세기 이래 왜가 한반도 남부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를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당시 추진되던 일제의 한반도 진출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정치적 근거로도 쓰였다. 1930년대 이래로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 북한의 김석형 등이 이를 반박하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문맥에 따라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될 수 있는 한문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바다를 건너 백제 등을 격파한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했다. 그러나 주어·목적어를 임의로 끼워넣은 정인보·김석형의 해석은 분명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다. 

신묘년조 해석을 두고 벌어지던 논쟁은 1970년대 글자 판독과 탁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완전히 새롭게 전환됐다. 재일교포 학자 이진희는 비문의 여러 탁본에서 같은 위치에 있는 동일한 글자들이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 점에 주목하여 비면에 석회가 발려 있었다는 점을 폭로했다. 이어 일본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의 글자들을 변조했으며, 일본에 남아 있는 탁본들은 조작되었다는 ‘석회 조작설’을 주장했다. 이진희의 주장은 일본 측 광개토왕비문 탁본을 일단 신뢰하며 연구를 진행해 온 한일 양국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석회 조작설’은 중국 학자 왕젠췬에게 반박된다. 그는 보름 이상 걸리는 탁본 작업 특성상 지나가던 군인인 사코우가 직접 탁본을 했다고 볼 수 없고, 군인이었던 그의 지식으로 난해한 비문의 글자 조작을 하긴 어려웠다고 봤다. 결정적으로 비면에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을 업으로 하는 현지 주민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0년대 일본 학계의 조사 과정에서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제작한 ‘원석탁본’이 확인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신묘년조’에 큰 차이가 없었다. 

광개토왕비문 연구는 1990년대에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재일교포 사학자 이성시는 신묘년조 앞의 “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 왔다”라는 내용에 주목하여, 최초 일본의 신묘년조 해석을 그대로 인정하되 고구려인에 의해 작성될 당시에 이미 내용 자체가 과장·왜곡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비문에서 백제·신라는 실제 역사와 달리 이미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는 ‘속민’으로 묘사되고, ‘왜’는 실제보다 크게 과장된 채로 무찔러져야 하는 악당 세력으로 나타난다. 이 서사에서 ‘영웅’인 광개토왕은 실제보다 강력한 악당인 ‘왜’를 무찌르게 된다. 신묘년조 해석은 일본학자의 해석이 맞을 수 있지만, 광개토왕의 업적을 극대화하려는 고구려인들의 ‘욕망’으로 이미 비문을 제작한 당대에 내용을 과장·왜곡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성시는 비문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논쟁이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탐구였다기보다는 일본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 온 과정이었다고 지적했다. 

 왜의 실체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의견은 조금씩 갈리지만, 현재 연구자들은 광개토왕비문이 진실만을 전한다고 보지 않는다. 광개토왕비 연구는 한·일 양국의 정치적·외교적 가치관을 투영해 온 과거 연구를 반성하는 가운데, 현재는 실제 비문을 작성한 고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그 이면의 객관적 진실을 추적하는 단계에 와있다. 자국 중심의 역사인식을 정당화해온 민족주의적 ‘욕망’을 드러내고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3) 백제 요서진출설의 ‘비밀’


백제가 한때 한반도 남부와 대륙에 걸쳐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했다는 ‘대륙백제설’은 욕망을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다. ‘대륙백제설’의 근거가 되는 백제의 요서 진출 기록은 많은 사람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켜왔다. 백제 요서 진출 기록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때 백제 역시 요서를 차지하고 진평군현, 백제군과 같은 군현을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대륙백제설’을 다룬 이문열의 소설 『대륙의 한』은 스테디셀러가 됐고, 소설을 모태로 2010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이 나오기도 했다. 2007년 한국사 교과서까지 백제의 요서 진출은 ‘역사적 사실’로 지도와 함께 꼬박꼬박 서술됐다. 그런데 백길남의 「백제는 정말 요서로 진출했나」은 이 같은 통념에 의외의 사실을 알려준다. 

백제의 요서 진출은 국내 역사서에는 없고 남조의 역사 자료에서만 전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그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백제의 ‘대륙 진출’에만 주목한 연구들은 백제 요서 진출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순환을 반복해왔다. 신채호와 정인보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백제의 왕성한 해양 활동 능력에 주목하여 근초고왕 전후에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고 보았다. 백제의 요서 진출을 인정하는 연구자들은 국내 기록의 불완전성과 백제의 해양 활동 능력을 고려할 때 백제가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만큼 백제의 요서 진출 정보가 남조 역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다고 본다. 반면, 백제의 요서 진출을 부정하는 연구자들은 당사자인 북조 역사서와 국내 역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고 고고학적 자료도 없는 점, 멀리 떨어진 요서 지역을 백제가 바다를 건너 진출할 이유가 없는 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 민족을 상대로 고구려의 견제를 받으며 요서로 진출하기는 무리라는 점을 든다. 

그런데 백제 요서 진출 정보의 유통과정과 최종적으로 남조의 역사서에만 기록된 이유를 탐구해보면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양직공도』에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한 주체로 나오는 ‘낙랑’에 주목하여 요서 지역으로 ‘교치’된 낙랑을 남조 역사가들이 혼동했거나, 이들과 백제의 낙랑·대방군 유민과의 교류가 지속되면서 백제가 요서에 진출한 것으로 잘못 기록됐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백제가 자국의 군사 능력을 과시하고 동진·남조에게 선진 문물이나 관직을 받고자 한 과정에서 전달한 정보가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제 스스로 국익을 고려하여 윤색된 상태로 요서 진출 정보를 동진·남조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한편, 백제가 실시하지도 않은 중국식 군현인 진평군현·백제군을 중국 지리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군현이 실제 중국 영역 안에 없었을 수 있다. 여기서 낙랑·대방군 멸망 후 한인 유민을 백제가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지역에 교군·교현이 설치되었고, 흥미를 느낀 남조 역사가들이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즉 백제가 실제로 대륙에 진출한 게 아니라, 백제가 과장한 정보가 그대로 남조 역사서에 수록됐거나, 인구 이동 및 지리 정보가 실제 요서 진출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반영하여 최근 교과서에서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논란이 있음을 인정하고 동진과 왜의 관계를 ‘교류관계’로 표기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4) 도식적인 ‘공식’보다는 풍부한 이해가 필요한 삼국시대


한국 고대국가의 전성기가 각각 언제인지는 역사 시험의 단골 문제다. 앞서 ‘4세기 백제(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광개토왕, 장수왕), 6세기 신라(진흥왕)’ 공식을 언급한 바 있다. 사전에서는 전성기를 ‘형세나 세력 따위가 한창 왕성한 시기’로 정의한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대체로 해당 국가가 주변 지역 다른 공동체에 비해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상대적 우위 현상이 나타난 시기를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강진원의 「고대국가의 전성기, 언제로 봐야 할까?」를 통해 삼국시대 전성기 문제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비교적 명확하게 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의 치세인 5세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만주와 한반도에서 일정한 세력권을 확립하고 중국 측으로부터 이를 인정받았다. 당시 고구려의 국제 위상은 중국 사료에도 나온다. 『자치통감』에는 고구려의 국력이 “바야흐로 강했기” 때문에, 북위에서 사신들이 머무는 관저를 둘 때 고구려 사신의 거처를 남제 사신 다음으로 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 입장에서 동이(東夷), 즉 당시 기준으로 랴오허 강 이동 지역의 패권을 인정한 ‘동이중랑장’ 내지 ‘동이교위’라는 호칭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전성기는 선왕들의 체제 정비와 백제의 주춤한 성장세, 한때 화북 동부를 장악했던 후연의 몰락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다. 

백제의 전성기와 관련하여 흔히 연상하는 인물은 근초고왕이다. 교과서에서는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북쪽으로 황해도 일대까지 영유하며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케 했으며,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일대에 잔존하던 마한 세력을 모두 통합하며 가야 소국들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나온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 열도로도 힘을 뻗쳤다. 그런데 근초고왕 시기 정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상당하다. 해외 진출이 특히 그렇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요서에 식민지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긴 어려우며, 왜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나타낸다는 칠지도는 오히려 양국의 우호적 관계 속에 오간 외교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마한의 잔존 세력을 병합하고 가야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은 『일본서기』에 바탕을 두는데, 전라남도 일대는 그 뒤에도 상당 기간 독자 문화를 향유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다만 다른 시기와 비교할 때 분명 4세기 후반 백제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외교적으로도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교과서 ‘공식’대로라면 신라의 전성기는 6세기 진흥왕대다. 하지만 진흥왕 시기 신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거나 백제와 고구려를 다방면으로 압도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삼국의 본격 정립을 보여준 시기로 보는 게 타당하다. 신라의 ‘황금시대’는 바로 삼국통일 이후다. 삼국통일의 성격에 많은 견해가 있지만, 적어도 신라의 면모는 이전과 달라졌다. 신라의 영역이 두 배 가까이 늘었고, 큰 전쟁의 위협이 사라져 안정적으로 생산량을 증대시킬 조건이 마련됐다. 사실상 신라는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가 됐다. 

사료의 부족으로 당대의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고대 국가의 전성기를 뚜렷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점에서, 특정 시기를 잘라내어 이해하는 것보다는 거시적 시야에서 전체적 전개 과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3. ‘유구한 우리 민족’과는 좀 다른 한국 고대사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역사’라는 표현을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반만년 역사 속에 외세의 침략에도 꿋꿋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다는 인식은 매우 널리 통용된다. 고조선부터 현재 대한민국까지를 통틀어 ‘민족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은 특정한 정체성이나 의식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된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고대 사회는 수많은 정치체와 종족이 상호작용하는 사회였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단일민족’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러한 ‘민족의식’은 당대 인물과 사회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민족의식은 잠시 접어두고 관련된 한국 고대사의 주제들을 살펴보자. 
 

1) ‘민족통합’인가 아닌가? 삼국통일과 발해


우리 사회의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가장 주류적인 관점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민족 형성의 시작이며, ‘민족통합’을 이뤄냈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삼국통일을 주도한 김춘추를 민족배반자, 사대주의자로 비난하고, 삼국통일을 한국사의 영역을 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시킨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편, 삼국통일의 한계를 지적하고 발해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남북국시대’로 보는 관점도 있다. 발해를 중국이 자국의 역사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삼국통일과 발해사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이성호의 「생존을 위한 전쟁, 신라의 삼국통일」과 권순홍의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라는 고립된 지리적 위치와 가야와 같은 경쟁 국가의 존재,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으로 발전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겨우 국가 형태를 갖춘 후에는 강력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받았기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성장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교통로를 직접 확보하여 교류를 지속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신라의 고민이 해결된 것은 진흥왕대다. 나제동맹군이 고구려에게서 한강 유역을 빼앗은 상황에서, 553년 신라는 과감히 백제를 배반하고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해 차지했다. 신라는 독자적인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거의 100여 년간 백제와의 전쟁이 이어졌다. 백제 의자왕(641~660년 재위)이 즉위한 이후 신라에 더욱 치명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신라 서쪽 변경 40여 성이 함락되고 대백제 전투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이 함락된 것이다. 심지어 대야성 전투 패배의 결정적 원인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의 행실 문제로 발발한 내부 분란이었다. 이는 김춘추 개인은 물론 김춘추를 지지하던 선덕여왕과 김유신 세력에게도 큰 정치적 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가 충격에 빠져 하루를 멍하니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김춘추는 멍하니 서 있는 걸로 끝내진 않았다. 당시 신라의 지배세력은 백제 멸망 없이 신라의 안위를 도모할 수 없다는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동맹을 맺기 위한 외교에 나선다. 그러나 첫 번째 후보인 고구려와 두 번째 후보인 왜와의 동맹을 수립하는 데 실패한다. 마지막 대안으로 남은 게 당이었다. 당은 신라 입장에서도 그렇게 선택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선덕여왕을 두고 당이 신라에 여왕이 있다는 점을 깔보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 시기 신라가 건립한 황룡사 9층탑의 2층은 당을 상징하는 ‘중화’(中華)다. 9층탑의 각 층에 제압해야 할 외부 세력을 할당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라는 당을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는 많은 부분을 양보하면서 당 태종의 적극적 군사 개입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고, 평양 이남 땅에 대한 소유권과 신라의 통치권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당과의 연합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고, 마지막에는 그동안 연합해 온 당과도 전투를 벌이며 삼국통일을 달성한다. 이상의 과정을 살펴볼 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전혀 같은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 아니면 동지가 되었을 뿐이다. 당과 왜도 마찬가지다. 신라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보여준다. 백제를 멸망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고구려와 왜에도 손을 뻗었고, 당을 경계하는 가운데 동맹을 맺어 목표를 이루었다. 당이 물러나지 않자 가차 없이 당을 공격해 몰아냈다. 통념과 달리 신라가 ‘민족’을 배반하고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발해는 어떨까.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해를 두고 당의 지방정권이었으며 말갈의 나라였다는 근거로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매우 많기에, 쟁점은 발해의 지배층이 말갈인가 아닌가에 맞춰졌다. 한국과 북한 연구자들은 중국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발해의 지배층이 말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관련하여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으로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을 ‘속말말갈’로 기록하여 오래도록 논쟁의 빌미가 됐다.  

실상은 어땠을까. 발해가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투쟁 및 부흥운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대조영 세력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은 이항 대립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 관계였다. 당의 인식도 마찬가지로, 당은 고구려 부흥을 막기 위해 말갈까지도 강제 이주시켰고, 당 내부에서는 이탈하는 말갈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고구려 왕족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후대에 편찬된 『신당서』에서 발해에 ‘미개한 말갈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발해 건국 후 이를 애써 부정하기 위한 당의 노력이었다. 그것을 근거로 현재 중국이 발해를 자기 역사로 가져가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발해가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양자택일보다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적극적인 협력과 그 이후 이어진 발해 역사의 실상을 폭넓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 알고 보니 기마민족의 후손인 우리 민족?


한국 고대국가 왕조가 ‘기마민족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기병을 잘 운용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신라 김씨 왕실이 흉노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2009년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에는 김씨 성의 유래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이 묘지명에서는 재당 신라인 김씨 부인의 가계를 서술하면서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를 김씨 시조로, 그리고 먼 선조로서 흉노의 조정에 몸담았던 김일제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비석 중 일부만 비편으로 남아있는 ‘문무왕릉비’에도 신라 김씨와 김일제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듯 보이는 내용이 나온다. 황금 궤짝에서 태어난 김알지의 후손이 신라 김씨 왕실이라고 알고 있던 우리에게 충격적인 내용이다. 

언론에서는 이에 주목하여 ‘신라 김씨는 흉노족 후손’이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KBS 역사추적〉에서 2008년 11월 22일, 29일에 2부작으로 〈문무왕릉비의 비밀 제1편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제2편 왜 흉노의 후예라고 밝혔나?>를 방송한 바 있다.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이 발굴되자 〈KBS 역사스페셜〉이 2009년 7월 18일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바도 있다. 어쩌면 신라 김씨 왕족은 기마민족의 뜨거운 피를 이어받아 그 힘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거 아닐까?

최경선의 「신라 김씨 왕실은 흉노의 후예였나」는 그 환상을 산산이 부숴준다. 먼저 소호 금천씨와 김일제에 대해 알아보자. 소호 금천씨는 중국 전설상의 성인인 삼황오제 가운데 한 명으로, 오행의 하나인 ‘금(金)’을 내세워 김씨의 시조로 일컬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제는 흉노 한 부족의 태자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궁에서 말 기르는 노예로 있다가 무제의 눈에 띄어 출세하여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 이후 김일제는 이민족 묘지명에서 흔히 이민족으로서 중국 왕조에 귀순해 충성한 인물을 비유할 때 등장한다. 

다음으로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와 계보는 신라 왕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몇 차례씩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신라 김씨의 유래와 관련해 고려 시대에 두 종류 전승이 있다고 전한다. 여기서 김알지 설화와 함께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는 설이 함께 소개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김유신비’와 ‘삼랑사비’에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알지의 후예라는 인식이 어느 시기부터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는 인식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신라 왕실이 중국 전설상의 성인을 시조로 내세우는 것이 통치 정당성 확보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시조 인식은 혜공왕대 들어 다시 미추이사금을 시조로 내세우면서 또 다시 변화한다. 이와 같이 어느 한 시기의 자료에서 보이는 계보를 절대적 사실로 보는 일은 위험하다.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에 나오는 계보와 인식은 재당 신라인으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 결과일 수 있다. 이미 교포 4세였던 김씨 부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나라 사람이었을 것이다. 진짜 신라 김씨 왕실이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에 대한 여러 기록 중 김일제가 선조였다는 이야기에 주목한 것은 우리 민족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김일제는 이민족으로서 중국 왕조에 충성을 바친 상징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4. 사이비역사학의 ‘낚시터’, 낙랑군 문제와 임나일본부 

 
지금까지 민족주의적 한국 고대사 인식에 기여한 교과서 속 역사서술과 우리 사회의 통념적인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봤다.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전제한 민족주의 역사관은 사이비역사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쉽다. 사이비역사학이 위대한 역사와 거대한 영토에 집착한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한국 고대사의 영역을 더욱 크고 넓게 보고 싶고, 타국에 비해 우리 역사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욕망은 사이비역사학의 주장에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식민사관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체계적 연구를 진행 중인 역사학계는 마치 ‘더 매운 맛’ 식민사관 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이비역사학의 선동에 의해, 여전히 식민사관의 지배하에 놓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러나 사이비역사학은 역사학의 기초인 연구사 검토와 사료 비판은 외면하고 입맛에 맞는 자료만 취사선택하여 실제 역사상을 왜곡한다. 단순히 사료를 선별할 뿐만 아니라 주장에 어긋나는 자료는 아예 조작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사이비역사학을 학문으로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낙랑군 위치 문제와 임나일본부 논쟁이다. 이제 사이비역사학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파헤쳐보자. 
 

1) 쏟아지는 증거도 부정하는 사이비역사학의 실체 


기경량의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낙랑군 위치 비정(比定) 문제에서 역사연구의 기초도 지키지 않는 사이비역사학의 수준을 보여준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 무제의 침공으로,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멸망했다. 낙랑군은 고조선 멸망 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네 군 중 하나다. 낙랑군은 오랜 기간 존속하다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공격을 받아 고구려에 편입된다. 그 위치는 많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근거로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정약용, 안정복과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그 이전 우리 역사서들은 물론, 현대 역사학계 또한 당대 사료인 『삼국지』와 약간 뒤 시기의 『후한서』를 종합하여 낙랑군 위치를 평양 지역으로 보아왔다. 이는 고고학적 증거와도 일치한다. 평양 지역에서는 수많은 낙랑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대놓고 ‘낙랑’이라는 문자가 적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북한 학계는 이미 1990년대 평양시 낙랑 구역 안에서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에서 1만 50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습하였으며, 낙랑군 소속 현의 인구를 기록한 행정 문서까지 출토되었다. 

놀랍게도 사이비역사학에서는 이를 격렬히 부정하며 식민사학이라 매도한다. 그 대표주자가 이덕일이다. 그는 낙랑군 평양설이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왜곡이며, 식민사학을 계승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아무 의심 없이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일까? 사이비역사가들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시기에 작성된 가장 오래된 자료인 ‘1차 사료’를 통해 낙랑군이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들이 역사서의 본문과 후대인이 덧붙인 주석도 구별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2015년 11월 16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주최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에서, 이덕일은 『한서』나 『후한서』 같은 ‘1차 사료’의 내용을 장황하게 열거하며 강변하다가, 그것이 당나라 때 덧붙여진 주석임을 다른 토론자에게 지적받고 창피를 당하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이덕일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고대 영토를 더 크게 보자고 주장했다. 

사실 313년 이후의 내용을 담은 중국 역사서에서 낙랑군과 조선현이라는 명칭이 요하 일대에 산발적으로 등장하긴 한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하자 선비족의 수장 모용외는 자신들에게 망명한 유민들을 위해 영토 내에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해주었고, 이 내용이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전한다. 이처럼 본거지를 떠난 이들을 새로운 땅에 정착시키며 과거에 살던 지역명을 계승해 사용케 하는 것을 ‘교치’라고 하며, 이렇게 설치된 군현을 교군·교현이라고 부른다. 즉, 본래 낙랑군이 그 지역에 존재한 게 아니라, 아메리카에 이주한 유럽인들이 영국 지명에서 따와 ‘뉴욕’을 명명한 맥락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러나 사이비 역사가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단편적 기록들만을 보고 낙랑군이 처음부터 그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물적 증거인 고고학 자료에 대한 사이비 역사가들의 태도는 어떨까? 이들은 이 자료들이 낙랑군과 상관없다고 애써 우기거나 위조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덕일은 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거대한 낙랑 고분군이 고구려에서 잡아 온 중국인 포로들의 것이라고 강변한다. 무덤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아예 연대가 적혀있는 것만 수십 점에 달한다. 그 중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85년이며, 다른 대부분도 기원 전후의 연대가 적혀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 이덕일의 주장에 따르면, 건국조차 하지 않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이미 평양 일대를 편입하여 수만 명의 중국인 포로들을 잡아 정착시켰으며, 그 포로들은 주인인 고구려인보다 훨씬 호화로운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무조건 대륙에 우리 고대국가를 위치시키려는 욕망에 매몰된 사이비역사학의 연구 역량은 이렇게 천박하다. 
 

2) 장관님까지 낚았던 임나일본부 문제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양국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공식 폐기됐다. 본지가 22일 입수한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최종 보고서 요약본에 따르면, 양국 학자들은 서기 4~6세기 왜(倭)가 가야에 군대를 파견해 정치기관인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데 합의했다. (“日학계 ‘일본의 가야 지배說’(임나일본부설) 폐기”, 《조선일보》, 2010.03.23)

도 후보자는 이어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 주장을 쓴 국내 역사학자들 논문이 많다.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관련 자료들을 찾아놨다”면서 “가야사에서 일본 쪽 주장이 일리 있다는 국내 학자들이 있어서 쟁점이 생긴 상황인데, 학문적 논쟁은 계속해나가면 된다. 일본 쪽 주장들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우리 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도종환, ‘역사관 비판’ 반박 ‘싸울 땐 싸우겠다’”, 《한겨레》, 2017.06.06.)

상반된 사실을 전해주는 두 기사를 보면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학계는 정말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2010년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 공식 폐기에 합의했다는 말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는 어디에도 없다. 해답을 얻기 위해 위가야의 「임나일본부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논쟁을 자세히 알아보자.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자면 4세기 중반에 왜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설치해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다.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학설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일본서기』의 진구기 49년조(369년) 가라 7국 평정 기사를 시작으로 야마토정권의 임나 경영이 시작됐다고 보았으며, 이를 앞에서 살펴본 ‘광개토왕비’ 신묘년조와 『송서』 왜국전에 나오는 왜국왕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벼슬 인정 기록을 통해 뒷받침할 수 있다고 봤다. 스에마쓰는 4세기 이후 야마토정권이 임나를 직접 지배하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정설로 인정받았다.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일본서기』 기사는 일본에 유리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국과 중국 사료를 통해 어느 정도 검증을 갖춘 그의 주장을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객관성·실증성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바쳤다는 진구기 52년조(372년) 기록을 입증하는 칠지도가 발견되며 또 다른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건 경성제국대학에서 스에마쓰의 제자였던 김석형이다. 김석형은 1963년 북한 학술지 《력사과학》에 「삼한ㆍ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일본서기』에 한반도에서 있었다고 기록된 사건 대부분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건설한 분국과 야마토 정권 사이에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오히려 한반도 여러 세력이 일본열도를 경영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또한 임나일본부는 야마토정권이 일본 열도의 가야계 분국에 설치한 기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논문은 세 번에 걸쳐 따로 번역될 만큼 일본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주장은 고고학 자료를 언급하지 않은 스에마쓰와 달리 풍부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무엇보다도 김석형이 스에마쓰와 같은 문헌 기록들을 이용해 정반대의 주장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일본 역사학자들을 큰 고민에 빠뜨렸다. 그들은 열심히 김석형의 주장을 비판했지만, 이는 스에마쓰의 『일본서기』 해석에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록 이후 연구가 진행되며 그의 학설은 생명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본격적인 『일본서기』 사료 비판의 길을 열었다는 학설사적 의미가 크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1970년대부터 『일본서기』 사료 비판을 통해 본격적인 임나일본부설 비판이 이루어졌다. 시작은 천관우의 연구였다. 그는 진구 49년조의 가라 7국 평정 기사에 주목하여 왜가 신라와 가라를 공격할 때 중요한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 백제 장군이라는 점이 이상할뿐더러, 무엇보다 평정한 지역을 백제에 내려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같이 인심 좋은 국제 관계가 고금동서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는 백제가 멸망한 후 왜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모국인 백제에서 활동한 일들을 마치 왜에서 백제로 건너가 활동한 일인 것처럼 바꿔 놓았거나, 그렇게 바뀌었던 기록들이 『일본서기』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임나 관계 기사들은 사건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 또한 백제의 가야 진출 과정에서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김현구도 같은 관점에서 『일본서기』 사료 비판을 시도했다. 그 또한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임나 경영이 사실은 백제의 임나 경영을 보여준다고 봤다. 백제 임나 경영의 담당자는 진구 49년조에 등장하는 목라근자인데, 그의 아들 목만치가 왜에 정착하면서 『일본서기』에서는 목씨가 중심이 된 임나 경영을 야마토 정권의 것으로 바꿔 기록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일본서기』 임나 경영 기사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시대별 전개상황을 정리했으며,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인물들은 백제가 고용한 왜인 계통의 백제 관료로 파악하여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선진 문물을 주고 군사원조를 제공받는, 일종의 용병관계로 보았다. 임나일본부는 지방장관이나 이주한 백성들, 그리고 주둔군을 관리하는 기구로 보았다.  

천관우와 김현구의 연구는 『일본서기』 한반도 관계 기사가 백제와 야마토정권의 관계 중심 기록임을 증명했으며,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설치한 기구로 보았다. 그러나 가야사 입장에서 본다면 지배의 주체를 일본에서 백제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실제로 1980년대를 전후로 가야 지역 발굴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가야 지역이 5세기 후반까지 독자성을 유지했음이 증명됐다. 일본은 물론 백제의 가야 지배 또한 주장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진구기 기록이 어디까지 사실인 걸까? 이를 규명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라는 사서의 성격 문제에 주목했다. 『일본서기』는 일본 역사서임에도 한반도, 특히 백제 관련 내용이 대단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백제계 도래인에 의해 편찬된 백제계 사서가 핵심 자료로 이용되어서다. 한편, 『일본서기』는 8세기 일본에서 천황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다분히 일본 중심적으로 서술되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 즉 가야의 모습은 백제인의 시각과 일본인의 시각에서 이중적으로 굴절된 상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구기 기록을 통해 임나일본부의 실상을 이야기하기 어려우며, 『송서』 왜국전의 ‘○○국제군사’라는 칭호가 실제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 행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더해, 앞서 살펴본 대로 광개토왕비 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면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잠시 임동민의 「칠지도가 들려주는 백제와 왜 이야기」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던 칠지도도 살펴보자.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칼이다.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하면 백제에서 이 칼을 만들어 후왕인 왜왕에게 주었다는 내용으로, 한국에서는 이를 백제가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고 보아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기록과 종합해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바쳤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칠지도 연구는 백제와 왜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칠지도와 『일본서기』 각각에 나타나는 백제와 일본의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달리, 백제와 왜는 좋은 외교파트너였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후방의 안정과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위해, 왜는 선진 문물 도입과 국제무대 데뷔를 위해 서로를 원했던 것이다. 각각의 기록에 남아있는 엄격한 상하관계와 달리 칠지도는 외교적 선물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는 완전한 허상이었을까. 일본이란 국호와 부라는 관청이 모두 7세기 후반에야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본서기』 6세기 기록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는 조작이지만, 그 기록을 모두 부정하기엔 정황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안라국을 중심으로 외교사절의 성격을 보인 임나일본부의 활동을 볼 때, 긴메이기 15년조(554년)의 ‘재안라제왜신등’(在安羅諸倭臣等, 안라에 있는 왜의 여러 사신)이라는 기록이 임나일본부라 기록된 존재의 원형을 가리킨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또한,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식 발음으로 ‘야마토노미코토모치’라고 읽으라는 표기에도 주목하였다. 이때의 ‘미코토모치’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돼 담당한 일이 끝나면 왕에게 돌아오는 사신을 가리킨다. 이 역시 임나일본부라 기록된 존재가 외교사절이었음을 알려 주는 근거가 되었다. 세부적으로 쟁점은 있지만, 현재 임나일본부설을 다루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이처럼 임나일본부라 기록된 존재의 실상을 외교사절이라는 성격에서 찾고 있다.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동의하는 역사학자는 한일 양국을 통틀어 어디에도 없다. 양국 학자가 임나일본부설 폐기에 합의했다는 2010년 신문 기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최근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도종환 장관은 어째서 국내 역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을까. 실마리는 도종환 장관의 인터뷰에서 ‘임나=가야’라는 주장이 곧 임나일본부설 추종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는 부분이다.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김석형이 한 것이지만, 이는 김석형의 학설이 생명력을 잃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역사가들은 이 주장을 다시 무대 위로 올렸다. 그들은 『일본서기』 스진기 기록을 활용하여 임나의 위치를 쓰시마 섬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역사학자들은 스진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기록은 심지어 스에마쓰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사이비역사가들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에도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임나는 가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멸망이 기록된 긴메이기 23년조(562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임나의 존재를 기록하는데, 이는 무언가 사료가 잘못됐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본서기』 편찬자의 임나 관념에 따른 실체 없는 허구라는 연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사이비역사가들의 주장은 기초적인 사료 비판 문제를 외면하고 자꾸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임나를 가야 지역의 한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는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한 결과다. 광개토왕비의 내용을 통해 임나가라와 안라가 한반도 남부, 신라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으며, 가야 출신 강수가 자신을 ‘임나가량인’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 진경대사의 선조가 임나의 왕족이라는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기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송서』를 비롯한 여러 중국 측 기록을 통해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이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 세력 전체 혹은 그중 한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사료를 종합한 결론이다. 

최근 사이비역사가들은 학계 연구를 왜곡하는 수준을 넘어, 국내 기록인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일본서기』만을 믿고 한국 고대사 연구에 이용하는 것도 식민사학이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가야 유적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동부의 섬진강 유역은 물론 금강 상류 유역에서 발견되는데, 이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기록은 『일본서기』에만 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우월하다는 게 아니라, 적절한 사료 비판을 거치면 우리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 대중적으로 조선총독부와 같은 지배기관을 연상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역사학자 대부분은 임나일본부에서 조선총독부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 반면 사이비역사가들은 여전히 임나일본부를 조선총독부와 같은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들에게 임나일본부설은 한반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우선 임나일본부를 『일본서기』의 조작으로 치부한다. 그 근거로는 김석형의 분국설을 변용해 『일본서기』에 기록된 삼국과 임나는 쓰시마 섬에 있던 분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인정한다. 임나일본부를 우리 역사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이들의 현실적 목적에, 역사학의 기본인 사료 비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한편, 임나일본부에서 조선총독부를 연상시켜 현실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 집단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들어 낸 논리가 식민사관이며 그 구체적 결과물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열심히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확인되는 것은 주어만 다른 식민사관의 동어 반복일 뿐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의 현주소는 바로 식민사학의 ‘슬픈 변종’이다.  
 

5. 결론

 
이상을 종합해볼 때 한국 고대사 이해에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현대의 정치적·외교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 사관은 오히려 고대사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당대의 역사적 주체와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여러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더불어 고고학적 증거까지 종합하여 역사상을 파악해야 한다. 특정 사료를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할 경우 매우 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셋째, 이미 다 결론이 났을 거라는 고대사에 대한 통념과 다르게, 연구는 계속 진전되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지식이 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사이비역사학은 왜곡된 역사상을 그려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김대현의 「환단고기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을 보자. 1960년대 말 창간된 반공 잡지 《자유》가 1975년 ‘우리국사찾기협의회’가 발족한 이후 사이비역사학을 수용하여 반공주의와 쇼비니즘적 역사인식이 이어진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국사찾기협의회는 단군 조선은 실재의 상고시대이고, 그 강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연해주, 아무르 강, 바이칼 호, 중원 대륙을 아울렀으며, 교과서는 단군신화설과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개정하여 대륙사관에 맞게 집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우리국사찾기협의회에는 출판사 ‘자유사’의 핵심인물인 박창암을 포함하여 사이비역사학의 핵심 이데올로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의 글이 《자유》의 대부분을 채웠다. 참고로, 박창암은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하고 5.16쿠데타에도 참여했다가 소위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구속과 석방된 전력을 가진 인물로, 그의 호는 무려 ‘만주(滿洲)’였다. 

이들은 ‘국민정신혁명의 기본’으로 ‘민족사관’을 주장하며, 자유와 민족 개념을 상고사로부터 뿌리내린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어내려고 했다. ‘민족사관’의 반대편에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놓고 이에 대한 사상적 대비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다. 9000년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규모로 거대한 역사와 영토를 주장한 이들에게 ‘상고사’는 냉전 질서 속 사상과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민족의 자긍심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민족주의에서 핵심으로 강조된 것은 혈연의 통일성과 순수성이었다. 그들의 ‘9천 년 민족사관’은 혈연적 원리주의와 충성하는 국가주의 등 민족주의의 가장 어두운 부분만을 모아둔 집합체였다. 

우리는 과거의 파시즘에 어떤 특성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민족공동체’를 부르짖으며 극단적인 인종주의를 내세웠던 파시즘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했다. 사이비역사학은 파시즘의 어떤 부분과 분명히 닮아있다. 반지성주의가 점점 확산되고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 ‘역사왜곡’ 문제가 언제나 뜨거운 현재 우리 사회는 사이비역사학에 매우 취약한 상태다. 과학적·합리적 역사인식이 필요한 때다. 학창 시절에 배운 가물가물한 역사지식이 대부분인 우리에게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는 사이비역사학과 잘못된 민족주의적 욕망에 ‘면역’이 되는 ‘백신’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