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6.26호

공소시효의 벽을 허물자

반인도적 국가범죄와 공소시효

이창조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조롱당하는 정의

[사례1] 지난해 여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84년 청송교도소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인권유린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 80년 초 계엄군에 의해 연행돼 삼청교육대를 거쳐 청송교도소에 수감됐던 박영두 씨가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교도관들에게 무참히 폭행을 당한 끝에 사망한 사건. 그 사건의 진상이 17년 만에 공식 확인된 것이다.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진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남는 문제가 있었다. 박영두 씨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했던 사람들의 문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에 따르면, 당시 이잠술 주임을 비롯해, 박수호, 김의식, 김명겸 등 수명의 교도관들이 박 씨의 온몸을 꽁꽁 묶고 2시간 동안 집단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사건발생 이후 검찰과 부검의사마저 눈감아 준 덕에 이들은 무사히 17년의 세월을 지낼 수 있었고,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돼 사법처리도 면하게 됐다. 심지어 폭행에 가담했던 교도관이 아직도 청송 제2교도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경이니, ‘공소시효의 벽’ 앞에서 죽은 피해자만 억울할 뿐이다.

[사례2] 지난해 12월 검찰은 1987년 발표된 이른바 ‘간첩 수지김 사건’이 안기부의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살인범을 반공투사로 만들고, 피해자를 간첩으로 조작한 이 희대의 사기 극으로 온 국민을 기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장세동(당시 안기부장)과 이학봉(당시 안기부 차장) 등 사건 조작의 주모자들에 대해 모두 ‘공소시효의 경과’를 이유로 기소를 포기했다. 방송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변명하는 장세동에게 이 땅의 ‘정의’와 국민의 자존심은 참담하게 짓밟혔다.

공소시효가 뭐 길래?

공소시효 제도란 범죄 발생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소추권을 소멸시키는 제도로서, 피의자 인권보호와 사회적 안정 도모를 위해 각국에서 두고 있는 형사절차제도다. 우리 형사소송법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 무기에 해당하는 범죄는 10년’이라는 식으로 공소시효 규정을 두고 있다.
공소시효제도를 두는 논리로는 대개 △증거가 사라져 진실발견이 어렵고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점 △범죄행위에 의해 발생한 사회질서 파괴가 상당히 회복된다는 점 △장기간의 도피 등으로 인해 범인 스스로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는다는 점 △범죄에 대한 사회적 처벌 의지와 피해자의 감정이 진정됨으로써 처벌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점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서 형성된 사실상태를 존중하고 사회 및 개인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사례는 물론, 삼청교육대 사건이나 이근안의 고문 행위 등, 국가권력이 저지른 반인권적 범죄행위들에 대해서까지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제도의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감정과 피해자의 감정이 진정된 것이 아니며 △증거가 사라져 재판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가해자들이 상당기간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권유린의 가해자들은 높은 공직에 종사하거나 권력을 누려왔다.
특히 수지김 사건 등과 같이 국가권력 스스로 사건을 은폐했던 경우엔 아예 소추권 행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국가권력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장치로써 ‘공소시효’를 악용해 왔던 셈이다.

반인도 범죄엔 시효가 없다

반면, 나치 전범 문제 등 부끄러운 과거를 참회하기 위한 독일인들의 노력은 철저했다. 독일의 패망일(1945. 5. 8)을 기준으로 할 때, 나치의 학살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는 65년 5월 8일이면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65년 4월 이른바 시효계산법을 제정해, 독일 법원이 재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49년 말까지를 시효계산에서 제외했다. 약 4년의 시간을 더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9년 또다시 시효만료 시점이 다가오자 형법개정을 통해 시효를 10년 더 연장시켰고, 79년에는 아예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시킴으로써 단호한 의지를 과시했다.
프랑스 정부 역시 1964년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반인도적 범죄를 끝까지 추적․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단죄 의지는 몇몇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엔은 1968년 총회에서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시효부적용 협약’을 채택함으로써 시효부적용 원칙을 국제법적 원칙으로 만들어냈다.
우리가 반인도적 범죄를 비롯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시효를 배제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의지를 대내 외에 천명하는 일일 뿐 아니라, 국제적 인권흐름에 동참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중대한 범죄행위에 대한 시효배제 입법이 존재한다. 1995년 이른바 전두환 내란사건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제정된,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특별법’이 그 예다. 비록 ‘헌정질서파괴범죄’와 ‘집단살해죄’에 국한하긴 했으나, 시효배제를 명문화한 법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중대한 진전이었다.
물론, 공소시효 배제에 대한 논란은 존재한다. 법무부를 위시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공소시효를 배제해 이를 소급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서 규정한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5․18특별법 제정 당시에도 위헌논란이 있었고, 이에 대해 당시 헌법재판소에선 다수의 재판관이 위헌 의견을 낸 바 있다.
그러나 공소시효는 범죄의 가벌성 여부를 판단하는 제도가 아닌 소송조건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죄형법정주의와 소급입법금지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출발한 원칙이 거꾸로 반인도적 국가범죄행위들의 면죄부로 기능하는 현실은 사법정의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공소시효의 배제를 명문화하는 입법이 요구되고 있으며, 최근 사회단체들은 ‘반인도 범죄 등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국회에 입법 청원했다. 법안의 골자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고문 등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와 국제법상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고 △국가공권력에 의한 증거조작 및 은폐행위에 대해서는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시효를 정지하는 것 등이다.

이제 국회와 정부가 답할 때다. 인권과 정의를 올바로 세우는 작업이 더 이상 공소시효의 벽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관련 입법에 나서야 하며,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 또한 절실히 요청된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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