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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9.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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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의 중국⑤ - 마오쩌뚱의 유령

백승욱 | 편집자문위원, 한신대 교수
[{사회진보연대}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⑤

[연재순서]
1. 흔들리는 중국 (1·2월 합본호)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3월호)
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4월호)
4. 黑猫白猫: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6월호)
5. 마오쩌뚱의 유령 (본호)

마오쩌뚱의 유령

백 승 욱 (한신대교수, 편집자문위원)

최근 들어 중국에서 국유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행되면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함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여러 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자유주의 지향의 사회적 구조조정은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다. 중국을 취재한 한국의 한 방송사의 기획프로그램에서 중국 내륙의 한 농민은 개혁개방의 성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있는 놈들은 배 터져 죽고, 농민과 없는 놈들은 굶어 죽고"라는 말로 현재의 중국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기도 하였다. 떵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 이후 중국의 지도부는 이런 현실을 단지 과도기적인 상황으로 합리화하고, 현실의 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회주의론의 변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가 이론적 합리화에 의해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코포라티즘적 체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자본가계급까지 포함하는 집권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성격을 전화하려는 노력은 인민공사의 해체와 노동자 특권의 해체라는 코포라티즘적 토대의 와해와 엇물리는 것이어서 현실적 효과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기적 현실 속에서 중국 노동자들의 대응 또한 새로운 모습을 띠고 있는데, 올 초부터 발생한 동북 지방의 자생적 파업이 한 예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중국 중부 지역의 한 공업도시에서 중국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조직해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저녁 시간을 이용해 노동자 문화궁 앞의 광장에서 자발적 토론회를 구성하기도 하였고, 또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자체적 학습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한 이론적 준거가 마오쩌뚱의 후기 사상, 즉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뚱이 제기한 '계속혁명론'이었다고 한다. 계속혁명론이란 사회주의가 언제나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속적인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으로 중국의 문화혁명의 근거가 된 이론을 말한다. 중국 정부가 현실적으로는 중국사회주의 역사의 핵심적 측면을 부정하고, 그 속에서 단지 근대화론적 함의만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화의 근거인 떵샤오핑의 '4대 기본원칙' 중 하나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뚱 사상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이들 노동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역설을 이용해 현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파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고위급 간부가 파견되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이 지나가는 눈에 잘 띄는 길목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거기에 '마오쩌뚱 사상만세!'라는 구호를 적었다고 한다. 이 구호를 중국지도부가 어떻게 해석했을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뚱, 특히 대약진과 문화혁명기의 마오쩌뚱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오류로 거부된 입장이고,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 20여 년은 이런 마오쩌뚱의 입장에 대한 즉자적인 안티 테제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오쩌뚱의 '정치우위'가 떵샤오핑의 '경제우위'로, 마오쩌뚱의 '계속혁명론'이 경제성장을 우위에 놓는 단계적 발전론으로 대체되어 온 것이 그 일면이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거대한 사진 속의 마오쩌뚱은 분열되고 서방의 모멸을 받아온 거대한 중국을 소생시킨 국부(國父)이자 중국 경제건설의 기초를 닦아 중국을 강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위인으로 수용될 수 있을 뿐이며, 1950년대 말 이후의 마오쩌뚱은 잘못된 노선선택에 의해 중국을 적어도 10년 이상 퇴행시킨 오류에 찬 인물이라는 것이 중국정부의 공식적 평가이다. 이렇게 해서 마오쩌뚱의 현재적 위험은 제거되었다고 보고있었는데, 느닷없이 '마오쩌뚱 사상 만세!'라니, 마오쩌뚱의 유령이 다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인가?
지금 중국에서 다시 마오쩌뚱을 거론한다는 것, 특히 계속혁명론의 마오를 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마치 역사를 다시 과거로 돌리고, 현재의 삶의 수준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중국을 다시 폐쇄되고 낙후된 상태로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로 간주될런지도 모른다. 마오쩌뚱은 '죽은 개'일 뿐이다.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모든 오류는 마오의 이름으로 귀속되고, 현 체제의 발전방향에 대한 반대는 즉각적으로 마오노선으로 회귀하려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이분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도 마오쩌뚱 시기의 중국사회주의의 역사를 공식적 견해와 다른 관점에서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어기고 죽은 혼을 무덤에서 되살리려는 자에게는 '극좌파'라는 험악한 딱지가 붙을 뿐이다.
이처럼 20여 년 동안의 노력 끝에 중국지도부는 마오쩌뚱을 역사적 인물로, 죽은 개로 매장하는데 성공했다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오쩌뚱의 유령이 어두운 창 밖에서 흐릿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실내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마오 사후 1980년대까지 이따금씩 나타나던 마오의 유령은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유령은 죽은 자이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논쟁의 상대로, 그리고 수미일관된 입장을 지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해 어떤 다른 세력과 대면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죽은 마오쩌뚱의 계승자임을, 특히 공식적으로 비판되고 부정된 그 입장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다. 유령은 우리의 삶의 일정 속에서 예측 가능한 시간적·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되었고, 사망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선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것은 느닷없이 어느 한 도시의 노동자들이 내건 '마오쩌둥 사상만세!'라는 구호 앞에서 잠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중국의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사고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주장 속에서도 마오의 유령은 다시 등장한다. 마오쩌뚱의 사진을 택시에 달고 다니고 마오쩌뚱의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출판물의 붐을 이룬 '마오쩌뚱 열' 속에서도 소비주의의 팽배 속에서 나타나는 불안심리와 결합된 마오의 유령은 등장한다. 더 근본적으로 마오쩌뚱을 묻었다고 생각하고, 마오쩌뚱과 전혀 다른 방향의 발전노선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의 지도부들 앞에도 마오는 늘 나타나고 있다. 개혁개방 노선의 변천사는 마오가 던진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그에 이은 마오 유령의 재출현, 그에 대한 재부정과 재출현이 반복되는 과정이며, 중국의 지도부는 끊임없이 마오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유령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조차 그중 일부에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오는 여전히 없는 존재이고 사망한 존재일 뿐이다. 유령은 유령을 불러낸 자 앞에만 나타날 뿐이고, 한 번 나타난 유령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 유령을 불러낸 자를 언제 어디서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앞으로 마오의 유령을 보게될 목격자는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런지?
유령은 그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한풀이'도 하지 않았는데, 유령이 사라지겠는가? 마오의 유령이 나타나는데는 마오가 던진 어떤 문제들의 동시대적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은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성격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주로 문화혁명기에 제기된 것들인데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사회주의의 가역성 문제이다. 이는 마오의 이른바 '대과도기론'과 스탈린의 '소과도기론'의 대립으로 나타난바 있는데, 사회주의가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소련에서 제기한 소과도기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가역성의 가능성은 없다. 스탈린은 이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는데, 하나의 독자적 생산양식으로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선진적 생산양식이므로, 자본주의가 봉건제로 복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는 생산관계 측면에서 국가소유와 생산력 측면에서 과학기술 혁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주로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마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장기간의 과도적 시기로 간주하였고, 이런 이행기의 특성상 사회주의는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곧바로 연관되는데, 이런 가역성이 존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오는 복귀의 가능성의 근거를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적인 본질에서 찾았는데,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소유제'가 아니다. 소유제는 단지 법적인 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부르주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走資派)이 국가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인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전화의 실패인가, 생산력인가 등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마오는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대혁명기의 논쟁도 여기에 다중적 답변을 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일정한 정치적 분파의 문제인 것처럼, 때로는 '사상'(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구습에 가까운 것)의 문제로, 때로는 조직의 문제로 제기하기도 했지만, 다만 문제로 던져졌을 뿐 합의된 결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의 낙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사실상 문제를 영원히 이월하는 것일 뿐,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 질문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이행기의 가역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 하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라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사회주의를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선진적 엘리트들의 주도로 계획된 플랜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중정치와 대중참여, 그리고 대중의 자기전화에 초점을 둘 것인가라는 대립이 나타나게 된다.
마오, 그리고 마오가 중심적으로 얽혀있던 문화대혁명은 이 문제들을 다만 문제제기로서 던졌을 뿐 그 이상의 구체적 해답의 모색에서는 복잡하게 착종된 역사적 과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이는 때로는 마오의 모호한 정치적 결정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어쨌건 이처럼 미해결의 형태로 제기된 마오의 질문들은 마오 사후에 개혁개방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마오의 유령과 더불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고, 마오의 즉자적 안티테제로서 개혁개방의 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마오의 유령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체성 전환까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은 마오의 질문들에 대한 자기 부정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걸고서 그 이면에서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자기부정적 변화를 추동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최초의 탈마오적 시도는 마오 사후 후계노선의 정립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마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구어펑은 마오가 말한 것은 모두 옳고 마오가 내린 결정은 모두 지켜야 한다는 '범시론'(凡是論)을 들고 나와서 마오의 후광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지만, 이는 마오의 문제제기가 아닌 어록만을 글자그대로 수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근거로 한 반박에 취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립한 세력을 대표한 떵샤오핑은 이를 반박하면서 "실천만이 진리의 유일한 검증기준"임을 내세운 진리표준 논쟁을 촉발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선을 중심으로 정치지도권을 확립하였다.
탈마오적인 개혁노선의 정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오에 대한 평가와 마오가 주도한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연이은 두 단계를 통해 진행되었다. 먼저 정리된 것은 마오 개인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평가였다. 1981년 11기 6중전회(11기 전국대표대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된 "약간 중대한 문제에 대한 역사적 결의"에서는 마오에 대해서 1950년대 중반까지는 기본적으로 올바른 입장이었지만, 그 이후는 많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마오는 더 이상 동시대적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현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선고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에 대한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후 다음은 마오의 '대과도기론'에 따른 사회주의론을 부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980년대를 거쳐 그 이론적 결론이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으로 정리되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그 내용상 스탈린과 소련의 소과도기론 및 전인민의 국가론과 상당히 유사한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이는 또한 근대화론의 자유주의적 함의를 수용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인정하고 소유제 개조를 통해 계급이 철폐되었음을 주장하지만, 다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과정을 중국처럼 생산력이 낙후된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와 고급단계를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고급단계로, 그 다음 공산주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 이론의 요체였다. 떵샤요핑의 이론적 입장을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통해 마오의 사회주의론을 부정함으로써 개혁개방 하의 새로운 소유제의 도입, 외국 자본의 유치, 다양한 물질적 유인의 동원, 집단주의의 해체 등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1990년대 들어서 탈마오 과정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제출된 것이 1992년 14차 당대회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이었다. 등소평의 남순강화와 맞물린 시기에 제기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대외적으로는 초국적 기업을 필두로하는 해외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국유기업의 비중을 낮추고, 노동자에게 제공되었던 여러 가지 혜택을 없애며, 사적자본주의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의 골간을 계획경제적 방식에서 거시경제관리적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의 근본적 변화를 정당화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의미규정 또한 이에 따라 변화하여, 국유와 집체를 합한 공유제가 차지하는 절대적 비율의 우위를 주장하던 것에서 점차 그 상대적인 중요성의 유지 정도의 의미를 주장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의 의미가 축소되었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의 달성여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규정 변화 속에서도 중국을 스스로 사회주의로 칭해온 중요한 근거는 두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소유제적인 규정으로 공유제의 우위였고, 두 번째는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으로서 프롤레타리아당인 공산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양자 모두 법률적 규정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음에도,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이중 첫 번째 영역에서 근본적 전환을 모색한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국가권력의 성격과 공산당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탈마오화의 길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는 2000년 장쩌민의 '세가지 대표론'과 2001년 사영기업가 입당 허용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가지 대표론은 중국공산당이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런 세가지 대표론의 선진적 생산력이나 광대한 인민의 이익의 내용을 드러낸 것이 작년 7월 1일 장쩌민의 연설에서 나타났듯이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추진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마오의 유령은 중국의 지식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해석은 문화혁명의 대표적 피박해자로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발언의 공간을 개방하였고, 많은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의 즉자적 반대물로서 개혁개방의 탈마오화에 대대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이 1969년 이후 제도화된 정치켐페인으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공격의 목표가 국가와 당, 그리고 관리자에서 지식인들로 전환되었으며, 여기서 지식인들은 조직된 공격에 노출되어 사회를 아홉 계급으로 나눌 때 '냄새나는 아홉 번째'인 가장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격과 마오에 대한 비판을 입지의 강화기반으로 삼은 새로운 지도부들은 이런 지식인들에게 발언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또한 서구적 발전모델을 추종하고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가 복귀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발언권과 정책결정과 실행에서의 참여공간 또한 넓어졌다.
1980년대 중국지식인계의 논쟁을 주도한 것은 계몽주의였다. 이는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문제, 특히 문화대혁명의 문제를 계몽적 전통의 결핍으로 본 것이었는데, 이런 논의에서는 심지어 중국 사회주의를 '봉건적 사회주의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현대사는 국가를 구한다는 목표에 치우치면서 계몽이 무시됨에 따라 비극이 발생하였다는 논지가 그 대표적 입장이다. 이런 계몽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있는데,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적 인권 관념의 수립과 이런 자유주의적 기반을 건설하기 위한 시장의 도입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시장주의적 자유주의는 중국지도부의 입장과도 공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통해 자유주의의 정치적 희망이 좌절되면서 계몽주의는 새로운 분화를 겪게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더 보수적 입장으로 바뀌면서 중국 현대사의 비극의 뿌리는 '급진주의'에 있었다고 평가하고, 1919년의 5.4운동에서 문화대혁명과 1989년의 6.4에 이르기까지 점진주의적이지 않은 급진주의가 시대적 조건을 넘어서는 반계몽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이며 반지성주의적인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는 비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자유주의적인 최소한의 정치적 개혁에 대해서조차 점점 더 소극적이 되었고, 광범한 시장지향적 개혁을 통한 자유주의적 토대를 마련한 후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단계론으로 입장을 전환하고, 결국 이는 1990년대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게 된다. 자유주의자 중 일부 비판적 세력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자본주의 건설을 희망하지만, 신자유주의화 추세 속에서 이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힘을 싣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1990년대 인문논쟁을 거치면서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신좌파'라고 지칭되는 조류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을 네가지 정도의 논점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의 다양한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고, 도덕적인 자본주의관의 환상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면서, 이들은 현시대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자본주의는 배제와 양극화, 종속의 심화, 부패의 만연을 내장한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고, 제 3의 길은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두 번째로 중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중국사회주의를 근대적이지 않고, 근대에 도달하지 못한 '봉건적' 특성을 본질로서 지니고 있는 것임을 주장한데 반해 이들은 중국 사회주의는 아주 전형적인 '근대적 기획'이며,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반근대적 근대성'이라는 역설을 띠고 있으면서 결국 그 반근대성이 근대적 틀 속, 특히 발전주의라는 자유주의의 틀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20세기의 전체 세계사 속에서 관찰해야 함을 뜻하고, 또한 사회주의적 길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속에 매몰된 근거를 규명할 필요를 제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개혁개방기의 빠른 성장이 마오시기의 역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마오시기에도 가능한 것이었는지라는 문제를 던지고, 개혁개방 시기에 강하게 남아있는 마오시기 역사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네 번째로, 마오로 대표되는 중국의 반근대성의 요소에 대한 적극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등장한 다양한 적극적 반근대성의 요소들을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신좌파 세력 또한 아직 몇몇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고,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 또한 제한적이지만, 마오의 유령이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마오가 제기한 질문과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이들 주위에서 마오의 유령을 통해 중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보는 마오의 유령과 노동대중이 보는 마오의 유령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타났지만 점점 더 그 목소리가 닮아갈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일찍이 1959년 대약진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 개최된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한 평가를 놓고 펑더화이와 대립하던 마오는 대약진에 대한 반발이 심하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면 자신은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 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겠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 마오의 유령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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