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태일재단이 왜 굳이 조선일보를 선택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보수언론 및 경제지들의 악의적 프레임 씌우기, 의도적으로 보이는 왜곡 보도와 오보 문제가 분명히 있지 않나요?
그런데, 언론의 노동 보도에 대한 편향적 태도가 비단 한국의 조선일보나 경제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경제정책 변화에서 보수언론이 의도적으로 ‘반노동 프레임’을 만들어 유포하며 계급적 쟁점을 왜곡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해외의 사례 연구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연구로 자주 거론되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 미디어 그룹의 “나쁜뉴스” 3부작 연구(<나쁜 뉴스>(1976), <더 나쁜 뉴스>(1980), <진짜 나쁜 뉴스>(1982))를 볼 수 있습니다. 연구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과 관련해 언론이 어떤 여론전을 펼쳤는가를 자세히 분석합니다. 한편 미국의 1990년대 주요 파업에 대한 언론보도를 분석한 크리스토퍼 R. 마틴의 작업에서는 노동보도가 ‘소비자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프레임화되는 경향을 밝힙니다. 가령 이런 방식입니다. ① 소비자는 왕이다. ② 생산과정은 공적 사안이 아니다. ③ 경제는 위대한 사업가에 좌우된다. ④ 작업장은 능력주의다. ⑤ 경제적 집단행동은 나쁘다. 마틴은 이런 프레임을 통해 점차 미국은 ‘계급 없는 사회’라는 신화가 유포되고 공적 시민사이에서 ‘노동’ 쟁점은 점점 더 배제된다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노동 보도에 편파적인 보수언론의 문제는 해외에서도 저널리즘 비판이나 언론학 연구의 주요 논의 대상입니다.
언론운동 활동가·연구자들은 균형 잡힌 여론을 지향하는 언론의 공익적 역할과 배반되는, 노동에 불리한 편향 보도 문제가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이 문제가 왜 쉽게 개선되지 않는지 여러 원인을 분석해 왔습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두 가지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날의 언론은 사적 소유구조의 기업 형태로 운영되기에 자금의 제공자인 광고주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이로 인해 공익성, 객관성, 약자 보호 원칙이라는 가치를 배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즉 대부분 언론은 광고에 의존하고, 광고는 기업이 제공하기에, 기업과 갈등하는 노동자의 입장을 언론이 적절히 반영하는 데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뉴스 콘텐츠는 항상 그 언론에 돈을 조달하는 사람의 이익을 반영한다”, “정부가 아니라 광고주가 오늘날 언론의 일차적 검열관이다”, “광고주들이 저널리스트를 매수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게 하기보다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뉴스가 보도되지 않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와 같은 명제가 해외 선행연구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노동 보도와 관련한 언론의 ‘낮은 전문성’이 꼽힙니다. 노동은 정치, 경제, 행정, 조세 등 다양한 정책 분야에서 복잡한 이해당사자가 얽혀있는 ‘두꺼운’ 의제입니다. 따라서 이를 적확히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전문적 지식과 식견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이런 실력을 갖춘 노동 전문 기자는 소수고, 노동 분야의 이해도나 전문성이 높지 않은 기자가 다수기에, 노동 분야에 대한 다층적인 분석보다는 폭력이나 갈등 양상만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못한 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론운동 활동가·연구자는 결론적으로 노동 보도의 주체인 언론사와 기자가 위와 같이 노동 이슈를 다루는 데 있어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문제 해결을 사고해야 대안적 보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결론은 편향적 노동 보도 문제가 (언론사나 기자 개인의) 단순한 의지나 윤리의 문제를 넘는 차원에 원인이 있다는 진단이기에, 올바른 저널리즘 확립이 쉽지 않은 영역이라는 걸 확인해 주는 셈입니다.2. 그렇다면 자본과 보수정치세력과 결탁해 노동에 대한 왜곡 보도를 일삼는 보수언론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여야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수를 교대해 ‘언론전쟁’을 벌인 것으로 본다면, 현재 시점에서도 ‘정치세력–언론 간 후견’ 모델을 일부 보수언론에만 적용하는 언론개혁을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소위 ‘조중동’이 보수정치세력과 결탁해 있다고 한다면, MBC와 한겨레, 경향신문은 ‘친민주당 언론’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총선에서 이런 진보 진영 친화 언론이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기준과 잣대를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구체적 내용은 「총선 이후 정국전망, 누가 극단적 포퓰리즘을 견제할 것인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여름호를 참고하세요.) 친민주당 언론은 최근 노조법 2, 3조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친노동’을 표방하고 있지만, 동시에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 대한 불리한 보도는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파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진보-보수로 양분되어 객관성과 공정성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구도를 유지하며 보수언론의 개혁만을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한편 오늘날 언론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유튜브, SNS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에서 유포되는 ‘가짜뉴스’입니다. 글에서는 디지털 미디어로 인해 변화한 언론 환경 속에서 언론 스스로 증오와 혐오를 양산하는 가짜뉴스를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디지털뉴스리포트 2023」에 따르면 한국인의 53%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보고 있는데, 이는 함께 조사한 다른 46개국 평균의 두 배에 가깝게 높은 수치입니다. 한국의 정치 유튜브는 신문과 방송 뉴스보다 더 빠르고 넓게 대중의 생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는 147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실시간 10만 명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는, 민주당 강성지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SNS입니다. 모든 이슈를 민주당 편에서 해석하면서, 관련한 정치 선동을 위해 자극적인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발원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기, 김어준은 TBS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하차해 2023년 1월부터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과거 TBS 스튜디오와 방송 시간을 똑같이 만들기도 하며 스스로 명실상부한 ‘언론’임을 자임합니다.
강준만 교수는 “유튜브 효과”라는 정치현상을 비판하는데 “정치인들의 유튜브 발언이 다시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정치인들은 유튜브에선 구독자의 입맛에 맞는 자극적 발언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정치인들은 유튜브를 통해 구독자, 즉 팬덤의 감정과 분노를 자극하는 선정적이고 과격한 언사를 쏟아내고, 뉴스와 언론은 뒤따라 이를 보도하며 진영 갈등과 대립을 양산합니다.
나아가 진영 간 혐오 정서가 커지면서, 언론의 기본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사실 확인을 위한 기사조차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지지층을 빠르고 강하게 결집하는 효과를 누리려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정치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제재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회 수와 인지도만 높다면 오히려 기성 언론보다 더 자주 출연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정치인은 공익을 위해 선출된 공인입니다. 정치인이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유튜브에 출연하여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은 정치 유튜브가 유포하는 가짜뉴스를 공인된 사실로서 승인하는 효과를 냅니다. 결국 가짜뉴스는 언론이 보도하는 사실과 경쟁하고, 때로는 사실을 대체하여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각하게 방해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금 시기 사회운동이 주목해야 할 문제는 보수언론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언론 자체의 제자리 찾기’입니다. 3.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사회운동으로서 언론에 대한 ‘공적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글의 결론은 솔직히 어떻게 가능할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노동자운동이 어떤 언론관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필자의 아이디어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앞서 소개한 글래스고 연구그룹이나 미국의 노동 보도를 비판한 연구에서 보수언론 대응방식에 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론이 혹여 ‘진짜 나쁜 뉴스’를 보도한다 해도 이들을 원칙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선택지를 결론으로 두지는 않습니다. 즉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는 한, 그러한 언론사를 강제력으로 억압하거나 퇴출시키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만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다수 시민에게 보수언론의 행태를 상세하게 비판하고, 논쟁을 제기하며 노동의 입장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급적 쟁점을 제기하고 이와 관련한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 나은 언론대응 방식이라는 말이죠.
가령 보수언론이 ‘반노조’, ‘반노동’이라는 극단적인 프레임으로 노동시장 격차의 책임을 조직노동에만 전가한다면, 공론의 영역에서 논쟁하고 대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언론사를 배제하려고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언론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프레임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특정 언론 배제는 노동을 대표하는 공적 조직인 노동조합이 스스로 공론의 영역에서 노동 의제에 대한 소통과 설득, 담론화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보수언론의 취재에 응하거나, 기고를 하는 것도, 사회적 공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언론의 노동 관련 보도에 대해 느끼는 적대감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 본연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이슈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고,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때때로 언론은 노동운동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보도하거나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동운동의 불편한 약점이 밝혀졌다 해서 또는 노조가 원하는 대로 보도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언론보도를 ‘친노동’과 ‘반노동’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노동운동의 약점을 드러내는 언론의 비판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즉 노조 역시도 공적 감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론이 정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사관계에 있어 균형 있는 보도를 하라고 주문하려면, 노동조합 역시 공론의 장에 존재하는 책임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혁신을 논해야 할 이유
1. 진보당의 ‘민주진보연합’ 눈치 보기
사실 2021년 9월 진보당 정기대의원대회에 제출된 집권전략보고서는 ‘자력 원내 진출’을 강조하고 있다. 2024년 총선에서 진보의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 ① 50만 당원의 대중정당, ② 30% 노조 조직, ③ 175만 정도의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갖추자는 구상이었다. 노동운동 차원에서 이를 실현하고자 제출된 노선이 바로 ‘당 중심 노동운동’이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를 거절당했던 진보당으로서는 자력 원내 진출을 어느 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성희 의원이 ‘고맙습니다. 민주당’ 구호를 내걸고 선거운동을 한 것이나, 당선 직후 처럼회 가입을 시도한 사례에서 확인되듯, 진보당은 가능하다면 언제든 야권연대를 시도해왔다. 이런 점에서 진보당의 ‘자력 원내 진출’이란 독자적 정치세력화로의 노선 변경이라기보다는 상황 논리상 자력 진출을 고려한 것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력 원내 진출, 민주진보연합 두 가지 선택사항을 열어두고 당의 정상(正常)화를 기획한 것이다.
2023년 12월 21일 민주노총 주최의 ‘2024년 총선에서의 진보진영 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대표는 민주진보연합 구상을 공론화하고, 2024년 1월 23일 연합정치시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비례위성정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앞서 2023년 12월 6일 진보당은 정의당의 선거연합정당(정의당을 플랫폼으로 한 민주노총 및 진보4당의 선거연합정당) 제안을 거절하며, 민주진보연합을 함께 추진하고 있던 진보정치연합 원탁회의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12월 12일에는 민주노총, 진보4당은 물론 기본소득당과도 선거연합을 논의할 수 있다며 ‘최대 진보’를 역제안했다. 같은 날 광주와 부산 등에서 신야권연대로 총선을 승리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전을 펼쳤다. (광주에서 “내년 총선, 반윤 범야권연대 필요하다”, 부산에서 “신야권연대로 총선 승리하겠다” 등) 야권연대로 총선을 치르겠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1월 8일 김준우 정의당 대표와의 좌담에서 윤희숙 진보당 대표는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이 절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라며, 민주당과 비례연합정당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흘렸다. 1월 23일 연합정치시민회의가 비례연합정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2월 5일 이재명 대표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내고 더불어민주당이 통합비례정당을 본격화하자, 2월 13일 진보당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진보연합을 공식화한다. 2020년과 달리 더불어민주당이 진보당에 통합비례정당 참여를 열어주자, 민주진보연합을 통한 원내 진출로 총선대응 방침을 확고히 한 것이다.2. 하이퍼 위성정당과 의회민주주의의 파괴
첫째, 민주당이 통합비례정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정당 지지율 이상의 의석을 비례대표로 얻을 수 없었으나, 통합비례정당을 통해 소수정당의 몫을 가로챘다는 점(161석에서 169석)에서 애초부터 분점이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더불어민주연합과 통합하면서 시민사회 당선자 2명이 추가로 입당해 민주당은 더 많은 의원(171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지역구 격전지에서 진보당 후보를 일괄 사퇴시켜 민주당으로 표를 쏠리게 하여 추가 당선자를 얻도록 도왔다는 점에서도 분점이라 보기 어렵다. 심지어 노동자 밀집 지역인 울산 동구와 창원 성산에서 민주당은 단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었는데, 진보당의 양보로 사상 첫 당선자를 냈을 정도다. 만일 지역구 격전지에서 진보당이 독립정당답게 모두 후보를 냈다면 더불어민주당이 161석 전부를 온전히 얻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덕분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대권가도는 물론 사당(私黨)화에 필요하면 언제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소수정당을 거느리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기본소득당과 진보당은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방어하는 데 어느 정당보다 적극적이었다.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두 당의 위성정당 참여를 보장한 것은 이들 당의 생환, 생명 연장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기본소득당과 진보당이 이재명 민주당과 명운을 함께 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진보당은 더불어민주연합이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보다 더 자율적인 ‘준(準)’위성정당이라고 강변했지만, 결과적으로 더불어민주연합은 국민의미래보다 더 확실히 위성정당의 역할을 했다. 준(準)위성정당이 아니라 하이퍼(hyper), 즉 최고 수준의 위성정당 기능을 한 것이다. 민주당이 소수정당과 비례의석을 분점한 것이 아니라, 진보당과 기본소득당이 민주당의 국회의원 독점에 기여한 것이고 그 일부를 수혜로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진보정당, 독립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어주고 ‘민주당 이중대’라는 오명을 남기면서 말이다.
이재명 민주당의 국회의원 독식 행위는 의회정치,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더더욱 조장할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의 원내 일당 목표가 의회주의의 진전, 시민권의 신장, 민주주의 제도의 안착화에 있는 게 아니라 사당화, 즉 본인을 포함한 민주당 주요 인사의 사법리스크 관리, 정권 흔들기에 이은 정권 탈환에 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국회의원 3석을 얻어 당의 정상화를 이루었다고 자평할지 모르지만, (기본소득당과 함께)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선거제도를 기망하고 민주당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일조한 행위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3.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 무력화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민주노총 총선방침 4항(위성정당 참여 금지)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1항(진보정치세력 연대연합)과도 충돌한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결정 사항 위반이기도 할 뿐더러, 2020년 총선 당시 민주노총이 민주당 위성정당에 참여하려 한 녹색당 지지를 철회한 전례를 보아도 진보당 지지를 철회해야 했지만, 민주노총 집행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은 진보당 지지 철회를 단호히 결정해야 한다」, 《사회운동포커스》, 2024.2.22.)
2024년 2월 15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및 3월 4일 속개된 같은 회의에서 진보당 지지를 철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위원들은 더불어민주연합은 연합정당이지 민주당의 위성정당이 아니라며 진보정당 국회위원의 원내 진출은 조합원의 염원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들은 돌연 녹색정의당 후보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후보나 지지후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녹색정의당이 더불어민주연합 참여는 거부했지만, 지역구에서의 선거연합 즉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열어두었다는 게 구실이었다. 진보당에 관용을 요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도리어 정의당에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민 것이다.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이후 열린 민주노총 80차 대의원대회(3월 18일)에서도 같은 논란이 반복되었다. 진보당을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다른 세력과 한시적, 제한적으로 연대연합하는 것을 이유로 민주노총 지지정당에서 제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며 민주노총의 녹색정의당, 진보당, 노동당 지지를 확인하자는 수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은 상정 자체가 부결되었다. 위성정당을 비롯한 보수양당 지지를 금지한 77차 대의원대회(2023.9.14.)의 결정을 2024년 총선 사업계획에 명시하자는 수정동의안도 발의됐다. 발의자는 이는 재확인에 불과하기에 표결 없이 의결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장이 이 안을 수용하지 않고 표결을 강행하자, 표결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집단 퇴장하며 대의원대회는 유회되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 대대 유회, 진보당 지지 철회 여부를 놓고 격론」, 《사회운동포커스》, 2024.3.19.)
연이은 중앙집행위원회 회의(3.21.)에서도 같은 논란이 반복되었다. 결국 노동당 후보만 민주노총 후보로 인정되고 진보당은 물론 녹색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민주노총 후보가 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민주노총 총선방침이 무력화되면서 가맹산별조직들은 독자 행보를 하게 됐다. 진보당을 지지하는 서비스연맹과 민주일반노조는 진보당 지지 활동을 하고, 공공운수노조와 화섬노조,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진보당 지지를 철회하거나 (녹색)정의당하고만 정책협약을 맺는 등 민주노총 가맹조직이 각자 총선대응을 하였다.
진보당은 당의 생존을 위해 민주노총 총선방침을 무력화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을 정치적으로 분열시켰다. 4.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위기와 민주노총의 상대화
민주주의는 제도와 규칙을 어떻게 마련하고 운영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제도와 규칙을 무시하고, 집행부 입맛대로 해석하고 다수의 논리로 집행하려 들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 최고 의결기구인데, 그 결정을 위원장이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정파의 이해를 앞세워 이른바 ‘대중조직 논의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는 ‘당 중심 노동운동’이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민주노총의 위상 역시 실추됐다.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유보하는 ‘선례’ 뿐만 아니라, 진보당 지지도 진보당 지지 철회도 결정하지 못하는 ‘선례’ 또한 남겼기 때문이다. 정치·총선방침을 결정하고도 민주노총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총선방침이 무력해지며 2023년 정치·총선방침 논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민주노총 주도의 선거연합정당 논의마저 사실상 중단될 것이라,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에 관해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총선에서 가맹산별조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개별적으로 정치 행보를 했다. 진보당 지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지지 활동을 했다. (「서비스연맹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 지지 선언」, 2024.4.2.) 반대로 진보당 지지 철회를 촉구했던 산별·지역본부와 위원장, 본부장은 정의당과 노동당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화섬과 공공운수노조는 각각 대의원대회(2.23.)와 중집(3.6.)을 열어 진보당 지지를 철회했다. 금속과 보건은 정의당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위성정당 거부와 올바른 노동자-민중의 체제 전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당·노조·사회운동 공동 기자회견」, 2024.4.3.) 공공, 금속, 화섬, 보건은 녹색정의당과 산별교섭 법제화를 위한 정책협약식을 맺기도 했다. (「초기업·산별교섭 제도화를 위한 노조법 개정 요구」, 2024.4.3.) 그리고 이 혼란의 와중에 사무금융노조는 중집(3.20.)을 열어 민주당 국회의원 23명 지지를 선언했다. 총선방침이 무력해지자 민주노총은 사분오열했다.
총선 평가를 두고도 갈등이 지속했다. 총선 직후 열린 4월 22일 대의원대회에서 진보당을 진보정당에서 제외하자는 수정동의안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됐다. 5월 21일 중앙위원회에서는 ‘총선방침 불이행, 민주노총 후보를 위한 선거투쟁의 방기, 총선평가안 미제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및 조합원의 민주당 지지 선거운동 방치’를 이유로, 정치위원장 서리(대행)의 책임을 물어 그의 인준을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가까스로 인준되기도 했다. 2024년 11월 27~29일에 열릴 민주노총 정책대회(창립 30주년 사업)에 총선 평가 및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향에 대한 토론도 예정되어 있어 갈등과 논란이 지속할 전망이다. 이는 현 양경수 집행부의 지도집행력을 훼손할 것이고, 총연맹의 위상을 상대화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5. 진보당의 ‘민주진보연합’, 진보정치의 초석을 다졌나?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신조어가 돌만큼, 더불어민주당의 이번 총선 후보 공천은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전략인 이른바 ‘반윤석열 세력연합’보다는 ‘이재명 사당화’에 충실했다. 더불어민주연합에서의 더불어민주당 후보공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위원 투표를 거치지 않고 전략공관위 심사로만 후보를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재명 사당화’가 목표였던 만큼 더불어민주연합에 조국과 그의 세력이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 조국은 반윤석열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이재명 사당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2020년에 진보당 전신인 민중당의 위성정당 참여를 거부했던 것과 달리, 2024년에는 진보당의 참여에 문호를 열었다. ‘통진당 논란’을 재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정하게 시간이 지난 데다가 ‘반윤석열 연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려면 소수정당도 어느 정도 참여시켜야 했다. 더구나 진보당은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방어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재명 민주당을 비난하며 떠나는 민주당 국회의원(특히 이낙연)을 향해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친명보다 더 친명처럼 굴어왔다. 이는 기본소득당 역시 마찬가지다. 노선과 방침에 근거한 연합이 아니라, 다수당은 사당화가, 소수당은 생환이 목표인,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선거연합이었다.
진보당 역시 이런 목표에 걸맞게 선거연합을 추진했고, 이재명 민주당의 후보 교체 요구를 수용했다. 울산 북구 1곳을 양보받는 대신, 자력 진출을 대비해 출마를 결의했던 지역구 후보 85명 중 68명(79.1%)을 용퇴시켰다. (진보당이 선거연합과정에서 보인 야권연대 행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 지지정당에서 진보당은 삭제되어야 한다」, 《사회운동포커스》, 2024.3.28.)
진보당은 이런 방식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비례대표 2명뿐만 아니라 지역구 1명(울산 북구)도 자력이 아니라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당선된 만큼, 진보당은 ‘이재명 민주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될 것이다. 진보당이 나중에라도 독립정당으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치양극화와 정치적 부족주의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그 어느 세력보다 ‘우리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견지하는 이재명 민주당과 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합으로 진보정치의 목표인 노자 계급관계의 역전은 불가능할 것이며, 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확대를 기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겠다.
이번 총선은 특히 더 폐쇄적이고 방어적이며 우리가 아닌 집단을 적대하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폐해가 나타난 선거였다. 2022년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 탓에 이재명 후보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열렬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한 악선동으로 일관했다. 사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 정서 탓에 ‘민주당 이중대’라 불리던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도 2.37%로 급락했지만,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아니라 심상적이 획득한 2.37% 탓에 윤석열 후보가 0.73% 차이로 당선됐다고 봤다. 총선에서 대승하고도 이재명의 열렬 지지자들은 서울 마포갑과 도봉갑에서 국민의힘 조정훈과 김재섭이 당선된 것이 녹색정의당 김혜미 후보(마포갑 2.0%)와 윤오 후보 탓(도봉갑 3.0%)이라며 맹비난했다.
접전이 예상되는 지역일수록 ‘이재명 민주당’은 민주당 편에 설 수 있는 소수정당의 독자진출을 억제하려 할 것이고, 이재명의 맹목적 지지자들 역시 난폭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정당의 자력 진출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진보당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위성정당을 통한 소수정당 줄 세우기의 힘이다.
진보당이 이재명 지지자들의 난폭한 행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진보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에서 국민의힘이 당선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던 덕이었다. 이는 진보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선거연합이 철저히 조율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장 몇 석이라도 얻겠다는 눈앞의 실리를 택해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지 않고 그들에 기대어 당의 생환을 보장받으려 했던 진보당이,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는가?
물론 스스로 주장하듯 진보당은 민주노총이라는 조직 기반이 있고, 정의당보다 지역 기반도 더 탄탄해 지역구 선거에서 더 좋은 성적을 냈다. 이를 근거로 자립이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것인데, 진보당이 작위적으로 선거연합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그 기반을 다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2020년의 실패 이후 선거연합으로는 원내에 진입하기 어렵다고 느낀 진보당이, 자력당선을 위해 내세운 노선이 당 중심 노동운동이다. 미조직 사업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민주노총 수권조직이 되어 다수파로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고자 민주노총 중심의 선거연합정당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2024년에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을 무력화함으로써 그나마 기대려 했던 자력당선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꼴이 됐다. 이는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과 진보정치세력의 단결을 뒤로 한 채, 당장의 실익을 위해 민주진보연합을 선택한 결과겠다. 6. 정의당의 원내진입 실패,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의당은 녹색당과 선거연합을 했지만 ‘지민비조’ 바람 앞에서 무기력했다. 2023년 7월 이른바 ‘새진보’로 불리던 당내 분파가 이탈하고, 류호정 의원 등 당내 ‘제3지대’로 불리던 분파도 이탈한 데다가, 지역 기반이 너무도 취약해지면서 역대 가장 적은 지역구 후보자를 냈다(2016년 51명, 2020년 75명, 2024년 17명). 조국이 ‘노회찬의 길을 가겠다’라며 정의당 비례후보였던 신장식을 영입하고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하고 제3당이 되겠다’라고 선언하자, 정의당 당원 중 일부는 탈당하기도 했다.
녹색정의당은 보건의료노조 전 위원장이었던 나순자 후보를 영입하고, 민주노총 전현직 임원, 간부들과 함께 노동본부를 구성하여 늦게나마 노동조합 지지를 얻기 위해 노조 간담회를 조직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터라 조합원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진보당과 달리 독립정당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자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거부했지만, 독자적인 정강을 세울 여력도, 돌아선 시민들의 표심을 되돌릴 방책도 없었다. 정의당은 부정적 여론에 압도당했다.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했던 202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이중대’라는 시민들의 비판 앞에서, 2024년 총선에서는 반대로 윤석열 당선에 기여했다는 비난 앞에서 참패를 반복했다.
민주당과 공수처법-선거법 패스트트랙 공조까지 하는 등 정의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를 늘리고자 2019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에 당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사이 민주당은 진보정당, 시민운동, 노동조합의 이슈와 정책에서조차 자신이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적응전략’에 성공했다. 독자적 이념과 정강정책이 본래도 취약했지만 진보정당 고유 의제라 여겨졌던 노동, 여성, 환경마저 민주당에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다.
게다가 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선거법을 개정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이 난립하면서 과거 병립형 비례대표제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양당이 얻은 비례대표 의석수는 병립형으로 환산해도 결과가 거의 같았고, 도리어 위성정당 혹은 비례전문정당의 등장으로 소수정당의 독자적인 정치적 성장 가능성만 제거됐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왼쪽에서 지지층을 확대하려는 전략마저 조국혁신당의 등장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단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하고, 민주당 왼쪽에서 선거법 개정으로 진보정당의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정의당의 시도는 최종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7. 조국혁신당의 등장, 노동운동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조합원 다수가 이번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을 지지한다면, 더 정확히는 그런 경향이 지배적이라면 민주노총은 어떤 정치세력화 전략을 구사해야 할까?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우리가 더 정권 심판을 잘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검찰 독재’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불통, 독단, 불공정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감정에 더 강력히 호소하는 것이다.
민주당과 반윤석열 선거연합을 한 진보당은 물론, 정의당도 ‘정권심판 정의롭게’ 구호를 통해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는데, 조국혁신당에 비하면 특별히 효과가 있지 않았다. 이 같은 방식은 이재명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같은 인민주의자를 당할 재간이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86세대와 97세대의 공감대, 즉 보수정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운동권에 대한 부채감, 사법체계에 대한 불만을 자극해 자신의 정적에 대한 부정적 정념을 만들고, 원한의 감정에 휩싸인 대중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고, 그렇게 대중을 정치적으로 소비해 권력을 누리고 행사하는 데서는 민주당 인민주의자들이 누구보다도 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에 설득돼 정념에 휩싸인 대중은 이재명 대표나 조국 대표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들의 죄가 ‘멸문지화 당할 정도의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 그의 부인 김건희 씨를 상대로는 ‘탄핵’, ‘특검’을 요구하며 사법적 처분 그 이상이 가해지길 바란다. 같은 진영에 대해선 사법적 관용을 구하지만 상대 진영에는 사법적 엄단을 촉구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지만, 대중의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정치 양극화의 토대이고, 인민주의자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고 반복되면 대중의 합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정치 자체가 불능에 빠진다. 이것이 오늘날 인민주의가 야기할 정치의 미래다.
시민권의 경계를 확대하면서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증대하고, 갈등과 모순을 분석하며 노동자와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성장을 통해 대안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회운동(노동운동)이, 대중을 대상화하고 정치 자체를 불능에 빠뜨릴 인민주의 전략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운동은 인민주의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 반보수전선 구도에 갇힌 채 민주당, 조국혁신당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자체를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인민주의자가 보여주는 행태, 즉 첫째, 경제적 제약을 무시한 채 선심성 정책을 앞세워 대중을 기망하는 행태, 둘째, 검찰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겠다며 사법부 독립의 원리를 흔들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태, 셋째, 정권의 유지와 찬탈을 위해 외교 사안까지 정치화하는 행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런 비판은 고사하고 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이재명 사당화 행태조차 온전히 규탄하지 않았으니, 조국혁신당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조합원이 이번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운동 탄압하는 윤석열 반대’ 이상의 정치활동이 없었음을 방증한다. ‘민주당 비판’, ‘인민주의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민주당을 친자본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보수양당 반대 즉 국민의힘도 반대하고 민주당도 반대한다는, 원론적 수준의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런 반대는 사문화된 선언 즉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민주당을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민주당이 어떻게 여론을 호도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치의 근간을 흔드는지’를 반박하고 조합원과 토론할 수 있어야, 조국혁신당과 같은 인민주의 정당, 친민주당 비례전문정당의 출현에 흔들리지 않고 진보정치를 일궈나갈 수 있다. 인민주의가 어떻게 사회운동을 타락시키는지 간부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토론해야, 노동운동 스스로 인민주의를 인식하고 경계할 수 있다.8. 민주노총 주도의 정당 통합 논의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2017년 2월 7일, 박근혜 탄핵과 함께 곧 닥칠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정치세력화 논의가 불붙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민중경선을 통한 후보전술, 2018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자’라는 안을 마련해 대의원대회에 제출했지만, 5개나 되는 수정동의안이 발의되었고 그 중 어느 안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원안마저 35.1% 찬성만을 얻어 최종 부결되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선거연합정당 논의가 또다시 좌초한 것이다.
2023년 4월 24일, 이번에는 전국회의 주도로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 논의가 개시되었다. 양경수 집행부는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자며 2024년 총선에서는 선거연합정당을 만들어 공동대응하자는 골자의 안을 제시했다. 허나 이른바 진보4당 중 진보당만 찬성하는 선거연합정당안이 수용될 리 만무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4.24 임대에 상정될 정치방침·총선방침은 민주노총의 분열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운동포커스》, 2023.4.17.) 결국 논의는 하반기로 미뤄졌다.
논란을 거듭하며 밤샘 토론을 반복하다 9월 14일 77차 대의원대회에서 극적으로 최종 합의안이 마련된다.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되 2024년 총선이 아니라 2026년 지자체 선거 공동 대응을 목표로 한다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사회진보연대는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는 것에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9·12 중집 최종안, 무엇이 문제인가?」, 《사회운동포커스》, 2023.9.13.) 2024년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가 대의원대회 방침 위반이라는 견해가 나온 것은 전년의 77차 대의원대회가 채택한 총선방침에 보수양당에 대한 지지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 정치·총선방침도 진보당이 진보정치 세력과의 연합보다 더불어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밀어붙이면서 사실상 무력화됐다.
2012년 8월부터 2023년 9월까지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 ‘선거연합정당’ 주장이 무려 세 차례나 반복되었지만,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거나 그나마 합의된 방침마저 파기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 그런가?
표면적으로는 2012년 이후 진보정당이 각개 약진한 현실이 있는데 특정 세력이 이를 백안시한 채 민주노총 중심의 선거연합정당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라는 갈등과 분열의 역사가 있고 이에 대한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논의가 실패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선거연합정당의 당위를 앞세우는 측과 그런 갈등과 분열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전제해야 한다는 측 사이의 선거연합정당을 둘러싼 논쟁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처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 빠져있거나 과소하게만 다뤄진다.
조합원 100만 시대를 열었다고 하지만, 민주노총의 계급대표성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공공기관·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는 것에 비해 격차 축소를 위한 노력은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민주노총 스스로 이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다.
단적으로 가맹산하조직의 임금투쟁 요구의 기준이 되는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조차 공공기관·대공장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임금인상 목표를 정함에서 본래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노동소득분배 개선치를 고려했으나, 이렇게 산정된 안이 공공기관·대공장 정규직의 요구에 못 미치자 임금격차해소분(2021, 2022), 실질물가폭등 반영분(2023), 격차 보전분(2024) 등 온갖 명목이 추가돼 목표치를 높였다. 임금인상 정액요구안의 산정방식을 바꾼 것이다. 임금인상 정액요구안이 고임금 집단의 임금인상 요구액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임금격차가 그만큼 큼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외면하고 산정방식을 고임금 집단에 맞게 바꾸었다. 저임금 집단에게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은 너무 높아 실현 가능성 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격차 해소 방안 만큼은 민주노총이 능력만이 아니라 의지조차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전체를 대표해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교섭 채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최저임금위원회처럼 일부 의제에서만 목소리를 낼 뿐이다. 노동자를 대표해 정부와 교섭하는 창구가 없다 보니, 민주노총은 민주노총대로 그 역할을 매개할 수 있는 정당에 의지하게 되고,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간에 정당에 의존하는 형태로 총선에 개입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노사정 교섭에 대한 민주노총의 부정적 기억을 단숨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허나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노사정 교섭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 있는 의견수렴 절차 문제를 풀기 위해, 노조 내 민주적 토론 문화를 갖추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노사정 교섭에 필요한 민주노총의 리더쉽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일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장구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은 이 문제를 아예 외면하고 있다.
노동시장 격차 축소를 위한 정책, 노동자를 대표하여 노동시장을 개입할 수단이 전무한 상황에서 민주노총 정치활동은 아예 이재명 민주당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대한 맞불 놓기인 민주당의 ‘검찰 독재’ 프레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는, 양회동 열사 투쟁을 계기로 정권퇴진투쟁에 조직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조차 윤석열 정부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여 반윤석열 정서를 고양하려는 도구,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민주당의 의도가 드러났음에도, 민주노총은 이를 명확히 비판하기보다는 반정권 투쟁의 근거를 늘리는 데 그쳤다.
민주노총의 통일운동은 북한 핵무장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일체 없이 반미(반제) 자주 투쟁만을 강조한다. 세계 비핵화란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는 논리인데, 양경수 집행부는 세계 비핵화가 민주노총 과제여야 한다며 2024년 사업계획에 이를 명시하기도 했다. 2023년에 발간된 민주노총 통일교과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이 아니라 돈바스 지역 해방과 미국의 나토 동진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임을 강조하며 러시아를 변호하고 있다.
취약한 계급대표성, 민주당과 변별되지 않는 정치활동, 북한의 핵무장과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 등, 오늘날 진보정치를 이루기 위해 갖춰야 할 요건 중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사회운동 주체로서 민주노총이 어떻게 계급 대표성을 제고할 것인지, 어떤 이념적 지향을 표방하면서 독립적인 사회세력으로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지 민주노총 스스로 준비된 대답이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내셔널센터로서 맡은 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9. 진보정당 운동의 한 순환 마감, 노동운동과 정치운동 혁신의 길
민주노총 정치세력화 운동의 한 순환도 마감되었다. 분당 이후 민주노총은 ‘노동 중심’, ‘제2의 정치세력화’라는 명명으로 정치세력화 운동에 새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지만,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다.
11년 만에 정치방침을 세우고 우여곡절 끝에 총선방침까지 수립했지만 1년도 채 안 되어 민주노총은 이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민주노총은 정의당도 진보당도 지지하는 정당임을 확인하지 못했고,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라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위원회, 대의원대회 등 민주노총 주요 의결단위는 파행을 거듭했고, 당분간 파행이 지속될 공산이 크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양경수(전국회의) 집행부가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다가,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가입을 무리하게 방어하다 생긴 문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주노총이 노동자를 대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스스로 진단하지 않고, 계급적 대표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다.
진보정당 역시 표면적으로는 당장의 당의 생환을 위해 선거법 개정에 올인(all-in)하다가 그나마 있던 지지 기반조차 잃고 원외정당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도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이 하나의 독립된 정치세력으로서 진보정치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정치양극화 시대, 진보정당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는데, 정의당이나 진보당이나 모두 민주당 왼쪽에서의 전략(‘전략적 야권연대’)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오판해, 정치양극화 문제를 타개할 정치전망을 스스로 세우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급격한 정세 변화, 인민주의의 득세와 이념적 혼란의 가중 속에서,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이 대안세력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적 전망을 갖추려는 노력 없이, 당장의 정치 일정에 급급하여 합종연횡을 반복한다면, 어떠한 해법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당장 전망을 세우기 어렵다 해도, 적어도 오늘날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만큼은 냉정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자신의 당면 과제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마땅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반핵평화의 기치를 지켜야 한다.
사회세력으로서 민주노총은 민주당의 인민주의를 비판하면서 계급대표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선행하고, 진보정당은 독자적인 이념과 한국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정당운동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자신의 사회적 표상을 재구축할 수 있어야 진보정치의 길이 열릴 것이다. ●
"노총 차원의 교섭이 있어야 진보정당도 대중 투쟁과 제도권 투쟁을 결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
"정의당의 패배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함께 가는 구조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 "민주연합 노선과 정확히 선을 긋고 갈 기회를 실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