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월례포럼 때 논의되었던 것을 정리했습니다. 간략하게 나온 이야기들을 논지에 따라 스케치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지난 4월 1일 진행된 여성위원회 1차 월례포럼 발제문입니다. 주제는 '여성의 의회진출, 어떻게 볼 것인가?'였고, 간략하게 발제문을 제 출했습니다. 이 글은 월간사회진보연대 4월호 정세초점에 실릴 것입니다.
서명도 많이 받고 서명받으면서 만약 발의안을 상정한다면 무엇을 요구하 고 싶은지에 대해서 이야기나눠봅시다. 개인의 삶의 요구가 정치적 요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날 만민공동회에서 같이 이야기해보자고 하면 좋을 것 같습 니다.
정치적 권리 탄압 중단하고 연행자를 즉각 석방하라 ! 오늘 4월 2일 전교조 충북지부장, 경남지부장에 이어 원영만 위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백주대낮에 노상에서 불법 폭력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은 체포영장도 제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영만 위원장의 출석 요구 시한도 지나지 않았다. ‘탄핵 무효, 부패정치 청산, 진보적 개혁정치 촉구 교사선언’ 행위와 인터넷에 민주노동당 지지방침을 밝힌 것이 국가공무원법,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또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지난 3월 23일 “업무상 정치적 중립은 철저히 준수할 것이나 공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사상과 신념의 자유까지 부정을 당하는 '정치적 중립'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온 몸으로 저항할 것이다”라고 결의하며 민주노동당지지를 선언한 것에 대해서도 선거법 위반이라며 공무원 노조 지도부 수사 착수에 들어갔다. 부패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정치권력 창출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지배정치권을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의 정치적 열망은 현재 한층 고조되어있다. 비정규직, 실업, 빈곤 등 노동의 위기와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로 고통 받는 민중의 생존 위협에 책임을 묻고자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는데 직장,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는 정치의 자유와 참정권을 공무원, 교사 직분의 ‘정치적 중립의무’라는 이름으로 침해하는 것은 정권의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강제하고 나아가 공무원, 교직원 노동조합의 활동 자체를 탄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의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선거에서 투표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제한될 수 있는가. 총선을 앞두고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진보적 개혁정치’를 만들어갈 것을 교사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것도 정치의 자유를 가진 국민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다. 직분을 이유로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착오적인 선거법 조항에 저항하는 정치적 권리 쟁취를 위한 노동자운동을 정부는 더 이상 탄압하지 말라. 정부가 계속 대대적인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민중의 정치를 염원하는 민중운동의 강력한 저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더 이상 미룰수 없다! - 송두율 교수 실형 선고를 규탄하며- 한국정부는 37년만에 귀국한 송두율 교수를 결국 징역 7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는 국정원과 공안검찰의 확신을 '예단'하여 인정하였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송교수가 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해왔던 것이 사실은 황장엽의 '카더라' 식 진술과 1999년에 망명하였다는 독일 북한이익대표부의 김경필의 디스켓 문서밖에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 심리과정에서 드러나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스스로 밝힌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 정치국 후보위원이 했다는 지도적 임무라는 것이 결국은 책을 써서 남한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뒤집어 버렸다. 또한 재판부는 송교수가 '경계인'을 가장하여 북한 체제에 경도된 주장을 객관적인 것인 양 위장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음으로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이 대목은 국가보안법이란 것이 사법당국의 자의적인 잣대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권 법률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정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다시 한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전국공무원노조의 정치적 자유 선언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최근 전국공무원노조(이후 전공노)가 공무원의 정치활동 보장을 선언하면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정치적 중립성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예의 공무원의 정치 중립을 운운하며 전공노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혹시라도 이를 빌미로 공무원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에 나서려는 것이 아닌지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번 기회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 내용이 과연 국민으로서 당연히 갖는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및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은 기본권적 권리로서 참정권과 정치적 의사결정 및 표현의 자유를 당연히 가지며 공무원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중립과 선거 중립을 구분해 사고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정이 아니라 선거 사무에서의 공정성과 중립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단순히 문구의 해석으로 정치적 중립 그 자체로 해석한다면 명백한 오류이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정치적 권리와 공무원의 중립을 규정한 두 규정은 서로 상충하게 되며, 그럴 경우 자연법적 상위 개념인 국민의 참정권적 기본권으로서의 정치활동 자유의 규정에 의하여 하위적 구조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표시한 헌법 규정은 당연히 위헌의 요소를 내포하게 되며, 문구를 바꾸던지 해석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정권의 하수인으로 이용하기 위해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구시대적 낡은 사고로 또다시 공무원노조의 정당한 요구를 탄압한다면, 또한 이를 빌미로 공무원노조운동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현 정부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와 민중세력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권의 탄압을 뚫고 공무원 노조 건설과 노동3권 쟁취의 한길로 매진해 온 전공노의 일련의 활동과 정치활동 자유 선언은, 그동안 보수적이던 공무원 사회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 냄은 물론이고 사회의 진보를 위한 민중운동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의 투쟁속에서 공무원 스스로 자신들의 노동자성을 인식하고 노동자운동의 일주체로서 당당히 성장해 온 전국공무원노조의 투쟁에, 사회진보연대는 동지적 연대를 표명하며 정권의 탄압에 함께 맞서 강력한 공동 투쟁을 결의한다. . 투쟁속에 성장하는 전국공무원노조! 공무원의 정당한 정치활동 보장하라!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쟁취하자! -2004. 4. 1-
17대 총선에서 여성운동진영은 여성들을 국회로 보내기 위한 운동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여성들의 과소대표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공적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는 예전부터 많은 여성운동들의 동인이 되어왔다. 이에 따라 많은 여성운동 진영은 여성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 여성 정치인 발굴, 여성할당제 시행 등을 자신의 주된 과제로 삼았다. 이들의 운동 방향은 정부의 정책으로 수렴되기도 했는데, 여성특별위원회 시기에는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라는 과제로 여성부 건설 이후는 "정책결정과정에 여성의 대표성 제고"라는 정책과제로 여성들의 공적영역 진출을 추진해왔다. 여성운동진영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의회진출'이다. 여성운동진영이 여성문제와 연관된 법, 제도의 개선, 여성의 지위향상 등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법, 제도를 입안할 수 있는 국회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진영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각 정당 역시 총선 전략에서 여성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추미애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과 같이 기존 여성 정치인들이 당의 핵심 요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 공천에서 50% 이상을 여성으로 할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 여성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성운동 진영이 목적하는 여성의 대표성 확보와 그를 통한 남녀평등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총선 전략에서 각 당이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인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15 총선과 여성의 의회진출 작년 8월 1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를 비롯한 321개 여성단체들은 '17대 총선을 위한 여성연대(이하 총선여성연대)'를 결성했다. 총선여성연대는 발족기자회견에서 "2004년 총선이 정치개혁 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여성들의 힘을 결집해 깨끗한 정치실현과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정치개혁 실현하고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정치개혁과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개선 제안서」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와 정치개혁추진 범국민협의회에 제출하는 등, 정치개혁 전반을 추동하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결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총선여성연대와 비슷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다만 활동방식에 있어서 '여성 100인 국회보내기'와 같이 적극적인 당선운동을 벌이는 것이 다른 점이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1월 초 '맑은 정치 여성후보 102인'을 발표(발표 후 1명 제외, 총 101인)하고, 각 당에 후보 명단을 제출하여 공천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맑은정치여성기금'을 발족했는데, 기금의 목적은 여성유권자들을 후원인으로 조직하여 여성 후보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다. 총선여성연대와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목표는 여성의 과소대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여성들이 국회(를 비롯한 공적영역)로 진출해 여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의 자기 이해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국회와 정치로 진출하면 정치를 더욱 깨끗하고, 참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 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여성 후보 101인 명단을 각 당에 보냈을 때, 각 당의 반응은 매우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각 당의 총선 전략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의 각 신문조차 '한국 정치권의 화두는 여성의 진출'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여성들의 의회 진출은 한국 정치 현실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탄핵 사태 이후 위기에 빠진 각 당의 '구세주'로 부상했다. 게다가 언론은 연일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과 박영선 열린우리당 대변인을 양대 라이벌이라는 식으로 부각시키며 양당의 대립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여성들이 기존의 각 정당을 대표하는 지위가 된 것이다. 각 당들은 비례대표 후보 5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여 확정했고, 이들 대부분이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 명망가이거나 여성, 장애인과 같이 소수자로 인식되던 부문의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언론의 보도만을 보면 가히 '여성들의 정치 진출 돌풍'이라고 할 만하다. 기존의 어떤 선거에서도 이만큼 여성이,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 정치인이 화두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이 '뜨고'있는 현 상황은 여성들의 운동에서 나온 성과가 아니다. 여성운동 진영이 보여준 여성을 의회로 보내기 위한 여러 활동들은 애초부터 각 당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대중의 지지가 컸던 것도 아니다. 여성들의 목소리와 여성들의 운동이 정당들의 태도를 바꾼 것은 더욱 아니다. 심지어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와 총선여성연대조차도 각 당이 여성후보들을 대거 공천하도록 압박하는 유의미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다. 각 당이 여성을 대거 등용하게 된 유일한 계기는 탄핵 사태와 이로 인해 극명해진 의회정치의 위기, 각 정당의 위기였다. 이는 현재 '여성의 돌풍'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보여준다. 결국 여성을 정치권으로 영입하려는 각 정당의 움직임은 '여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도덕성, 참신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여성의 의회진출을 추진해왔던 여성운동 세력들은 현재의 이 상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여성의 의제가 탄핵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묻혀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여성이 의회로 진출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여성의 의회진출 운동 실제로 여성이 정치의 영역에서 과소 대표되고 있는 현실은 이미 존재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국회에 진출한 여성은 극히 적은 수(16대 국회 여성 국회의원 비율 5.9%, 전 세계 여성 국회의원 비율 14.8%)여서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는 많은 여성운동 진영의 주요 과제였다. 그러나 여성운동 진영의 이런 운동이 대중적인 이슈로 부각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공적영역 진출을 위한 흐름은 대다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운동이 아니었으며,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에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여성 정책과 궤를 같이하면서 이미 공적 영역으로 흡수되었다. 여성부를 비롯하여 여성들이 진출한 영역에서 여성의제에 관한 정책을 입안했지만, 번번이 국회에 발목을 잡혔다(호주제 폐지 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라).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에게 여성의제와 관련된 법안을 제기하고 옹호할 수 있는 여성 국회의원이 필요성이 절박해졌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이 급부상하고 여성의 의회진출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이는 당장의 상황은 분명 여성운동 진영의 목적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운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회진출을 위한 운동 또한 큰 힘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이 사활을 건 총선 국면과 정치개혁이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탄핵 사태를 경과하며 드러난 각 정당의 위기가 이 상황을 더욱 폭발적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대중이 겪는 삶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완수하는 과정은 노동자 대중의 기본권과 날카롭게 대치될 뿐만 아니라 대중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불만과 투쟁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행정부의 역할과 지도자의 힘이 필요하며, 정당의 역할도 조정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각 정당은 다양한 사회세력의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국민정당, 전국정당, 무지개정당(catch-all party)으로 변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기존의 부정부패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새롭고 참신하며, 도덕성과 참신함을 갖춘 인사들로 물갈이를 시도한다. 법조인, 아나운서, 연예인, 행정 관료, 학자 등이 후보 물망에 올랐고, 여성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전에 비해 높은 비율로 공천 후보에 거명되었다. 기존 정치에 편입되지 않았던 참신함과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도덕성을 갖춘 인물로서 여성은 정치개혁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탄핵사태는 각 정당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을 활용하고 있는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대통령 탄핵안 통과 이후, 각 정당은 대중의 강력한 '反의회'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활을 걸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각 당은 비례대표 후보 1번을 모두 여성으로 배정했고(자민련을 제외하고), 여성들을 당 요직에 올렸다. 이런 전략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근혜'와 '추미애'다. '이들이 진정 여성을 대표하는가'라는 논쟁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점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기에 빠진 당을 자식에 비유하며 자신을 어머니에 비유하는 박근혜의 발언은 '강인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어머니'라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이미지에 기댄 것이다. 실제 이들은 현실 대다수 여성들의 고통과 위기는 물론이고,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한 대중의 불만과 불안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온화한 미소와 희생을 감내하는 강인한 어머니 상, 당의 구원을 짊어진 연약한 어깨와 같은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행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파탄낸 대중의 삶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고, 여론과 이미지만 난무하는 선거판 선두에 여성이 활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과 여성의 위기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과정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조작하는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하는 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하는 존재다. 직장과 가사를 병행해야만 하는 여성들은 이중부담에 시달리고, 여성 육체에 대한 상품화가 심화되면서 여성들은 더욱 심각해진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들의 결혼 기피 현상과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문제가 보여주듯이, 여성들은 더 이상 결혼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여성에게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는 경로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따라 가계소득이 감소하고, 필수적인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이 삭감되면서 가계유지 비용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여성이 가족 내에서 가지고 있는 부담이 줄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적 서비스 축소와 가족의 부수입을 담당한다는 여성의 위치 때문에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여성이 처한 이중부담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점차 민중의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함에 따라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위기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이런 방법들은 정말 개인적인 차원에서 최소한의 방어다.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 자기 조직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성과 같은 여성의 권리를 포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해체는 재생산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자본과 지배세력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심해지는 한편, '가사와 직장의 양립', '여성인력활용방안'과 같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여성들의 권리와 요구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자본이 처한 위기 지연 전략을 반영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가사와 직장을 양립'할 수 있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 지속적인 정책 과제였고 이를 위한 몇몇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여성들이 처한 위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자본의 요구에 따른 여성정책은 여성의 불만을 조정하고자 하지만, 결국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배세력에게는 잠재해있는 여성의 불만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성들이 의회를 비롯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함으로써 나타나는 또 다른 효과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정규직,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가족 내의 보살핌 노동과 재생산 노동도 책임지는 현실을 살지만, 이런 현실은 은폐된다. 의회를 비롯한 공적영역에 진출한 여성들이 실제는 현실의 여성들과 전혀 무관함에도 여성의 지위와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 여성 정치인들의 바람이 거세지자 '여성들도 이제 살 만하겠다'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실제 이들이 여성의 문제를 발언하는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여성의 문제를 의회 안에서 형성되는 쟁점으로 가두면서, 진정한 쟁점을 은폐한다.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여성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여성들의 대중운동을 왜곡하고 여성의 권리를 협소한 틀로 축소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불만과 분노를 관리하는 방식이 의회와 같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여성들을 자신이 가진 여성의 얼굴로 부각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여성운동 여성의 위기를 은폐하고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정치의 위기를 지연시키는데 활용되고 있는 여성들의 의회진출 흐름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여성운동 진영이 목적하는 여성의 대표성 확보는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오히려 여성의 위기를 은폐하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가르는 분할선을 공고히 하면서 여성의 현실을 대표하지 못하는 의회진출이야 말로 여성의 자기대표성 확보에 역행하는 일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하는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의 배제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당연히도 자신의 실리를 중심으로 한 요구들이 더욱 강력해지며, 이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 또한 이해당사자로서 사회적인 협약과 포섭의 방식이 선호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이 없고, 조직화되지 않은 여성들이 스스로 대중운동을 만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의회 공간에 여성을 진출시키려는 여성운동 진영의 활동과 이와 공존하는 지배정치의 여성 활용 전략은 대중운동의 무기력함을 더욱 강화한다. 신자유주의 개혁과 같이 가는 여성의 의회진출 흐름은 여성들의 불만과 불안을 관리하고 은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또 다시 여성의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를 낳는다. 이런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발점은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실체가 바로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적확한 인식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여성을 해방시켜주거나, 혹은 여성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 여성들의 권리를 제기하며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화할 때,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와 투쟁이 신자유주의가 침식하는 인민의 보편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이 될 때, 여성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여성이 정치에 자신의 목소리와 권리를 각인시키는 것은 여성의 보편적인 권리에 입각한 투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대통령 탄핵 사태의 본질과 대응 방향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사회의 위기는 국가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중도좌파"를 자처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정책결정을 철저히 초민족자본과 국제금융기구에 의존하고 권력을 강력한 행정부로 집중시켰다. 그 결과 의회는 부차적인 지위로 전락하고, 정당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허물어졌다. 이러한 구조가 형성되면서 여야 정당들의 대결 구도는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있다. 한국사회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장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여야정당은 모두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로 인하여 비정규직, 실업, 빈곤 등 노동의 위기와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 등 심각한 일상의 고통으로 민중의 불만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 여야정당은 자신의 정당성을 선전할 도리가 없는 상태에서, 결국 "나도 나쁘지만 상대방은 나보다 더 나쁘다"는 식의 "차악"(次惡)의 정치를 동원했다. 이러한 "부정적 정당화"는 여야 지배세력의 사생결단의 위기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한 국민 정서의 이반이 심각하고, 따라서 총선을 앞둔 지배세력의 정치적 동원은 매우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지배세력들은 자신의 분파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사회그룹들 ― 사회운동을 포함하여 ― 을 형성하려하지만, 그 성과는 매우 미진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측은 탄핵통과를 불사하며, 총선과 재신임 문제를 연계하겠다고 선언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을 추진할 때부터 이것이 "총선전략"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여야정당 모두 총선을 앞두고 거대한 도박판을 벌여 누가 차악인가 선택하라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탄핵이 가능하다고 야당이 판단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노무현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층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50%가 참여하는 투표에서 어느 정도 의석을 확보하는 문제와는 전혀 딴 문제다 (지난해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때 노무현을 찍은 사람의 절반이 "후회한다"고 응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세력 내 다른 분파들의 "흔들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달리 말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불만을 지배세력 내의 다른 분파가 활용할 수 있었다 (경제침체에 대한 책임론은 태통령 탄핵 사유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지역경제의 위기와 지역주의 활용은 가장 중요한 네가티브 캠페인의 선전 기조다). 그러나 일단 탄핵이 발의되고 국회에서 통과되자 사태의 흐름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친노/반노 또는 친한나라/반한나라 대결구도로 대중의 판단을 몰아가려는 흐름이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현재는 그 방향이 어느 한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노대통령은 의회의 횡포에 당한 "희생자"로 묘사되고 열린우리당은 5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불만이 과연 친노/반노로 "안전하게"(?) 봉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든다. 대중의 불만은 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노동자 분신사태에 직면해 "노무현정권 심판"이라는 요구까지 내걸었고, 올 초 한칠레 FTA와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로 격렬한 전투를 치른 노동자, 농민운동, 사회운동이 그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들이 일종의 "자기검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사태의 흐름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반동적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따라서 현재의 흐름은 크게 두 측면에서 커다란 우려를 낳는다. 첫째, 이번 계기는 "노무현식 정치스타일"이 통용되고 강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정권은 부패스캔들의 뇌관을 터뜨려 정당들을 붕괴시키고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라는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강화하려 했다. 그리고 미디어와 팬클럽으로 이를 보완하려 했다. 현재의 강력한 "反의회" 이데올로기는 도리어 억압적 국가기구의 편을 드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둘째, 현재 노동, 사회운동의 주류적 흐름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민중의 민주적 권리의 대대적인 침해에 대해 침묵하는 방향으로 휩쓸려 가고 있다. 이는 "문민화"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호도하려 했던 지배세력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노무현식 정치스타일"은 언제, 왜 등장했나? - "신자유주의 독재"와 대중조작적 정치 노무현 정권은 DJ 개혁의 처참한 실패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2000년 총선 전까지 IMF 조기졸업과 주가 1000선 돌파가 가능해 보이고 코스닥 활황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처럼 보일 때까지는 그런 대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거품이 빠진 자리에 만성 불황이 찾아왔다. 대중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3홍비리"는 DJ 정권에게 사형선고였다. 이제 정권재창출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된 듯하였다.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난 것이 국민경선이고,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였고, 노무현식 정치스타일이었다. 물론 IMF가 요구한 경제개혁과 문민화 과정은 DJ 개혁의 특정한 지지층을 형성했다 (아메리카식 생활양식과 소비문화에 포섭된 386-화이트칼라, 권력지향적인 지식인·NGO, 그리고 노동자대중 일부 등의 "실리주의"적 지지). 그러나 이들은 신자유주의와 대중의 삶의 위기로 인해 적극적인 정당화의 논리를 개발할 수 없었다. 이 때부터 노무현은 "탈권위"를 내세우며 파퓰리즘적인 정치스타일에 적극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남미에서의 파퓰리즘이 노조 등과의 "사회적 합의"라는 코포라티즘적인 수단에 의존했다면, 그러한 기반이 없는 노무현은 철저하게 미디어와 팬클럽을 활용하는 파퓰리즘으로 나아갔다 (물론 노무현 정권도 끊임없이 남미 사례와 유사한 사회적 합의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효율성을 위해 미디어의 선동주의를 동원하고, 이념도 정책도 없는 여야 대결에서 승리를 얻어내려고 개인의 카리스마를 빛내기 위해 팬클럽을 활용했다 ("노사모"는 모든 문제를 노무현 개인에 대한 지지로 환원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노정권이 신자유주의 위기를 은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지난해 여론조사 결과는 대선 때 노무현을 찍은 사람들의 절반이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 하자 노무현은 부패스캔들의 뇌관을 터뜨렸다. 노무현은 스스로가 부패스캔들에 깊숙이 연루되었으나 희대의 "10분의 1 정계은퇴" 발언으로 야당을 정면으로 겨냥한 대도박을 감행할 수 있었다. 기존의 모든 정당이 "털면 나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리고 "부패척결"은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구호다). 노정권은 모든 정당을 폐허로 만드는 전략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정당을 폐허로 만들고 나면,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에 의존한 파퓰리즘 정치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된다. 결국 파퓰리즘에 의존한 행정부-사법부 권력의 극대화, 부패스캔들의 연쇄를 통한 정당정치의 황폐화, 그 이후에 오는 "신자유주의 독재". 이것이 노무현식 정치스타일이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낳은 민주주의의 위기의 한국형 판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안정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50%를 상회한다한들 그것이 몇 달이나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미 한국경제는 장기불황에 돌입한지 오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이 반복되는 현실 자체다. 어떤 정치세력도 안정적인 대표성과 정당성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중운동의 적합한 대응이 없다면 노무현식 정치스타일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제 "그들"이 돌아온다? - 누가 민중의 권리를 대대적으로 침해하는가? 냉전시기 제3세계(신식민지) 우파세력은 대중적 토대가 취약했고, 따라서 제국주의에 철저하게 의탁한 반공친미적인 "매판우파"로서만 등장했다. 똑같이 오늘날의 한나라당도 매판우파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고, "반공-발전주의"의 그늘 아래 성장했다. 그러나 실제 "대중적 우파"는 존재하지 않았고, 강력한 억압기구를 동원해서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냉전의 시기가 끝나고 우파세력의 주문과도 같았던 "민족적 발전의 길"도 약효가 다하게 되자, 그들의 보수주의는 더 이상 안정적인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중심부 국가들의 우익 보수파들이 "반미"를 내걸고(민족주의/인종주의) 대중선동적인 형태의 보수파로 등장했지만, 이는 한국의 우파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노선이었다. (한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배제된 지역들, 동유럽이나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종족주의-분리주의나 종교 원리주의가 대중을 장악했다.) 한국의 우파세력은 탈냉전과 발전주의의 해체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당시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는 오히려 "정권교체"를 선호하고 DJ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다. IMF 경제개혁은 재벌개혁이나 정부 구조조정과 같이 지배세력 내부의 반발을 불사하는 것이었으므로, 전통적인 지배층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정권교체가 요긴한 일이었다. 일단 신자유주의 개혁에서 주도권을 놓치게 되자 그들은 퇴행적인 정치행위에 의존함으로써(지역주의, 반공-발전주의에 대한 향수 등), "수구보수 왕초"의 낙인을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제 보수화 된 자유주의 세력이 신자유주의 개혁과 통치의 관리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야당세력은 근본적으로 보수-반공주의에 뿌리를 두었고, 똑같이 "친미파"였다. 그들의 파병강행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침해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 또한 안정적인 통치를 형성하지 못하고 계속적인 정치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행동 스타일에서 잘 포장된 자유주의적 외양과 실제 정책 지향을 호도하는 미디어 선동, 지식인과 NGO의 적극적인 활용은 계속 '차악'의 논리를 통해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적 보수파가 냉전적 보수파를 대체하여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 민주주의의 대대적 침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이주노동자의 권리, 교육, 보건 등 민중의 권리가 위협받는 것은 냉전 시기의 "그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무엇이 민중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가? - 신자유주의 비판을 결여한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오직 기만이다.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이 70%를 넘는 결과는 오늘날 정당정치가 국민들에게 대표성, 정당성을 상실했고, 심각한 위기의 국면에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 정당들의 국회의석 비율은 국민의 지지를 과대하게 반영하고 있다. 2000년 총선 투표율은 57%에 불과했다). 따라서 탄핵사태에 대해 대중이 규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곧바로 노무현정권에 대한 지지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탄핵무효"를 요구하는 세력 중에는 노정권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향으로 운동을 이끌어 가려는 흐름이 분명히 존재한다. <탄핵무효 부패정치청산 범국민행동(준)>은 운동의 초점을 순전히 한나라당-민주당 척결로 맞춤으로써 실제로 노정권과 신자유주의 개혁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부패세력 척결이 87년 민주화운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바로 민중의 민주적 요구,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결정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탄핵사유가 안된다" 또는 "탄핵사유로 경미하다"는 주장은 "헌법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타당할 수 있다 (물론 헌법학자 내에도 적지 않은 이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결코 노무현정권에서 벌어진 부패비리나 권위주의-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정치적 심판의 근거를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비약될 수는 없다. 나아가 현재 국면에서 표출되는 민중의 불만에서 발견되는 것은 87년 시기 이미 표출된 바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 쟁점인 "국민주권" - "인민주권"이 더 분명한 표현이다 - 의 모순이다. 우리가 "누가 인민인가", "어떻게 인민은 자신의 주권을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가 실제로 얼마나 이를 억압해 왔는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안을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정당들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통과시킬 때, 특히 그 목표가 87년의 성과물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공격하는 것일 때, 민중들이 주권을 표출할 수 없는 무능력성과 허구적인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87년 민중이 등장하여 자신의 궁극적 권리인 민중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려 하자, 위험을 감지한 지배세력은 그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내놓았다. 대통령 직선제는 마치 "성과물"인 듯 보였지만 민중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봉쇄한 도구였다. 사실 1990년대 전체에 걸쳐 민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여기서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87년의 봉쇄점을 단순히 "복구"하려는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는 민중이 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권리를 조금도 진전시키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위협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는 방향이 될 수 없다. 87년과 달리 사소한 성과물조차 쟁취할 수 없는 이러한 방향은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끝없는 절망과 자조로 돌아서게 될 길을 닦을 뿐이다. 헌법재판소가 민중의 심판을 대신할 수 있는가? - 헌재의 판결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심판이다. 한편 사회운동 내 <범국민행동>의 노선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는 가운데, 실제 탄핵 문제를 결정할 최종적인 권능은 헌법재판소의 손안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 여야정당과 모든 언론도 사태 해결의 담당자는 9명의 헌판재판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야정당과 그 지지세력은 언론에 대한 압박이나 대중동원, 결정적으로는 총선 결과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려하고 있다. "탄핵무효"를 선전하는 세력은 헌법학자의 다수 견해가 반대고 (어떤 언론은 70%, 또다른 언론은 50%의 학자들이 탄핵이 불가하다는 견해를 냈다고 보도하고 있다), 대세가 탄핵 기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겠지만, 불행하게도 진정한 문제는 헌법재판관이 어떻게 판결을 내릴지는 판결문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출"된 자가 아니고 "임명"된 자들이다. 그들은 순전히 개인이 생각하는 "법리"에 따라 결정을 내릴 뿐이다. 하지만 여야정당이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판단을 촉구하고 그것을 따르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경우 국가기구 대 국가기구의 대결이 극단화되어 현존하는 국가기구의 붕괴로도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의 판단이 어떻게든 어느 한쪽이 받아들 수 없다고 선포하면 그 위기를 봉합할 수 있는 능력은 "군대"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헌재의 판단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따라서 <범국민행동>이 헌재의 조속한 기각을 촉구하는 것은 민중의 결정을 억압적 국가기구에게 대신 전적으로 맡기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어떤 결정이 나올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범국민행동>이 아무리 민주주의 "완성"을 주장한다고 한들 그 장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문제는 "선출된 자"에게 있다기보다는 "선출되지 않은 자"의 거대한 권력에 있다. 누가 민중의 결정 권리를 그들에게 위임했는가? 잠재된 신자유주의 반대,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 민주주의는 민중의 투쟁으로, 거리에서 만들어진다. 무엇보다도 노정권에 대한 "헌재의 심판"이나 "탄핵무효-총선승리"의 대결 구도를 "민중의 심판"으로 전환해야한다. 또한 "총선에서의 심판"을 민중의 대중행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왜냐하면 헌재의 심판은 결국 국가기구의 심판이며, 총선에서의 심판은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를 깨뜨리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조금도 진전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중적 운동을 형성하는 게 가장 긴급한 정치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에 특히 유념해야 한다. 첫째 먼저, 현 사태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활용하려는 지배세력과 그 지원세력에 대해 모든 전선에서 분명한 대치선을 그어야 한다. 둘째, 탄핵사태로 표출된 여야정당과 국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위험과 불안과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현재 <범국민행동>은 이러한 결합의 고리를 깨뜨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위기를 분명히 밝히고, 민중의 민주적 권리가 대대적으로 침해되고 있는 현실을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 셋째, 정당정치의 대표성,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대중행동과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하고 강화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단지 의회가 문제가 아니라 행정부, 사법부(선출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민중의 직접적인 통제 방안을 사고해야 한다. 최근 사회운동에서는 참정권 확대의 맥락에서 국민소환, 국민발의제와 같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논의되고 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넷째, 사회운동은 반전반세계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헌신해온 만큼, 그 기조 위에서 민중진영의 합의와 단결에 입각해 탄핵사태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 한편 현 사태에 직면하여 총선참여를 준비해온 "진보정당"의 처지는 매우 궁색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이는 현재의 억압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의 정당정치 체계 전반의 위기와 보수적인 파퓰리즘의 득세는 곧 진보정당이 단순히 총선에 참여하고 소수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유효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오히려 진보정당이 "파병반대, FTA반대"와 같이 사회운동의 이슈들과 결합하고 사회운동의 강화를 자신의 목표로 할 때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현재 국면을 지나며 진보정당은 단지 "실패했다"는 규정을 받게 되고, 민중운동의 "사기저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진보정당은 당 내부의 권력 경합에 몰입하기보다는, 자신의 운동방향을 결정할 때 다양한 사회운동들과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토론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중의 힘으로 전쟁반대 신자유주의 심판! 반민중 반민주 여야정당에 파산선고를 ! FTA·파병강행 노무현정권 심판하자! 국민소환, 국민발의로 민중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자!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