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스위니 집행부 당선 이후 미국 AFL-CIO의 대외정책 킴 사입스1)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1995년 스위니 집행부 당선 이후 미국 AFL-CIO의 대외정책 킴 사입스1)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