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권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과 대안의 부재는 노무현 정권의 조건이다. ‘참여적 발전(참여와 발전의 결합)’이란 참여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전망과 정책의 부재를 참여로 대체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전략이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동북아 중심으로 성장, 번영한다는 구상으로 수렴된다. 이의 핵심은 자본유치이다. 그러나 지난 해 극심한 경기침체와 가계파산, 생계형 자살 증가와 같은 삶의 불안은 노무현의 구상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낳았다. 자본도 노동도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의 재신임을 내걸고, 일정정도의 정국주도력을 장악했지만 각종 사회갈등과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이제 노무현은 “투자활성화를 통한 성장잠재력 창출 -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 방향을 내놓고, 위기관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대외개방, 노동 유연화, 금융시장 안정화 등) 위해 모든 경제․사회 정책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중의 기본권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갈등과 저항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통합 정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의 위기는 경제위기로 국한되지 않는 사회의 해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삶의 고통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더군다나 가족과 교육은 대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대부분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공동체 자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대중의 실리주의를 더욱 자극한다(포섭에 대한 기대와 배제에 대한 공포). 실리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코퍼러티즘적인 협약에 대한 대중의 선호-행정기구와 각각의 대중의 실리(소위 이익집단)가 직접 갈등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방식-가 일반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선 정당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당정치는 행정부의 관리 방식의 효율성에 미달하는 무능력한 것이고, 대중은 자신의 삶에서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는 지배세력들에게 사활적인 과제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정치개혁의 목적은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이다. 정당은 기존의 이념지향을 벗어나서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어야 위기관리와 갈등 조절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은 대중을 동원하고 동시에 대중들의 불만과 갈등이 급진적으로 전화될 수 있는 능동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전략이지만, 이 역시 모순과 갈등의 여지가 많다. 참여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대중을 동원하고, 이러한 동원이 대안과 전망의 부재를 메꾸어 사회의 통합을 이뤄내고자 한다. 하지만 참여의 논리가 극도의 실리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에(참여한 자만이 수혜를 얻을 수 있다는), 참여를 통한 합의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증폭되고, 다양한 요구들이 충돌하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정권에게는 ‘참여’ 자체가 중요한 것인데, 이미 참여는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운동이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의 동원 대상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중운동 내부,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키고, 일부를 포섭하는 것은 정권에게 중요한 과제다. 좋았던(?) 옛날을 미래의 전망으로 갖는 것은 정권과 지배세력의 관리방식과 공명하는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요구에 기반을 둔 이런 대응은 대중의 운동에 대한 불신과 대중의 수동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이러한 실리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과 삶의 해체가 운동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어떻게 이들의 불만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이질적인 지지층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해서 수권에 성공했다. 이는 서로 다른 집단들의 이해와 요구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노무현 자신이라는 희망의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비전과 정책방향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철저히 신자유주의 개혁 방향에 자신의 조타수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조건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은 국민의 갈등과 불만을 야기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그들의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선 직후 터져 나온 대통령 측근 비리 문제는 대선자금 문제,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일파만파 되었다. 물론 이런 무능과 부정부패는 노무현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현 상황에서 위기를 봉합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안이나 비전도 제시할 수 없는 지배세력 전반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근간에는 삶의 파탄과 사회의 해체에 직면한 노동자 대중의 불만이 놓여있으며, 따라서 핵심은 어떻게 이 불만을 관리(혹은 조직화)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대응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비롯된 소위 ‘재신임 사태’다. 경제위기와 이로부터 다양한 갈등과 불만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지배계급 내부의 각 분파간의 갈등 또한 첨예해진 상황에서 노무현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시했다. 재신임 선언은 “대통령 자신과 국가의 위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이 ‘국민협박극’은 역설적이게도 ‘국민투표’라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기제를 통해 이루어질 판이었으니, 이만큼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참여’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결국, 노무현이 말하는 ‘참여’란 비전과 대안이 없는 지배계급의 무능을 참여를 통해 국민과 대중에게로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을 참여시켜 합의를 도출하는 것, 이 합의로 비전과 대안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참여’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참여에는 경계가 이미 정해져있다. 당연히도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어떻게 잘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 기준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배제된다. ‘참여’를 매개로 한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은 이후 더욱 강화될 것이다. 17대 총선에는 노무현의 재신임 문제가 달려있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이번 총선에서 알맹이 없는 선심성 공약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것이 결국 ‘공약’일 뿐인 조건에서 ‘참여’는 더욱 강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말해온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요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이라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되고 있는 실업의 문제를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가운데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상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현재 있는 일자리를 쪼개는 방식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정권과 지배세력은 이 이상의 방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로부터 또 다시 갈등은 촉발되겠지만, 정권은 계속해서 ‘참여’를 통한 합의를 강조할테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들에겐 폭력과 배제가 남겨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조건과 노무현 정권의 정책 전망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미 주어진 방향성이다. 지난 1년 노무현이 갈팡질팡하는 행보 속에서도 계속해서 제출했던 각종 로드맵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 구상이다. 애초에 노무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 실현’을 한국 사회 발전 전략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북아 중심 국가의 핵심에는 외국인 자본 유치가 필수적인 바,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는 것이 그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는 끊임없이 민중들의 기본권(생존권, 민주주의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이 다양하게 폭발했다. 게다가 지난 해 지표상의 경제성장률이 2%로 하락하면서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평가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현실에서 체감되는 위기는 훨씬 심각했다(경제위기를 넘어선 사회적 위기라 할 만하다: 생계형 자살 급증,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등). 물론 이러한 현실이 세계화된 시대의 한국경제의 발전전략으로서 ‘자본유치형 국가’라는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본 방향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불안 요소들을 제어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이다. 올해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4%~5%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면서 대체적으로 회복세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세계경제(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유럽 경제)의 성장이라는 대외여건의 개선을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경제의 성장이 수출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를 전제로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를 발판으로 동북아 중심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요구가 주를 이루는데, 그들이 성장잠재력의 장애로 꼽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용 없는 성장(만연된 실업), 경제 시스템의 낙후성(노사분규, 기업의 투명성 등), 소극적인 대외개방(FTA, 서비스 시장 개방 등), 사회의 양극화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갈등(서민들의 생활 안정).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가 성장함에도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이의 원인으로는 그나마 수출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 IT 산업의 고용흡수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제조업의 중국진출로 인한 공동화 현상과 투자 부진으로 인한 신규채용 미비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시도 속에 이미 예정되어있던 결과이다. 이미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만연된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을 노동시장의 일반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왔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금융, 자본 시장에) 자본투자를 유치하여 성장하겠다는 전략을 취하는 바, 제조업 부문이 성장동력일 수 없다는 점은 전제된 바이다. 그럼에도 최근 고용/실업의 문제가 새삼스레 부각되고 있다면, 그것이 가지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경제부는 2004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꼽았으며, 이를 올해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이며,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기간제 고용에 대한 규제 완화, 해고관련 규제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다양한 고용행태를 보편화시켜 잠재적인 노동수요가 고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고용, 실업 정책의 맥락과 다를 바 없다. 동시에 이 말은 지금 재경부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솔선하여 고용창출에 앞장서겠다며 생색을 내고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대책도 그 대부분이 임시직, 직업훈련, 해외연수와 같은 단기처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권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기업의 투자활성화가 중요해진다(일자리 확충의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투자가 증가해야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결국 일자리 창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투자이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모든 경제․사회적 정책의 방향성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쪽으로 맞춰진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양자간․다자간 자유무역협정과 WTO 협상은 필수적이고 확대되어야 하며, 교육과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산업에 있어서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투자처를 축소시키는 일이다. 포섭의 기대와 배제의 공포 여기서 핵심적으로 보아야할 부분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불안정한 삶과 만연한 실업이라는 민중의 불만을 다시금 자본의 투자를 위한 최적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근거와 동력으로 삼는 역설이다. 우선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라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한국 경제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어 자본을 유치하는 것 외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살아남을 방도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혁은 끊임없이 민중의 기본권과 충돌한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이후 외자 유치를 위한 조건을 갖춘 한국의 미래로서 ‘동북아 경제 중심’을 제시했지만, 이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자유구역법 저지 투쟁, 화물연대의 파업, FTA 체결 반대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조건에서 더욱 커다란 불만과 갈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남은 것은 이 갈등과 불만이 체제의 위기로 전화하지 않도록 사활을 걸고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하반기 노무현이 제시한 “소득 2만불 시대로 나아가자!”는 구호는 그 내용에서는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었다. ‘소득 2만불’이라는 표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보다 훨씬 직설적이며, 그만큼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경제가 “마의 1만불 벽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지금 이 상태에서 주저앉느냐”하는 기로에 서있다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위기 상황과 맞물려 더욱 커다란 위기감을 자극했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주저앉고 싶지 않다. 소득 2만불 시대를 실현하고, 동북아 중심 국가로서 번영을 누리는 것은 위기감 속에서 합의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으로 가차없이 짓밟아야 했다(작년 하반기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탄압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와 같은 강요된 합의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관리 방식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배양과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목표의 핵심은 ‘투자’에 있지만, ‘고용과 실업’ 그리고 나아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과 운동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일례로 노무현 정권은 이 정책 과제 중의 하나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 선언을 제시했다. 고용과 실업은 노동자운동 일부가 사회적 협약에 참가하는(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협약의 결과, 현재의 불안정한 노동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는 것 자체도 커다란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협약이 ‘포섭과 배제’라는 정권의 위기관리방식의 더욱 강력한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삶과 사회가 위기에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불안과 공포를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라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층-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 일부-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려할 것이다. 이들은 포섭과 참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광범위한 빈곤층, 실업과 반실업 상태에 놓인 대중(이들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층이다), 이주노동자, 여성, 농민-는 배제된다. 게다가 이들의 저항은 용납할 수 없는데, 포섭된 대상들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은 극심해지고, 결과적으로 (포섭된) 대중이 (배제된) 대중의 투쟁과 저항을 억압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만연한 실업의 문제를 국정 가장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엄밀히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문제가 되어왔던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이 방치되었을 때 그 자체로 커다란 사회적 위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전반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노동자에 대한 포섭과 관리의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어온 노동자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겠다는 강력한 구상이다. 만일 노동자운동이 사회적 협약을 거부한다면(이미 실리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이 이를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거부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운동은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탄압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또 다시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켜 운동의 가능성을 점차 어렵게 만들게 된다. 정당정치의 위기와 정치개혁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인 갈등과 위기를 조정하지 못하고, 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정당은 더 이상 국가행정에 대해 계급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있지 못하다. 정당은 이미 정책결정에 실질적인 관여를 못하고 있으며, 정당간에 정책적 차별성도 거의 없다. 국회의 입법활동이란 행정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책의 큰 방향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은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행정부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 확보는 대의제 민주주의 기관인 국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정당과 의회정치의 역할을 축소되고, 행정기구의 역할과 권력은 증대된다.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위기관리체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기를 관리하는 행정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이 정치를 갈음한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도 조정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당 외부의 다양한 동원기구, NGO 등과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이들을 활용한다. 정당 또한 행정부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고,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기 위해선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 논의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정치개혁이라는 쟁점은 이미 지난 대선 시기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문제지만, 현재는 가히 ‘정치의 과잉’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개혁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었다(흡사 정치가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하지만 이는 외양면에서 부풀어있는 측면이 크다. 실제 대중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최근 정당의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바, 지지정당이 없다고 말한 부동층이 40~45%에 달하고 있으며, 투표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게다가 각 정치세력들의 정치개혁 의제나 정책에서도 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비례대표제 확대, 선거구 조정과 같은 문제가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처럼 선전되고 그에 대한 입장이 각 당의 차이 같지만, 이는 각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분확보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이지 정치개혁 자체의 핵심은 아니다. 한편 현재 달아오르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는 ‘인적청산과 세대교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모두에게 이번 총선의 모토는 “일하는 정치(전문성 강화), 깨끗한 정치(정치자금 투명화)로 경제를 되살리자(신자유주의 개혁)!”로 요약된다. 시민운동진영의 이번 총선대응의 주된 흐름인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2004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의 당선운동 흐름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의 삶에서 정치의 중요성이 사라진 상황은 몇몇 참신하고 전문성 있는 인물교체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패청산, 젊은 정치, 일하는 정치라는 쟁점이 국민을 인입하고 있다면, 이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상황만은 아니고, 이러한 정치개혁을 통한 현실적인 실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386세력은 현실적 실리의 최우선 이해당사자이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길었던 ‘3김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이 지체되었던 계층이다. 게다가 이제 386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으며, 계층으로 보자면 대졸중산층(상대적으로 안정적인)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포섭될 희망이 강력한 계층이다. ‘세대교체’는 3김 시대의 구태의연한 세력들로부터 자신들에게로 정치적 발언력과 권한이 이전되는 강력한 계기이다. 그리고 정치개혁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지키는 길(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적 방식으로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개혁 쟁점이 부각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미디어의 조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정치권의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개혁에 관한 각종 토론회와 전문가 진단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정치개혁의 상을 제시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계속해서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한 국회를 대비시키며 대립을 조장해왔다. 미디어는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정책개혁과 갈등조정의 역할을 다 해야하고, 국회는 당략에 사로잡혀 행정부의 효율성을 저해하지 말아야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는 현재의 정치개혁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감정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개혁의 과제 중 하나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확보하고자 하는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과제이다. 지금의 지역감정은 이전 3김 시대와 달리 성장으로부터의 지역배제와 이에 따른 지역경제 침체라는 조건이 존재한다. 이는 (민족)국가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선별 포섭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민족)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역별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전망을 가지고 포섭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여타 지역은 극심한 배제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실리주의적인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지역감정의 새로운 조건을 낳았다. 더 이상 지역감정은 영․호남의 지역적 분할선을 타고 균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지역감정 타파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발전의 전망을 약속해야 한다(실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의 중요한 전략은 지역별로 발전을 약속한 것이었다.). 영․호남을 넘어서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약속(열린우리당의 총선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배제와 포섭의 논리는 계속 지역발전의 전망과 공존한다. 게다가 지역 내부의 불평등과 배제가 더욱 문제다. 한 지역의 발전이 그 구성원 모두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어떤 지역도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의 심화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내부의 배제를 쟁점에서 사라지게 한다. 정확한 현실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자.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는 이제 사회의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과 학교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가 나타난다. 위기와 그 극복전략을 둘러싼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치가 심화된다. 지배세력은 ‘참여’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다. 배제의 공포 속에서 대중은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가 극심해진다. 누군가는 ‘수건돌리기’라고 표현했다. ‘나의 뒤에 수건이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놓인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수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위기의 해결이 아닌 지연의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정확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현실에 대한 인식, 대중의 불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경쟁과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내는 지배세력의 방식에 조응하는 것은 운동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참여의 수혜와 관용’을 받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운동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이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운동 사이의 괴리는 커지고, 이 괴리는 더욱 큰 대중의 절망을 낳는다.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할 것인가, 대중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대중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이 문제에 맞서는 우리의 출발점이다.PSSP
'참여정부'의 악순환 노무현 정권이 '서로 다른 집단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는 약속의 핵심에는 '참여정부'라는 구호가 있었다. 즉 정부가 나서서 정책을 완성하고 집행하기보다는 각 사안의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공식․비공식 기관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정부는 공정하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정된 정책이야말로 힘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내건 참여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민주적인 외양을 띠었다. 게다가 노무현 캠프에 '386세대', 운동권 인사가 가담하면서,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오히려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갈등조정의 방식일 뿐이거나, 문제의 책임을 정부 밖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정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사안에 관해 개혁법안이나 '사회적 협약'을 추구한다. 하지만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대화와 타협은 사실 절충적인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모두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오히려 종종 갈등을 더 증폭시키거나,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문제 해결이 고착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정부가 이해당사자의 '집단 이기주의'를 운운하며, 그 책임을 정부 밖으로 전가하게 된다. 결국 악순환이다. 특히 노동자에게 그 참여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더군다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곧 '시민'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포괄하려는 참여의 범위는 다양한 직업적 집단이나 NGO, 전문가 집단이다. NGO가 불안정한 노동자 대중을 대체하여, 이들 집단의 '관리의 주체'로 승인된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정치적 모순 물론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란 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양한 초민족적 국제기구들은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고안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는 정부재정, 금융 정책을 비롯해 거시․미시 경제정책, 노동, 교육, 여성, 사회복지, 인구 노령화 등 다루는 사회이슈를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정책연구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각론들을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투자에 안정적이며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성장 잠재력의 고갈'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기업집단간, 개인간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사회적 위기의 지표들이 출현하고 있다 - 실업의 만연('고용없는 성장'), 가계대출과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중소기업 붕괴, 농업 해체, 이민열풍과 두뇌유출 등등. 물론 몇몇 특화된 산업과 기업이 선두를 달리며 초민족 기업으로 자태 변환을 시도하고 일부의 엘리트집단이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영유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하향 평준화되거나 사회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 (금융)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라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지상명령과 노동권-시민권의 보편적 요구는 근본 모순을 낳는다. 개혁과 정치의 슬림화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이 동반하는 정치개혁은 근본적 모순을 비켜 간다. 그 목적은 오히려 단순하다.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 비용을 경량화하자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 자체를 행정적 관리로 대체하고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어느 때 못지 않게 강한 '리더쉽'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은 계속 축소된다. 정당들이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지지 기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입법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주어진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의 장소는 행정부고, 행정부는 수완을 부려서 해결사의 노릇을 해야한다. 정당성의 위기,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 사회운동들의 저항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부의 권력은 증대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결코 '강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DJ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구호를 항상 주장했다). 물론 과거 군사독재의 폭압적인 동원 체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데, 문제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 체제다. 이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형된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마치 학계나 NGO의 전문가들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어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게 가장 우수한 활동인 것처럼 평가된다 (NGO가 정치인을 욕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무식하다'는 것이다). 이미 정당들은 스스로 '국민정당'이나 '무지개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적은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재조정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그 결과로 정치비용의 경량화도 중요한 요구다 (최근 전경련의 행보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개인적 부패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요 이슈에는 각 정당들의 '당략'적인 목적이 담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통 '지역구도 타파'로 선전이 되는 간선제 국회의원의 확대, 선거구 재조정 등은 한나라당의 의석 비율을 잠식하여 정당들의 세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선전되지만, 최종적인 목적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계급 또는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지분이 걸린 생사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부패한 국회의 문제를 대비시키며, 거듭하여 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공무원의 할 일이 아니다), 국회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고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이것이 미디어의 요구다. 참여정부와 코포라티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심각한 효과는 '참여'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놓고 대중운동들을 분할한다는 점이다. '참여'는 사실 대중운동에게 매우 부분적인 타협의 가능성을 흘려주지만, 그 악순환의 끝은 부분적인 포섭과 배제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특정한 분야나 사안별로 '참여'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운동은 실제로 '참여냐 비타협적 투쟁이냐'라는 의도된 쟁점에 휘말리게 된다. 또는 각자 자기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로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개혁안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빠지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로 사회운동의 활동은 공통의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부문이나 분야별로 분산된다. 그리고 주요한 활동이 정부와 '정부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거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애초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통과를 저지하거나 또는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 때 특히 총선에서 당선 또는 낙천․낙선운동을 무기로 삼게 된다). 사실 이미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사회운동에서 대체로 정형화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효율성과 편의성이라고 하는 '덕목'을 내세우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단일 이슈에 집중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효율성, 그래서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의 정당화, 코포라티즘적인 동원에서의 편의성 등등. 이는 많은 운동단체들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활동은 종종 운동 주체화 과정이 제거된 협상과 동원 체계로 전환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속력을 갖는 협상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제도화를 추구하게 된다. 또한 협상이 성사될 경우에는 그것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관철시켜야 한다. 오히려 정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흡수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 부문이나 분야를 이슈로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데 근본적 난점을 갖는다. 물론 특정 분야 개혁에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우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일한 이슈, 협소한 쟁점이 개인들을 일시적인 관심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장기적인 운동 주체화의 과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일 이슈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정책아이템을 찾아 부유한다. 사회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 그러나 이것이 운동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이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의 국가장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없는 조건이다.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해체, 학교의 붕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참여세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직격탄이다 (해고나 카드 빚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인가? 그에 따른 가족의 파탄, 기존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공포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회적 노동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과 연계된 교육의 위계화와 실업의 공포는 교육을 붕괴시킨다. 또한 빈곤의 여성화는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해체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개인들의 극단적인 불안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종종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회정책은 파편적인 미봉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운동은 이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전환하지 못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도 그 괴리를 따라 잡지 못한다 ('최대한의 임금상승'과 '고용안정'으로 가족과 학교를 매개로 하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 범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또는 종종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분적인 정책공약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실로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몇 가지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들의 붕괴로 인해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들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운동을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이 즈음하여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토론하게 된 맥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1990년대 말 IMF 경제개혁과 민주노총 위기논쟁이 불거졌을 때 우리의 화두였다. 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공통과제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계급형성적 노동운동)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노동자대중 내부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빈곤 대중 문제, 노동자운동 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문제를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평의회에 대한 지향(코포라티즘이 아닌 노동자통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빈곤, 성, 인종의 문제는 필연코 공동체의 문제를 낳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관성화된 사업 패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오히려 새로운 운동방식을 개척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하반기 사회개혁투쟁'으로 고착화되고,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사실 남아 있는 우리의 무기는 시기집중 파업이 유일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도부 교체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당장 어떤 활동으로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억압의 관용' 우리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오히려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신임 선언은 이미 실패한 정권의 '국민협박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겠다'는 정말로 거대한 협박.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을 승인하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코포라티즘적인 지향과 활동 방식을 체화한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은 달가운 일이 된다. 그가 사회운동의 특정한 부위의 '후견인' 역할을 자인하는 한에서. 오히려 억압이 일상화된다면 '관용'은 보호자가 베푸는 큰 혜택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와 '억압의 관용'은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다. 참여정부의 논리가 대중운동의 동원과 무력화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 억압의 관용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PSSP
리포트. 대선자금과 노무현 측근비리 중간결산 드러난 흑막 불법대선자금의 전모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당선한 노무현의 최측근들과 2등으로 낙선한 이회창의 최측근들 그리고 분당이전의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前대표와 前사무총장들이 모두 구속되거나 영장이 발부되었다. 현재 대선자금은 대검 중수부의 기업수사와 노대통령 측근비리 특검를 주요 축으로 해서 밝혀지고 있다. 기업수사의 경우 검찰에서 각종 그룹의 분식회계와 비자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선자금 및 각종 로비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경로들이 밝혀지면서 본격화되었다. 또 노무현 측근비리 특검 과정에서도 속속들이 불법자금의 실체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검팀은 측근비리를 중심으로 조사를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대선시 자금창구를 맡았던 이들의 자금유용 문제를 쟁점화시키면서 대선자금 수사까지 파고들고 있다. 대선자금 중에서도 불법자금으로 분류되는 것은 여러 가지 경로를 거친다. 기업에 영수증 처리는 되었지만 선관위에 신고되지 않은 자금, ‘차떼기’를 필두로 하는 사용출처가 애시 당초 불법적인 자금, 자금의 전달과정에서의 ‘배달사고’등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현재 대선전후의 정치자금 뿐 아니라 경선과정에서의 자금까지도 수사의 범위에 포획되어있다. 이 땅에서 ‘헌정’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가 직접선거로는 10번의 대선과 16번의 총선을 경험했지만 이처럼 선거자금이 여론과 법의 도마위에 올려진 기억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97년 대선의 소위 ‘세풍’도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의 성과(?)로 그 진실의 발견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경험 탓에 검찰의 수사가 제 아무리 집요하더라도 밝혀질 실체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는 것도 세인의 인식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비리’,‘부패’,‘아무개 리스트’,‘횡령’등의 단어는 ‘그러려니’라는 말과 함께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자금 문제가 정치인들의 과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의 철저한 구조적 공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또 현재의 대선자금 파동이 정치개혁의 중요한 상수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실체와 의미는 분명히 밝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기에 우선 대선자금 뿐만 아니라 지난 1년간 나라종금에서부터 시작해서 밝혀진 각종 비리와 정치자금의 형성과 유통 경로를 되짚어볼 필요성을 느낀다. 사건의 시발점 <나라종금 게이트> 주지하다시피 측근비리라는 형태로 불법자금이 드러난 첫 케이스는 나라종금이다. 나라종금 게이트의 문제는 자사의 퇴출을 막기위한 로비자금이 노무현 캠프에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에서 문제가 확대된 바가 있었다. 실제 나라종금은 비자금 230억원 정도를 조성하여 로비자금을 뿌렸으며 이와 관련하여 한광옥,김홍일등이 구속된 사건이다. 나라종금의 대주주인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은 1998년 종잣돈 10억원을 벤처기업인 골드뱅크에 투자해 8개월 만에 3백4억원의 수익을 올렸었다. 그는 이 돈을 기반으로 99년 7월부터 2000년 8월 사이 자금담당 직원 최모씨의 22개 차명계좌에 2백68억원을 넣어 비자금으로 관리했다. 이중 33억원 가량이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에게 건너갔다. 전형적인 금융형 비리의 전형인 셈이다. 전방위 로비의 결과로 나라종금은 2차 영업정지 이후에도 한동안 생명을 이어갔고, 투입된 공적자금이 버려진 것이다. 검찰은 각각 1백55억여원, 16억여원(이상 당시 시가기준)에 이르는 김호준, 안상태씨의 은닉재산을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환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김호준 전 보성그룹(나라종금 대주주)회장은 98~99년 401억원을 분식회계한 뒤 금융기관에서 568억원을 부당대출 받고 나라종금에서 2천995억원을 불법대출 받았으며 미화를 빼돌린 혐의 등으로 2002년 7월 구속기소 되어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추징금 30만달러가 선고됐다. 또 안상태 전 나라종금 회장은 보성그룹이 97년 외환위기 직전 인수한 나라종금으로부터 2천955억원을 불법대출 받는 과정에서 상환능력 없는 보성에 대출해준 혐의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한광옥은 나라종금 대주주인 보성그룹 측에서 1억1천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 등)로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2년6개월에 추징금 3천만원을 선고받은 바 있다. 김홍일은 1999년 10월~2001년 12월 네차례에 걸쳐 1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박주선(민주당)은 동생 계좌를 통해 2억5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영장청구가 된바 있었던 사건이다. 나라종금 게이트의 경우 본질적으로는 로비의 대상에는 민주당 구주류가 핵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수사가 종결된 나라종금 게이트에서 ‘목적이 불분명한’(?) 정치자금이 노무현 캠프에 흘러갔기 때문에 측근비리 특검을 통해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노무현 측근 구속 1호인 염동연은(대선후보 정무특보)나라종금 대주주인 김호준씨한테서 2억8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현재 보석으로 나옴) 3억9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안희정은 불구속 기소된 것이 시발이 된 것이다. 나라종금에 대한 수사가 작년 봄 재개되면서 측근비리가 문제가 되었고 정치권 내부의 공방으로 특검이 진행되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노무현 캠프의 매카니즘 노무현의 측근비리 조사는 현재 특검을 통해서 수사가 진척되고 있다. 노무현의 측근비리는 집권 이후의 권력형 비리보다는 대선전후로 정치자금과 관계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만 측근비리도 무시할 수는 없다. 늘어나는 측근들의 구속자 숫자와 밝혀진 혐의들로 노무현 캠프가 민주당 대선 경선과 2002년 대선을 겪으면서 필요한 정치자금역시 기업으로부터 후원에 의존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희망돼지’가 어설픈 선전문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무현 캠프 즉 90년대 초반부터 노무현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다는 가신들은 대부분 수사의 대상에 올라와있다. 특히 안희정은 노무현 캠프의 실질적 재정책임자였다.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선대위 정무팀장이었지만 동시에 비공식적인 재정책임자였다. 그 외에 염동연 전 대선후보 정무특보,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등이 노무현의 충실한 가신들이다. 다시말하면 노무현 캠프의 불법정치자금을 형성한 핵심군인 셈이다. 최근 구속되거나 수사 중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썬앤문 문병욱 회장등은 주요한 노무현 캠프의 후원인맥이다. 특히 태광 박연차화장의 경우 노무현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 왔는데 정부 출범 이후 박 회장의 셋째딸이 청와대 국정상황실 직원(8급)으로 채용되고 2003년 4월엔 노 대통령의 친형 건평(健平)씨의 경남 거제시 구조라리 땅을 매입한 사실이 드러난 바가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연차는 한나라당 재정위원이기도 해서 금 번 대선 때 특별당비로 10억원을 낸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음으로 양으로 노무현을 지원한 패트론이라 할 수 있다. 그와 이기명 전 노무현 후원회장간의 땅 매매도 장수천 빛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는 이상수 의원에게 대선전 현금 20억원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자인한 것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노무현 가신그룹의 비리현황 노무현의 가장 핵심측근인 안희정은 대선당시 별도의 자금담당자였다. 열린 우리당의 충청도 준비위원장이 된 안희정은 현재 그가 시인하고 고소장에 거론된 건만 성명 불상자들로부터 6억원 수수, 선봉술을 통해서 강금원으로부터 4억5000만원을 수수, 이광재를 통해서 썬앤문으로부터 1억원을 수수 삼성그룹으로부터 10억원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희정은 또 대우건설 쪽으로부터 경선을 앞두고 5천만원 대선을 앞두고 1억75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안희정은 강금원으로부터 장수천의 빛 면제 면목으로 19억원을 무상대여 받았다. 점입가경인 것은 대선이후 안희정이 작년 3월과 8월에 태광실업과 건설업체 반도로부터 각각 2억원씩 총 4억원을 받은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외에 작은 푼돈(?)까지 합치면 현재 안희정은 40억을 넘게 수수한 것으로 드러난 상황이며 50억 돌파가 멀지 않았다는 추측도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반미청년회를 이끌었지만 자신의 꿈이 집권당의 사무총장이라는 한 타락한 386의 현실이다. 안희정의 검은 돈은 강금원의 조카 계좌를 통해 관리되고 있었다고 한다. 최도술은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을 지냈고 대선당시에는 새천년민주당 부산시지부 선거대책본부 회계책임자였다. 그는 이영로를 통해 SK손길승으로부터 대선직후 11억원을 수수받았다. 현재 이 금액은 이씨에게 2억원, 최씨에게 3억9000만원, 그리고 전 장수천 대표 선봉술씨에게 2억3000만원이 건너간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확인된 8억20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8000만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검찰이 추적중이다. 이 사실은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이 폭로하면서 제기되었는데 정치권의 폭로전이 항상 허황된 쇼만은 아니라는 진귀한 케이스다. 물론 최도술의 비리 역시 이에 그칠 리 만무하다. 검찰은 청와대 총무비서관 재직 시절인 기업체들로부터 그가 삼성물산 2100만원, 현대증권 500만원 그 외 기업체로부터 4700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혔다. 총무비서관 출신답게 불법자금을 받아 넣어둔 계좌는 청와대의 운영자금을 관리하는 계좌였다고 한다. 현재 그가 대선전후로 수수한 금액은 약 18억원 정도다. 지난 대선 당시 최도술이 부산책임자였던 만큼 부산지역 재계와의 유착관계도 포착된 상황이다. 부산상의 현재 회장인 김성철이 최도술에게 사무실을 무상대여 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성철이 운영하는 국제종합토건이 화의(和議)중인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대선직후에 부산상의 회장에 선출된 사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또 대선당시 부산상의 회장이었던 넥슨 회장 강병중은 부산지역 기업체로부터 대선자금을 모금해 정치권에 전달하는 창구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최도술은 넥슨 타이어에서 대선후 1억 남짓한 돈을 수수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일단 수사는 대선당시 주요 재정담당자였던 안희정과 최도술에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양길승,이광재,민병찬등이 수사의 대상에 올라와있다. 양길승 사건과 관련해 청주 ㅋ나이트클럽 소유주 이원호를 중심으로 한 수사도 김진홍 특검팀을 통해 현재진행 중이다. 노건평의 처남인 민병찬은 병원을 운영하다가 부도가난 신용불량자지만 최근 2개월간 투자목적이 불분명한 펀드를 650억원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이광재는 안희정과 함께 노무현의 오른팔로써 현재로서는 썬앤문과 관계된 1억원으로 수사를 받았고 염동연은 이미 나라종금등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현재 보석으로 석방되어있다. 노무현의 친위 기업 <장수천> 각종 비리 사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장수천’등의 기업들은 우리가 노무현 캠프의 재정적 매카니즘을 이해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곳들이다. 노무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장수천’외 몇몇 기업은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이름들이다. 이 기업들은 노무현의 최측근들이 1996-7년 무렵에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우리들 그룹’을 창설(?)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수 사업부문으로 장수천(이후 워터코리아)과 판매회사인 오아시스워터, 자동차보험 판매 부문, 법률 사업부문, 컴퓨터프로그램 사업부문 등 4개 분야에서 수익사업을 벌여 ‘미래의 꿈나무 노무현을 키우는 종자돈’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결국 노무현의 측근은 dj의 동교동계나 ys의 상도동계와 유사한 가신그룹으로써 음으로 정치자금을 형성한 것이다. 당연히 장수천 혹은 그 이후 이름이 바뀐 회사들에는 노무현의 측근들이 포진해 있었다. 장수천의 사장을 지낸 선봉술은 노무현의 고향친구이면서 90년대 초반부터 노무현의 실질적인 재산관리였으며 최도술도 장수천의 이사였다. 안희정은 오아시스 워터의 사장을 역임했으며 실질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장본인이다. 노무현의 비서관 출신으로서 부산상고 선후배들이 만든 ‘노무현후원회’ 사무국장, 부산상고 동창회 차장 등을 지낸 홍성태도 빼놓을 수 없다. 홍성태는 장수천의 대표로 있으면서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4년 후배인 썬앤문 그룹 문병욱 회장이 98년 4월에 설립한 생수회사 ㈜명수참물의 이사로도 등재돼 있었다. ㈜명수참물이 장수천의 서울 판매회사였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장수천을 두고 한국판 <워터게이트>라는 조롱도 있다. 조선일보의 표현이다. 전방위적인 청탁과 로비 <썬앤문> 세간의 고정관념과 달리 썬앤문은 통일교 관련 그룹이 아니며 송도비치호텔, 호텔 미란다, 라마다 호텔등 호텔관련한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는 관광전문기업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썬앤문 그룹은 노무현 캠프의 ‘중간급’ 후원자 정도의 위치였다고도 한다. 현재 언론과 민주당 김영환 의원등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그 ‘중간급’인 썬앤문 그룹은 로비의 대가로 특혜 대출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다. 내일신문이 입수한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썬앤문그룹 계열사들은 지난 99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6개 시중 금융기관으로부터 모두 1316억2200만원을 대출받았다. 특히 이 가운데 84%에 달하는 1104억원이 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지난 2002년 4월말 이후 한해동안 집중 대출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실제 썬앤문의 대출은 6개 금융기관에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국세청에 로비를 통해서 23억원의 세금을 감면받기도 하였다. 썬앤문 문병욱 회장은 지난 4월 세금감면 청탁과 함께 국세청 간부에게 5000만원, 전직 동두천 시장에게 3억원을 건넨 혐의로 구속돼 지난 10월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난바 있다. 특히 감세와 관련하여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대목이지만 문병욱-노무현캠프-노무현-국세청장-국세청 간부로 이어지는 청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썬앤문 문병욱은 주되게 정치자금과 관련된 문제만 그럴 뿐이고 이제는 흔해 빠진 뉴스인 ‘횡령’‘세금포탈’등의 혐의가 덧붙여서 다시 구속된 상황이다. 현재 썬앤문의 구체적인 노무현 후원 금액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병욱이 이광재를 통해서 안희정에게 1억원이 건네진 것은 밝혀졌으나 그 외는 오리무중이다. 다만 노무현이 당선자 시절인 올해 1월께 문 회장을 초청해 식사를 한 사실은 확인되었으니 그 유대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노무현이 썬앤문의 고문 변호사였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썬앤문의 로비가 비단 노무현캠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역시 구속된 썬앤문의 부회장이었던 김성래는 민자당 충남금산 부위원장 경력을 내세워 한나라당 전담 로비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김성래는 최근 자신의 탄원서에서 대선을 앞둔 지난해 12월 3일, 문병욱이 한나라당 후원금 모금행사에서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의 부인 한인옥씨를 만나 한 시간 동안 면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문병욱이 하루 동안 오후에는 노무현 후보 측근인 이광재를, 또 저녁엔 다시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을 만난 사실도 밝혔다. 검찰이 밝힌 금액은 민주당 내에서는 이광재 1억 500만원, 여택수3000 만원, 신상우 전 의원 2000만원으로 다 합해 기껏(?) 1억 5500만원이다. 한나라당 의원 6명에 대해서는 더 조사해야 하는데 총액은 2억 8000만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진실은 실로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대선을 즈음한 썬앤문의 정력적인 로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구)민주당의 불법정치자금과 부패비리 주지하다시피 대선자금이 노무현의 측근들에 의해서만 형성 될 리 만무했다. 열린 우리당과 민주당의 상호폭로전덕분에 민주당의 불법정치자금의 규모는 실로 방대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노무현의 선대본장이었던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 노무현 죽이기의 선봉에 있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민주당은 대선 후 발간한 대선백서를 통해 선거비용 총액은 274억1800만원이며, 정당 활동비를 포함해 지출 총액이 360억원에 그쳤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이후 이상수 민주당 사무총장이 계산에 차이가 있으며 민주당 대선자금 규모는 “국고보조금 250억원을 포함하면 모금액 토털이 390억원 정도”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이 역시 허튼 선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이다. 최근 민주당(분당이후)은 지난 대선 직전인 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자금 42억1900만원을 부산과 호남을 제외한 전국의 지구당에 제공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대선 지구당지원금 조사위원회’ 관계자는 2월 3일 “일단 최도술(崔導術)씨가 관리한 부산과 호남을 제외한 전 지구당에 대선 직전 500만원에서 1천만원의 긴급 자금이 내려간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적어도 20억선은 탈법자금이라는 이야기이다.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자는 현역 의원만 열린우리당에 정대철 이상수, 민주당 박주선 이훈평 김운용 5명이다. 이상수는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 총무본부장을 맡아 대선자금을 총괄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의원은 지난 대선때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은 10억원(한화), 6억원(금호)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금액 중 일부를 개인 영수증 처리한 10억원(현대차). 10억원(삼성), 10억(SK)등을 모금했었다고 한다. 한화건설에서 10억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이재정 전의원은 전달자로서 구속되었다. 검찰의 영장을 물리력으로 저지한 한화갑의 경우 검찰이 구속영장에서 "2002년 4월 김원길 의원(경선당시 한화캠 선대위원장)을 통해 하이테크하우징 측으로부터 대표 경선자금 명목으로 6억5천만원을, 2002년 2월에는 SK 측으로부터 대통령 후보 경선자금 명목으로 4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여기에 굳모닝 윤관열 게이트로 구속된 정대철의 정치자금 수수내역도 드러난 상황이다. 굳모닝에게 4억 2천만원을 수령한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는 현재 구속 수감 중에 있다. 그는 굳모닝에게서 수령한 금액 중 2억원은 대선자금에 쓰였다고 밝혔다. 그는 각종 후원금액 10억원을 이상수에게 전달했다고 밝혔으며 이상수 역시 이를 시인한 바 있다. 정대철은 하우테크하우징(대우건설 협력업체)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대우건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정치자금은 터져 나왔다. 미8군내 카지노와 강원랜드 VIP출입으로 물의를 일으킨 송영진 전의원이 뇌물 성격으로 2억원을 정대철이 3억원을 대우건설로부터 받았다. 대우건설은 후술하겠지만 한나라당 서정우 15억 그리고 전술했던 안희정 2억원 등 역시 전방위적인 로비를 해왔던 것이다. 그 외에도 직접적인 대선자금과는 무관하더라도 민주당 김방림이 작년 1월 특가법상 뇌물을 4억 2천만원 수수한 것으로 구속된 상황이었다. 이훈평 의원도 최근 제3자 뇌물 공사수주 청탁으로 구속되었다. 이훈평은 2000년 당시 국회 정무위 민주당 간사로 활동하면서 현대측으로부터 정무위 국정감사 증인 명단에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을 제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 D, W사 등 2개 건설업체가 각각 23억8000만원과 115억원 규모의 하도급 공사를 현대건설에서 수의계약으로 수주하도록 도와 준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제적인 스포츠계의 거물이었으며 동시에 국제적인 횡령범임이 드러난 김운용은 횡령, 배임수재로 40억원 가량이 드러나 구속되었다. 그는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등 자신이 총재를 맡았던 체육단체들에서 횡령한 것이다. 태권도발전에 써달라며 기업들이 낸 후원금은 물론 IOC가 배정한 올림픽 수익금까지 빼돌렸다고 한다. 박주선은 특가법상 뇌물로 나라종금, 현대건설 등 2억 8천만원을 수령한 것으로 구속된 상황이다. 열린 우리당의 천용택도 군 장성출신 답게 군납비리 문제로 계속해서 별도의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전통의 강호 한나라당 특검을 쟁취 하기 위하여 최병렬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단식을 했건만 차떼기로 오히려 입지가 좁아진 한나라당의 드러난 불법자금은 현재 600억원선이다. 그런데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했던 이회창 자진출두라는 희극에서 실제 금액을 가늠하거나 알기 어려울 듯하다. 한나라당의 불법자금은 세인의 입방에 오른 차떼기, 장부떼기등이 가장 굵직한 물줄기를 차지하고 있다. 주연배우는 이회창의 최측근인 변호사 서정우와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을 역임한 최돈웅 의원이다. 서정우는 차떼기를 솔선수범한 인물로써 채권장부를 통해서 삼성으로부터 112억원을 LG로부터 150억원을 차떼기로 직접 수수했다. 참고로 LG에 150억원은 공식후원금 30억원을 제외한 것이다. 또 서정우는 현대차로부터 100억원을 현금으로 수수하였으니 총액 362억원이다. 현재 이외에도 서정우는 대우건설과 관련하여 보강수사가 진행중 이다. 최돈웅은 한나라당의 대선 자금을 위하여 기업모금을 주도했으며 서정우와 함께 공모한 경우외에도 SK로부터 100억원의 불법자금을 수수 받은 일이 드러나 구속되어 있다. 또 한나라당 선대본부장이었던 김영일은 한화로부터 불법 정치 자금 10억원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금호그룹으로부터 받은 10억7천만원 상당은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회의원 신경식도 롯데에서 10억원을 받은 건이 드러난 상황이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한화로부터 불법 자금 1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서 구속되었다. 박상규 의원은 대우건설서 2억원을 건네받았은데 그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아 구속되지는 않은 상황이다. 점입가경은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안영근의 충격고백이다. 안영근은 대선당시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자신의 지구당으로 도합 2억5천만원의 선거지원금이 내려왔다고 폭로하였다. 그의 주장을 2백27개 모든 지구당에 적용하면, 대선 당시 한나라당 중앙당이 지구당에 제공한 공식-비공식 지원금은 최대 5백67억5천여만원이고, 불법 지원규모는 2백95억원에 달한다. 이외에도 대선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적지만 의원 비리-뇌물 사건은 끊이지 않고 드러나고 있다. 박주천 의원은 지난 2000년 9월 국회 정무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설 김윤규 사장으로부터 정무위 국정감사 증인 명단에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을 제외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박명환은 자동차 부품업체로부터 6천만원을 받은 것이 드러났으며 박재욱은 자신의 학교인 경북테크노외국어대학의 교비 107억원을 횡령하여 유용한 건으로 구속되어 있다. 박재욱의 경우 경산, 청도가 지역구인데 관할 지역의 시장, 군수에게 공천을 청탁받으며 10억원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고 안상영 부산시장은 진흥기업으로부터 1억원의 뇌물을 동성여객 이광태(47) 대표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등으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중 부산구치소에서 자살하였다. 흑막이 드러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선자금의 실체가 어디까지 규명될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검찰의 수사범위는 한화갑 의원을 구속하면서 대선자금을 넘어서 예비대선격인 경선자금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일찍히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경선도 규정된 금액만으로 치루기 불가능함을 고백한 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당 경선에서 완주한 이는 노무현과 정동영뿐이니 총체적인 대선자금의 수사 폭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흥미로운 문제다. 민주당과 한나라당간의 상호간의 의혹제기에 이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이후의 폭로정국은 점입가경에 이르렀으므로 그 폭과 수위를 가늠하기가 더욱 어렵다. 최근 민주당의 최 일선에서 노무현과 대결하고 있는 김경재 의원은 평화방송에 출연, "몇 조원 규모의 펀드가 K신용금고 등에 있는데, 펀드를 관리하는 증권가의 B고 출신들이 1조원을 뽑아서 1주일간 돌려 시세차익으로 2천억원을 조성, 총선자금으로 보관중이라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인 줄은 알 수 없으나 민경찬이 최근 2개월만에 모은 투자금 650억원도 총선용이라는 견해도 들린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보수정치계의 백전노장 jp가 한나라당의 대선자금의 규모는 900억원선 정도가 아니라 수 천 억원 선이라고 일갈한 것 역시 단순한 정치적 과장만으로 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검찰에 의하여 밝혀진 두 진영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한나라당 598억2000 만원, 노 캠프 65억7200만원선 이다. 최근의 수사들을 보면 대선자금수사를 통한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거나 혹은 기업수사도중에 불법정치자금이 확인된다. 결국 정치자금 형성의 방도가 (기업의 부실 혹은 확장)--분식회계등의 금융수법-비자금마련-정치권 로비(2002대선)의 공식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그룹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분식회계가 있었던 SK경우만이 아니다. 언론에 따르면 현대차가 양당에 준 대선자금이 현대캐피탈을 통해 조성된 비자금이 아니냐는 관측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삼성의 경우 대선자금의 출처가 삼성전기가 납품업체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의 일부이며, LG 역시 LG홈쇼핑 주식을 부당 내부거래 과정을 통해 거액의 시세차익을 챙겨 대선자금으로 제공했다는 의혹이 짙다. 정치자금 제공의 목적이 상대적으로 ‘보험성’이 짙은 4대 그룹 만도 이러한데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재계는 요구하는 자들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정치권은 자신들이 오직 현행 선거형태의 희생양이라며 호도하거나 때로는 경우에 따라 몇 몇 문제 있는 개인들의 행태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화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만들어낸 정경유착의 방식은 이미 DJ정부 동안에도 모두 드러난 바다. 문제는 이 새삼스러운 수사 정국 뒤에 형성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에 있다. 즉 선거 형태 자체가 문제였다고 주장하며 현재의 수사와 정치개혁을 결부시키고자 하는 지배세력의 정치개혁 논의다. 즉 문제 있는 개인들은 ‘물갈이’대상으로 분류하면 되고 보다 관건적으로는 왜곡(?)된 선거형태를 개조해서 구조적인 희생자(?)들을 줄이는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 이 번 수사는 정치자금 문제에 관한 시비를 매듭짓고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미에서의 ‘공작수사’인 것이다. 지금의 대선자금 및 측근비리에 대한 수사가 금융적 비리형태들의 매커니즘과 정경유착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주는 정치권의 ‘각성가’일리 만무하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치자금 수사를 통해서 노무현이 노리는 효과는 지난 1년 동안 답보상태였던 정치개혁의 쟁점을 극대화하는데 있다. 그 저의는 정치자금을 문제 삼아 ‘지구당 폐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식 원내 정당화를 본궤도에 올리는 데 있다. 예컨대 보수정치에서 ‘물먹는 하마’로 통용되는 지구당은 소요되는 과도한 정치자금을 지렛대 삼아 폐지되고 모든 사회적 쟁점들은 난무하는 TV토론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우리는 짧은 헌정사를 통해서도 정치개혁이라는 문구가 언제나 대중의 불만들을 억압하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정당성을 수립하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제기되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전망 하에서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의회’를 정치개혁의 장으로 바꾼다는 포부로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재결집 시키는 것이 노무현의 카드인 셈이다. 정치(자금)개혁이라는 공약을 달성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정당성을 획득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재생산되는 정치-행정-사법구조의 혁신 또는 지배세력의 도덕성 재확립은 단지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노무현의 가신과 열린우리당-민주당, 한나라당의 대선자금과 부패비리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정치자금 문제를 화두로 추진되고 있는 정치개혁이 내재하고 있는 진정한 쟁점을 폭로, 비판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검찰의 수사와 정치개혁 논의라는 양 날개를 올바르게 마주하는 방식이다.PSSP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참여정부'의 악순환 노무현 정권이 '서로 다른 집단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는 약속의 핵심에는 '참여정부'라는 구호가 있었다. 즉 정부가 나서서 정책을 완성하고 집행하기보다는 각 사안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공식·비공식 기관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정부는 공정하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정된 정책이야말로 힘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내건 참여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민주적인 외양을 띠었다. 게다가 노무현 캠프에 '386세대', 운동권 인사가 가담하면서,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오히려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갈등조정의 방식일 뿐이거나, 문제의 책임을 정부의 밖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정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사안에 관해 개혁법안이나 '사회적 협약'을 추구한다. 하지만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대화와 타협은 사실 절충적인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모두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오히려 종종 갈등을 더 증폭시키거나,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문제 해결이 고착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정부가 이해당사자의 '집단 이기주의'를 운운하며, 그 책임을 정부 밖으로 전가하게 된다. 결국 악순환이 성립된다. 특히 노동자에게 그 참여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더군다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곧 '시민'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포괄하려는 참여의 범위는 다양한 직업적 집단이나 NGO, 전문가 집단이다. NGO가 불안정한 노동자 대중을 대체하여, 이들 집단의 '관리의 주체'로 승인된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정치적 모순 물론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란 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양한 초민족적 국제기구들은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고안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는 정부재정, 금융 정책을 비롯해 거시·미시 경제정책, 노동, 교육, 여성, 사회복지, 인구 노령화 등 다루는 사회이슈를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정책연구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각론들을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투자에 안정적이며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성장 잠재력의 고갈'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기업집단간, 개인간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사회적 위기의 지표들이 출현하고 있다 - 실업의 만연('고용없는 성장'), 가계대출과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중소기업 붕괴, 농업 해체, 이민열풍과 두뇌유출 등등. 물론 몇몇 특화된 산업과 기업이 선두를 달리며 초민족 기업으로 자태 변환을 시도하고 일부의 엘리트집단이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영유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하향 평준화되거나 사회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 (금융)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라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지상명령와 노동권-시민권의 보편적 요구는 근본 모순을 낳는다. 개혁과 정치의 슬림화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이 동반하는 정치개혁은 근본적 모순을 비켜 간다. 그 목적은 오히려 단순하다.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 비용을 경량화하자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 자체를 행정적 관리로 대체하고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어느 때 못지 않게 강한 '리더쉽'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은 계속 축소된다. 정당들이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지지 기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입법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주어진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의 장소는 행정부고, 행정부는 수완을 부려서 해결사의 노릇을 해야한다. 정당성의 위기,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 사회운동들의 저항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부의 권력은 증대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결코 '강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DJ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구호를 항상 주장했다). 물론 과거 군사독재의 폭압적인 동원 체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데, 문제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 체제다. 이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형된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마치 학계나 NGO의 전문가들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어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게 가장 우수한 활동인 것처럼 평가된다 (NGO가 정치인을 욕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무식하다'는 것이다). 이미 정당들은 스스로 '국민정당'이나 '무지개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적은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재조정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그 결과로 정치비용의 경량화도 중요한 요구다 (최근 전경련의 행보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개인적 부패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요 이슈에는 각 정당들의 '당략'적인 목적이 담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통 '지역구도 타파'로 선전이 되는 간선제 국회의원의 확대, 선거구 재조정 등은 한나라당의 의석 비율을 잠식하여 정당들의 세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선전되지만, 최종적인 목적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계급 또는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지분이 걸린 생사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부패한 국회의 문제를 대비시키며, 거듭하여 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공무원의 할 일이 아니다), 국회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고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이것이 미디어의 요구다. 참여정부와 코포라티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심각한 효과는 '참여'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놓고 대중운동들을 분할한다는 점이다. '참여'는 사실 대중운동에게 매우 부분적인 타협의 가능성을 흘려주지만, 그 악순환의 끝은 부분적인 포섭과 배제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특정한 분야나 사안별로 '참여'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운동은 실제로 '참여냐 비타협적 투쟁이냐'고 하는 의도된 쟁점에 휘말리게 된다. 또는 각자 자기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로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개혁안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빠지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로 사회운동의 활동은 공통의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부문이나 분야별로 분산된다. 그리고 주요한 활동이 정부와 '정부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거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애초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통과를 저지하거나 또는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 때 특히 총선에서 당선 또는 낙천·낙선운동을 무기로 삼게 된다). 사실 이미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사회운동에서 대체로 정형화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효율성과 편의성이라고 하는 '덕목'을 내세우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단일 이슈에 집중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효율성, 그래서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의 정당화, 코포라티즘적인 동원에서의 편의성 등등. 이는 많은 운동단체들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활동은 종종 운동 주체화 과정이 제거된 협상과 동원 체계로 전환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속력을 갖는 협상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제도화를 추구하게 된다. 또한 협상이 성사될 경우에는 그것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관철시켜야 한다. 오히려 정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흡수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 부문이나 분야를 이슈로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데 근본적 난점을 갖는다. 물론 특정 분야 개혁에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우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일한 이슈, 협소한 쟁점이 개인들을 일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장기적인 운동 주체화의 과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일 이슈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정책아이템을 찾아 부유한다. 사회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 그러나 이것이 운동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중대한 문제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의 국가장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없는 조건이다.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해체, 학교의 붕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참여세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직격탄이다 (해고나 카드 빚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인가? 그에 따른 가족의 파탄, 기존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공포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회적 노동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과 연계된 교육의 위계화와 실업의 공포는 교육을 붕괴시킨다. 또한 빈곤의 여성화는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해체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개인들의 극단적인 불안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종종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회정책은 파편적인 미봉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운동은 이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전환하지 못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도 그 괴리를 따라 잡지 못한다 ('최대한의 임금상승'과 '고용안정'으로 가족과 학교를 매개로 하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 범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또는 종종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분적인 정책공약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실로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몇 가지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들의 붕괴로 인해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들에 대해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운동을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이 즈음하여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토론하게 된 맥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1990년대 말 IMF 경제개혁과 민주노총 위기논쟁이 불거졌을 때 우리의 화두였다. 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공통의 과제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계급형성적 노동운동)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노동자대중 내부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빈곤 대중 문제, 노동자운동 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문제를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평의회에 대한 지향(코포라티즘이 아닌 노동자통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빈곤, 성, 인종의 문제는 필연코 공동체의 문제를 낳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관성화된 사업 패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운동방식을 개척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하반기 사회개혁투쟁'으로 고착화되고,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사실 남아 있는 우리의 무기는 시기집중 파업이 유일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도부 교체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당장 어떤 활동으로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억압의 관용' 우리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오히려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신임 선언은 이미 실패한 정권의 '국민협박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겠다'는 정말로 거대한 협박.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을 승인하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코포라티즘적인 지향과 활동 방식을 체화한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은 달가운 일이 된다. 그가 사회운동의 특정한 부위의 '후견인' 역할을 자인하는 한에서. 오히려 억압이 일상화된다면 '관용'은 보호자가 베푸는 큰 혜택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와 '억압의 관용'은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다. 참여정부의 논리가 대중운동의 동원과 무력화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 억압의 관용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2003년 12월 18일에 '자유무역협정/wto반대 국민행동'에서 개최한 '반세계 화활동가수련회' 자료집입니다. - 2004년 WTO/FTA/자발적 자유화조치 대응투쟁의 정세적 맥락과 중요성 - 2004년 반세계화 운동의 방향과 투쟁계획 -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 추진현황 - 세계사회포럼과 반신자유주의/반세계화 국제연대운동의 쟁점과 방향 - 교육개방 진행상황 - 문화개방 현황과 문화협약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2003년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이제 2003년이 저물어가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망년(忘年)이 아니다. 2003년은 노동자 민중에겐 잊을 수 없는 죽음과 절망의 한 해였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중들의 삶은 빈곤과 처참함의 수렁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노동자, 민중에게는 어떤 이익도 없는 '외자유치'라는 허울좋은 명분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생존의 요구와 저항은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당하며 죽음으로 내몰려야 했다. 농민들은 WTO와 자유무역협정의 물결 속에서 잊혀지고, 존재하지 않는 국민들이 되었다. 이 땅의 누구 하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는 한 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2004년도 암울한 전망을 지속할 뿐이다.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끔찍하고 이례적인 사건들이 이제는 매일같이 TV와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이 빈번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제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이 땅 민중의 삶이다. 극복될 것 같지 않은 경제불황 속에서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고, 더욱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삶에 남은 것은 빈곤과 불안, 절망과 죽음이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 민중의 절망과 분노 앞에서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런 정권의 대응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시간의 단위에 따라 바뀌는 한 해가 우리에겐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무엇 하나 전진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에서 신자유주의 공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우리에게 2004년은 여전히 2003년의 연장이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투쟁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바꿔내는 것일 뿐이다. 올해 내내 진행해왔던 많은 투쟁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진행해왔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망년과 송년이 아닌 멈출 수 없는 투쟁으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할 투쟁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확인하자. 학살동맹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 규탄한다! 노무현 정권은 23일 국무회의를 열고 국회에 상정할 이라크 추가 파병동의안을 최종 확정했다.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 즉시 파병동의안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국회에 상정하고 가능한 연내에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미 올해 초 서희, 제마 부대의 파병 결정은 노무현 정권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또 한 번의 파병 결정으로 노무현은 자신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번 파병동의안은 자본 투자의 불안요인을 제거하고 세계화 과정에서 드러난 극단적인 배제와 억압에 따른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미국의 '예방전쟁'에 자신들의 전망을 일치시키겠다는 의지를 거듭해서 확인시켜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파병 결정의 과정은 노무현이 이야기해온 '대화와 타협'의 기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파병동의안을 처리하기 앞서 노무현은 '국민의 합의'를 누누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국민과의 합의 과정은 순전히 말뿐이었고, 파병은 반대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노무현의 대화법이 결국은 민중을 기만하고, 달래기 위한 겉치레에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이 정한 룰에 따른 대화, 자신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화가 아니면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는 그의 정치기술이 파병문제에 있어서라고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이라크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미국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처럼 '악의 축'을 '산뜻하게' 제거하고 새로운 통치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결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패권과 점령에 맞선 이라크 내부의 저항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 이라크 민중들을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폭력적인 점령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파병에 동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전투병, 비전투병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파병은 그것이 어떤 성격의 군대라고 할지라도 곧 미국의 점령통치와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더불어 유의 깊게 봐야할 점은 전 세계적으로 추가파병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예방전쟁', '선제공격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군사전략 재편과 깊은 연관을 맺는 문제다. 이 새로운 전략에 따르면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된다. 그 이유는 우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신흥시장으로 미국 경제에 중요한 위치라는 점, 지역적 수준에서 군사적인 패권 국가가 불분명하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사적 경쟁 혹은 충돌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잠재적으로 미국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의 부상을 제어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구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고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파병 결정이 미국의 군사전략에 동참하겠다는 굳은 의지임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파병을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투쟁은 올해 내내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병을 막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전략에 동참하려는 정권의 전망을 비판하는 것,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투쟁의 강고한 기초와 흔들리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로 강력하게 불붙어야 한다. 파병반대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추방 분쇄! 이주 노동자 전면 합법화 쟁취! 현재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에 맞서 농성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명동성당 농성단의 경우 현재 농성 40일을 넘었다. 정부는 내년 8월부터 시행될 고용허가제에 앞서 현재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들을 '정리'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이 바로 4년 이상 불법체류자를 자진신고를 통해 출국시키거나, 강제추방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강제추방과 예정되어있는 고용허가제는 이미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일부가 되어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와 통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이 필요는 오히려 자본과 지배계급 측이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점점 더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키고, 이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통해 노동력의 공급과 노동조건을 조절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의도하는 바이다. 불안정 노동층에 있어서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는 이제 필수조건이다. 하기에 정부도 더욱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고용허가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말로는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정해준다고 하지만, 노동기본권은 하나도 보장되지 않으며, 한 술 더 떠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통제한다. 결국 고용허가제의 목표란 불법체류자들을 정부의 관리가 가능하도록 등록시켜, 적절히 조절, 통제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투쟁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은 불안정 노동에 맞서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남한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내는 당당한 노동자로서 스스로 일어섰다. 강제추방을 박살내고, 고용허가제를 철폐시키는 것은 이들이 노동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요구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정책은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통해 노동자들을 분할시키고, 관리한다. 함께 노동하며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불법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으로 차별하는 것, 함께 노동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남성보다 열등한 여성으로 차별하는 것,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 이미 수많은 분할과 차별이 우리 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자들 스스로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고, 단결하고 연대함을 통해서만 승리의 길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차별과 분할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단초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단결을 이루는 투쟁은 우리 운동의 매우 절실한 과제이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야 할 불안정 노동을 철폐시키는 투쟁이다. 명동성당에서, 전국 곳곳에서 고용허가제를 철폐하라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재 진행중이다. 핵폐기장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 대체 에너지 개발! 핵폐기장 건설을 막아내기 위한 부안 주민들의 끈질긴 투쟁은 결국 노무현이 한 발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부안에 핵폐기장이 건설될 수 없음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투쟁이 끝났다고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 부안 주민들은 스스로 투쟁의 과정에서 핵폐기장이 핵 산업의 확장, 강화를 위한 것임을 알게되었고, 따라서 문제는 부안에 건설될 핵폐기장을 막는 것을 넘어서 남한의 어느 곳에서도 핵폐기장이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정부와 군수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기만하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촛불집회를 벌였던 민주광장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함께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자치와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이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전면 백지화되고, 주민들이 투쟁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획득한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성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입장은 주민투표를 통해 유치여부를 결정하고, 다른 지역의 유치 신청을 받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현재 국회에서 통과 절차에 들어가 있는 '주민투표법안'을 통해 이후 지방자치단체 등의 주요 정책에 대해 주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주민투표를 통한 부지 선정은 크게 두 가지 지점을 은폐, 왜곡한다. 우선은 지역경제 발전이라는 문제다. 노무현 정권이 천명한 외자유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이라는 발전전략에 따르면 지역경제는 발전은커녕 오히려 지역은 배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금융인프라가 서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금융 투기가 주를 이루는 외국인 자본의 투자가 지역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보니 지역경제는 날로 쇠퇴하고, 인구도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방책이라는 것은 지역별로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경제특구, 관광특구 등 실제로 경제 성장의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노동권과 공공성, 환경을 파괴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핵폐기장도 그것의 위험성이나 그것이 향후 핵 산업의 확장에 가져올 영향은 고려되지 않은 채 지역경제의 발전을 위해 유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앞서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부안에서 핵폐기장 건설이 불가능해진 지금의 상황에서도 지역경제 운운하는 기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는 지역의 배제와 소외가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은 채, 핵폐기장 건설을 통한 지역경제 회생이라는 불가능한 정책을 던져놓고 주민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오히려 '핵폐기장이라도 유치해 먹고 살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겠다며 주민투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민투표라는 방식이 가지게 되는 문제가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안을 만들면서 정권은 부안이 아닌 다른 지역에 유치할 때도 주민투표라는 방식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역발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민투표는 주민들의 민주적인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기보다는 정권의 정책을 갈등 없이 추진할 수 있는 '50% 이상의 찬성'이라는 허울을 만드는 방식일 수 있다. 부안 주민들이 정권과 공권력의 폭력과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탄생시킨 민주주의가 '주민투표법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안 주민들은 촛불 집회와 민주광장에서 일궈낸 자신들의 민주주의 속에서 핵폐기장 건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가지는 의미를 배웠고, 지역경제 회생이 정부가 던져준 시설을 유치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여기까지 전진했다. 이 성과를 온전히 남기는 것은 자신의 미래와 그를 위한 투쟁을 민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민투표법안'으로 민중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투쟁의 가능성마저 봉쇄하는 것은 부안이 남긴 성과를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전국의 어느 지역에도 핵폐기장이 들어설 수 없도록 계속해서 투쟁해가는 것, 부안 주민들이 남긴 소중한 민주주의를 주민투표로 갈음하려는 시도를 막아내는 것. 우리가 이후의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이다. 부안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병과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그리고 부안의 핵폐기장이 아니더라도 끝낼 수 없는 저항과 투쟁이 민중의 삶 곳곳에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있는 오늘이고, 끝나지 않은 2003년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민중에게 새해의 해맞이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