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는 표를 생략했습니다. 첨부된 한글 파일을 참조하세요.] "만일 노동자가 자본과의 일상적인 충돌에서 비겁하게 양보한다면 그들이 한층 더 광범한 운동을 일으킬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은 임금제도와 연관되어 있는 노동자의 일반적 예속상태를 전혀 도외시하면서까지 일상적 투쟁의 유한한 성과를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그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일상적 투쟁에서 그들은 오직 결과에 반대하여 싸울 뿐이지 그 결과를 낳는 원인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현존 체제의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그치고 그와 동시에 현존 체제를 변혁하려 하지 않으며 또 노동계급의 궁극적 해방을 위한 즉 임금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서 노동조합의 조직된 힘을 이용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임금, 가격, 이윤』(마르크스, 1865)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요구투쟁은 최종목표를 위한 투쟁과 융합해야 한다." 『붕괴경향과 계급투쟁』(헨릭 그로스만, 1929) 1. 최근 노동자운동에서 임금투쟁의 경향 1) 낮은 임금인상률 97년 이후 한국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지체되어 왔다. 2004년 11월 30일 현재 100인 이상 지도대상 사업장 노동부 조사에 의하면 이들 사업장에서 협약임금인상률이 임금총액기준 5.5% 인상이었고, 이는 2003년의 6.5%에 비해 약 1%포인트 하락한 것이었다. 또한 18% 사업장에서 동결, 0.4% 사업장에서는 임금삭감이 발생했는데, 10월 말 노동부 자료에 의하면 동결, 하향조정 사업장 가운데 300인 미만 중소기업이 83.0%(550개소/663개소)를 차지했다. 인플레이션(국내총생산 디플레이터 2.7%, 내수 디플레이터 3.8% 상승)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실질임금이 삭감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문별로 보면 민간부문 5.6%, 공공부문 2.8% 인상되었는데, 공공부문은 전년도(5.6%)에 비해 임금인상률이 훨씬 낮아졌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공공부분은 전체적으로 실질임금이 삭감된 것이다. 2004년도 같은 임금 인상 억제는 98년, 99년에도 발생하였고 이런 누적 효과로 인해 아이엠에프 위기 직전인 97년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영업잉여에 비해 피용자보수의 증가율을 현저히 낮추고 있다. 노동소득분배율 또한 낮아지고 있다. 2) 노동자간 격차 확대 100인 이하 사업장의 임금인상 실태는 어떨까? 이는 <표 3>에서 보듯이 5인-99인 사업장의 임금인상률은 100인 이상 사업장에 비해 임금인상률이 현저히 낮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총액은 2000년 53.7%, 2001년 52.6%, 2002년 52.7%, 2003년 51.0%로 그 격차가 확대되다가 2004년 51.9%로 조금 줄어들었다. 3) 공동임투 실종 현재 임투는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된다. 산별노조의 임금과 관련한 교섭은 작년의 보건의료노조 사례가 있었으나 산별협약 체결에 우선순위가 놓이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연맹이 진행하는 대각선교섭 공동교섭 등도 개별노조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공공부문에서는 예산제약선을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사적부문에서는 조합원들은 사측과 조합의 제시율을 보고 대체로 그 중간선에서 타결될 것으로 예상해서 임투의 활력이 사라진지 오래고 지역연대투쟁 역시 실종되었다. 그래서 총연맹이나 연맹의 경우 임단투 시기에 구조조정이 걸린 커다란 사업장을 중심으로 중앙전선을 설치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이것이 패배하거나 허물어지면서 전체 전선은 무너지게 된다. 4) 관성적인 임투 가장 큰 문제점은 임투 자체가 변화없이 반복되면서 운동적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임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고, 운동주체들이 이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어떠한 정치적 의식적 장을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적당한 수준에서 임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2. 계급적 연대와 혁신으로 그렇다면 임투를 어떻게 운동적으로 복원, 혁신 혹은 확장할 것인가? 관성적인 임투를 넘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각성하고 정치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운동적 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1) 노동자내의 분할 및 분열을 극복하는 임투를 지향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계급형성을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갖가지 구획선으로 나뉘어 있는 노동자계급 내의 단결과 연대를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임투도 조직노동자의 임금인상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연대와 단결을 목표로 하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예컨대 비정규직을 비롯한 저임금 중소영세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더 많게 또는 적어도 동일하게 임금인상되는 방향이어야 하고 더 적은 액수가 인상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 원하청 공동투쟁 등을 통해서 이러한 지향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교육, 의료, 주택비용을 줄이는 것을 간접적인 임금인상으로 보고 이를 '사회임금'으로 주장해왔는데, 그 주장이 사회적 교섭, 사회적 협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를 계급임투라 부르고 기존의 임투가 아니라 이 투쟁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사회임금 의제와 사회적 교섭이 맞물렸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이 되는 바다. 조직노동자가 고용이나 임금에 있어서 양보의 의사를 비친다고 해서 국가가 '사회임금'을 확충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이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시대규정의 의미이다), 설사 일정한 개선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정도는 고용 임금의 양보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일 것이고 그 방식에 있어서도 노동자 대중의 투쟁을 통한 자기조직화의 기회를 헌납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하겠다. 2)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을 임투의 공동과제로 해야 한다 현재 민주노총은 1)최저임금법 개정, 제도개선 2)최저임금 현실화 - 전체노동자 평균임금의 50%로 인상 3)산업별 최저임금협약 쟁취 확대, 지역별 최저임금협약 추진 4)최저임금 적용 쟁취 5)최저임금 위반하는 도급계약 제도 개선 등을 최저임금 투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최저임금 현실화의 문제는 직접적인 적용 대상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문제이자 단위사업장으로 갇힌 임투를 넘어서는 문제다. 즉 기존의 임투를 사회적 연대투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서 최저임금 투쟁을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 조직율이 10%대에 머무르고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직된 정규직만을 표상하는 운동을 넘어서고 다수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으로 임투를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도 최저임금 투쟁은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또한 지역연대 투쟁을 활성화시킴에 있어서도 공동임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최저임금 투쟁이 유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업장 내부로만 집중되었던 역량을 의식적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고 간부수준의 투쟁을 조합원까지 확대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착취와 저임금 노동,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여성노동 문제, 노동자 연대 등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3) 임금억제와 임금격차 실태를 폭로하고 고임금 이데올로기를 분쇄해야 한다 경총은 3월30일 "대기업 노조가 올해 임금 동결에 협조한다면 올해 임금 인상분(3.9%)을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경총은 올해 임금 가이드라인으로 '임금총액 기준 3.9% 인상, 1천명 이상 대기업은 임금 동결'을 제의했다. 경총 김영배 부회장은 "현대차의 경우 연간 인건비 2조9천억원 중 4%만 정규직 노조가 양보하면 약 1천억원의 자금을 창출해, 비정규직의 임금을 지금보다 60%가량 인상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한겨레21 2005. 4. 26). 그러나 이는 최근 자본의 이윤율이 엄청나다는 것을 은폐하면서 정규직 노동자의 출혈로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을 올려줄 수 있다는 전형적인 조삼모사식 이데올로기 공세다. 자본의 수익률은 오히려 증대했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 2004년 들어 증가세가 뚜렷하다. 개별기업의 이윤을 파악할 수 있는 경상이익률에 있어서도 확실히 증가하였다. 또한 앞서 <표2>에서도 보듯이 노동소득분배율이 계속 떨어지는 것은 전체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몫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경총의 말은 자본이 더 많이 가져가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고 줄어든 노동자 몫을 나눠가지라는 말이다. 자본의 이윤 증가는 지난 몇 년간의 살인적인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에 대한 공격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 결과 노동자는 가난해졌고 주주, 자본가들은 이득이 늘어났다. 임금동결을 말하는 그 대기업들이 그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은행의 경우 2004년, 5500억의 순이익을 보고도 3800명을 감원하기로 했다. 고임금 이데올로기 역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노동조건을 은폐하고 있다. 제조업 대공장, 예컨대 양대 자동차회사의 경우 기본급이 40%밖에 안되는 조건에서 특근과 잔업 등 출혈적인 장시간 노동을 통해 생활임금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근, 잔업 차이에 따라 임금격차가 커져서 노동자 사이에서 물량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4) 구조조정, 노동법 개악저지 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 특히 비정규 노동법개악, 노사관계 로드맵 문제는 노동자운동의 향후 지형을 바꿔놓을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따라서 임투에 있어서도 사업장 내 현안투쟁 뿐 아니라 전체 노동자와 함께 하는 투쟁을 결합시켜야 한다. 상층 교섭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지역과 현장에서 연대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 운동의 동력을 형성해야 한다. 3.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임투를 위해 임투를 혁신하고 확장하자는 것은 노동자들의 대중적 참여와 이를 통한 교육적 정치적 각성의 공간을 현장과 지역,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새로이 구축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이는 임투를 조합주의적 실천으로 치부하면서 시민운동적 의제나 통일운동을 사회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임투를 이것들로 대체하자는 것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오히려 민주노총 건설 시기부터 얘기되어 온 산별-사회개혁투쟁-사회임금 등은 현재 형해화되고 도식화된 임투를 극복하는 사고와 행동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임투의 표상을 새롭게 창출해내면서 임투가 노동자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 계급형성의 경로가 될 수 있도록 발상을 바꿔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PSSP
4.20 장애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장애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억압과 차별 지난 3월20일, 어묵을 팔며 하루 1-2만원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청각장애인 김모씨가 노점단속을 당한 뒤 관할 시청으로부터 70만원의 벌금을 부과 받고 월세 3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고민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같은 날 밤 9시 30분 경, 잠실대교 남단에서는 점점 심해지는 뇌병변장애로 인한 가족의 부담에 괴로워하던 최모씨(47세)가 한강에 몸을 던져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또한 지난 2월 18일에는 장애인 주모씨(53세)가 생계의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강서 구청 현관 앞에서 목을 매 숨을 거두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죽음은 효율성과 경쟁만을 강요하고, 공동체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진 자만을 더욱 배불리는 것으로 귀결되는 비상식적인 사회에 의한 타살이다. 장애인이 지닌 차이를 철저한 차별과 배제로 만들고, 기본적인 교육권, 노동권, 이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이 땅의 정부에 의한 잔혹한 타살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종 통계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애인 실업률(29%)은 비장애인 실업률(6%)의 5배가 넘고, 전체 장애인의 51.6%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이며, 장애인의 컴퓨터 활용 수준(27.6%)은 비장애인의 컴퓨터 활용 수준(66%)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땅의 장애인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심각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01년 오이도역의 장애인용 수직형 리프트 추락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2002년부터 조직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활동은 우리 사회에 장애인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는 한편, 장애운동을 활성화하는데 있어 소중한 성과를 만들어오고 있다. 올해에도 지난 3월24일부터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소속 장애인 30여명이 ‘대한민국에는 장애인 인권이 없다!!’는 검정색 플랭카드를 내걸고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옥란 열사의 기일이기도 한 3월 26일에는 제1회 전국 장애인 대회를 열어 장애해방열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에 나설 것을 선포하였다. 지난 4월 12일에는 점거 농성이 진행 중인 국가 인권위원회 앞에서 ‘중증장애인 노동권확보와 장애인연금제도 도입을 위한 한마당’ 행사가 그리고 4월15일에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장애인교육권연대 주최로 ‘장애인 교육권 확보와 장애인 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전국부모결의대회’가 열렸다. 또한 4월 16일에는 제3회 장애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몸으로 쓴 장애 여성 잔혹사’라는 주제로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차별에 고통 받아 왔던 장애여성들의 투쟁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2005년에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쟁단을 중심으로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한 법률제정, 장애인 생존권 생활권 쟁취, 장애인의 사회적 권리 확보를 요구하며 차별 받는 장애인의 인권확보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05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의미와 과제 그 동안 장애차별철폐 운동은 이동권과 교육권을 중심으로, 단순히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들을 진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2004년 12월에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기도 하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의식 변화, 장애 운동의 주체 재생산과 외연 확장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장애 운동을 주도해왔던 장애인이동권연대나 장애인교육권연대와 같은 단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 사안을 다루는 연대체의 성격으로 인하여, 그리고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하는 한시적 투쟁체의 위상을 가짐으로 인하여, 장애인 문제 전반에 대해 일상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수행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장애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기반으로 하여 현재의 장애인 투쟁이 민중 운동에 있어 단지 하나의 부차적인 부문운동으로 환원되지 않고,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다양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보편적인 투쟁이 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과제가 필요하다. 첫째, 보다 확장된 노동권-생활권 쟁취 투쟁이 중요하다. UN에 따르면, 세계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장애인 가운데, 중증 장애인의 약2/3가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중교통 수단과 건강 서비스가 열악하거나 구비되어 있지 못한 경우, 그리고 교육, 고용 및 기타 소득기회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을 때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되는 집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경우, 2000년 장애인실태조사를 보면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08.2만원으로 도시근로자의 평균 가구소득(233.1만원)의 46.4% 수준에 불과하고, 전체 장애인 가구의 약 62.5%가 월 100만원 미만의 소득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5세 이상 133만2천명의 장애인 중 경제활동인구는 63만7천명이며, 취업자 수는 45만6천명(71.6%), 실업자 수는 18만1천명(28.5%)이다. 결과적으로 97만6천명의 장애인들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과 국가는 자신들이 바라는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평균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없고 빈곤과 소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에서의 배제와 차별은 곧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권리에서의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요구들을 제기하고, 그 결과 사회복지제도 개선 등을 통해 얻게 된 혜택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성과를 더욱 발전시켜 장애인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근본적인 노동권-생활권 쟁취 투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장애인의 노동권은 ‘노동할 권리’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것이며, 생활권은 이러한 노동권의 개념으로 모두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문제와 관계되는 권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단지 장애인차별철폐 운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여성/이주 등 신자유주의 지배 전략 속에서 끊임없이 분할, 배제되고 있는 여러 운동과 함께 만들어가야 할 투쟁이다. 지금까지 장애운동에 연대해왔던 사회운동의 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장애인을 비롯하여 이 땅에서 하나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온 다양한 주체들의 노동권과 생활권을 제기하고, 이를 보편적인 민중의 요구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둘째, 진보적 장애 운동을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 현재의 장애 운동이 사안별 연대 혹은 한시적인 공동 투쟁체라는 위상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장기적인 시야에서 장애민중의 삶을 변화시키고 남한 사회 변혁적인 민중운동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입장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적 장애운동의 정체성과 담론을 형성하며 지속적인 현장투쟁을 벌여낼 수 있는 대안 세력의 구체화 및 이의 확장을 위한 ‘진보적 장애운동 연대체 건설’ 흐름은 매우 소중하고, 유의미하다. 새롭게 건설될 진보적 장애운동 연대체는 장애인문제를 변혁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발언해 낼 수 있는 이론적-전략적 입장을 마련하는 것, 장애운동이 전체 민중운동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기만적인 포섭과 배제의 전략 속에서 더 많은 차별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 그리고 그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져 왔던 장애 운동을 전국화하고 한국 사회 전역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장애인 대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투쟁이 벌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소통하고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하고자 한다. 사회운동, 민중운동은 이러한 진보적 장애운동 연대체 건설 흐름에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장애운동을 단지 장애인의 권리만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 장애차별철폐 운동이 장애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차별에 저항하는 다른 운동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장애운동을 하나의 운동적 의제로서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차별에 의해 고통 받는 장애여성문제에 주해야 한다. 이 사회 구조 속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불평등하고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차별 받는 상황 안에 장애 여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듯 논외로 취급되며, 이중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비장애 여성과 장애 남성보다 빈곤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출산, 육아, 보건, 위생이나 가사 등에 있어서도 비장애 여성보다도 훨씬 많은 비용들을 부담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태조사나 국민기초 생활보장 제도의 계측시행 시 장애 여성의 이러한 현실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장애 여성의 현실이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적극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장애여성은 성폭력과 성매매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지난 3월 27일 4명의 성매매 여성의 목숨을 앗아간 하월곡동 화재사건의 현장에서 구조된 장애 여성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하였고, 2003년에도 성남 성매매 집결지에서 두 명의 장애여성이 구출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이처럼 장애여성들은 교육현장에서 배제되고, 노동현장에서도 소외된 상태에서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포주들이 관리하기 쉽기 때문에 성매매 현장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차별 속에서 극심한 빈곤으로 내몰리고 극단적인 폭력과 성폭력에 의해 고통 받는 장애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장애여성 역시 하나의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장애 여성 역시 스스로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당당하게 발언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회 운동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 420 장애인의 날을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차별 철폐의 날’로 만들자!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모순에 맞서 차별에 저항하는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은 경쟁과 효율의 원리 속에서 끊임없이 분할과 배제를 낳는 신자유주에 저항하는 가장 보편적인 투쟁이다. 더 이상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길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권리들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이번 420장애인차별폐투쟁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또 다른 차이에 의해 차별 받는 비정규직, 여성, 이주 노동자, 빈곤 계층 역시 신자유주의의 배제와 억압 속에서 당당한 투쟁의 주체들이다. 이 주체들이 서로의 운동을 상승시킬 수 있는 연대와 공동 투쟁의 기풍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출발로서 이번 420장애차별철폐의 날을 차이에 의한 차별로 인해 억압받는 장애, 비정규직, 여성, 빈곤, 이주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의 날로 만들자. 나아가 앞으로 있을 노동절 투쟁에서도 이들이 당당한 주체로서 투쟁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편적인 인민의 권리가 되고, 여러 주체들의 투쟁이 노동자들의 투쟁이 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가자.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은 이런 의미에서 지속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본질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미대륙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가능한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것에 따른 것이다. 그동안 APEC은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더군다나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모순으로 발생한 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APEC은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대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포괄적인 의제 설정 등으로 돌파구를 모색해왔다.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인민들을 호도하고 태평양 바다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을 둔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을 적극 개방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한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60년대 일본의 경제기적과 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날으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짐. 이전과정에서는 앞선 국가의 직접투자가 매개됨.)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의존도가 높은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된다.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이 감소하고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함에 따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기술혁신과 산업화 진전이 한계에 봉착함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에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인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의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은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되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된다. 따라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등의 체결이 가속화된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 분야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된다.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지역적 개방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에 따르면, ’지역적 개방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위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 있어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인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 경제,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배분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페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남미 시장이 존재하며 이를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협, 부산여성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란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페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한국형 '뉴딜' 정책과 연기금 활용 구상의 문제점 정지영(정책부장) 한 때 국민연금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로 격했던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순간 슬며시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11월 초, 정부가 발표한 '경기활성화를 위한 종합투자계획(일명 한국형 뉴딜)'이 그 발단이다. 한국형 뉴딜은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경제 성장률 하락에 직면해 정부가 카드로 꺼내든 정책이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인데, 그 재원은 국민연금의 기금이 언급되었다. 한국형 뉴딜 정책이 발표되자,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정책이 과연 경기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 정부의 재정 부담이 크지 않은가, 연금기금을 동원하는 것이 연금의 재정안정화에 도움이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이 글에서는 정부가 한국형 뉴딜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정책이 정부가 추진해 온 국민연금 개혁 방향과는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를 주되게 밝히고자 한다. 한국형 뉴딜, 대안 없는 정부의 고육지책 한국형 뉴딜이라는 경기활성화 정책이 발표된 배경은 당연히도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이다. 지표상으로 봤을 때도, 각종 경제연구소들은 2004년 하반기와 2005년 경제전망에서 경제성장률을 5%대 이하로 잡고 있다. 물론 체감되는 경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만 했다. 즉, 정부가 재정 부실화의 가능성과 연금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카드는 소위 전문가들로부터 실효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위기는 몇몇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IMF 구조조정 이래로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귀결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노동의 유연화는 심각한 빈곤의 문제를 낳으면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외국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개방정책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정부가 내놓는 몇몇 경기부양책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당연히도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한국형 뉴딜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이런 정책을 내놓으면서 노리는 효과는 분명하다. 현재의 위기를 정책상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좀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좀 더 유연화 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좀 더 예산을 풀면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식의 해법을 내놓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의 핵심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두고 말이다. 국민연금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상의 기막힘 국민연금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먼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효성도 의심되고 자신들의 위기를 가리기 위한 정책을 위해 국민연금의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뻔뻔스러움을 지적해야겠다. 이 문제는 정부가 추진해온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방안과 연계를 시켜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정부는 그 동안 국민연금 기금의 고갈과 수익성을 문제 삼으면서, 보험료를 올리고 급여는 삭감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추진해왔다. 정부는 국민들의 노후야 어떻게 되던,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현재의 빈곤함에 국민연금 보험료가 더욱 부담스럽던 간에 무조건 기금을 쌓아둬야 한다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해결이 불가능한 위기를 떠받치기 위해 연금을 끌어다 쓰겠다는 발상을 내놓고 있다. 이를 통해 명확해지는 것 하나, 정부가 국민연금을 사고하는 시각이라는 것이 국민들이 노후를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주식, 부동산 등 어디든 필요한 곳에 끌어 쓸 수 있는 눈 먼 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간접자본 투자 = 건전한 투자? 국민연금 기금을 사회간접자본의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식시장 투자보다는 낫다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 한국형 뉴딜 정책이 그 동안 진행되어온 연금개혁의 방향과 배치되는 무엇은 아니다. 오히려 연금개혁 방향에 충실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기금관리기본법, 민간투자법,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 소위 '뉴딜 3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적립될 기금의 규모를 키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을 축소하는 과정이다. 기금관리기본법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 및 부동산 투자를 비롯하여 투자처를 확대하기 위한 법이다. 민간투자법은 민간투자 대상을 학교시설, 공공청사, 임대주택 등으로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정책이 건설경기 부양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을 중심으로 계획이 수립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것이 이후에 낳을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연금의 기금은 천문학적 액수로 적립되는 것이고,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통해 이 돈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위기를 관리하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버팀목으로 어디에든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뿐만 아니라 민간투자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기간시설 혹은 공공시설을 민영화하는 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국민연금의 투자처가 사회간접자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전한 투자로 볼 수 있는가? 오히려 국민연금의 투자 대상이 주식, 부동산, 각종 펀드, 해외투자, 민영화 사업 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연금기금이 금융세계화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연금기금이 주식시장에만 투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부의 이번 발표가 국민연금기금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단순히 결정 주체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거액을 쌓아두고 다양한 투자의 길을 열어두는 조치들이 취해졌을 때, 아무리 독립적인 기금운용위원회가 결정을 내린다하더라도 투자처는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국민의 삶과 노후야 어떻게 되든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쌓아두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쌓으려는 것이다. 연금은 민중의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 한국형 뉴딜로 인해 다시 불거진 국민연금 문제, 하지만 지금의 논란은 정말 원칙도 기본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연금이 민중의 삶을 거덜 내는데 일조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연금이 왜 필요한가? 국민연금 문제의 원칙은 이야기했듯이, 민중의 삶이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삶이 날이 갈수록 밑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지배세력은 민중의 노후를 위한 저축까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활용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이 땅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내기에도 버겁고, 이 빈곤이 노후까지 연장되는 마당에 국민연금의 급여는 축소하고, 보험료는 올리는 작태를 보인다. 게다가 이 기금을 자신들이 저질러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미봉책으로, 그리고 앞으로 더욱 이를 활성화시키는데 활용하고 있다.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정책 그 자체라고, 이를 유지하는데 민중의 노후소득을 활용하지 말라고 주장해야 한다. PSSP
2005년 <사회화와노동>의 기치를 밝히며 오늘의 세계화는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며 새로운 제국주의다. 극단적인 착취와 강탈, 전쟁의 폭력,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세계 민중에게 유례가 없는 도전이다. 이에 저항하는 세계의 사회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지배세력의 온정주의나 보수적■퇴행적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념과 운동을 발견하고 있다. 인민의 권리의 자율적 실현, 사회적■경제적 변혁, 사회운동과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배세력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과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 속에서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적인 요소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운동의 긴급한 과제와 앞으로 <사회화와 노동>이 주목하고자 하는 바를 이 지면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 미국 경제의 위기와 이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인 우위는 세계 인민들에게 진정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해외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투자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로 엄청난 양의 소득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부유계급은 미국 내 신자유주의 개혁의 흥청거림 속에서 풍요한 소비를 향유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저축률의 감소,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라는 악순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화 약세라는 궤도로 돌아섰고, '글로벌한 정책협조'라는 미명으로 그 부담을 타국에게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대파국을 맞으리라 예상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경향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금융적 지배와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모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력으로 강점한 후 신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걷고 있다. 2004년 말 19개 나라로 구성된 ‘파리클럽’(주요채권국회의)은 이라크의 120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가운데 파리클럽에 지고 있는 400억 달러 중 80%에 대한 부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기 30%를 탕감한 후에는 IMF 프로그램이 승인된 후 30%를 탕감하고 마지막은 20%는 IMF 조사위원회가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탕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을 감행한 당사자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IMF 프로그램은 이라크 인민의 민주적 결정 과정을 배제한 철저한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될 터이므로 심각한 저항을 야기할 수 있다. 이미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를 감당한 능력을 과연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점령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한 사회를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능력은 결핍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부시의 대통령 재선은 도덕심, 애국주의 등 어떤 치장을 하더라도 미국 사회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말로 미국 스스로가 주도한 금융세계화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퇴행적, 반동적 대응의 한 측면이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착취와 강탈, 이데올로기적 맹신과 전쟁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국면으로 이미 진입하였을 보여준다.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자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세계 민중에게는 유례가 없는 도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는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비견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을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 인구의 강제적인 구축, 다양한 형태의 소유권(공공소유, 집단소유, 국가소유)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 공공의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 소비의 대안적■ 토착적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하는 자산의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주의적 영유과정, 교환과 납세의 화폐화(특히 토지), 노예무역, 고리대금■국채■신용체계 등등.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현재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것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한다. 신용체계와 금융자본은 약탈, 사기, 도둑질의 중요한 수단이다. 주식부양,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인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약탈, 한 나라의 모든 인민을 부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채무부담의 증대, 신용과 주식 조작을 통한 기업의 사기와 자산 강탈(연금 기금의 유용과 주식과 기업의 붕괴를 통한 대규모 피해) 등등. 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은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이 열고 있다. WTO 협상에서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IPS 협정)의 강조는 중요한 사례다. 지적재산권은 지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유용성, 즉 지식과 기술, 사상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이념이 무색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전물질의 세계저장량에 대한 약탈이 소수의 거대 초민족기업의 이득을 위해 진행 중이다. 세계의 환경 공유물(토지, 대기, 물)의 점증하는 고갈과 생물서식지의 하락은 자연의 대대적인 상품화의 결과며 자본집약적 농업생산 양식을 제외한 모든 농업을 제약한다. 문화적 형태, 역사, 지적 활동의 상품화는 대대적인 강탈을 동반한다. 이러한 강탈의 과정은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을 누적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저항을 야기하고 있다. 반세계화인가, 대안세계화인가? 그러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다양한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은 그러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당시 미국노총이 보여준 입장은 중요한 사례다. 그들이 시애틀투쟁에 참가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였다. ‘중국의 가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가 동반하는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현실의 원인을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또한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을 적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내부의 적 - 이주자, 여성, 실업자 등등 - 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국민 중에 기생충이 있다”는 대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국말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범죄화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에게도 ‘반세계화’는 중심 구호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시민권의 '민족 우선‘ 원칙을 세운 유럽연합은 배타적인 권리부여를 체계화한다. 세계화가 낳은 혼돈으로부터 또는 ’미국화‘의 물결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반세계화‘의 논리는 이처럼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보수주의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반대’의 코포라티즘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경제의 재건, 국유화나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산업의 균형발전, 노동자 전체의 고용증진과 복지개선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금융세계화의 현실에서 이미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배세력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을 대중조작을 위한 간판으로 간혹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먼 훗날의 신기루로 한없이 지연된다. 대안세계화: 세계 민중운동의 저항의 전진적 요소들 이처럼 ‘반세계화’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운동을 지칭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농민운동조직인 비아캄페시나(소농의 길)는 ‘투쟁을 세계화하자,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민족적■인종적 분할, 성적 억압과 배제라는 현실의 조건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이념과 그에 적합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만이 능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어떤 전진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가? 첫째, 인민들의 권리의 자율적인 실현이라는 원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이나 ‘반세계화’ 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모든 인민들의 권리의 목록을 재작성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확장적인 권리를 발견하며, 또한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둘째,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공통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전화의 전략과 요구를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 자본주의 주변부와 신흥공업국을 휩쓴 외채위기를 겪으며, ‘국제금융■무역기구’ 반대(또는 전화), 제3세계 외채탕감, 금융거래과세를 통한 자본통제 등의 요구를 제시했다. 현재 세계사회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세력의 하나인 농민운동은 식량주권(단순한 민족적 식량자급이 아닌 토지, 생명종과 유전자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토지개혁과 대안적 농업모델을 두고 활발한 모색과 투쟁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사유화■상품화의 물결 속에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과 자연 공유물에 대한 소유권에 반대하는 투쟁도 성장하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모색과 투쟁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복합적인 현실의 변화를 낳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제한적 요구의 제기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금융세계화에 조응하기 위해 화폐통합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경제통합을 단행하고 유럽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유럽연합의 현실은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건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한다. 예컨대 유럽의 입법■사법■행정기구의 민주화 (특히 유럽연합의 사법체계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화되면서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이라는 목표의 갱신), 국경의 민주화 (인민들의 순환과 거주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일반화 (특히 획일적인 민족적 교육체계에 의해 억압되는 익명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등등. 이는 세계화가 억압하는 인권■시민권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자 사회의 변혁을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적■지역적 시민권(노동권, 여성권)의 재건을 위한 경로들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사회운동은 (앞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된 민족 또는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갈등과 전쟁을 불변으로 간주하거나 이를 진압■순치하는 게 ‘성스러운’ 임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결하는 게 긴급한 과제다. 오늘 세계에서 전쟁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는 세계화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이자 인민운동의 진정한 무능력을 표현한다. 현재 움터나고 있는 반전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되는 ‘인도주의’ 전쟁이나 침략전쟁을 거부하며, 전쟁과 폭력의 전장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운동들간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곧 저발전 지역이며 곧 퇴행적인 사회이며,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의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인민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의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대안세계화와 한국의 사회운동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라는 이름을 찾고 있는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이라는 조건 위에 있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의 노선을 보완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신속하게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를 창출하고 있다.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나 지역주의(실리주의)적 동원 등의 정치행태는 민중운동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과 NGO와 결탁은 위기의 순간마다 민중의 단결을 교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과거 남미의 페론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참여와 대화’라는 수사는 계속 허구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자율화되면서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의 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는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이 우선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세계화의 승리자(수혜자)’라는 미망을 타파하며, 전쟁의 폭력이라는 위급성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화와 노동>은 다음과 같이 우리 운동의 공동의 과제를 인식하고 분석과 입장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첫째,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현재 국제노동자운동은 형성 중인 대안세계화운동에서 가장 비활동적인 부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국제자유노련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노동자운동조직의 전통적인 ‘반공주의■코포라티즘’ 지향과 그 몰락의 유산이다 (북반구 노조운동의 쇠퇴, 로비중심의 활동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무현정권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파퓰리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현존 노동조합 운동이 큰 동요를 겪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코포라티즘적 지향조차 포기하며 정권의 ’위기관리‘ 파트너가 될 것인가 동요한다. 한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향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또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대중의 포괄적인 부문들에게 그 결과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향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주의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나, 그것을 허구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구상이 일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으로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현재의 노조운동의 지향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재 ‘비정규직 철폐투쟁’도 갈림길에 있다. 비정규직권리보장 입법과 같은 ‘법제화’ 시도는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 - 일례로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나 여성의 가사노동과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의 사회적 인정. 또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변혁 - 가 동반되지 않으면 비정규직 철폐의 현실적 경로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의 구조에 단순히 편입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구조를 변혁하는 게 유일한 경로다. 방향의 전환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실업■빈곤, 이주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할 길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양립. 지난 세기 노동자운동은 가족을 매개로 재생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온존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성이 출산, 양육과 전반적인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이중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태를 촉진했다. 이는 여성의 출혈적인 노동력 판매를 확대하고 그 결과 여성의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이 성립했다. 여기서 남성 가장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가족임금’은 하나의 맹목점이 되었고, 현실의 고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빈곤 문제에 관한 전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편,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더욱 증폭한다. 먼저 전쟁은 대부분의 전쟁이 증언하듯이 ‘성별화된 폭력’을 확대한다. 전쟁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폭력을 동반한다. 또 한편으로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빈곤은 성매매의 문제를 더욱 증폭한다. 전쟁과 성매매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에 직면해 여성의 권리의 견지에서 운동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에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도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거나, 콜롬비아나 베네주엘라에서 저강도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 배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명으로 중심부로의 분쟁확대를 저지하는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과거 식민주의■제국주의■신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인간생명과 자연자원의 착취, 외채를 통한 수탈을 겪었고, 구 식민권력이 이식한 부정한 토착정권의 이중수탈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황폐화되었고, 군벌들 간 약탈전쟁마저 만연하다.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배제된 지역에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이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전쟁과 빈곤은 극단적 폭력의 지대를 공고히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또한 현재 한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통합’과 ‘절멸의 전쟁’의 위기에서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희망하는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분쟁관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급진화의 길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시점이다. 역시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복합적인 과제들이 존재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가장 활력 있는 부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농민운동, 식량주권과 농업개혁에 관한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생태운동, 현재의 실업/반실업■빈곤의 문제와 깊게 연루된 대중교육의 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가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긴급한 과제다 <사회화와 노동>은 이와 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의 전망을 세워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먼슬리 리뷰 Volume 56, Number 6, November 2004에 실린 Janine Fitzgerald라는 사람의 글입니다. 8, 90년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복지국가의 구조적 재편을 대표하는 미국의 1996년 복지개혁이 가져온 결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번역이 그다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감안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더 관심있으신 분들은 1. [복지의 종말-미국 복지개혁 비판](Gwendolyn Mink 지음, 김은정 역, 신정출판) 2. [복지에서 노동으로] (김종일 지음, 일신사) 또는 기관지 11월 호에 미국의 노동연계복지에 대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S. 빈곤팀들은 반드시 읽어보시길...